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 게릭

num_of_likes 96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no image
야구 선수, 스포츠인 + 카테고리

루 게릭은 '철마'라는 별명으로 불린 메이저리그 뉴욕 양키스의 전설적인 1루수였습니다. 베이브 루스와 함께 '살인 타선'을 이끌며 팀의 황금기를 주도했고, 2,130경기 연속 출장이라는 불멸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은퇴 직전 진단받은 근위축성 측삭경화증(루게릭병)으로 인해 요절했으나,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고별 연설로 용기와 희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03

[뉴욕에서 태어난 '철마']

독일 이민자 부부의 아들로 뉴욕에서 태어났다. 출생 당시 몸무게가 6.4kg에 달했다.

헨리 루이스 게릭이라는 이름으로 뉴욕 시 맨해튼의 요크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건강 문제로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어 어머니가 생계를 책임졌으며, 어머니는 어린 루 게릭이 야구 선수로 성장하도록 도왔다.

1920

[고교 야구 경기, 엄청난 만루 홈런으로 주목]

뉴욕 상업 학교 소속으로 시카고 컵스 파크에서 열린 경기에서 메이저 리그 구장 밖으로 날아가는 만루 홈런을 쳤다.

1만 명 이상이 운집한 가운데 뉴욕 상업 학교 팀이 시카고의 레인 기술 학교와 경기를 벌였다. 8대 6으로 뉴욕 팀이 이기던 9회초 공격에서 18세 고등학생 루 게릭은 메이저리그 구장 밖으로 날아가는 만루 홈런을 쳤고, 이는 그가 처음으로 전국적인 관심을 받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21

[고교 졸업과 컬럼비아 대학교와의 인연]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고, 어머니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하며 대학 진학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맨해튼 워싱턴 하이츠에 있는 PS 132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해 1921년에 졸업했다. 게릭의 어머니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가족에게 대학 진학에 대한 생각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3

[컬럼비아 대학 투수, 스카우트의 눈길을 사로잡다]

양키 스타디움 개장일에 컬럼비아 대학 야구팀 소속으로 윌리엄스 팀을 상대로 17개의 삼진을 기록하며 양키스 스카우트 폴 크리첼의 눈에 띄었다.

양키 스타디움이 처음 문을 여는 날 베이브 루스가 홈런으로 개장식을 거행했고, 같은 날 컬럼비아 대학 야구팀의 투수 루 게릭은 윌리엄스 팀을 상대로 컬럼비아 야구 팀 역사상 최고 기록인 17개의 삼진을 기록했다. 비록 경기는 패배했지만, 양키스 스카우트 폴 크리첼은 게릭의 투수 능력보다 좌타석에서 보여주는 엄청난 타격 능력에 주목했다. 그는 4월 29일 컬럼비아 사우스 필드에서 450피트(약 137m)짜리 홈런을 치는 등 동부 대학들 간의 경기에서 엄청난 비거리의 홈런을 날렸다.

[루 게릭, 뉴욕 양키스 입단과 메이저리그 첫 발]

뉴욕 양키스와 계약금 1,500달러, 잔여 시즌 연봉 2,000달러에 입단 계약을 체결하고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야구 선수로 활동하던 중 뉴욕 양키스의 스카우트였던 폴 크리챌의 눈에 들어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게 되었다. 1923년 시즌 중반에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뉴욕 양키스에 입성하여 그의 첫 메이저 리그 야구 경기는 1923년 6월 15일 경기였고 대타로 출전했다.

1925

['철마'의 전설이 시작되다: 연속 출장 대기록의 서막]

유격수 폴 웨닝거 대신 대타로 경기에 나가면서 전설적인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시작했다.

연속경기출장의 기록은 1925년 6월 1일, 루 게릭이 유격수 폴 ‘피 위’ 웨닝거를 대신해 대타로 경기에 나가면서 시작됐다.

[윌리 핍의 빈자리를 채우며 주전으로 도약]

당시 주전 1루수 윌리 핍을 대신해 선발 출장하여 2안타를 치며 주전 1루수 자리를 꿰찼다.

6월 2일, 당시 양키스 감독이었던 밀러 허긴스는 주전 1루수 윌리 핍 대신에 게릭을 선발 출장 명단에 넣었다. 핍은 슬럼프와 두통으로 출장 명단에서 빼줄 것을 요구했고, 허긴스 감독은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게릭을 기용했다. 루 게릭은 이날 2안타를 쳐내면서 주전 1루수 자리를 따냈다.

1927

[압도적인 타격과 MVP, '살인 타선'의 핵심]

타율 0.373, 47홈런, 175타점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MVP를 수상했고, 베이브 루스와 함께 '살인 타선'을 이루며 월드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루 게릭은 타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즌 중 하나를 보내며 218안타, 타율 0.373, 52개의 2루타, 18개의 3루타, 47개의 홈런, 175타점을 기록했고, 장타율은 0.765에 이르렀다. 이러한 활약으로 양키스는 110승 44패를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피츠버그 파이리츠와의 월드 시리즈에서 4승 무패로 우승했다. 게릭은 아메리칸 리그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다.

1931

[메이저리그 역사를 쓴 단일 시즌 184 타점]

단일 시즌 184타점을 기록하며 아메리칸 리그 역대 1위, 메이저리그 전체 역대 2위 기록을 세웠다.

1931년 작성한 184 타점은 2008년 시즌이 종료된 지금까지도 아메리칸 리그 역대 타점 1위의 기록이며, 리그 전체를 통해서도 핵 윌슨이 1930년에 기록한 191 타점에 이은 역대 2위의 기록이다.

1932

[20세기 야구사에 길이 남을 한 경기 4홈런 대기록]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의 경기에서 20세기 들어 처음으로 한 경기 4개의 홈런을 친 선수가 되었다.

쉬비 파크에서 벌어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의 경기에서 5번째 홈런이 될 뻔한 타구가 외야수에게 잡히며 아쉽게도 4개의 홈런에 머물렀다. 하지만 이 대기록은 같은 날 존 맥그로 감독의 은퇴 선언에 묻혀 헤드라인을 장식하지 못했다.

1933

[루 게릭, 엘리너 트윗첼과 웨딩마치]

시카고 공원의 행정관 프랭크 트윗첼의 딸인 엘리너 트윗첼과 결혼했다.

1933년 9월, 루 게릭은 시카고 공원의 행정관 프랭크 트윗첼의 딸인 엘리너 트윗첼과 결혼을 했다.

1934

[불멸의 타격 3관왕에 오르다]

타율 0.363, 홈런 49개, 165타점을 기록하며 타격 3관왕을 달성했다. 이는 베이브 루스보다 홈런을 더 많이 친 유일한 시즌이기도 하다.

1934년 시즌으로 루스가 125경기에 출장해 22개의 홈런을 기록한 반면 루 게릭은 49개의 홈런을 기록하여 베이브 루스보다 홈런을 더 많이 친 유일한 시즌이었다.

1938

[알 수 없는 이유, 기량 하락의 전조]

풀타임 14번째 시즌이었던 1938년 시즌 중반부터 야구 선수로서의 성과가 줄어들기 시작하며 타율 2할대로 떨어졌다.

1938년 시즌 중반이 되자 루 게릭이 야구 선수로서 보여주던 성과들이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시즌이 끝나고 “시즌 중반에 이미 지쳐버렸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다신 그럴 수는 없지.” 라는 말을 남겼다. 타율이 13년 만에 2할대(0.295)로 떨어지긴 했어도 170개의 안타를 쳐서 114타점, 0.523의 장타율을 기록했지만, 이전 시즌인 1937년의 타율 0.351, 장타율 0.643과 비교해 보면 그 하락폭은 제법 큰 것이었다.

1939

[스프링캠프, 충격적인 기량 저하]

플로리다 스프링캠프에서 타격과 주루 플레이에서 급격한 힘과 스피드 저하를 보였고, 심지어 경기장에서 쓰러지기까지 했다.

플로리다주 세인트 피터스브루에서 1939년의 뉴욕 양키스 스프링캠프가 시작되었을 때, 이전까지 보여주었던 타격에서의 무시무시했던 힘은 현격히 줄어든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주루 플레이에도 영향이 미쳐서 스프링캠프가 열린 세인트 피터스브루의 알 랭 필드에서 쓰러지기까지도 했다. 스프링캠프가 끝나갈 무렵까지도 게릭은 홈런은 고사하고 안타 하나 기록할 수 없었다.

[36세, 최연소 나이로 명예의 전당에 오르다]

은퇴 유예 기간 없이 전미야구기자협회의 특별 투표로 메이저리그 역대 최연소인 36세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영광을 누렸다.

1939년 시즌이 종료된 12월, 명예의 전당 헌액자를 결정하는 전미야구기자협회는 게릭을 유예기간 없이 곧바로 명예의 전당에 올렸다. 일반적으로 선수 은퇴 후 몇 년의 유예기간을 가진 뒤 헌액이 되는 기존과 다른 특별한 경우였다.

[2,130경기 연속 출장의 마지막, 은퇴를 결심하다]

워싱턴 세너터스와의 2,130번째 연속 출장 경기에 나섰으나 4타수 무안타, 평범한 수비 실수 등 급격히 쇠퇴한 기량을 보이며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의 타격 기록은 타율 0.143과 1 타점으로 역대 최악이었다. 팬들과 언론은 루 게릭의 갑작스러운 능력 쇠퇴의 원인을 파악하고자 했다. 투수였던 조니 머피는 송구를 받기 위해 1루 베이스로 몸을 거의 끌다시피 해서 들어가는 게릭을 기다려야 할 정도였다. 게릭은 평범한 플레이에 격려를 보내는 감독과 동료들의 모습을 보고 더 이상의 연속 출장은 무의미하다고 느껴 은퇴를 결심했다.

['철마' 루 게릭, 대기록에 마침표를 찍다]

디트로이트 원정 경기 전 조 매카시 감독에게 자신을 벤치에 앉히라고 말하며 14년간 이어온 2,13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마감했다.

경기 휴식일이었던 5월 1일이 지나 다음날인 5월 2일, 타이거스와의 디트로이트 원정 경기가 시작하기 전 루 게릭은 매카시 감독에게 다가가서 “감독님, 오늘은 벤치에 있을게요.”라고 말했다. 매카시 감독은 마지못해 허락했고, 게릭이 빠진 출장 명단은 심판들을 놀라게 했다. 벤치에 앉아 눈물을 보이고 있던 루 게릭에게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팬들은 기립박수를 보내주었다.

[36번째 생일, 루게릭병 진단이라는 잔혹한 선물]

메이요 클리닉에서 정밀 검사를 받은 후, 36번째 생일에 근위축성 측삭경화증(ALS) 진단을 받았다. 병의 예후는 급격한 전신 마비와 3년 이내의 시한부 삶이었다.

루 게릭의 몸 상태가 점점 더 나빠지자, 아내 엘리너는 메이요 클리닉에 전화를 걸었고, 찰스 윌리엄 메이요 박사는 게릭을 병원으로 데려오라고 말했다. 1939년 6월 13일에 병원에 도착하여 6일간의 정밀 검사를 받은 후, 6월 19일에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ALS)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는데, 공교롭게도 그 날은 루 게릭의 서른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병의 예후는 급격한 전신 마비의 증상이 늘어날 것이고 음식을 삼키거나 대화하는데 지장이 심하며 향후 3년을 못 넘길 것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양키 스타디움, 메이저리그 최초 영구 결번과 감동적인 고별 연설]

양키 스타디움에서 은퇴식이 거행되었고,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유명한 연설을 남겼다. 그의 등번호 4번은 메이저리그 최초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뉴욕 양키스는 루 게릭의 은퇴를 공식 발표하고, 7월 4일 양키 스타디움에서 은퇴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워싱턴 세네터스와의 경기가 있는 미국 독립 기념일인 그 날 더블헤더 사이에 경기장 안에서 은퇴식이 거행됐다. 뉴욕 타임스는 "61,808명의 관중들이 한 선수에게 작별을 고하는 이제껏 가장 화려하고 가슴 찡한 행사"였다고 보도했다. 양키스 구단은 루 게릭의 유니폼 등번호인 4번을 영구 결번 처리했는데, 이것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최초의 영구 결번이었다. 베이브 루스의 연설이 끝난 뒤 루 게릭은 청중들에게 "저는 제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유명한 연설을 하였다.

1940

[야구장을 떠나 시민을 위한 봉사, 가석방 위원회 감독관 취임]

뉴욕 시장 라과디아로부터 10년 임기의 뉴욕 시 가석방 위원회 감독관 직책을 임명 받아 취임했다.

1939년 10월 뉴욕 시장 라과디아로부터 10년 임기의 뉴욕 시 가석방 위원회 감독관 직책을 임명 받아 1940년 1월 2일 직책을 수여받았다. 가석방 관련 업무가 일반 시민들에게 봉사할 좋은 기회이므로 직무를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연봉 5,700 달러보다 훨씬 수입이 큰 유료강연이나 행사의 초대손님 제안도 거절하고 조용히 의무를 이행해 나갔다.

1941

[병마로 인한 직책 사임]

몸 상태가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가석방 위원회 감독관 자리에서 조용히 물러났다.

죽음을 앞둔 한달 전쯤, 게릭은 이제 더 이상 몸이 직무를 수행해 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에 미치자 조용히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는 감독관 업무를 행하면서 종종 아내인 엘리너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는데, 공문에 서명을 할 때면 그녀는 게릭의 손을 잡아주면서 도와줬다.

[37세, '철마' 루 게릭 잠들다]

뉴욕 브롱크스 자택에서 근위축성 측삭경화증(루게릭병)으로 인해 3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1941년 6월 2일 밤 10시 10분, 윌리 핍 대신 1루수로 출장한 그 날 이후 3년이 지나 루 게릭은 뉴욕 브롱크스 필드스턴지구 델라필드가 5204번지에 위치한 그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망 소식에 베이브 루스와 그의 아내가 게릭의 아내 엘리너를 위로하러 갔으며, 뉴욕 시장 라과디아는 모든 뉴욕 관청에 조기를 게양할 것을 명했다. 전국의 모든 메이저 리그 야구 구장에서도 조기가 게양되었다.

[양키 스타디움, '철마' 루 게릭 영원히 기리다]

뉴욕 양키스는 양키 스타디움 외야 중앙에 루 게릭을 기리는 헌정비를 세워 그의 위대한 업적과 2,130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영원히 기억하게 했다.

뉴욕 양키스는 1941년 7월 6일 양키 스타디움 외야 중앙쪽에 루 게릭을 기리는 헌정비를 세웠는데, "한 남자가 있었다. 예의 바른 신사였다. 누구나 놀랄 만한 2,130 경기 연속 출장 기록을 세운 이 위대한 야구 선수는 영원히 기록되리."라고 칭송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밀러 허긴스의 기념비와 나란히 하게 되었고, 후에 베이브 루스의 기념비도 그 옆에 세워졌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루 게릭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