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완다 집단학살

num_of_likes 110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르완다 집단학살
집단학살, 전쟁 범죄, 인권 침해, 아프리카 역사 + 카테고리

1994년 르완다에서 약 100일간 벌어진 후투족의 투치족 대상 대량 학살. 최소 50만에서 1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비극으로 1분당 7명꼴로 살해된 인류 최악의 사건 중 하나다. 국제 사회의 방관 가톨릭 교회의 역할 논란 등 복잡한 배경 속에서 발생했으며 국제형사재판소 설립의 계기가 되었다. 이 비극은 오늘날까지 르완다와 국제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기고 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BC 5k

[트와족의 르완다 지역 정착]

오늘날 르완다 지역에 피그미 수렵채집인 트와족이 정착하여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의 르완다 지역에 원래 거주했던 종족은 트와족이다. 트와족은 토착 피그미 수렵채집인들로서, 기원전 8000년에서 3000년 사이에 해당 지역에 정착했고 현재까지 르완다에서 살아가고 있다.

400

[반투족의 르완다 이주 및 농경사회 형성]

많은 수의 반투족이 르완다로 이주해 농업을 위해 숲을 개간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후투족과 투치족의 구별이 계급적으로 발생한 배경이 되었습니다.

기원전 700년에서 기원후 1500년 사이에, 많은 수의 반투인들이 르완다로 이주하면서 농업을 위해 숲을 없애기 시작했다. 역사학자들은 반투인의 이주에 대한 여러 가지 이론을 내놓았는데, 후투족과 투치족의 구별은 민족적이라기보다는 주로 계급적인 것으로, 투치족은 가축을 치는 유목 계급을, 후투족은 농사를 짓는 농경 계급을 형성했다고 본다.

1700

[르완다 지역 내 다수 왕국 형성]

르완다 지역에 여러 씨족이 함께 생활하며 약 8개의 왕국을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함께 여러 개의 씨족을 형성했으며, 이후 1700년경까지 약 8개의 왕국을 형성했다.

1750

[르완다 왕국 성장과 투치족 지배 강화]

투치족 은이기냐 씨족이 다스리던 르완다 왕국이 점차 강해지기 시작하여 정복과 흡수를 통해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그중 투치족의 은이기냐 씨족이 다스렸던 르완다 왕국이 18세기 중반부터 점차 강해지기 시작하여 정복과 흡수를 통해 세력을 확장해 나갔고, 키겔리 르와부기리 왕 때 전성기를 맞았다. 르와부기리는 왕국을 서쪽과 북쪽으로 확장하고 행정 개혁을 실시했다. 행정 개혁에는 우부하케와 우부레트와라고 불리는 조치들도 포함되었는데, 우부하케는 투치족 사람들이 가축을 제공하면 그 대가로 후투족 사람이나 투치족 사람으로부터 경제적 혹은 군사적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한 것이었고, 우부레트와는 후투족 사람들이 투치족 사람을 위해 일을 하도록 강제하는 부역 제도였다. 르와부기리의 이러한 개혁은 후투족과 투치족 사이의 사회경제적인 분열을 심화시켰다.

1884

[베를린 회의로 르완다 독일 식민지화]

베를린 회의를 통해 르완다 영토가 독일에 할당되며, 독일은 르완다 군주정을 통한 통치 정책을 시작했습니다.

1884년의 베를린 회의에 의해 르완다의 영토는 독일에 할당되었으며, 르완다 군주정에 의한 통치 정책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시스템을 통해서 유럽 국가들은 작은 규모의 군대를 통해서 식민지를 통제할 수 있었다.

1916

[제1차 세계 대전 중 르완다의 벨기에 지배]

제1차 세계 대전 동안 르완다와 부룬디는 벨기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이후 위임통치령으로 정식 편입되었습니다.

르완다와 부룬디는 제1차 세계 대전 도중에 벨기에의 손에 들어갔으며, 1919년 위임통치령에 의해 정식으로 벨기에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1919

[르완다, 벨기에 위임통치령 편입]

르완다는 위임통치령에 의해 정식으로 벨기에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르완다와 부룬디는 제1차 세계 대전 도중에 벨기에의 손에 들어갔으며, 1919년 위임통치령에 의해 정식으로 벨기에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다.

1926

[벨기에, 르완다 직접 통치 시작 및 투치족 우대 강화]

벨기에는 르완다 군주정을 통한 간접 통치에서 벗어나 더 직접적인 식민 통치 정책을 도입하고, 족장을 투치족에 집중시켜 투치족의 우위를 강화했습니다.

벨기에는 처음에는 독일과 같이 르완다의 군주정을 통한 통치 정책을 폈으나, 1926년에는 벨기에령 콩고에서 사용한 시스템과 비슷한 더 직접적인 식민통치 정책을 도입했다. 그들은 족장의 수를 줄이고 족장을 투치족에게 집중시킴으로써 족장 시스템을 단순화시켰고, 우부레트와의 규모와 범위를 확대했다. 또한 투치족 족장들에 의한 토지 개혁 과정을 감독했는데, 이 개혁 과정에서 전통적으로 후투족이 관리하던 목축지가 최소한의 보상만 이루어진 채 몰수되었다.

1934

[르완다 인구 160만 명 기록]

르완다의 인구가 160만 명을 기록하며, 이후 1989년까지 급격한 인구 증가로 토지 소유 경쟁이 심화되는 배경이 됩니다.

르완다의 인구는 1934년 160만 명에서 1989년 710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에 따라 토지 소유에 경쟁이 생기게 되었다. 제라르 프루니에 같은 역사학자들은 1994년의 집단학살은 어느 정도 높은 인구 밀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긴다.

1935

[벨기에, 르완다 근대화 프로젝트 착수]

벨기에는 교육, 보건, 공공 사업 등 대규모 프로젝트를 시작하여 국가를 근대화했지만, 투치족의 우위는 유지되었고 후투족은 강제 노동에 시달렸습니다.

1930년대에 벨기에인들은 대규모의 프로젝트를 교육, 보건, 공공 사업, 농업 감독의 영역에서 시작했다. 이를 통해서 국가는 더 근대화되었지만 투치족의 우위는 계속되었으며, 후투족은 많은 권리를 박탈당하고 큰 규모의 강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1935년에 벨기에는 각 사람을 투치족, 후투족, 트와족, 귀화한 외국인으로 식별하는 식별 카드를 도입했다. 이전에는 부유한 후투족이 명예 투치족이 될 수 있었으나, 이러한 식별 카드의 도입으로 인해 더 이상의 계급 이동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벨기에, 민족 식별 카드 도입으로 계급 이동 봉쇄]

벨기에는 각 사람을 투치족, 후투족, 트와족 등으로 식별하는 카드를 도입하여, 이전에는 가능했던 후투족의 '명예 투치족'으로의 계급 이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1935년에 벨기에는 각 사람을 투치족, 후투족, 트와족, 귀화한 외국인으로 식별하는 식별 카드를 도입했다. 이전에는 부유한 후투족이 명예 투치족이 될 수 있었으나, 이러한 식별 카드의 도입으로 인해 더 이상의 계급 이동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1947

[후투족 해방 운동의 성장 시작]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사회 개혁에 대한 불만과 가톨릭 교회의 후투족 동정심에 힘입어 후투족 해방 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르완다에서는 두 세계 대전 동안 일어난 사회 개혁에 대한 분노와 가톨릭 교회 내에서의 후투족에 대한 동정심에 영향을 받아 후투족 해방 운동이 성장하기 시작했다. 가톨릭 선교사들은 투치족 엘리트보다는 후투족 하층민의 힘이 되어야 할 책임을 느끼고, 상당한 수의 후투족 성직자와 교육받은 엘리트들을 배출하여 기존의 정치 질서에 대한 대항 세력을 형성했다.

1957

[바후투 선언 발표, 투치족과 후투족의 인종 구별 주장]

후투족 학자 그룹이 '바후투 선언'을 작성, 투치족과 후투족을 별개의 인종으로 규정하며 후투족으로의 권력 이양을 주장했습니다.

1957년에 한 후투족 학자들의 그룹은 '바후투 선언'을 작성했는데, 이 문서는 처음으로 투치족과 후투족을 별개의 인종으로 명시했으며, 그들이 '통계적 법률'이라고 명명한 것을 기초로 하여 투치족에게서 후투족에게로 권력을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59

[후투족 부족장 피습, 르완다 혁명의 불씨]

후투족 부족장 도미니크 음보뉴무트와가 친투치 정당 지지자들에게 공격당하자, 후투족 운동가들이 투치족을 공격하며 르완다 혁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벨기에는 후투족을 지지했습니다.

1959년 11월 1일, 후투족의 부족장이었던 도미니크 음보뉴무트와가 키갈리에서 친(親)투치 정당의 지지자들에 의해 공격을 당했다. 음보뉴무트와는 살아남았지만, 그가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후투족 운동가들은 지도층과 일반 시민들을 불문하고 투치족을 죽임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이로써 르완다 혁명이 시작되게 되었다. 투치족 또한 나름의 공격을 시작함으로써 후투족의 공격에 대응했으나, 이때 투치족의 지배를 전복하고 싶었던 벨기에는 후투족을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었다.

1961

[벨기에의 후투족 지원 강화, 권력 재편]

벨기에는 투치족이 차지했던 족장 자리 대부분에 후투족을 임명하고 코뮌 선거에서 후투족의 압도적인 승리를 이끌며 권력 구도를 전환했습니다.

1960년대 초반에 벨기에는 투치족이 차지했던 족장 자리 대부분에 후투족을 임명했으며, 중간년도 코뮌 선거를 치러 압도적인 후투족의 승리를 가져왔다.

1962

[르완다 독립과 후투족 공화정 출범]

르완다가 벨기에로부터 독립하고, 왕이 폐위되며 후투족 주도의 공화정이 설립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투치족이 주변국으로 망명했습니다.

왕은 폐위되었고, 후투족 주도의 공화정이 설립되었으며, 1962년 르완다는 독립을 맞았다.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투치족은 후투족의 숙청을 피해 르완다를 떠나서 부룬디, 우간다, 탄자니아, 자이르 등의 주변 국가들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964

[투치족 대규모 망명 및 무장 단체 '인벤지' 결성]

30만 명 이상의 투치족이 르완다를 떠나 망명자가 되었고, 이들은 '인벤지'라는 무장 단체를 형성하여 르완다를 공격했지만 실패하고 오히려 보복을 낳았습니다.

혁명이 진행됨에 따라 투치족은 후투족의 숙청을 피해 르완다를 떠나서 부룬디, 우간다, 탄자니아, 자이르 등의 주변 국가들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 망명자들은 정착지에서 난민으로 분류되어 르완다로 돌아갈 것을 요구받았다. 그들은 바퀴벌레라는 뜻의 '인벤지'(invenzi)라는 무장 단체를 형성하여 르완다에 공격을 가했으나, 공격은 대체로 실패로 돌아갔고 오히려 투치족과 망명자들에 대한 보복을 낳았다. 1964년까지, 30만 명 이상의 투치족이 도망하였으며 이후 30년 동안 망명자의 신분으로 살아가야 했다.

1973

[하브자리마나의 쿠데타로 정권 장악]

쥐베날 하브자리마나가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획득하며 투치족에 대한 무분별한 폭력은 감소했지만, 르완다 내 투치족 차별은 지속되었습니다.

1973년 쥐베날 하브자리마나가 정권을 획득한 쿠데타 이후 투치족에 대한 무분별한 폭력은 감소하였지만, 르완다 내에서 투치족에 대한 차별은 계속되었다.

1985

[우간다 내 르완다 난민의 군사 활동 시작]

1980년대, 우간다에 있던 르완다 난민들은 프레드 르위게마의 지도 아래 요웨리 무세베니의 민족 저항군과 함께 우간다 내전에 참전했습니다.

1980년대에 우간다에 있는 르완다 난민들은 프레드 르위게마의 지도 하에, 요웨리 무세베니가 밀턴 오보테 정권을 전복시킨 우간다 내전에서 반란군인 민족 저항군과 싸웠다. 이 병사들은 무세베니의 대통령 취임 후에도 우간다 국군에 남았으나, 동시에 군대의 간부들과의 은밀한 네트워크를 통해 르완다 침공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1989

[르완다 인구 710만 명 기록, 토지 경쟁 심화]

르완다 인구가 710만 명으로 급증하여 인구 밀도가 아프리카 최고 수준에 달했으며, 이는 토지 소유 경쟁을 심화시키고 1994년 집단학살의 한 배경으로 지목됩니다.

르완다의 인구는 1934년 160만 명에서 1989년 710만 명으로 증가하였으며, 이에 따라 토지 소유에 경쟁이 생기게 되었다. 제라르 프루니에 같은 역사학자들은 1994년의 집단학살은 어느 정도 높은 인구 밀도의 영향을 받았다고 여긴다.

1990

[르완다 애국전선, 르완다 침공 개시로 내전 발발]

프레드 르위게마는 4천 명이 넘는 우간다 반군을 이끌고 '르완다 애국전선'을 기치로 르완다를 침공하며 르완다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1990년 10월에 르위게마는 4천 명이 넘는 우간다 반군을 이끌고 르완다 애국전선이라는 이름을 기치로 르완다로 60km를 진군했다. 그러나 르위게마는 공격을 감행한 지 3일째에 전사했으며, 프랑스와 자이르가 르완다군을 지원하여 군대를 파견함으로써 반란군은 격퇴되었다. 르위게마를 보좌하던 폴 카가메는 애국전선의 지휘를 맡아, 우간다를 거쳐 르완다 북부의 바위 지형인 비룽가 산맥으로 작전상 후퇴를 했다. 그곳에서 그는 군대를 정비하고, 투치족 디아스포라로부터 자금 조달과 신병 모집을 진행했다.

1991

[폴 카가메, 게릴라전 재개 및 북부 지역 점령]

폴 카가메가 애국전선을 이끌고 루헹게리 북부 마을을 급습하며 전쟁을 재개했고, 이후 치고 빠지는 게릴라전을 통해 국경지대 일부를 점령했습니다.

카가메는 1991년 1월, 루헹게리 북부의 마을을 급습함으로써 전쟁을 재개했다. 애국전선은 마을을 점령하고, 하루 뒤에 숲으로 후퇴했다. 그 후로 애국전선은 치고 빠지는 식의 게릴라전을 계속하여 국경지의 몇몇 지역을 손에 넣었으나, 르완다군을 상대로 의미 있는 승리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1992

[키갈리 연정 출범과 애국전선의 평화 협상 시작]

키갈리에서 여러 정당의 연정이 만들어지자, 애국전선은 휴전을 선언하고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르완다 정부와 평화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1992년 6월 키갈리에서 여러 정당의 연정이 만들어지면서, 애국전선은 휴전을 선언하고 탄자니아 아루샤에서 르완다 정부와 협상을 시작했다.

1993

[극단주의 후투족의 투치족 폭력 사태 유발]

극단주의 후투족이 투치족에 대한 대규모 폭력 사태를 일으키자, 애국전선은 평화 협상을 중단하고 르완다 북부의 넓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1993년 초에 어떤 극단주의 후투족 사람들이 투치족에 대한 대규모의 폭력 사태를 일으켰다. 애국전선은 이에 평화 협상을 중단하고 공격에 나서 르완다 북부의 넓은 지역을 점령했다.

[아루샤 합의 최종 서명 및 평화유지군 파견]

평화 협상이 재개되어 아루샤 합의가 최종 서명되었고, 애국전선은 광역 과도 정부와 국군에서 직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엔 르완다 지원단 평화유지군이 르완다에 파견되었습니다.

그 후 평화 협상은 아루샤에서 재개되어 아루샤 합의가 도출되었고, 1993년 8월에 최종적으로 서명되었다. 이 합의에 따라 애국전선은 광역 과도 정부와 국군에서 직을 갖게 되었다. 평화유지군인 유엔 르완다 지원단이 르완다에 파견되었으며, 애국전선은 키갈리에 있는 국회 건물에 광역 과도 정부 설립 과정에 사용할 본부를 가지게 되었다.

1994

[르완다 대통령 탑승 비행기 격추, 집단학살의 서막]

르완다 대통령 하브자리마나와 부룬디 대통령이 탑승한 비행기가 키갈리에서 격추되어 전원 사망하며, 이는 바로 다음 날 시작될 르완다 집단학살의 직접적인 계기가 됩니다.

1994년 4월 6일, 르완다 대통령이었던 하브자리마나와 부룬디 대통령이었던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타고 있던 비행기가 키갈리에서 하강하던 중 격추되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집단 학살은 바로 그 다음날 시작되었다.

[르완다 집단학살 발발, 후투족의 투치족 대학살]

후투족 주도 정부에 의해 계획된 집단학살이 시작되어, 군인, 경찰, 민병대 및 후투족 민간인들이 투치족과 온건파 후투족 지도자들을 체계적으로 살해했습니다. 최소 50만에서 100만 명의 사람들이 살해당했습니다.

집단 학살은 바로 그 다음날 시작되었다. 군인과 경찰, 민병대는 재빠르게 투치족 핵심 인사와 온건파 후투족 지도자들을 처형했으며, 검문소와 바리케이드를 세우고 르완다 민족 식별 카드를 사용해 체계적으로 투치족을 살해했다. 이 세력은 후투족 민간인들에게도 압력을 가하여 칼과 둔기 등의 무기로 무장하도록 했으며, 투치족 이웃들의 재산을 파괴하거나 빼앗고, 그들을 강간하고 폭행하도록 했다. 4월 6일부터 7월 중순까지 약 100여일간 최소 50만명이 살해당했으며 대부분의 인권 단체들은 약 80만명에서 100만명이 살해당했다고 주장한다. 이 수치는 당시 투치족의 약 7할, 전체 르완다 인구의 약 2할에 해당한다. 현재 르완다 정부는 이 학살에서 100일 동안 1,174,000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이것은 1일당 1만명, 1시간당 400명, 1분당 7명이 살해당한 것과 같다. 당시 학살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로마 가톨릭교회 사제들과 수녀들에 의해 희생된 사람이 많았다고 전했고, 르완다 정부는 희생자 대부분이 도피했던 가톨릭 교회에서 숨졌다고 밝혔다.

[르완다 애국전선, 키갈리 점령으로 집단학살 종결]

평화 협정이 깨지자 르완다 애국전선은 군사 활동을 재개하여 신속하게 르완다 북부를 통제하고 7월 중순경 수도 키갈리를 장악함으로써 집단학살을 끝냈습니다.

애국전선은 평화 협정이 깨지자 군사 활동을 재개하여 신속하게 르완다 북부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으며, 7월 중순경에는 수도 키갈리를 손에 넣음으로써 집단학살을 끝냈다.

[르완다 집단학살 후유증: 사회경제적 혼란과 난민 문제]

집단학살로 인한 강간은 HIV 감염 급증, 수많은 고아와 과부 발생, 국가 경제 마비로 이어졌습니다. 애국전선 주도 정부 출범 후 많은 후투족이 자이르로 도망갔고, 이로 인해 콩고 민주 공화국과의 무장 충돌이 계속되었습니다.

르완다 집단 살해는 르완다와 주변 국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집단학살이 일어나는 동안 자행되었던 수많은 강간은 HIV 감염의 급증으로 이어졌으며, 감염된 여성이 강간으로 인해 HIV에 감염된 아기를 출산하기도 했다. 수많은 고아와 과부가 발생했다. 기간시설의 파괴와 심각한 인구의 감소는 국가 경제를 마비시켰고, 새로 탄생한 정부가 경제 성장과 안정을 이룰 수 있을지는 미지수이다. 르완다 애국전선이 군사적인 승리를 거두고 애국전선 주도의 정부가 출범함에 따라, 많은 후투족은 주변국으로 도망하였다. 특히 자이르(현 콩고 민주 공화국) 동부에서는 르완다 국경 주변 난민 수용소에서 후투족의 'genocidaires'가 재결집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집단학살을 방지하기 위해서, 애국전선 주도의 정부는 군대를 파견해 자이르를 급습했다. 르완다 정부와 콩고 민주 공화국 내의 적대 세력 간의 무장 충돌은 M23 반란 등 고마 지역에서 각 세력의 위임을 받은 사병 조직 간의 충돌을 통해 계속되었다. 여전히 많은 수의 르완다 후투족과 투치족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고 있다.

1998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르완다 학살 관련 침묵과 논란]

바티칸은 학살 가담자들을 유럽으로 도피시키고 '민족 말살' 대신 '골육상쟁'이라 표현하며 침묵을 지켰습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뒤늦게 르완다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지만 사과 내용은 없었으며, 후투족 학살자들의 사형 연기를 요청하여 비판을 받았습니다.

르완다에서 학살이 일어난 이후 교황청은 촘촘한 조직망을 이용해 학살 가담자들을 유럽으로 도피시켰다. 학살의 전범들은 바티칸의 국제자선단체기구인 카리타스 인터내셔널의 도움을 받아 유럽행 비행기표를 제공받아 유럽으로 탈출하였고, 학살에 참가한 신부들은 벨기에나 프랑스 교구로 파견하였고 주교들은 이러한 사실을 부인하였다. 또한 르완다 학살을 '민족 말살'이란 표현 대신에 '골육상쟁'이란 표현으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3개월이란 짧은 시간에 최대 300만명의 사람들이 죽어가는 동안 바티칸에서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프랑스의 미테랑 대통령의 지시로 시행된 학살 사건 진상조사가 발표된 뒤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8년 4월 23일 침묵을 깨고 르완다 공화국의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그 편지에는 어떠한 유감이나 사과의 내용이 담겨있지 않았고, 다만 후투족 학살자들의 사형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2017

[프란치스코 교황, 르완다 학살에 대한 가톨릭 교회 책임 공식 사죄]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에서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을 만나, 르완다 대학살 당시 가톨릭 교회와 구성원들이 저지른 죄와 잘못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했습니다.

그러다 2017년 3월 20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바티칸 사도궁에서 폴 카가메 르완다 대통령을 만나 르완다에서 벌어진 대학살 때 가톨릭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이 저지른 죄와 잘못에 대해 사죄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르완다 집단학살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