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를레네 디트리히
연표
1901
[마를레네 디트리히 출생]
독일 베를린에서 루이스 에리히 오토 디트리히와 빌헬미나 엘리자베트 요제피네 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본명은 마리 마그달레네 디트리히입니다.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독일 베를린에서 경찰이었던 아버지 루이스 에리히 오토 디트리히와 어머니 빌헬미나 엘리자베트 요제피네 사이의 둘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이후 11세가 되던 해에 '마를레네'로 개명하게 됩니다.
1907
[아버지 사망 및 학창 시절 시작]
아버지가 사망했으며, 같은 해부터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여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까지 학업을 이어나갔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바이올린 연주와 시 창작에 대한 관심을 키웠습니다.
1907년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아우구스테 빅토리아 여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까지 10년간 학교에 다녔습니다. 이 기간 동안 바이올린 연주를 익히고 시에 대한 관심도 보였습니다. 한때 바이올린 연주자를 꿈꿨으며, 베를린의 한 극장에서 무성 영화 상영 중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일도 했지만 4주 만에 해고되었습니다.
1912
출생 시 이름이었던 마리 마그달레네에서 11세가 되던 해에 '마를레네'로 개명했습니다. 이 이름은 이후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됩니다.
1916
[어머니 재혼 및 계부 사망]
어머니가 아버지의 친구였던 에듀아르드 폰 로쉬와 재혼했지만, 로쉬 역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습니다.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어머니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에듀아르드 폰 로쉬와 재혼했지만, 로쉬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습니다. 로쉬는 빌미나의 딸들을 공식적으로 입양하지는 않았기에 성을 바꾸지는 않았습니다.
1919
1919년부터 배우 및 가수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활동 기간은 1992년까지 이어집니다.
1922
[초기 무대 및 영화 데뷔]
‘귀도 티에셔의 걸 카바레’에서 코러스 가수로 첫 무대 경력을 쌓았고, 영화에서 대사가 있는 첫 역할을 맡으며 배우로서 발판을 다졌습니다.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보더빌 형식으로 공연하던 ‘귀도 티에셔의 걸 카바레’의 코러스 가수로 첫 무대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가 감독으로 일하던 극장의 오디션에서는 탈락했지만, 코러스 배우로는 발탁되어 작은 역할을 맡아 무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또한, 1922년에는 처음으로 영화에서 대사가 있는 역할을 맡으며 배우로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23
루돌프 지버와 결혼했으며, 이후 남편은 1976년에 사망합니다.
1929
[《푸른 천사》로 세계적 스타 등극]
조지프 폰 스턴버그 감독의 영화 《슬픈 천사》(푸른 천사)에서 '롤라' 역을 맡아 세계적인 스타로 급부상했습니다.
조지프 폰 스턴버그 감독의 《슬픈 천사》에서 존경받는 교사 때문에 몰락하는 카바레 가수 “롤라”를 연기하여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상업적으로 크게 성공하여 1930년대까지 여러 언어로 제작되었습니다. 이 성공으로 파라마운트 픽쳐스와 계약하게 됩니다.
1930
[미국 데뷔작 《모로코》 출연 및 아카데미 후보]
미국에서 첫 출연한 영화 《모로코》에서 카바레 가수 역을 맡아 아카데미상 후보에 오르며 할리우드에서의 성공적인 시작을 알렸습니다.
1930년부터 1935년까지 폰 스턴버그 감독이 연출한 파라마운트 픽쳐스의 영화 여섯 편에 연달아 출연하며 '팜 파탈'의 이미지를 확고히 구축했습니다. 그녀의 미국 첫 영화인 《모로코》는 그녀에게 아카데미상 후보 지명을 안겨주었습니다.
1932
디트리히와 폰 스테른베르크는 《모로코》 외에도 《불명예》, 《금발의 비너스》, 《상하이 특급》, 《붉은 낙인》, 그리고 《악마는 여자다》에 출연했습니다. 특히 《악마는 여자다》에 출연했던 자신의 모습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1936
[독립 영화 《알라의 정원》 출연]
데이비드 O. 셀즈닉이 제작한 독립 영화 《알라의 정원》에 당시로서는 거액의 출연료를 받고 출연하여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독립 영화를 제작하는 데이비드 O. 셀즈닉은 당시 매우 큰 거액이었던 20만 달러를 출연료로 주고 디트리히를 섭외하여 《알라의 정원》을 제작했습니다. 이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1937
[《갑옷 없는 기사》 출연]
잉글랜드의 알렉산더 코다 프로덕션이 45만 달러의 출연료를 지불하고 그녀를 주인공으로 한 《갑옷 없는 기사》를 제작했습니다. 이 영화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37년에는 잉글랜드의 영화 제작사인 알렉산더 코다 프로덕션도 출연료 45만 달러를 들여 디트리히가 주인공인 《갑옷 없는 기사》를 제작했습니다. 이 영화 역시 흥행에 성공했습니다.
1939
[나치당 출연 제의 거절 및 미국 시민권 취득]
나치당으로부터 영화 출연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파라마운트와 재계약하며, 나치 독일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1939년, 나치당 측이 영화 출연을 제의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하고 파라마운트와 재계약했습니다. 그녀는 나치 독일의 폭정에 반발하여 독일 국적을 버리고 미국 국적을 취득하며 분명한 반 나치 노선을 걸었습니다.
1941
[제2차 세계 대전 연합군 위문 공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전쟁 채권 홍보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연합군 위문 공연에 합류하여 군인들에게 큰 위로와 인기를 얻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디트리히는 전쟁 채권을 홍보하였고, 전선 위문공연에 합류하여 최전선의 군인들을 위로했습니다. 이때 부른 '릴리 마를렌'은 참전 군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 공로로 전후에 수훈하였습니다.
1950
[세계 최대 카바레 쇼 진행자로 변신]
본격적으로 쇼 진행자로 변신, 1970년대 중반까지 세계 최대 카바레 쇼를 이끌며 새로운 전성기를 맞았습니다.
1950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세계 최대 카바레 쇼를 진행했습니다. 1953년에는 라스베가스의 호텔 사하라에 출연하여 주당 30,000 달러를 받으며 피부색과 흡사한 비단으로 만든 '누드 드레스'를 입고 쇼를 진행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런던의 나이트클럽 카페 드 파리와도 출연 계약을 맺었습니다.
1965
1965년 디트리히는 다리에 암이 발병하여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습니다. 진통제와 알코올에 의지하여 고통을 견뎠지만, 결국 1974년에는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1967
1960년대 후반부터 연극 무대에 다시 올랐는데, 브로드웨이에서 1967년과 1968년 두 번에 걸쳐 토니 상을 받았습니다.
1972
[《당신의 사랑을 바래요》 뮤지컬 공연]
런던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던 《당신의 사랑을 바래요》를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각색하여 공연했습니다.
1972년 11월 디트리히는 런던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던 《당신의 사랑을 바래요》를 자기 방식의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각색하여 공연했습니다. 흥행은 성공했다고 할 만하지 않았지만, 영국의 BBC와 미국의 CBS가 공연을 녹화하여 이듬해인 1973년 1월에 방송했습니다.
1974
진통제와 알코올에 의지하여 고통을 견뎠지만, 결국 1974년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습니다.
1975
[마지막 공연 및 다리 부상]
시드니 공연 중 다리가 다시 부러지는 사고를 당하며 더 이상 쇼를 진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녀의 오랜 공연 경력의 사실상 마지막이었습니다.
시드니에서 공연하던 도중에 다리가 다시 부러지는 사고를 당한 후로 쇼를 더는 진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녀의 공연 활동에 종지부를 찍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6
불행이 겹쳐 디트리히의 남편이었던 루돌프 시베르가 1976년 6월 24일 암으로 사망했습니다.
1979
[마지막 영화 《오직 지골로뿐》 출연]
영화 《오직 지골로뿐》에 출연하고 주제가도 직접 불렀습니다. 이 작품은 그녀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 되었습니다.
디트리히는 1979년 영화 《오직 지골로뿐》을 촬영하고 주제가도 직접 불렀습니다. 이 작품이 디트리히가 마지막으로 출연한 영화였습니다.
1982
[자서전적 다큐멘터리 제작 동의]
자신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제작에 동의했고, 이는 1984년 《마를레네》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습니다.
파리의 아파트에 칩거하던 디트리히는 1982년 자신의 일생을 다룬 다큐멘터리 제작에 동의하였고, 이 다큐멘터리는 1984년 《마를레네》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습니다.
1992
1992년 5월 6일 향년 90세의 나이로 파리의 아파트에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녀의 묘비는 독일 베를린에 있습니다.
1999
[미국 영화 연구소 선정 역대 최고 배우 9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여성 배우 중 9위에 오르며, 그녀의 예술적 업적을 다시 한번 인정받았습니다.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는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역대 최고의 여성 배우 중 9위로 선정하며 그녀의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기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