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리언 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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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영화 감독, 연극 배우, 작가 영화/드라마 배우

릴리언 기시는 무성영화 시대의 선구적인 미국 배우이자 영화 감독입니다. 데이비드 와크 그리피스 감독의 수많은 걸작에 출연하며 '미국 영화의 영부인'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음성영화 시대로 전환된 후에는 주로 연극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간간히 영화와 TV 드라마에도 출연하며 90대까지 연기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평생 무성영화의 가치를 옹호하고 보존하는 데 헌신했으며, 아카데미 평생공로상과 AFI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영화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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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93

[릴리언 기시 출생]

미국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에서 릴리언 다이애나 기시로 태어났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오하이오주 스프링필드에서 어머니 매리 로빈슨 맥코넬과 아버지 제임스 리 기시 사이에서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여동생 도로시 기시도 인기 있는 영화 배우로 성장했습니다. 그녀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가족을 버렸고, 어머니가 배우 일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습니다.

1902

[연극 무대 데뷔]

오하이오주 라이징썬의 리틀 레드 스쿨 하우스에서 연극 무대에 처음으로 데뷔했습니다.

릴리언 기시의 연극 무대 데뷔는 1902년 오하이오주 라이징썬에 있던 리틀 레드 스쿨 하우스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듬해부터는 어머니, 여동생 도로시와 함께 연극 <그녀의 첫 번째 잘못된 발걸음>으로 순회공연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1903

[연극 순회공연 시작]

어머니와 여동생 도로시와 함께 연극 <그녀의 첫 번째 잘못된 발걸음>으로 순회공연을 벌였습니다.

1903년부터 1904년까지 릴리언 기시는 어머니 매리, 여동생 도로시와 함께 연극 <그녀의 첫 번째 잘못된 발걸음>으로 순회공연을 벌이며 어린 시절부터 무대 경험을 쌓았습니다. 이후 뉴욕에서 사라 베른하르트와 춤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1905

[사라 베른하르트와 활동]

뉴욕에서 사라 베른하르트와 함께 춤을 추는 활동을 했습니다.

1905년 뉴욕에서 세계적인 배우 사라 베른하르트와 함께 춤 활동을 하며 예술적인 경험을 넓혔습니다. 이 시기는 그녀의 연기 경력 초기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1910

[아버지 병간호와 학업]

오클라호마주 스와니로 내려가 아버지의 병간호를 하며 그 지역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10년, 오클라호마주 마실론에 있는 이모 집에 머물고 있을 때 위독한 아버지의 소식을 듣고 오클라호마주 스와니로 내려갔습니다. 이곳에서 삼촌 집에 머물며 스와니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갔습니다.

1912

[아버지의 사망]

오클라호마주 노먼에서 아버지가 사망했습니다.

릴리언 기시가 오하이오주로 돌아간 지 몇 달 후인 1912년, 그녀의 아버지는 오클라호마주 노먼에서 사망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어린 릴리언에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단편 영화 <보이지 않는 적> 출연]

여동생 도로시와 함께 단편 영화 <보이지 않는 적>에 출연하며 스크린에 첫선을 보였습니다.

영화계에 데뷔한 해, 릴리언 기시는 여동생 도로시와 함께 단편 영화 <보이지 않는 적>에 출연하며 본격적인 영화배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정통 연극 배우들은 영화를 저급하게 여겼으나, 릴리언은 영화의 잠재력을 확신했습니다.

[영화계 데뷔 및 그리피스 감독과의 만남]

이웃이자 아역 배우였던 매리 픽포드의 소개로 D. W. 그리피스 감독을 만나 바이오그라프 영화사와 계약하며 영화계에 데뷔했습니다.

1912년, 뉴욕으로 이사한 릴리언과 도로시 자매는 이웃 글래디스 스미스(매리 픽포드)와 친구가 되었습니다. 매리 픽포드의 도움으로 D. W. 그리피스 감독을 소개받아 바이오그라프 영화사와 계약하며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당시 19세였지만 캐스팅 감독에게 16세라고 말하며 나이를 속였습니다.

1913

[연극 중 빈혈로 쓰러짐]

연극 <착한 꼬마 악마> 공연 도중 빈혈증으로 쓰러질 정도로 연기에 몰입했습니다.

영화와 연극 활동을 병행하던 릴리언 기시는 1913년 연극 <착한 꼬마 악마>를 하던 중에 빈혈증으로 쓰러졌습니다. 이는 그녀가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고통을 감내하는 집착에 가까운 열정을 보여주는 일화 중 하나입니다.

1915

[무성영화 걸작 <국가의 탄생> 주연]

D.W. 그리피스 감독의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흥행작인 <국가의 탄생>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15년, 릴리언 기시는 D.W. 그리피스 감독의 논란의 여지가 있었으나 무성영화 시대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국가의 탄생>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최고의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이 작품으로 '미국 영화의 영부인'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1916

[<인톨러런스> 출연]

D.W. 그리피스 감독의 또 다른 대작 <인톨러런스>에 출연했습니다.

<국가의 탄생> 이후, 릴리언 기시는 1916년 D.W. 그리피스 감독의 복잡한 서사 구조와 대규모 스케일을 자랑하는 <인톨러런스>에도 출연하며 그리피스 감독의 뮤즈로서 입지를 굳혔습니다.

1918

[독감 팬데믹 감염 및 회복]

영화 <짖밟힌 꽃>을 촬영하던 중 독감 팬데믹에 감염되었으나 성공적으로 완쾌했습니다.

1918년,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독감 팬데믹 시기에 영화 <짖밟힌 꽃> 촬영 중 릴리언 기시도 감염되었으나 다행히 완쾌하여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1919

[<짖밟힌 꽃> 출연]

D.W. 그리피스 감독의 작품 <짖밟힌 꽃>에 출연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19년, D.W. 그리피스 감독의 감동적인 드라마 <짖밟힌 꽃>에 출연하며 섬세하고 감정적인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이 시기 그녀는 이미 할리우드에서 가장 존경받는 여배우 중 한 명이었습니다.

1920

[생사를 넘나든 <동부 저 멀리> 촬영]

<동부 저 멀리> 촬영 중 엄청난 추위 속에서 빙판 위에 기절하는 연기를 하면서 손가락에 영구적인 신경 손상을 입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동부 저 멀리>에서 빙판 위를 떠내려가는 장면을 연기하면서 살을 에는 추위와 싸워야 했습니다. 이 연기로 손가락에 영구적인 신경 손상을 입었을 정도로 혼신을 다했고, 이는 그녀의 연기에 대한 집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로 남아있습니다.

1921

[<풍운의 고아> 출연]

D.W. 그리피스 감독의 또 다른 명작인 <풍운의 고아>에 출연했습니다.

1921년, 릴리언 기시는 D.W. 그리피스 감독의 <풍운의 고아>에 출연했습니다. 영화 배우 활동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25개 이상의 단편 영화를 찍으며 스타 배우가 되었고, <동부 저 멀리> 같은 호화로운 문학 작품 영화에도 다수 출연했습니다.

1925

[MGM 이적 및 그리피스 시대 종말]

새롭게 설립된 MGM의 제안을 받아들여 D.W. 그리피스 감독과 결별하고 이적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25년, 당시 막 설립된 MGM의 제안을 받고 그리피스 감독과의 오랜 협업을 끝내는 것에 주저했지만, MGM이 더 큰 창의적 자율권을 약속하자 이적을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높은 개런티 대신 낮은 임금과 일정 비율의 수익 분배를 요구하며 영화의 질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1926

[MGM에서의 주요 출연작]

MGM에서 <라 보엠>과 <주홍 글씨>에 출연했습니다. 특히 <라 보엠> 촬영 때는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3일간 금식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MGM으로 이적한 후 릴리언 기시는 1926년 <라 보엠>과 <주홍 글씨>에 출연했습니다. <라 보엠>에서 죽는 장면을 준비하며 3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아 감독이 실제 죽음을 찍는 것이 아닌가 걱정할 정도로 완벽한 연기를 추구했습니다.

1928

[MGM 계약 만료 및 <바람> 출연]

MGM과의 계약이 만료되었으며, 이 시기에 촬영한 <바람>은 무성영화 시대의 가장 독특한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1928년, 릴리언 기시와 MGM과의 계약이 만료되었습니다. 이 시기에 출연한 <바람>은 유성영화의 출현으로 상업적으로는 실패했으나, 오늘날 무성영화 시대의 가장 예술적이고 독특한 작품 중 하나로 손꼽히며 그녀의 연기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1930

[브로드웨이 연극 <바냐 삼촌> 출연]

제드 해리스의 브로드웨이 작품인 <바냐 삼촌>에 출연하며 연극 무대로의 성공적인 복귀를 알렸습니다.

유성영화 시대로 접어들면서 대중의 영화 취향 변화에 따라 릴리언 기시는 연극 무대로 돌아왔습니다. 1930년 제드 해리스의 브로드웨이 작품인 <바냐 삼촌>에 출연하며 연극 무대에서의 활약을 재개했습니다.

[연극 무대 활동에 집중]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에 걸쳐 대부분 연극에 집중하며 활동했습니다.

음성영화 시대의 여명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릴리언 기시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전반에 걸쳐 연극에 주로 집중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간간히 영화에도 출연하며 연기자로서의 폭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주었습니다.

1936

[<햄릿>과 <동백꽃 여인> 출연]

거스리 맥클린틱의 기념비적인 작품 <햄릿>에 오필리아로, <동백꽃 여인>의 마가리타로 출연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36년, 연극 무대에서 큰 활약을 펼치며 거스리 맥클린틱의 <햄릿>에서 오필리아 역을, 그리고 <동백꽃 여인>에서 마가리타 역을 맡았습니다. 그녀는 <햄릿>에서의 연기에 대해 '내가 음란한 오필리아를 연기했어!'라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1943

[CBS 라디오 드라마 출연]

인기 있는 CBS 라디오 시리즈 <서스펜스>의 한 에피소드에 출연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영화와 연극 외에 라디오 활동도 병행했습니다. 1943년 인기 라디오 시리즈 <서스펜스>의 한 에피소드에 출연하여 목소리 연기로도 대중을 사로잡았습니다.

1944

[라디오에서 <국가의 탄생> 비하인드 스토리 공개]

CBS의 라디오 프로그램 <내가 거기 있었다>에서 영화 <국가의 탄생> 제작에 관한 드라마 형식 방송에 출연했습니다.

1944년 1월 16일, 릴리언 기시는 CBS의 <내가 거기 있었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자신이 주연을 맡았던 <국가의 탄생> 영화 제작 비하인드 스토리를 드라마 형식으로 방송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영화사의 살아있는 증인이자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1946

[<백주의 결투>로 아카데미 후보 지명]

서부 영화 <백주의 결투>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며 오랜만에 주요 영화 시상식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연극 활동에 주력하던 릴리언 기시는 1946년 영화 <백주의 결투>에서 병들어 죽는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이며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습니다. 이는 그녀의 영화계 복귀와 연기력에 대한 재평가를 이끌어냈습니다.

1950

[텔레비전 드라마 출연 시작]

1980년대 말까지 텔레비전 연속극에 다수 출연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50년대 초부터 1980년대 말까지 텔레비전 연속극에 다수 출연하며 활동 영역을 넓혔습니다. 스크린과 무대뿐만 아니라 안방극장에서도 시청자들에게 꾸준히 얼굴을 비추며 폭넓은 팬층을 형성했습니다.

1951

[브로드웨이 '블랙 쉬폰' 출연]

브로드웨이의 플레이하우스에서 블랙 쉬폰을 각색한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1951년 5월 31일, 릴리언 기시는 브로드웨이의 플레이하우스에서 상연된 '블랙 쉬폰' 각색 작품에 출연하며 연극 무대에서의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녀는 스크린과 무대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 스펙트럼을 보여주었습니다.

1953

[TV <풍요로운 여행> 출연으로 찬사]

텔레비전 출연작 중 가장 큰 찬사를 받았던 <풍요로운 여행>에 출연했습니다.

릴리언 기시가 텔레비전에 출연한 작품 중 가장 많은 찬사를 받은 것은 1953년의 <풍요로운 여행>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그녀는 TV 드라마에서도 변함없는 연기력을 선보이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1955

[<사냥꾼의 밤> 출연]

스릴러 영화 <사냥꾼의 밤>에서 살인적인 설교자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수호 천사와 같은 인상적인 역을 맡아 강렬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55년 스릴러 영화 <사냥꾼의 밤>에서 로버트 미첨이 연기한 살인적 설교자로부터 자신의 품에 들어온 아이들을 보호하는 수호 천사와도 같은 인상적인 역을 맡아 깊은 연기력을 보여주었습니다.

[조지 이스트맨 어워드 수상]

조지 이스트맨 어워드에서 영화 예술에 지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수상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55년, 조지 이스트맨 어워드에서 영화 예술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는 그녀의 오랜 연기 경력과 영화 발전에 대한 기여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1

[아카데미 평생공로상 수상]

최고의 예술성과 영화 발전에 대한 탁월한 공헌으로 아카데미 특별상(평생공로상)을 수상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71년, 영화 예술에 대한 탁월한 공헌과 평생에 걸친 헌신을 인정받아 아카데미 특별상(평생공로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는 그녀가 영화계에 미친 지대한 영향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1972

[미국 연극 명예의 전당 헌액]

미국 연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연극계에서의 공로도 인정받았습니다.

영화 배우로 유명했지만 연극에서도 큰 활약을 했던 릴리언 기시는 1972년 미국 연극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무대 예술에 기여한 공로를 공식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73

[트뤼포 감독 영화 헌정]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이 자신의 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릴리언 기시와 그녀의 여동생 도로시 기시에게 헌정했습니다.

1973년, 프랑스 영화감독 프랑수아 트뤼포는 자신의 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릴리언과 도로시 기시 자매에게 헌정하며 그녀들의 예술적 업적에 존경을 표했습니다. 이는 릴리언 기시가 세계 영화계에 미친 영향력을 보여줍니다.

1975

[무성영화 보존 활동]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제작한 무성영화 관련 프로그램 <무성 시절>의 호스트를 맡았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75년, PBS의 무성영화 관련 프로그램 <무성 시절>의 호스트를 맡으며 잊혀진 예술인 무성영화의 가치와 보존에 헌신적인 옹호자로 활동했습니다. 그녀는 고전 작품들의 상영과 관련 연설 등으로 무성영화를 알리는 데 힘썼습니다.

1976

[기시 영화관 헌정식 참석]

볼링 그린 주립대학의 연극영화과에 '기시 영화관과 갤러리'가 헌정되는 행사에 참석했습니다.

1976년 6월 11일, 볼링 그린 주립대학은 릴리언과 도로시 기시 자매의 이름을 딴 '기시 영화관과 갤러리'를 헌정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이 헌정식에 직접 참석하여 자신과 몇 년 전 사망한 동생에게 주어진 명예에 감사하는 마음을 전했습니다.

[명예박사 학위 수여]

볼링 그린 주립대학으로부터 공연예술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받았습니다.

1976년 6월 12일, 볼링 그린 주립대학은 전날 헌정된 기시 영화관과 갤러리의 의미를 기리며 릴리언 기시에게 공연예술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했습니다.

1979

[여성 영화인 크리스탈 어워드 수상]

로스앤젤레스에서 여성 영화인 크리스탈 어워드를 수상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79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여성 영화인 크리스탈 어워드를 수상하며 여성 영화인의 귀감으로서 그 공로를 인정받았습니다.

[<바람> 상영회 소개]

로스앤젤레스의 윌턴 극장에서 영화 <바람> 상영회의 소개를 맡았습니다.

1979년, 릴리언 기시는 로스앤젤레스의 윌턴 극장에서 자신의 주연작이었던 <바람> 상영회의 소개를 맡아 직접 관객들에게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1980

[무성영화 다큐멘터리 인터뷰]

TV 다큐멘터리 <할리우드: 미국 무성영화의 전성시대>에 인터뷰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1980년, 릴리언 기시는 무성영화 시대를 조명하는 TV 다큐멘터리 <할리우드: 미국 무성영화의 전성시대>에 출연하여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경험과 무성영화에 대한 깊은 통찰을 공유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살아있는 영화사의 증인이었음을 보여줍니다.

1982

[케네디 센터 명예상 수상]

공연예술을 통해 미국 문화에 기여한 공로로 케네디 센터 명예상을 수상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82년, 공연예술 분야에서 미국 문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공로로 케네디 센터 명예상을 수상하는 큰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영화배우를 넘어 미국 문화 전반에 미친 영향력을 입증합니다.

[볼링 그린 주립대학, 기시 자료 이관]

볼링 그린 주립대학이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던 기시의 영화와 사진들을 넘겨받았습니다.

1982년, 볼링 그린 주립대학은 현대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던 릴리언 기시의 영화 관련 자료와 사진들을 넘겨받아 그녀의 유산을 보존하고 연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1983

[텔루라이드 영화제 특별 손님]

텔루라이드 영화제에 특별 손님으로 초청되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83년 텔루라이드 영화제에 특별 손님으로 초청되어 영화계의 거장으로서 변함없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후배 영화인들에게 귀감이 되는 존재였습니다.

1984

[AFI 평생공로상 수상]

미국 영화 연구소(AFI)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두 번째 여성 수상자이자 무성영화 시절 배우로서는 최초 기록을 세웠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84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에서 평생공로상을 수상하며 다시 한번 영화계에서의 전설적인 입지를 확인했습니다. 그녀는 이 상을 받은 두 번째 여성이자 무성영화 시대 배우로서는 최초로 이 상을 받으며 역사를 새겼습니다.

1987

[마지막 영화 <8월의 고래> 출연]

93세의 나이에 마지막 영화 <8월의 고래>에 출연하여 빈센트 프라이스, 베티 데이비스 등과 함께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93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1987년 영화 <8월의 고래>에 출연하며 변함없는 연기 열정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영화에서 그녀는 베티 데이비스와 함께 메인주에 사는 늙은 자매 역할을 맡아 깊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8월의 고래>로 국내외 찬사]

영화 <8월의 고래>에서의 연기로 전미 비평가 위원회 최우수 여배우상을 받았으며, 칸 영화제에서는 관중들로부터 10분간 기립박수를 받는 등 국제적인 찬사를 받았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마지막 영화 <8월의 고래>에서의 탁월한 연기로 전미 비평가 위원회 최우수 여배우상을 수상했습니다. 또한 칸 영화제에서는 관중들로부터 10분간 기립박수를 받으며 노익장을 과시, 전 세계 영화 팬들에게 깊은 감동과 존경을 안겼습니다.

1988

[연기자 경력의 마지막: <쇼 보트> 녹음]

제롬 컨의 <쇼 보트> 녹음에 참여하여 마지막 장면에서 노인의 짧은 대사를 감동적으로 읽으며 연기자로서의 긴 경력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굿나잇'이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88년 제롬 컨의 <쇼 보트> 녹음에 참여하며 연기자로서의 마지막 활동을 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노인의 짧은 대사인 '굿나잇'을 감동적으로 읽으며 그녀의 90년에 가까운 긴 연기 경력을 마무리하는 상징적인 순간을 만들었습니다.

1993

[대학, 기시 유산 기념품 전시 기금 모금]

볼링 그린 주립대학은 릴리언 기시의 사망 이후 그녀의 유산에서 받은 기념품 전시를 위한 갤러리 확장 기금을 모았습니다.

1993년 릴리언 기시 사망 이후, 볼링 그린 주립대학은 그녀의 유산에서 받은 기념품들을 전시하기 위한 갤러리 확장 기금을 모았습니다. 이는 그녀의 예술적 업적과 유산을 기리는 중요한 활동이었습니다.

[릴리언 기시 사망]

99세의 나이로 심부전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의 유골은 뉴욕의 성 바돌로매 성공회에 여동생 도로시와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릴리언 기시는 1993년 2월 27일, 99세의 나이에 심부전으로 사망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삶을 마감했습니다. 100세를 불과 8개월 앞둔 때였습니다. 그녀의 화장된 유골은 뉴욕에 있는 성 바돌로매 성공회에 여동생 도로시와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그녀의 재산 대부분은 도로시와 릴리언 기시 프라이즈 신탁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2019

['기시 극장' 명칭 변경 요구 논란]

볼링 그린 주립대학의 흑인학생연합이 논란의 여지가 있는 <국가의 탄생>에 기시가 연루되어 있다는 이유로 '기시 극장'의 이름을 바꿀 것을 요구했습니다.

2019년 2월, 볼링 그린 주립대학의 '기시 극장' 명칭을 둘러싼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대학의 흑인학생연합은 릴리언 기시가 출연했던 논란의 영화 <국가의 탄생>의 역사적 맥락 때문에 극장 이름을 변경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2019.5.3 사후 26년

['기시 극장' 명칭 삭제 결정]

볼링 그린 주립대학 이사회가 만장일치로 '기시 극장'의 이름 삭제를 결정했습니다.

2019년 5월 3일, 볼링 그린 주립대학 이사회는 릴리언 기시의 이름이 붙은 극장 명칭 변경 요구에 대해 만장일치로 '기시' 이름을 삭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는 릴리언 기시가 출연한 <국가의 탄생> 영화의 역사적 논란 때문이었습니다.

[영화계 인사, '기시 극장' 이름 복원 촉구]

릴리언 기시의 마지막 영화 <8월의 고래>의 공동 제작자 마이크 카플란이 헬렌 미렌, 마틴 스코세이지 등 50여 명의 영화계 인사와 함께 볼링 그린 주립대학에 기시의 이름 복원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배포했습니다.

2019년 6월, 릴리언 기시의 마지막 영화 <8월의 고래> 공동 제작자 마이크 카플란은 헬렌 미렌, 제임스 얼 존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등 50여 명의 영화계 저명인사들과 함께 볼링 그린 주립대학에 '기시 극장'의 이름을 복원해 줄 것을 촉구하는 청원서를 배포했습니다. 이들은 릴리언 기시의 전체적인 업적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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