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절린드 프랭클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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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물리학자, 결정학자, 여성 과학자 + 카테고리

- 영국의 생물물리학자이자 X선 결정학의 대가 - DNA 바이러스 석탄 흑연 등 다양한 물질의 구조 규명에 결정적으로 기여 - 특히 DNA 이중 나선 구조 발견에 핵심적인 사진 51 등 중요한 데이터를 제공함 - 그러나 그녀의 놀라운 기여는 종종 무시되거나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으며 사후 노벨상 수상 대상에서도 제외됨 - 과학적 업적뿐만 아니라 연구 과정에서 겪었던 논란과 성차별 의혹으로도 회자되는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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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20

[빛나는 시작, 부유한 유대인 가정의 맏딸로 태어나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런던 노팅 힐의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유대인 가정에서 둘째이자 맏딸로 태어났습니다.어린 시절부터 과학, 라틴어, 스포츠 등 다방면에서 탁월한 소질을 보였으며, 그녀의 가족은 사회 개혁 활동에도 적극적이었습니다.이러한 환경 속에서 프랭클린은 과학자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그녀의 아버지 엘리스 아서 프랭클린은 런던 머천트 뱅크 직원이었고, 어머니는 뮤리엘 프랜시스 월리였습니다. 아버지의 삼촌 허버트 사무엘은 영국 내각 최초의 유대인 내무장관을 지냈으며, 고모 헬렌 캐롤라인 프랭클린은 여성 참정권 운동과 노동조합 조직에 활동적이었습니다. 프랭클린은 세인트 폴 여학교와 노스 런던 칼리지잇 스쿨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가족은 나치를 피해 유럽에서 도망 온 유대인 이민자들의 정착을 돕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1938

[케임브리지 대학교 입학, 결정학의 씨앗을 뿌리다]

프랭클린은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교 뉴넘 칼리지에 진학하여 화학을 전공했습니다.이 시기 그녀는 '결정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윌리엄 브래그스를 만나 결정학에 깊은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이 만남은 훗날 그녀의 위대한 업적의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1941

[우등 졸업과 새로운 도전, 전쟁 연구에 뛰어들다]

케임브리지 대학교를 우등으로 졸업한 프랭클린은 학위 연구 대신 전쟁에 기여하고자 런던 외곽의 영국석탄이용연구소로 자리를 옮겼습니다.이곳에서 그녀는 숯과 석탄에 대한 창의적인 연구를 시작하며 자신만의 독자적인 연구 분야를 개척해 나갔습니다.

케임브리지는 1947년부터 여성에게 학사 및 석사 칭호를 소급 적용했고, 프랭클린은 이에 따라 학사 학위를 인정받았습니다. 영국석탄이용연구소에서 그녀는 '왜 어떤 종류의 석탄은 물이나 공기를 통과시키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을 탐구하며 풍부한 실험 도구와 함께 국제적 명성을 가져올 이론을 발달시키게 됩니다.

1945

[석탄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다: 비정질 물질 X선 결정학의 선구자]

영국석탄이용연구소에서 다공성 석탄의 물리화학적 성질을 연구한 프랭클린은 이 연구를 기반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그녀의 석탄 연구는 여러 학술 논문의 기반이 되었고, 비정질 물질의 구조를 밝히는 데 대한 그녀의 통찰력을 보여주는 세계 최초의 선구적인 업적 중 하나였습니다.

이 연구는 그녀의 박사 논문 'The physical chemistry of solid organic colloids with special reference to coal'의 기반이 되었고, 여러 학술 논문과 출판물의 표지 기사로도 다루어졌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DNA와 바이러스 연구에 필요한 X선 결정학 기술을 익히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됩니다.

1946

[X선 결정학의 대가, 파리에서 꽃피우다]

프랭클린은 프랑스 국립 과학 연구 센터의 지원으로 파리 국립 화학 연구소에 합류하여 결정학자 자크 메링을 만났습니다.메링에게 비정질 물질에 X선 결정학을 적용하는 실질적인 기술을 배우며 그녀의 전문성을 더욱 심화시켰습니다.이 시기 그녀는 석탄이 흑연으로 변할 때의 원자 배열 문제를 연구하며 여러 논문을 발표했고, 학계에서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메링은 기존의 수천 가지 결정에 X선 회절을 적용하는 연구와 달리, 비정질 물질에 X선 회절을 적용하는 선구적인 연구를 하고 있었습니다. 프랭클린은 이 새로운 도전을 받아들여 석탄의 물리적, 화학적 연구에 적용했고, 파리에서 다양한 학회에 참여하며 세계적인 인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1950

[킹스 칼리지 합류, DNA 연구의 서막]

킹스 칼리지 연구 펠로우십을 수락하며 합류하였습니다. 당초 단백질 및 지방 연구를 맡을 예정이었으나, 모리스 윌킨스가 가져온 핵산 샘플로 인해 연구 방향이 DNA 구조 규명으로 변경되었습니다.

1951

[DNA 연구 본격 돌입, 그리고 윌킨스와의 불편한 동거]

프랭클린은 킹스 칼리지에서 레이먼드 고즐링과 함께 새로운 X선 회절 장치를 조립하며 DNA 연구에 착수했습니다.이 과정에서 그녀는 물을 많이 머금은 B형 DNA와 짧고 건조한 A형 DNA라는 두 가지 형태의 DNA를 발견하며, 탁월한 X선 분석 기술과 시료 준비 능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킹스 칼리지에는 이미 모리스 윌킨스가 핵산에 대한 연구를 몇 년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윌킨스는 프랭클린의 전문성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팀에 합류하길 기대했지만, 프랭클린은 랜들의 지시로 자신과 고즐링만이 DNA 연구를 맡았다고 생각하여 둘 사이에 오해가 생겼고, 이는 심각한 불화로 이어졌습니다. 이 불화는 훗날 프랭클린의 기여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중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됩니다.

[DNA 핵심 정보 발표, 왓슨과의 운명적 만남]

킹스 칼리지에서 열린 DNA 세미나에서 프랭클린은 DNA 분자 바깥에 인산기가 위치하며 물이 이를 둘러싸고 있다는 중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이 자리에는 제임스 왓슨도 참석했는데, 왓슨은 이 정보를 무시하고 인산기가 안쪽에 있는 잘못된 DNA 모델을 만들었다가 프랭클린의 비판으로 폐기하게 됩니다.그녀의 발표는 DNA 구조 규명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습니다.

세미나 후 왓슨과 크릭은 인산이 안쪽에 있는 DNA 모델을 만들었으나, 프랭클린은 이 모델이 물을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진다며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이 일로 캐번디시에서는 DNA 연구를 잠시 중단하기로 합의했습니다. 프랭클린은 이 시기 이미 DNA가 나선 구조이며 인산이 바깥쪽에 있다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1952

[DNA 이중나선 규명에 결정적 '사진 51'을 찍다]

프랭클린은 B형 DNA의 가장 선명하고 중요한 X선 회절 사진인 '사진 51'을 세계 최초로 촬영했습니다.이 사진은 DNA가 나선 구조를 가진다는 결정적인 증거였지만, 그녀는 A형 DNA 연구에 집중하기 위해 이 사진의 공개를 잠시 미루는 결정을 내렸습니다.이 사진은 훗날 왓슨과 크릭의 DNA 모델 구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 사진은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선명도와 정보를 담고 있는 X선 회절 사진이었습니다. 프랭클린은 또한 자신의 연구 결과를 옥스퍼드의 결정학 전문가 도로시 호지킨에게 가져가 논의하는 등, 자신의 결과에 대한 확신을 얻기 위해 다각도로 노력했습니다.

1953

[새로운 시작, 버크벡 칼리지로의 이적 확정]

킹스 칼리지에서의 불화와 연구 환경에 지쳐 있던 프랭클린은 1953년 1월 버크벡 칼리지로 이적을 확정했습니다.그녀는 킹스 칼리지를 떠나기 전, DNA에 관한 중요 논문 두 편을 MRC(의학 연구 위원회)에 보고하며 자신의 연구 성과를 공식화했습니다.

이 시기 프랭클린과 고즐링은 패터슨 함수를 이용한 수많은 계산에 몰두하여 A형 DNA가 나선형이 아니라는 증거를 얻었습니다. 이적 소문이 퍼지자 폴링과 코리가 DNA 구조를 알아냈다는 소식이 들리기도 했으나, 프랭클린은 이미 모델 구축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고별 세미나, 그리고 결정적인 '사진 51'의 비자발적 유출]

프랭클린은 킹스 칼리지 고별 세미나에서 A형 DNA가 나선형이 아니라고 발표했습니다.이 발표 직후, 왓슨은 프랭클린의 실험실을 찾아가 그녀의 X선 해석 능력을 의심하며 논쟁을 벌였습니다.흥분한 프랭클린에게 왓슨이 도망치자, 모리스 윌킨스는 왓슨에게 프랭클린의 '사진 51'을 몰래 보여주었고, 왓슨은 이 사진을 보고 DNA가 나선 구조를 가진다는 확신을 얻게 됩니다.이는 DNA 구조 발견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됩니다.

윌킨스는 프랭클린이 떠난 뒤에도 DNA 연구가 계속될 것이라는 생각에 고즐링으로부터 받은 '사진 51'을 왓슨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왓슨은 이 사진을 통해 DNA의 나선 구조와 정확한 경사도, 간격까지 알아낼 수 있었고, 캐번디시 연구소의 책임자 브래그는 DNA 연구 금지를 바로 풀어주어 왓슨과 크릭은 곧바로 DNA 모델 구축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프랭클린의 기여가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논란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왓슨과 크릭, 프랭클린 데이터로 DNA 이중 나선 모델 완성]

제임스 왓슨과 프랜시스 크릭은 프랭클린의 MRC 보고서와 '사진 51'을 바탕으로 DNA 이중 나선 모델 구축을 시작했습니다.그녀의 보고서에는 두 나선이 반평행하다는 등 모델 구축에 필요한 모든 핵심 정보가 담겨 있었습니다.2월 말, 그들은 DNA의 상보적 결합을 발견하며 완벽한 DNA 구조를 설명해냈습니다.이 과정에서 프랭클린의 데이터가 결정적이었으나, 그녀는 자신의 연구가 이용된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왓슨은 프랭클린의 MRC 보고서를 입수하여 필요한 모든 정보를 얻었고, 크릭의 제안에 따라 인산을 바깥에 놓은 모델을 만들었습니다. 같은 주 프랭클린도 B형 DNA에 대한 계산을 진행하며 두 개의 사슬로 이루어져 있음을 받아들였지만, 염기 배치에 대한 설명에서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들의 DNA 구조 발견은 생물학 역사에 가장 중요한 발견 중 하나로 기록됩니다.

[DNA 구조 논문 발표, 프랭클린의 기여는 그림자에 가리다]

DNA 구조를 다룬 세 편의 논문이 세계적인 과학 저널 《네이쳐》에 동시 게재되었습니다.가장 먼저 실린 것은 왓슨과 크릭의 논문이었고, 이어 모리스 윌킨스 팀, 그리고 프랭클린과 고즐링의 논문이 뒤따랐습니다.프랭클린의 논문에는 그녀의 결정적인 DNA X선 회절 사진과 정확한 데이터가 실렸지만, 그녀의 기여는 상대적으로 덜 부각되었습니다.

왓슨과 크릭의 논문에서는 킹스 칼리지 연구팀의 자세한 결과는 알지 못했다고 서술했지만, 1년 뒤 그들의 논문에서는 킹스 칼리지의 데이터가 없었다면 모델 구축이 힘들었을 것이라고 인정했습니다. 프랭클린의 주변 사람들은 그녀의 데이터가 새어 나가 캐번디시 연구팀에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의심했지만, 프랭클린은 이에 대해 항의한 적이 없습니다.

1954

[버크벡 대학교, RNA 바이러스 구조 연구에 몰두]

버크벡 대학교로 자리를 옮긴 프랭클린은 농업 연구 회의의 지원을 받아 X선 결정학을 이용한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TMV) 구조 연구에 착수했습니다.그녀는 1954년부터 아론 클러그와 성공적인 공동 연구를 시작했으며, RNA 바이러스의 유전 물질 구조를 밝히는 데 선구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1955년, 프랭클린은 《네이쳐》에 TMV 바이러스가 모두 같은 길이를 가지고 있다는 논문을 발표했는데, 이는 저명한 바이러스학자의 의견과 정면으로 모순되는 주장이었으나 결국 사실로 밝혀졌습니다. 그녀의 팀은 담배 모자이크 바이러스 모델을 완성하여 브뤼셀 세계 박람회에 전시하기도 했으며, 폴리오 바이러스 등 다양한 RNA 바이러스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1956

[암 투병 중에도 연구 열정 불태우다]

미국 출장 중 건강에 이상을 느낀 프랭클린은 그해 9월 복부 주위에 두 개의 종양이 있다는 난소암 진단을 받았습니다.여러 차례 입원과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도 그녀는 연구를 멈추지 않았습니다.1956년에 7편, 1957년에 6편의 논문을 발표하는 등 놀라운 연구 열정을 보여주었으며, 팀과 함께 폴리오 바이러스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그녀는 가족과 친구들, 특히 크릭 부부와 깊은 친분을 쌓으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부모님께는 자신의 투병 사실을 숨기려 노력했습니다. 1957년 후반 다시 위독한 상태에 놓였다가 1958년 1월 생물물리학 연구 경영자로 승진되기도 했으나, 병세는 점차 악화되었습니다.

1958

[위대한 과학자의 이른 죽음, 노벨상 수상 기회 박탈]

1958년 3월 30일 건강이 다시 악화된 프랭클린은 결국 4월 16일 37세의 젊은 나이로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그녀의 이른 죽음은 장기간 X선에 노출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됩니다.노벨상은 사후 수여되지 않기 때문에, 1962년 DNA 구조 발견으로 왓슨, 크릭, 윌킨스가 노벨상을 수상할 때 그녀는 그 영광을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프랭클린은 생전 왓슨, 크릭, 윌킨스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는데, 이는 윌킨스와의 불화, 데이터의 무단 사용 의혹, 그리고 성차별적 대우 등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습니다. 그녀의 결정적 기여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논란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962

[DNA 노벨상 수상자 발표, 프랭클린은 제외되다]

1962년, 제임스 왓슨, 프랜시스 크릭, 모리스 윌킨스는 핵산 연구, 특히 DNA 구조 규명에 대한 공로로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수상했습니다.하지만 1958년 사망한 로절린드 프랭클린은 노벨상의 사후 수여 불가 원칙에 따라 수상 대상에서 제외되었습니다.그녀의 결정적인 기여가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 것에 대한 논란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윌킨스는 10년 이상 DNA 구조를 연구하여 왓슨-크릭 모델을 확인했으며, 크릭은 유전 암호를, 왓슨은 RNA를 연구했습니다. 프랭클린의 결정적 데이터와 통찰이 없었다면 왓슨과 크릭의 모델 완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것이 학계의 중론입니다. 또한 그녀는 연구 과정에서 성차별과 데이터 무단 사용 등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왓슨은 자신의 책 《이중나선》에서 프랭클린을 깎아내리는 발언을 했으며, 추후 공식적으로 사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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