린뱌오
연표
1907
린뱌오는 청나라 후베이성 황강시의 수공예 장인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렸을 때 이름은 린위룽이었다. 지역 군벌의 횡포로 공장이 문을 닫아 가족은 상하이로 이사했다.
1922
상하이 학생운동에 여러 번 참가했으나 소심하고 내성적인 성격 탓에 중도 포기하고, 1922년에 국립 공업과목사범학교인 우창공진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하였다.
1923
1923년 린뱌오의 가족은 생활고를 겪게 되었고, 장남인 린뱌오는 학교를 결국 자퇴 후 생활비를 벌기 위해 초등학교 조교일을 했다.
1925
1925년 린뱌오는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하며 정치적 활동을 시작했다.
1926
[황푸 군관학교 입학 및 북벌 활약]
황푸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장제스와 소련 교관 바실리 블류헤르의 애제자가 되었으며, 북벌에 참여하여 국민당군 대대장으로 승진했다.
18세 때인 1926년 황푸 군관학교에 입학하여 장제스와 소련 교관 바실리 블류헤르의 애제자가 되었다. 그는 저우언라이에게 병법, 사격술 등 군사과목을 배웠고, 같은 해 북벌에 참여하여 몇 달 만에 소대장에서 국민당군 대대장으로 승진했다.
1927
1927년에 대령으로 진급하였으나, 이후 공산당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자 린뱌오는 국민혁명군에서 사직하고 마오쩌둥과 주더가 지휘하는 장시 소비에트의 홍군에 합류했다.
1934
홍군 합류 후 눈부신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1934년에는 홍군의 제1군단장까지 승진하였다. 린뱌오는 펑더화이와 함께 홍군의 가장 유능한 야전 사령관으로 꼽혔다.
1936
이후 부대를 이끌고 장정에 참여하여 1936년에는 옌안에 도달하였다. 김무정 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군인들도 장정에 참여했다.
1937
[**핑싱관 전투 승리**]
제2차 국공 합작 성립 후, 제115사단을 이끌고 산시성 핑싱관에서 일본군 제5사단을 매복 공격하여 격멸했다. 이는 중일 전쟁 개전 이후 중국 측의 최초의 승리로 중국인의 사기를 크게 올렸다.
제2차 국공 합작이 성립하여 공동 항일전선이 만들어지자, 1937년 9월 린뱌오는 제115사단을 이끌고 산시성 핑싱관에서 일본군 제5사단을 매복 공격하여 격멸하였다. 이는 중일 전쟁 개전 이후 연전연패하던 중국 측의 최초의 승리로서, 중국인의 사기를 크게 올리고 공산당의 선전 활동에도 크게 기여했다.
1938
[오인 사격으로 인한 부상 및 요양]
전리품으로 얻은 일본군 망토를 입고 승마 중 아군에게 오인 사격을 받아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소련 모스크바로 이동해 1942년까지 요양했다.
1938년 3월, 전리품으로 얻은 일본군 망토를 입고 승마 중 일본군으로 오인되어 아군에게 오인 사격을 받아 머리에 큰 부상을 입고, 이후 옌안으로 후송되었다가 후에 소련 모스크바로 이동해 1942년까지 요양하였다. 이때 신경의 부상으로 물과 바람을 매우 두려워하게 되었으며, 산수화까지 보는 것을 두려워할 정도였다고 한다.
1945
[국공 내전 발발 및 둥베이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취임]
일본의 무조건 투항 선언 이후 국공 내전이 발발하자, 린뱌오는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된 둥베이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연합군 상대로써 차라리 무조건 투항 선언에 뒤이어 국공 내전이 일어났는데, 국민당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을뿐만 아니라 미국의 원조로 최신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래서 공산군은 후퇴를 거듭했고, 본부가 있던 옌안마저 함락되었다. 린뱌오는 동북항일연군이 개편된 둥베이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을 맡았다.
1948
1948년 11월 린뱌오는 둥베이(만주) 지역에서 수적으로 우세한 국민당군을 격파하였다. 린뱌오의 승리를 기점으로 전세는 공산당쪽으로 기울었다.
1949
린뱌오는 제4야전군으로 개편된 자신의 부대(총병력 백만)를 이끌고 계속 남하하여 1949년 2월에는 베이징을 함락시켰고, 장강을 도하하여 1950년까지 중국의 최남단인 광시성까지 도달하였다.
1954
중화인민공화국 설립 이후 잠시 은퇴했으나 1954년 부총리로 복귀했다.
1955
1955년에는 인민해방군에 계급 제도가 도입되어 중화인민공화국 원수 계급을 받았다.
1958
1958년에는 중국공산당 부주석으로 임명되었다.
1959
1959년 루산 회의에서 국방부장을 맡고 있던 펑더화이가 대약진운동의 폐해를 비판하자, 마오쩌둥은 바로 펑더화이를 해임하고 린뱌오를 국방부장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펑더화이는 완전히 몰락했고, 린뱌오는 권력의 핵심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1962
1962년 중인국경분쟁에서 린뱌오의 지도를 받은 중국군이 인도군을 격파하고, 당에서도 린뱌오가 류사오치에 맞서 마오쩌둥을 지지하자, 마오쩌둥은 린뱌오를 더욱 신임하게 되었다.
1966
[문화대혁명 주도 및 후계자 지명]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마오쩌둥을 지지하며 이에 앞장섰고, 절대적 존재가 된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로 떠올랐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자 린뱌오는 이에 앞장을 서 절대적 존재가 된 마오쩌둥의 공식 후계자로 떠올랐다.
1971
1971년 9월 마오쩌둥은 남부를 시찰하며 린뱌오를 비판했고, 린뱌오는 이를 자신에 대한 제거 신호로 보고 중화인민공화국 공군 중위로 있던 아들 린리궈와 함께 마오쩌둥 암살 및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예상과 달리 마오쩌둥이 베이징으로 빨리 복귀하는 바람에 쿠데타 미수에 그치고 말았다.
[**9·13 사건으로 사망**]
가족들과 함께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했다. 이를 '9·13 사건'이라 부른다.
결국 린뱌오는 가족들과 함께 서둘러 호커 시들리 트라이덴트 1E 여객기를 타고 소련으로 망명했으나, 몽골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하였다. 린뱌오의 갑작스러운 쿠데타 기도, 망명과 죽음은 아직까지도 불명확한 점이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