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펑
연표
1928
[상하이 출생]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리위안펑(李远芃)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 리옌쉰과 모친 자오쥔타오는 초기 중국공산당 당원이었습니다.
리펑은 1928년 10월 20일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리위안펑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가족은 원래 쓰촘성 청두 출신이며, 부친 리옌쉰과 모친 자오쥔타오 모두 초기 중국공산당 당원이었습니다.
1931
1931년 리펑의 부친 리옌쉰은 중국국민당에 의해 사로잡혀 처형당했습니다.
1939
1939년 리펑은 상급 공산당 지도자 저우언라이의 부인 덩잉차오를 만났고, 그녀는 그를 저우언라이에게 데려갔습니다. 이후 리펑은 저우언라이 부부에 의해 양육되었습니다.
1941
1941년 리펑이 12세였을 때 저우언라이는 그를 공산당 기지 옌안으로 보냈습니다. 리는 1945년까지 옌안에서 공부하며 옌안 자연과학 연구소에서 수학했습니다.
1945
1945년 17세의 나이에 리펑은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공산당원으로서의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1948
1948년 리펑은 소련의 모스크바 동력 대학교로 보내져 수력 발전 공학 분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쌓았습니다.
1954
1954년 모스크바 동력 대학교를 졸업한 리펑은 소련에 체류하는 동안 중국 학생 협회를 이끌며 활동했습니다.
1955
1955년 중국으로 돌아온 리펑은 둥베이 지방에서 동력 산업 분야에 종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기술적인 역할을 맡았으나, 이후 관리부로 자리를 옮기며 경력을 발전시켰습니다.
1976
1976년 발생한 지독한 탕산 대지진 이후, 리펑은 피해 지역의 전력 복구를 위한 노력을 진두지휘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979
1970년대 후반 덩샤오핑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지도자가 되면서 리펑의 정치 경력은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1979년과 1983년 사이에 부총리를 역임했습니다.
1982
[중앙위원회 가입 및 주요 직책 역임]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가입하며 공산당의 주요 단체 일원이 되었고, 동력부 부장 및 수자원 보존 및 동력부 부부장을 역임했습니다.
1982년 리펑은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에 가입하며 당내 주요 단체 일원이 되었습니다. 또한 동력부 부장과 수자원 보존 및 동력부 부부장을 겸임하며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1985
[국가 교육 위원회 부장 및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선출]
국가 교육 위원회 부장이 되었으며,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와 공산당 서기로도 선출되었습니다.
1985년 리펑은 국가 교육 위원회 부장으로 임명되었고, 중국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와 공산당 서기로 선출되며 당내 핵심 요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1987
[국무원 총리 권한 대행]
자오쯔양의 승진 후 국무원 총리 권한 대행이 되었고, 다음 해 공식 총리로 선출되며 권력의 정점에 올랐습니다.
1987년 11월 24일, 리펑은 자오쯔양이 승진한 후 국무원 총리 권한 대행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정치 경력에 있어 매우 중요한 단계였으며, 다음 해 공식적으로 총리로 선출될 발판이 되었습니다.
1988
1988년 3월 25일, 리펑은 중화인민공화국 제4대 국무원 총리로 공식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총리로서 정치적 불일치, 사회 문제, 가격 상승 등 당시 중국이 직면한 여러 도전에 직면하며 경제에 대한 정부 통제를 강화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1989
[톈안먼 시위 '대소동' 규정]
전 공산당 지도자 후야오방 사후 시작된 톈안먼 시위에 대해 〈인민일보〉에서 '대소동'으로 규정하며 강경한 입장을 드러냈습니다.
1989년 4월 26일, 전 공산당 지도자 후야오방의 사후 시작된 톈안먼 시위가 확산되자, 〈인민일보〉는 시위들을 '대소동'으로 규정하는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이는 시위자들을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으며, 리펑은 시위자들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그들에게 가장 비난받는 공무원 중 한 명이 되었습니다.
[톈안먼 사건 계엄령 선포 및 진압]
톈안먼 시위를 끝내기 위해 군사력 사용을 강하게 지지했으며,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사 활동을 명령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습니다.
1989년 5월 20일, 리펑은 톈안먼 시위를 강경하게 진압하기 위해 군사력 사용을 강력히 지지하며 베이징에 계엄령을 선포했습니다. 6월 3일부터 4일까지 군사 개입으로 시위가 진압되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그는 이 탄압이 중국 공산주의의 미래를 위해 중요했다고 주장했습니다.
1993
1993년 리펑은 심근 경색에 걸리면서 경제 개혁 지지자인 주룽지에게 일부 영향력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해 국무원 총리로 재임명되며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1994
[싼샤 댐 및 선저우 프로그램 시작, 대한민국 방문]
싼샤 댐 건설과 선저우 유인 우주 프로그램 준비를 시작했으며,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회담했습니다.
1994년 리펑은 두 가지 거대한 프로젝트인 싼샤 댐 건설과 선저우 유인 우주 프로그램 준비를 시작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들은 막대한 비용과 광범위한 논쟁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반으로서 처음으로 대한민국을 방문하여 김영삼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1998
[총리 퇴임 및 상무위원회 위원장 취임]
국무원 총리직에서 퇴임하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는 의례적인 직위였으나, 그는 싼샤 댐에 주로 전념했습니다.
1998년 3월 17일, 리펑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습니다. 이 직위는 의례적인 성격이 강했지만, 그는 평생의 역작으로 여겼던 싼샤 댐 관련 업무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며 공학자로서의 배경을 보여주었습니다.
2000
2000년 리펑은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이 회담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국제적 외교 활동의 일환이었습니다.
2002
2002년 리펑은 중국공산당의 주요 의사결정위원회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는 그의 공식적인 정계 은퇴 수순의 시작으로 여겨졌습니다.
2003
[상무위원회 위원장 퇴임 및 정계 은퇴]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직에서 퇴임하며 모든 공식 직위에서 물러났습니다.
2003년 3월 20일, 리펑은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장직에서 퇴임하며 모든 공식적인 직위에서 물러났습니다. 이로써 그의 오랜 정치 경력은 막을 내렸습니다.
2010
2010년 리펑의 자서전 〈중요한 순간 - 리펑의 일기〉가 출판되었습니다. 이 책은 1989년 천안문 사건 동안 그의 활동을 다루었으나, 평론가들은 그가 탄압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줄이려 했다고 비판했습니다.
2017
2017년 리펑은 생애 마지막으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이는 그의 공적 활동의 마지막 순간이었습니다.
2019
2019년 7월 22일, 리펑은 90세의 나이로 베이징에서 치료를 받던 중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 후 7월 29일에 국장으로 치러지고 화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