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파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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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권 운동가, 인권 운동가, 사회 운동가 + 카테고리

미국의 민권 운동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1955년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체포된 사건으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촉발했습니다.이 사건은 마틴 루터 킹 주니어를 중심으로 한 미국 인권 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미국 의회로부터 '현대 인권 운동의 어머니'로 불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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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13

[로자 루이즈 맥콜리 출생]

미국 앨라배마주 터스키지에서 목수인 아버지와 교사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로자 루이즈 맥콜리 파크스는 1913년 2월 4일 앨라배마주 터스키지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의 이혼 후 어머니와 함께 몽고메리 근처 파인 레벨로 이사했고, 11살까지는 어머니에게 홈스쿨링을 받았다. 이후 몽고메리 여자 산업 학교와 앨라배마주 흑인 교원대학교에서 공부했으나 할머니와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중퇴했다.

1932

[레이먼드 파크스와 결혼]

레이먼드 파크스와 결혼했으며, 남편의 도움으로 1933년 고등학교 교육을 마쳤다.

1932년 레이먼드 파크스와 결혼했다. 남편 레이먼드는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에 참여하고 있었다. 결혼 후 로자는 여러 직업을 전전했으며, 1933년 남편의 외조로 고등학교 교육을 마칠 수 있었다. 당시 아프리카계 미국인 중 약 7%만이 고등학교 이상의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1943

[NAACP 몽고메리 지부 가입]

짐 크로우법에 의해 흑인들의 정치 참여가 방해받았지만 3번의 도전 끝에 투표권을 등록하고, 민권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여 NAACP 몽고메리 지부에 가입하고 1957년까지 서기로 활동했다.

당시 미국 남부에서는 인종차별 악법인 짐 크로우법이 시행되어 흑인들의 정치 참여를 방해했다. 하지만 로자 파크스는 3번의 도전 끝에 투표권을 등록하는 데 성공했다. 1943년 12월에 민권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여 전미 흑인 지위 향상 협회(NAACP)의 몽고메리 지부에 가입했고, 이후 1957년까지 서기로 활발히 활동하며 인권 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1955

[몽고메리 버스에서 좌석 양보 거부 및 체포]

몽고메리 페어 백화점에서 퇴근 후 버스에 탑승, 백인 승객을 위해 자리를 양보하라는 운전사의 지시를 거부하여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로자 파크스를 미국 민권 운동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1955년 12월 1일 목요일, 몽고메리 페어 백화점에서 하루 일을 마친 로자 파크스는 버스를 타고 귀가 중이었다. 버스 백인 전용칸이 만원이 되자 운전기사 제임스 F. 블레이크는 흑인 전용칸에 앉아있던 로자 파크스를 포함한 네 명의 흑인들에게 일어나라고 요구했다. 다른 세 명은 자리를 비켜주었지만, 로자 파크스는 '일어나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데요'라고 대답하며 지시를 거부했다. 결국 블레이크는 경찰을 불러 로자를 체포하게 했고, 로자는 몽고메리 시 조례 6장 11절의 분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었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시작]

로자 파크스의 체포 소식이 알려지자 흑인 사회는 버스 보이콧 운동을 조직했고,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몽고메리 진보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며 운동을 이끌었다. 이는 382일간 지속된 대규모 인종 분리 저항 운동의 시초가 되었다.

로자 파크스 체포 소식은 흑인 사회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날 저녁, 로자 파크스의 친구 E.D. 닉슨과 조 안 로빈슨 교수는 버스 보이콧을 선언하는 선전물 3만 5천여 장을 만들어 배포했다. 여성 정치 위원회(WPC)도 이 운동을 적극 지지했다. 1955년 12월 4일 일요일,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에 각지의 흑인 교회가 동참하겠다고 발표했다. 다음날인 12월 5일 월요일, 성공적인 하루 보이콧 후 시온 교회에서 모여 향후 전략을 논의했고, '몽고메리 진보 협회'를 결성하여 운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젊고 당시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덱스터 애비뉴 침례교회 목사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박사가 협회 회장으로 선출되어 운동을 이끌게 되었다.

1957

[디트로이트 이주 및 전국 순회 연설 시작]

버스 보이콧 이후 직장을 잃고 KKK와 백인들의 위협에 시달리자, 가족과 함께 미시간주 디트로이트로 이사하여 민권 운동의 대변인으로서 활동을 이어갔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이후 로자 파크스는 백화점 직장을 잃었고, 남편 또한 직장을 그만두어야 했다. 백인 우월주의 단체 KKK와 지역 백인들의 심한 위협 때문에, 결국 가족은 고향을 떠나 북부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시로 이사갔다. 그곳에서 로자 파크스는 1957년부터 버스 보이콧 사건을 알리기 위해 각지를 돌며 연설하는 등 민권 운동의 대변인 역할을 하며 여러 권익 향상 운동을 펼쳤다. 1965년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하원의원 존 코니어스의 비서로 고용되어 1988년 은퇴할 때까지 일했다.

1996

[대통령 자유 훈장 수여]

빌 클린턴 행정부로부터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받아, 그녀의 공헌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

1996년 빌 클린턴 행정부는 로자 파크스에게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의 훈장인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여했다. 이는 미국 민권 운동에 대한 그녀의 용감하고 지대한 공헌을 국가적으로 기린 것이다.

2005

[92세로 사망 및 국회의사당 안장]

92세의 나이로 디트로이트에서 사망했으며, 여성으로서는 최초이자 흑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워싱턴D.C. 국회의사당 캐피톨 힐에 안장되어 국민들의 애도를 받았다.

2005년 10월 24일, 로자 파크스는 92세의 나이로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운명했다. 그녀는 미국의 역사에 중요한 족적을 남긴 인물로 인정받아, 여성으로서는 첫 번째, 흑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워싱턴 D.C. 국회의사당 캐피톨 힐에 안장되는 영예를 안았다. 장례식에는 콘돌리사 라이스 국무장관을 비롯한 많은 인사가 참석했으며, 4만 명의 시민 조문객이 유해를 방문하여 애도를 표했고, 미국의 모든 공공 기관은 조기를 게양하여 그녀를 추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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