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콴유
연표
1923
리콴유는 1923년 9월 16일 싱가포르에서 태어났다. 그는 훗날 싱가포르의 건국을 이끌고 장기간 총리직을 역임하며 싱가포르의 경제 발전과 사회 질서 확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51
리콴유는 친영국적 진보당 소속이었던 상사 존 레이콕을 위해 선거인으로 활동하며 정치인으로서의 첫 경험을 쌓았다. 그러나 진보당이 대중, 특히 중국인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을 보며 당의 미래가 밝지 않음을 직감했다.
1953
[선거권 확대와 정치적 기회]
렌델 위원회가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에게 선거권을 확대하며 중국어 사용 인구가 급증, 리콴유는 중국계와의 연결고리를 만들 기회를 얻었다.
렌델 위원회가 선거권을 가진 사람의 자격을 싱가포르에서 태어난 모든 사람으로 확대하자 중국어를 사용하는 인구가 엄청나게 증가했다. 리콴유는 무역 노조와 학생 조합에 법률적 조언을 해주면서 중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의 연결고리를 가지며 정치적 기반을 다질 기회를 얻었다.
1954
[인민행동당 창당]
리콴유는 '맥주 마시는 부르주아들'이라 불리던 영어를 배운 인사들과 함께 인민행동당(PAP)을 창당했다. 이 당은 친공산주의적 무역 노조와 연계하여 영국 식민 지배를 끝내고 독자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1954년 11월 21일 리콴유는 영어를 배운 일군의 사람들과 함께 인민행동당(PAP)을 결성하였다. 이 당은 친공산주의적 무역 노조와 정략적인 연계를 통해 만들어졌는데, 영어를 사용하는 계층은 친공산주의자들의 대량의 지지가 필요했고, 공산주의자들은 말레이시아 공산당이 불법이었기 때문에 이를 가리기 위한 지도층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리콴유는 이 정략적 연합을 편리를 위한 결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공동의 목적은 독자적인 정부를 구성하고 영국 식민 지배를 끝내기 위해 대중을 선동하는 데 있었다. 창당식은 빅토리아 기념홀에서 1500명의 지지자와 무역 노조들로 가득찬 채로 이뤄졌다. 리콴유는 이 당의 사무총장이 되었으며 이 직책을 1957년의 잠시간을 제외하고는 1992년까지 유지하게 된다.
1955
[탄종 파가르 선거구 의석 획득]
리콴유는 1955년 선거에서 탄종 파가르 선거구의 의석을 획득하며 야당 당수로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리콴유는 1955년 선거에서 탄종 파가르 선거구의 의석을 획득하였다. 야당의 당수로서 데이비드 솔 마셜의 노동 전선 연립 정부와 대항한 그는 싱가포르의 미래 정세에 대한 런던에서 열린 두 차례 회의에도 인민행동당의 대표로 참가하였다.
1957
[당권 위기 극복 및 복직]
친공산주의자들이 가짜 당원들을 이용해 인민행동당 당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림유혹의 명령으로 이들이 구속되며 리콴유는 사무총장으로 복직했다.
1957년 친공산주의자들이 가짜 당원들을 이용해 당권을 장악하자 리콴유의 인민행동당에서의 위치는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림유혹은 친공산주의자들을 대거 구속하도록 명령하였고, 리콴유는 사무총장으로 복직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의 당내 위협은 다음 선거를 준비하는 동안 일시적으로 중단되었다.
1959
[인민행동당 선거 압승]
1959년 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이 51개 의석 중 43개를 차지하며 압승했고, 싱가포르는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국내 문제에 대한 자치권을 획득했다.
1959년 7월 1일 열린 선거에서 인민행동당은 51개 의석 중 43개의 의석을 차지하였다. 싱가포르는 국방과 외교를 제외한 국내 문제에 관한 자치권을 갖게 되었다.
[초대 국무총리 취임]
리콴유가 싱가포르 최초의 국무총리로 취임했다. 그는 취임 전 림유혹 정부 시절 구속되었던 정치범들의 석방을 요청했다.
1959년 7월 3일, 리콴유는 수석장관이었던 림유혹을 대신해 싱가포르 최초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국무총리가 되기 전에 리콴유는 림유혹 정부 시절 구속되었던 림친시옹과 데반 나이르의 석방을 요청했다. 그는 영국으로부터 자치권을 획득한 이후 교육, 주거, 실업 등 많은 문제에 부딪혔다.
1961
[말라야 연방 제안 수용]
말라야 연방의 툰쿠 압둘 라만 총리가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사바, 사라왁 간의 연방을 제안했고, 리콴유는 이에 합병 사전 작업을 시작했다.
말라야 연방의 총리 툰쿠 압둘 라만이 1961년에 말라야 연방, 싱가포르, 사바, 사라왁 간의 연방을 제안했을 때, 리콴유는 말레이시아와 합병하고 영국의 식민지 통치를 끝내기 위한 사전 작업을 시작했다.
[인민행동당 분당 사태 발생]
인민행동당 의원 13명이 내각 불신임 투표를 거부하고 탈당, 바리산 소시알리스를 창당하며 당이 분열되었다. 이로 인해 인민행동당은 의회에서 간신히 다수를 유지하게 되었다.
1961년 7월 21일, 13명의 인민행동당 의원이 당론을 따르지 않고 투표를 거부한 내각 불신임 투표가 있었다. 이들은 6명의 교역 조합 출신 좌파 지도자들과 함께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당인 바리산 소시알리스를 창당한다. 바리산 소시알리스는 창당시기부터 인민행동당에 버금가는 지지를 얻었다. 인민행동당의 51개 지부중 35개의 지부와 23명의 간사 중 19명이 바리산 소시알리스로 자리를 옮겼고, 이 사건은 '1961년의 분당 사태'로 알려져 있다. 의회에서의 인민행동당은 이제 26석만을 유지해 25석을 유지한 야당에 간신히 다수를 유지하고 있었다.
1962
[합병 국민 투표 통과]
말라야 연방과의 합병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70%가 찬성하며, 리콴유의 합병 계획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확인되었다.
리콴유는 70%가 투표에 찬성한 1962년 9월 1일에 열린 국민 투표 결과를 이용해 국민들이 자신의 계획을 지지한다고 이야기했다.
1963
[말레이시아 연방 합류]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으나, 말레이연합 국가조직(UMNO)은 싱가포르 내 화교 다수 문제로 우려를 표했다.
1963년 9월 16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 하지만 이 연방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말레이연합 국가조직(UMNO)은 싱가포르에 있는 다수의 화교가 말레이시아에 통합되어 인민행동당이 영향력을 갖게 되는 것을 걱정했다.
1964
[싱가포르 인종 분쟁 발발]
무하마드 생일에 칼랑 가스회사 부근에서 싱가포르 인종분쟁이 발생, 중국인과 말레이인들이 충돌하여 23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을 입었다.
1964년의 싱가포르 인종분쟁은 무하마드의 생일(1964년 7월 21일)에 칼랑 가스회사 부근에서 일어났다. 이 분쟁에서 중국인들과 말레이인들이 서로를 공격하며 23명이 죽었고 수백명이 부상을 당했다. 분쟁의 원인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는데, 그중 중국인이 무슬림 행렬에 병을 던졌다는 설도 있고, 말레이인이 이 분쟁을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추가 인종 분쟁 발생]
1964년 7월에 이어 9월에도 인종 분쟁이 발생, 약탈이 벌어졌고 툰쿠 압둘 라만과 리콴유가 사태 진정을 위해 나섰다.
1964년 9월에는 더 많은 분쟁이 일어나서 사람들이 차량과 상점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이에 따라 툰쿠 압둘 라만과 리콴유는 이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대중 앞에 나서야 했다.
1965
[장기 집권과 일당제 유지]
1965년부터 1981년까지 싱가포르는 야당의 존재를 허용했음에도 인민행동당이 의회의 모든 의석을 독차지하여 사실상 일당제 국가나 다름없었다.
리콴유와 인민행동당은 20세기 중반부터 싱가포르 정치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1965년부터 1981년까지의 싱가포르는 야당의 존재를 허용했음에도 싱가포르 의회의 모든 의석을 인민행동당 한 당이 독차지하여 이 시기의 싱가포르는 사실상 일당제 국가나 다를 바 없었다.
[말레이시아 분리 협정 서명]
말레이시아와의 합병이 실패로 돌아가자, 리콴유는 분리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으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분리 후에도 상호 국방과 교역 부문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툰쿠는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해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쫓아내며 '중앙 정부에 어떤 존경심도 보이지 않은 싱가포르주 정부와의 모든 관계를 단절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리콴유는 연방에 계속 머물기 위한 타협을 성사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그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리콴유는 1965년 8월 7일, 말레이시아와의 분리 뒤 관계를 다룬 분리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에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분리 뒤에도 상호 국방과 교역 부문에서 협력하기로 했다.
[싱가포르 독립 선언]
말레이시아 의회가 싱가포르를 주로 인정하던 관계를 끊는 결의안을 채택하며, 싱가포르는 독립 주권 국가임을 선언했다. 이는 리콴유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
1965년 8월 9일, 말레이시아 의회는 말레이시아에서 싱가포르를 한 주로 인정하던 관계를 끊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싱가포르는 천연 자원과 수자원이 부족해 이런 자원의 공급을 말레이시아에 의존하고 있었으며, 매우 빈약한 국방 능력을 가지고 있었기에 싱가포르 정부와 리콴유는 이런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기자회견에서 리콴유는 분리를 발표하며 감정을 추스르지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1968
1968년부터는 아예 노동자의 파업을 법적으로 금지했다.
1969
[헌법 비판 금지 조치]
1969년 4월부터 12월까지 리콴유의 직접 지시로 싱가포르의 개정된 헌법을 비판하는 모든 행위가 금지되었다.
1969년 4월 중순부터 12월까지는 리콴유가 직접 지시를 내려 싱가포르의 개정된 헌법을 비판하는 모든 행위를 금지했다.
1970
[학문 및 언론 통제 강화]
리콴유는 자신에게 비판적인 외국인 교수들을 비난하며, 강의 내용이 국정 방침과 일치하지 않으면 특정 학과를 폐쇄하겠다고 위협했다.
1970년에 리콴유는 교수들 앞에서 자신에게 비판적인 외국인 교수들에 대해 '철새들이 정부의 정책을 비난하는 것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겠다'며 비난하고 '강의 내용이 싱가포르의 국정 방침과 일치하지 않으면 정치학과, 사회학과, 철학과를 폐쇄하겠다'는 위협까지 가했다. 리콴유에게 반대하는 학생들과 교수들은 대학교에서 쫓겨났다.
1971
[엠네스티 조사관 추방]
엠네스티가 파견한 영국 국적의 조사관 에스트렐라 카레라스가 인권 탄압 조사 후 싱가포르 재입국이 금지되며, 리콴유 정부의 외국인 언론인/교수 추방 정책이 드러났다.
1971년 12월에 엠네스티가 파견한 영국 국적의 여성 조사관 에스트렐라 카레라스는 출국 후에 싱가포르 당국에 의해 재입국이 금지되는 등 리콴유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외국인들은 언론인, 교수 가릴 것 없이 외국으로 추방시켰다.
1972
[프리덤 하우스 자유 지수 평가]
프리덤 하우스가 1972년부터 발표한 세계 자유 지수에서 리콴유 집권기 싱가포르는 전두환 시기 한국, 마르코스 시기 필리핀보다 낮은 자유 지수를 기록했다.
프리덤 하우스가 1972년부터 매년마다 발표하는 세계의 자유 지수에 따르면 리콴유가 집권한 1972년부터 1990년까지 싱가포르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은 약 4.69였다. 참고로 전두환 시기 대한민국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이 약 4.86이었으며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시기 필리핀의 세계의 자유 지수 평균이 리콴유보다도 높은 약 4.64였다.
1973
[집회 및 시위 통제]
시위를 막기 위해 밖에서 10인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조치가 시행되었으며, 이는 오늘날에도 싱가포르의 시위 문화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적어도 1973년부터는 시위를 막기 위해 밖에서 10인 이상이 모이는 것까지 금지시켰으며, 오늘날에도 싱가포르에서는 도심 공원 한 곳에서만 시위가 가능하다. 이 곳에서 경찰의 허가를 받은 시위가 허용된 것이 2000년 9월이었고, 자유로운 시위는 무려 2008년 9월에야 가능하게 되었다.
1978
[말레이시아 총리 후보 초청]
리콴유는 차기 말레이시아 총리가 될 마하티르 빈 모하마드를 싱가포르로 초청하여 양국 간 관계 개선을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리콴유는 마하티르가 차기 말레이시아 총리가 될 것으로 알게 된 뒤, 1978년에 마하티르를 싱가포르로 초청했다. 마하티르의 싱가포르 방문을 통해 리콴유와 마하티르간의 개인적 및 외교적 관계가 개선되었다.
1981
1981년에 있던 보궐선거에서야 야당이 한 선거구에서 승리해 의석을 차지했고 그리고 1984년에 있던 총선에서야 싱가포르의 야당은 79석의 의석 중 무려 2석을 얻으며 본격적으로 의회에 입성하게 된다.
1988
[링구이댐 건설 협정 체결]
리콴유는 마하티르 총리와 함께 쿠알라룸푸르에서 조호르 강에 링구이댐을 짓는 협정을 맺었다. 이는 양국 관계 개선의 일환이었다.
마하티르는 리콴유가 민주행동당의 화교 지도자와의 친교를 중단할 것을 요청했고, 그 대가로 마하티르는 싱가포르의 말레이인들에 관한 문제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1988년 6월엔, 마하티르와 함께, 쿠알라룸푸르에서 조호르 강에 링구이댐을 짓는 협정을 맺었다.
1990
[총리직 사임]
리콴유는 31년간 이어진 싱가포르 총리직에서 사임하고 고촉통에게 총리직을 넘겼다. 그러나 그는 이후에도 '선임 장관' 등 다양한 직책을 맡아 국정 운영에 영향을 미쳤다.
리콴유는 1959년 6월 5일부터 1990년 11월 28일까지 싱가포르 총리직을 역임했으며, 고촉통이 그의 후임 총리가 되었다.
1992
리콴유는 인민행동당의 사무총장으로서 1957년의 잠시간을 제외하고는 1992년까지 이 직책을 유지했다. 1992년에 공식적으로 총재직에서 사임했다.
1993
[태형 적용 범위 대폭 확대]
리콴유 정부는 태형에 대한 굳은 신념을 바탕으로 42개의 범죄에 대해 태형을 의무화하고, 42개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적용하며 처벌 범위를 대폭 확대했다.
리콴유 정부는 영국으로부터 사법적 태형을 물려받았지만, 적용되는 범위를 훨씬 더 넓혔다. 1993년에는 42개의 범죄에 대해 태형을 의무화했고, 42개에 대해서는 선택적으로 적용했다.
1994
[마이클 페이 태형 사건으로 국제적 관심]
미국 청소년 마이클 페이가 기물 파괴법 위반으로 태형을 선고받으며, 싱가포르의 사법적 태형이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1994년에 미국 청소년인 마이클 페이가 기물 파괴법 위반 혐의로 태형을 선고받자, 이 사법적 태형은 전 세계의 이목을 끌었다.
2015
2015년 2월 5일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인공호흡기에 약 1달 동안 의존해왔다.
2015년 2월 5일 폐렴으로 병원에 입원한 뒤, 인공호흡기에 약 1달 동안 의존해오다 당해 3월 23일 오전 3시 18분 향년 91세에 서거하였다. 생전에 찬사와 비판을 동시에 받았던 리콴유의 장례식은 2015년 3월 29일에 국장으로, 싱가포르 국립대학에서 엄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