마리아 칼라스
연표
1923
[세계적인 소프라노의 탄생]
미국 뉴욕 시에서 그리스계 이민자 부부의 둘째 딸로 태어났으며, 본명은 마리아 아나 소피아 케킬리아 칼로예로풀루입니다. 어릴 적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나, 어머니의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노래 연습에 매진했습니다.
1923년 미국 뉴욕 시에서 아테네 대학 약대를 졸업한 약사 요르고스 칼로예로풀로스와 배우 지망생 에방겔리아 디미트리아두 부부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칼로예로풀루였으나 발음하기 쉽게 영어식인 칼라스로 줄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뚱뚱한 체구와 고도의 근시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어머니의 성악가 꿈을 대신 이루기 위해 열심히 노래 연습을 했습니다.
1929
[어린 시절의 시련과 가족의 몰락]
교통사고를 당했으며, 이 시기에 아버지의 약국이 뉴욕증권시장 폭락으로 문을 닫게 되는 등 가족의 경제적 어려움이 시작되었습니다.
1929년 7월 마리아 칼라스는 교통사고를 당하기도 했으며, 아버지 요르고스는 주식에 투자했다가 뉴욕증권시장의 폭락으로 자신이 운영하던 약국을 팔아야 했습니다.
1930
1930년경부터 음악 공부를 시작하여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933
[길거리에서의 첫 감동]
피아노를 치며 '라 팔라오모나'를 불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여들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선보였습니다. 이 사건은 어머니가 그녀의 음악적 재능을 확신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3년 5월 초, 그가 직접 피아노를 치면서 '라 팔라오모나(La Palaomona, 비둘기)'를 부르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모여 노래가 끝날 때까지 서 있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 일은 어머니 에방겔리아가 딸의 음악적 재능을 확신하고 그리스 국립 아테네 음악원 입학을 주선하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4
[첫 공식적인 음악적 성과]
미국 뮤투얼 라디오 방송국의 아마추어 노래 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최우수상을 받으며 대중에게 자신의 재능을 처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34년 미국 뮤투얼 라디오 방송국의 아마추어 노래 경연대회에 출전, 라 팔로마를 불러 예선을 통과하고 본선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1937
1937년 부모의 이혼 이후 어머니와 함께 생활하며 그리스로 건너가 아테네 시에 체류했습니다. 그리스 국립 아테네 음악원에 입학하여 스페인 출신 소프라노 엘비라 데 히다르고 등에게 성악법을 배웠습니다. 어려운 형편에도 히다르고 교수의 도움으로 학비를 면제받고 개인지도까지 받으며 학업에 매진했습니다.
1938
[그리스 오페라 무대 데뷔]
아테네에서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의 산투차 역으로 데뷔하며 오페라 가수로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938년 아테네에서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Cavalleria Rusticana)》의 산투차 역으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50여 편의 오페라, 가곡 배역을 맡았고 20편 이상의 오페라 전곡을 음반으로 녹음했습니다.
1940
1940년 그리스 국립 리사이틀 테아트레(Lyric Theatre)에서 주페의 오페레타 《조반니 보카치오 (Boccaccio)》를 선보였습니다.
1941
1941년 엘비라 히다르고 교수의 추천으로 마리아는 아테네 오페라단의 평생 회원의 자격을 얻었습니다.
1944
1944년 7년 만에 아버지 요르고스의 편지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1945
1945년 8월 3일 아테네에서 솔로 리사이틀 겸 작별 콘서트를 하고 미국으로 갈 여비를 모았습니다.
[미국에서의 힘든 시작]
미국 뉴욕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며 단역을 전전했고,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응모했으나 거구라는 지적을 받으며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했습니다.
1945년 9월 미국 뉴욕으로 돌아와 아버지와 함께 생활하였으며 단역을 전전했습니다. 그 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에 응모하였으나 95kg의 거구가 지적받으며 주목받지 못하였고, 이에 다시 다이어트를 시작하여 감량에 성공했습니다. 칼라스는 영화 '로마의 휴일'의 주연 오드리 햅번의 미모에 반한 것이 다이어트의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1946
[기회의 문턱에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과 시카고 오페라단의 제안을 받았으나 여러 이유로 거절하거나 공연이 무산되었습니다. 또한, 조반니바티스타 메네기니를 만나며 그의 후원자가 됩니다.
1946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단의 단장 에드워드 존슨이 마리아 칼라스의 노래에 매료되어 1946-1947 시즌에서 베토벤의 피델리오와 푸치니의 나비부인의 주연 나비부인역을 제의했으나, 피델리오를 영어로 부르는 것과 81Kg의 체중으로 15세의 가냘픈 여자 역할을 하는 것이 싫어 거절했습니다. 같은 해 시카고 오페라단의 투란도트 공연도 후원사의 파산으로 무산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조반니바티스타 메네기니를 만나 그의 팬이자 열렬한 후원자, 매니저가 되었습니다.
1947
[라 스칼라 오페라단 입단 및 호평]
밀라노 라 스칼라 오페라단에 입단하여 《청교도》와 《아이다》의 대역으로 투입되어 연이어 호평을 받으며 명성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1947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단에 입단하고, 《청교도 (I puritani)》의 단역으로 캐스팅되었으나 주인공 엘비라 역으로 낙점된 마르게리타 카로시오가 독감에 걸려 대역으로 투입되었습니다. 3일의 연습으로 무대에 섰는데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어 레나테 테발디가 갑자기 아프게 되어 《아이다》의 주연 아이다 역을 맡을 수가 없게 되자, 칼라스는 아이다 역의 대역으로 투입되었고 이 공연으로 크게 호평을 받으면서 명성을 얻게 되었습니다. 《청교도》의 엘비라 역, 《아이다》의 아이다 역, 《토스카 Tosca》의 토스카 역 등을 소화해낸 뒤 《노르마》, 《람메르무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 등의 주인공역으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새로운 도전]
이탈리아 나폴리에 도착하여 오페라 《라 조콘다》 연습에 돌입하며 이탈리아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47년 초, 이탈리아 베이스 가수 니콜라 로시 레미니를 통해 베로나 오페라 페스티벌의 예술 감독인 조반니 체나텔로를 소개받았습니다. 체나텔로는 칼라스의 노래에 매료되어 《라 조콘다 (La Gioconda)》의 주연으로 캐스팅했습니다. 칼라스는 오페라의 꿈을 포기하라는 주변의 권고를 물리치고 6월 27일 이탈리아 나폴리에 도착, 《라 조콘다》를 연습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의 첫 성공]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를 성공적으로 불러 이탈리아 오페라계에서 처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이후 '라 디비나(오페라의 성자)'라는 별칭을 얻기도 했습니다.
1947년 7월 베로나 음악제에서 폰키엘리의 《라 조콘다》의 타이틀 롤을 불렀고, 8월 3일 베로나의 아레나에서 《라 조콘다》를 성공적으로 불러 이탈리아에서 인정받게 되었습니다. 공연은 성공적이었으나 초기에는 별 인상을 남기지 못하다가, 이 공연 이후 그는 한때 이탈리아인들이 일부 소프라노 등에게 붙이는 '라 디비나 (오페라의 성자)'라는 별칭을 받기도 했습니다.
[바그너와 푸치니 오페라 주연으로 주목]
베니스에서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졸데역과 푸치니의 《투란도트》 타이틀롤로 주목받아 재계약을 맺으며 이탈리아에서의 입지를 굳혔습니다.
1947년 12월 베니스에서 이탈리아어로 상영되는 바그너의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이졸데역에 캐스팅되고, 바로 자코모 푸치니의 《투란도트》의 타이틀롤로 주목을 받아 재계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베로나 아레나 공연에서 그의 재능을 알아본 조반니바티스타 메네기니는 그의 후원자가 되었습니다. 이후 주로 투란도트를 공연하였습니다.
1948
1948년 베니스, 로마, 제노바 등에서 트리스탄과 이졸데, 투란도트, 레오노라를 공연하고 1948년 연말에는 아이다와 노르마 등을 주로 하였습니다. 11월 30일 피렌체의 테아트로 코무날레에서 공연한 노르마는 흥행하였습니다.
1949
[조반니바티스타 메네기니와 결혼]
베로나에서 조반니바티스타 메네기니와 정식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후 메네기니의 후원으로 활발한 공연 활동을 펼쳤습니다.
1949년 초 브룬힐데의 브룬힐데 역을 11일간 하였으며, 1949년에는 베니스에서 활동하였습니다. 4월 21일 베로나에서 메네기니와 정식 결혼식을 올린 뒤 아르헨티나로 건너가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공연하였습니다. 이후 메네기니의 후원으로 2년간 돈 걱정 없이 이탈리아와 프랑스, 독일, 영국 등에서 공연을 하였습니다.
1949년 11월 칼라스의 최초의 판매용 음반을 체르타 음반사에서 녹음했습니다. 비용은 남편 메네기니가 부담하였습니다.
1950
[라 스칼라 극장 매니저의 외면]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에서 《아이다》 타이틀 롤을 대역으로 불렀으나, 극장 매니저의 외면을 받았습니다.
1950년 3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서 레나타 테발디 대신 대역으로 투입되어 《아이다》의 타이틀 롤을 불렀으나, 라 스칼라 극장 매니저 안토니오 기린겔리는 칼라스를 외면하였습니다.
1951
[라 스칼라 극장 중심 활동 및 명작 출연]
밀라노 라 스칼라 극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노르마》, 《안나 볼레나》, 《메데아》 등 발굴되지 않았던 명작에 출연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51년부터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을 중심으로 활약하여 《노르마 (오페라)|노르마》, 《안나 볼레나》, 《메데아》 등 발굴되지 않았던 명작에 출연하였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라 스칼라 극장 개막 공연 대성공]
라 스칼라 극장 시즌 개막 공연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으며 극장에서의 입지를 공고히 했습니다.
1951년 1월 라 스칼라 극장의 시즌 개막공연에서 대단한 호평을 받았습니다.
1952
1952년에는 코벤트 가든의 초청을 받아 노르마, 토스카 등을 선보였습니다.
1954
[미국 오페라 무대 데뷔]
시카고 오페라 극장에서 상영된 《노르마》의 주연 노르마 역으로 미국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습니다.
1954년 11월 1일 시카고 오페라 극장에서 상영된 《노르마 (Norma)》에서 노르마 역으로 미국에서 데뷔했습니다.
1956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 캐스팅]
뉴욕 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상영된 《노르마》에도 캐스팅되어 열연했습니다. 이때 언론은 어머니 에반겔리아와의 인터뷰 기사를 실었습니다.
1956년 10월 29일 뉴욕 시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상영된 《노르마》에서도 캐스팅되었습니다. 이때 타임지는 어머니 에반겔리아와의 인터뷰 기사를 싣습니다. 칼라스는 어머니 에반겔리아가 자신의 유년 시절을 빼앗아갔다고 자주 비난했고, 두 번 다시는 어머니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1957
[오나시스와의 만남, 이혼 요구]
그리스의 선박왕 애리스토틀 오나시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남편 메네기니에게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자신의 후원자이자 이탈리아 부호였던 메네기니와 결혼생활 중 남편 메네기니와 함께 참석한 한 연회장에서 오나시스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오나시스는 자신의 유람선에 칼라스, 메네기니 부부를 초청해 3주간 항해하였고, 칼라스는 그에게서 20벌의 드레스와 각종 신발, 장신구 등을 선물받았습니다. 칼라스는 남편이자 후원자였던 메네기니를 버리고 오나시스와 동거했으며, 먼저 메네기니와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결혼식 직후 친정어머니 에방겔리아는 '내 딸 칼라스'라는 책을 내 그를 인신공격했으며, 방송에서도 비난을 쏟아냈습니다. 이후 칼라스는 친정 가족들과의 의절을 선언하고 연락을 끊었습니다.
[《안나 볼레나》 시연 성공]
남편 메네기니, 루키노 비스콘티와 함께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 시연을 기획하여 비평가들의 열광적인 호평을 받았습니다.
1957년 4월 마리아 칼라스는 남편 메네기니 및 루키노 비스콘티와 함께 도니제티의 《안나 볼레나 (Anna Bolena)》 스토리를 읽고 시연을 기획했습니다. 시연 후 비평가들의 열광적인 호평을 받았습니다.
1958
[노르마 공연 중단 사태]
로마 오페라 극장에서 이탈리아 대통령 앞에서 노르마 공연 중 몸이 좋지 않아 중단했고, 이에 이탈리아 청중들에게 맹비난을 받았습니다.
1958년 1월 2일 로마 오페라(Opera di Roma) 극장에서 이탈리아 대통령 조반니 그론키 앞에서 노르마를 공연했으나 몸이 좋지 않아 약을 먹고 공연하였으나, 통증과 약기운 등으로 공연 중간에 그만두게 됐습니다. 이때 이탈리아의 청중들은 화가 나서 그녀를 맹비난했습니다. 동시에 칼라스는 극장주와도 격렬히 싸우고 극장과의 관계를 청산했습니다.
[라 스칼라 극장과의 결별]
라 스칼라 극장에서의 공연 중 감독과의 갈등으로 남은 계약 기간 동안 극장에서 공연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1958년 5월 라 스칼라 극장에서 피에타 공연 중, 감독 안토니오 기린겔리와의 오랜 갈등으로 59년 말까지 남은 계약 기간 동안 스칼라 극장에서 공연하지 않을 것을 결심했습니다.
1958년 11월 6일 메트로폴리탄 극장의 루돌프 빙(Rudolf Bing) 총감독은 1959년 시즌에 칼라스를 투입하지 않기로 하고 해고를 통보해왔습니다.
[파리 오페라 콘서트 재기 성공]
파리 오페라 콘서트에서 화려하게 재기하며 다시 한번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공연을 통해 오나시스 등 명사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인 메네기니는 유럽의 콘서트를 알아보았고, 1958년 12월 19일 칼라스는 파리에서 파리 오페라(Paris Opera)의 콘서트에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했습니다. 당시 파리 공연 중 그는 그리스의 선박왕 애리스토틀 오나시스를 다시 만나게 되었고, 오나시스는 VIP석에서 그의 노래 모습에 매료되어 이후 계속 구애해왔습니다. 이 공연 이후 오나시스 등의 명사들이 그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1959
선박왕 오나시스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남편 메네기니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1959년 조반니바티스타 메네기니와 이혼했습니다.
1960
1960년 초에는 오나시스를 따라 상류사회의 생활과 사교계에 다니며 작품 활동이 뜸하였습니다.
1963
1963년 6월 5일 파리에서 토스카 공연을 선보였습니다. 같은 해 파리의 애비뉴 포크로 이주했습니다.
[오나시스와의 결별, 유산 및 목소리 이상]
오나시스가 재클린 케네디와 연인이 되고, 칼라스는 아기를 유산하며 개인적인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 시기부터 목소리에도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오나시스는 자신의 유람선에 존 F. 케네디와 재클린 내외를 초대한 뒤, 그해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자 미망인 재클린 케네디와 연인이 되었습니다. 칼라스는 이 무렵 아기를 유산하며 개인적인 고통을 겪었습니다. 동시에 그의 목소리에 이상이 생겼고, 공연 도중에 또는 공연 사전에 연이은 공연 취소와 비난에 직면했습니다.
1964
1964년 1월 콘벤트 가든에서 토스카를 공연했는데, 위대한 공연이라는 호평을 받았습니다.
1965
1965년부터는 오페라 연출, 연기지도 등에도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오페라 무대 은퇴]
영국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상영된 《토스카》의 주연 토스카 역을 마지막으로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1965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토스카를 아홉 번 공연하고 3월에는 미국 뉴욕에서 토스카를 두 번, 5월에는 다시 파리에서 노르마를 다섯 번 공연하였습니다. 이때 피로를 느꼈으나 공연을 강행하였고, 공연을 취소하라는 의사의 충고에도 7월 콘서트를 강행했습니다. 1965년 7월 5일 영국 런던 코벤트 가든에서 상영된 《토스카》의 주연 토스카 역을 맡아보았고, 이를 마지막으로 오페라 무대에서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1966
1966년 칼라스는 미국 시민권을 포기하고 그리스 국적을 취득했으며, 파리 외곽으로 이주했습니다. 1970년에는 영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영화 《메데아》에 캐스팅되기도 했습니다.
1968
[재클린 케네디와 오나시스 결혼 후 은둔]
오나시스와 재클린 케네디의 결혼 이후 미국 국적을 다시 회복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은둔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1968년 오나시스와 재클린의 결혼 이후 칼라스는 미국 국적을 다시 회복하고 프랑스로 건너가 은둔하였습니다.
1970
1970년에는 영화 그리스 신화를 소재로 한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영화 《메데아》에 캐스팅되어 출연했습니다.
1971
1971년부터 1972년까지 미국 줄리어드 음악 스쿨의 교수로 특별 초청되어 오페라, 성악을 지도하였고, 마스터클래스 실기교실의 교수로 초빙되어 특별 강의를 열기도 했습니다.
1972
1972년부터 1973년 오랜 친구이자 옛 연인이던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미국과 유럽 순회 공연을 다녀왔습니다. 스테파노의 딸의 치료비를 마련하지 못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스테파노와 함께 스테파노 딸의 치료비 마련을 위한 세계 순회 공연을 수락했습니다.
1973
[오페라 연출 및 순회공연]
이탈리아 시칠리아에서 《시칠리아의 저녁기도》 연출을 맡았으며, 영국 런던에서는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리턴 투 마리아 칼라스' 순회공연을 가졌습니다.
1973년 이탈리아로 건너가 시칠리아의 저녁기도(I Vespri Siciliani)의 연출을 맡았습니다. 같은 해 영국 런던에서 주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리턴 투 마리아 칼라스 순회공연을 하였습니다. 또한 극동 아시아 순회 공연때는 디 스테파노와 리사이틀을 열었습니다.
1974
[한국 방문 공연]
한국을 방문하여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카르멘, 라 조콘다 등 다양한 오페라의 타이틀 롤을 선보였습니다.
1974년 10월 한국을 방문, 서울특별시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카르멘과 라 조콘다, 메피스토펠레스, 쟌니 스키키, 라 보엠, 토스카 등의 타이틀롤을 선보이고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1974년 11월 말 디 스테파노와 연락을 끊게 되었습니다.
1974년 11월 9일 일본측의 초청으로 호세 카레라스와 함께 비행기편으로 일본 도쿄를 방문, 인터뷰 후 삿포로에서도 카르멘, 토스카 등을 선보였습니다.
1976
말년에는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렸고 프랑스 파리시 외곽의 허름한 아파트에서 은둔하였으며 1976년 오나시스의 이혼 도중 사망 소식을 접했고, 그는 충격을 받고 고독과 공허함 등에 시달렸습니다.
1977
[오페라의 여왕, 영원한 안식에 들다]
우울증 약물 및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인한 쇼크성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한때 자살설이 돌기도 했으나, 정확한 사인은 심장마비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7년 9월 14일 우울증 약물 및 수면제 과다 복용 등으로 인한 쇼크성 심장마비로 사망했습니다. 한때 자살설이 돌아, 극심한 고독에 의한 자살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시신은 화장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으나 여러 번 도난을 반복하다가 에게해에 뿌려졌습니다. 그의 나이 55세였습니다.
2002
[영화 《칼라스 포에버》 제작]
이탈리아에서 마리아 칼라스 사망 25주년을 기념하여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영화 《칼라스 포에버》가 제작, 상영되었습니다.
2002년 이탈리아에서 마리아 칼라스 사망 25주년을 기념하여 영화 《칼라스 포에버》가 제작, 상영되었습니다. 영화는 칼라스의 절친한 친구였던 이탈리아인 프란코 체피렐리가 맡았으며, 음악감독 유진 콘은 1970년 이후 3년간 칼라스의 공연에 동행하며 피아노 연주를 하였습니다. 또한 스태프 겸 메이크업 감독으로 참여한 닐로 자코포니는 1970년과 71년 마리아 칼라스가 출연한 영화 메데아의 스태프였습니다.
2007
[사망 30주년 기념 행사]
그리스에서 '마리아 칼라스의 해'로 지정하고 사망 30주년 기념 국가적 행사를 개최하는 등 전 세계적으로 그녀를 추모했습니다.
2007년 그리스에서는 마리아 칼라스의 해로 지정하고 사망 30주년을 기념하여 국가적 기념행사를 개최했고, 독일, 미국,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일본, 한국 등에서도 그의 소추모제가 산발적으로 열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