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 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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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 페로
기업인, 정치인, 자선가 + 카테고리
미국의 자수성가형 억만장자로, 정보기술(IT) 서비스 산업의 선구자이자 미국 정치사에서 제3지대 돌풍을 일으킨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일렉트로닉 데이터 시스템스(EDS)를 창업해 막대한 부를 일궜고, 이란에 억류된 직원을 직접 구출하는 등 강한 결단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992년과 1996년 두 차례에 걸쳐 제3당 및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이례적인 득표율을 기록하며 양당 체제에 묵직한 경종을 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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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30

[텍사스주 텍사카나 출생]

면화 계약을 전문으로 하는 상품 중개인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프랑스계 캐나다인 이민자의 후손으로, 어린 시절부터 자립심을 키우며 성장했습니다.
헨리 로스 페로는 텍사스주 텍사카나에서 룰라 메이와 가브리엘 로스 페로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계 혈통은 1740년대 루이지애나 식민지로 이주한 프랑스계 캐나다인 이민자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1938

[첫 직장 신문 배달 시작]

어린 나이에 처음으로 경제 활동에 뛰어들어 신문을 배달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거대한 기업을 일구는 근면성실함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여덟 살의 나이에 '텍사카나 가제트(Texarkana Gazette)'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으로 일하며 생애 첫 일자리를 가졌습니다. 이른 나이부터 일하며 경제 관념을 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42

[보이스카우트 이글 스카우트 달성]

청소년 단체에 가입하여 단기간에 최고 등급의 자격을 획득하는 성과를 거둡니다. 특유의 리더십과 목표 달성 능력이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음을 보여줍니다.
미국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한 지 불과 13개월 만에 최고 영예인 이글 스카우트(Eagle Scout)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훗날 그는 이 탁월한 활동을 인정받아 우수 이글 스카우트상(Distinguished Eagle Scout Award)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1947

[고등학교 졸업 및 대학 진학]

지역 사립학교를 거쳐 고등학교를 무사히 마치고 지역 전문대학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갑니다. 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기초 학문을 닦는 시기였습니다.
패티 힐(Patty Hill)이라는 지역 사립학교를 다닌 후, 텍사카나에 위치한 텍사스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1947년부터 1949년까지 텍사카나 주니어 칼리지에 재학하며 학문을 쌓았습니다.

1949

[미국 해군사관학교 입학]

국가에 봉사하고자 군사 학교에 입학하여 생도 생활을 시작합니다. 이 곳에서 그는 엄격한 규율을 배우고 사관학교의 명예 제도를 확립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했습니다.
텍사스의 34대 주지사이자 전 상원의원이었던 W. 리 '패피' 오다니엘의 전보 추천으로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재학 중 동기들과 함께 사관학교 내 명예 제도를 새롭게 구축하고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1953

[미 해군 장교 복무 시작]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정식 장교로 임관하여 구축함과 항공모함에서 차례로 근무합니다. 이 시기 군대의 물자 보급 체계를 체감하며 정부의 무분별한 예산 낭비 문제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됩니다.
1953년부터 1957년까지 미국 해군의 초급 장교로 복무하며 구축함과 항공모함에 탑승해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평생 신발을 한 켤레만 소유해본 그가 해군에서 여러 켤레의 신발을 한꺼번에 지급받은 일화는 훗날 그가 '정부 낭비의 첫 사례'로 자주 언급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6

[마고 버밍엄과 결혼]

해군 장교 시절 소개팅으로 만난 여성과 평생의 반려자가 되기로 서약하며 가정을 꾸립니다. 이 결혼을 통해 그는 슬하에 여러 자녀와 손주를 두며 다복한 삶을 영위하게 됩니다.
볼티모어에 정박 중이던 사관생도 시절 블라인드 데이트로 처음 만난 가우처 대학 출신의 마고 버밍엄(Margot Birmingham)과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두 사람은 훗날 로스 페로 주니어를 포함해 5명의 자녀와 19명의 손주를 두며 오랜 기간 해로했습니다.

1957

[IBM 영업사원 입사]

해군 전역 후 세계적인 기술 기업의 영업사원으로 입사하여 놀라운 판매 실적을 올립니다. 하지만 자신의 혁신적인 사업 아이디어가 경영진에게 무시당하자 결국 회사를 떠나 독립을 결심하게 됩니다.
군 복무를 마친 후 컴퓨터 제조사 IBM에 영업사원으로 입사하여, 단 2주 만에 1년 치 영업 할당량을 모두 채울 정도로 회사 내 최고의 직원으로 급부상했습니다. 그러나 상사들에게 제안한 새로운 데이터 처리 서비스 아이디어들이 번번이 무시당하자 직접 창업에 나서기로 마음먹었습니다.

1961

[해군 예비역 전역]

오랜 기간 몸담았던 해군의 예비역 장교 신분에서 마침내 완전히 벗어납니다. 군 복무의 의무를 최종적으로 마무리하고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로 매진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현역 복무 이후 이어오던 미국 해군 예비역 신분에서 1961년 6월 30일 자로 최종 전역 처리를 받았습니다. 전역 당시 그의 최종 계급은 해군 대위(Lieutenant)였습니다.

1962

[일렉트로닉 데이터 시스템스(EDS) 창립]

대기업에서 퇴사한 후 직접 데이터 처리 전문 서비스 기업을 세워 독자적인 사업을 시작합니다. 수많은 거절 끝에 마침내 첫 계약을 따내며 기업 성장의 든든한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일렉트로닉 데이터 시스템스(EDS)를 창립하고 거대 기업들을 상대로 데이터 처리 아웃소싱 서비스를 제안했습니다. 초기에는 무려 77번이나 계약 입찰에서 거절당하는 시련을 겪었으나, 1960년대 미국 정부로부터 메디케어(Medicare) 기록 전산화라는 수익성 높은 계약을 연이어 따내며 폭발적인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1968

[EDS 상장과 억만장자 등극]

자신이 세운 회사를 주식 시장에 성공적으로 상장시키며 단숨에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됩니다. 주가가 며칠 만에 폭등하며 언론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는 텍사스의 유력 기업인으로 우뚝 섰습니다.
1968년 EDS가 기업 공개(IPO)를 단행했고, 주당 16달러였던 주가가 며칠 만에 160달러로 폭등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경제 전문지 포춘(Fortune)은 그해 표지 기사에서 그를 '가장 빠르고 부유해진 텍사스인'으로 대서특필했으며, 이듬해 말 그의 지분 가치는 무려 10억 달러에 달하게 되었습니다.

1969

[베트남 전쟁 포로 문제 적극 개입]

백악관의 요청으로 동남아시아를 방문한 후, 전쟁 포로 및 실종자 구출 문제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합니다. 이는 훗날 그가 역대 미국 행정부들과 심각한 외교적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1969년 라오스를 방문하여 북베트남 고위 관리들과 만난 이후, 베트남 전쟁 참전 미군 포로 및 실종자(POW/MIA) 문제에 열정적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수백 명의 미군이 여전히 동남아시아에 버려져 있다고 굳게 믿었으며, 독자적인 비밀 협상을 거듭 시도하다가 레이건 및 조지 H. W. 부시 행정부와 관계가 심각하게 악화되었습니다.

1970

[최악의 주가 폭락 사태 직면]

승승장구하던 기업의 주가가 하루아침에 대폭락하며 역사적인 개인 손실을 기록하는 위기를 맞습니다. 시장의 극심한 혼란과 매도세 속에서 개인 자산의 엄청난 증발을 뼈저리게 지켜보아야 했습니다.
기술주 중심의 시장 붕괴와 맞물려 공교롭게도 첫 번째 '지구의 날'에 EDS의 주가가 대폭락했습니다. 페로는 하루 만에 4억 4,500만 달러(현재 가치 약 28억 달러)라는 뉴욕 증권거래소 역사상 '가장 큰 개인 손실액'을 기록한 불운의 인물로 언론의 조명을 받았습니다.

1979

[이란 억류 직원 구출 작전 주도]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타국 정부에 의해 소속 직원들이 억류되자, 사비를 털어 특수 구출 팀을 파견합니다. 목숨을 건 구출 작전은 결국 기적적으로 성공하며 그의 뛰어난 결단력을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란 혁명 직전, 계약 분쟁으로 인해 EDS 직원 두 명이 이란 감옥에 투옥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페로는 미 육군 특수부대 출신 아서 D. "불" 시먼스 대령을 리더로 한 전담 구출 팀을 직접 조직해 후원했으며, 혁명군이 감옥을 습격한 혼란을 틈타 직원들을 구출해 터키 국경으로 무사히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극적인 이야기는 켄 폴릿의 베스트셀러 소설 《독수리 날개 위에(On Wings of Eagles)》로 쓰이고 TV 미니시리즈로도 제작되었습니다.

1984

[제너럴 모터스에 EDS 경영권 매각]

거대 자동차 기업에 자신이 창립한 회사의 경영권을 천문학적인 금액에 넘기는 결단을 내립니다. 인수 기업의 경영진과 독립적인 운영을 약속받았으나, 결국 심각한 갈등을 겪으며 결별의 수순을 밟게 됩니다.
미국의 대표적 자동차 제조사인 제너럴 모터스(GM)가 24억 달러(2024년 기준 61억 달러)에 EDS의 지배 지분을 인수했습니다. 페로는 EDS가 GM 내부에서 독립적인 리더십을 가질 것이라는 구상 하에 회사를 매각했지만, GM 경영진이 그의 혁신적인 뜻을 묵살하자 회사를 떠났고 이후 미국 대기업의 부조리를 강하게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마그나 카르타 사본 구입]

영국 밖으로 거의 유출되지 않았던 인류 역사상 가장 중요한 헌장 중 하나를 거액을 들여 매입합니다. 이 귀중한 역사적 문서는 오랫동안 국가 기록원에 전시되며 대중의 역사 인식 고취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페로 재단을 통해 영국을 떠난 몇 안 되는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의 초기 사본 중 하나를 수백만 달러를 들여 구입했습니다. 이 사본은 이후 워싱턴 D.C.의 국립문서보관소(National Archives)에 영구 임대 형식으로 제공되어 독립선언서 및 미국 헌법과 나란히 전시되었습니다.

1985

[스티브 잡스의 NeXT에 천사 투자]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쫓겨난 젊은 천재 창업가의 새로운 도전에 막대한 자금을 선뜻 투자합니다. 과거 다른 IT 거물에 대한 초기 투자 기회를 놓쳤던 뼈아픈 아쉬움을 거울삼아 주저 없이 결단을 내린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애플에서 권력 투쟁에 밀려나 회사를 떠난 뒤 컴퓨터 회사인 넥스트(NeXT)를 창업하자, 페로는 천사 투자자(엔젤 투자자)로 나서 무려 2,000만 달러 이상을 과감히 투자했습니다. 이는 과거 빌 게이츠의 초창기 마이크로소프트에 투자할 기회를 놓쳤던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결정이었습니다.

1988

[페로 시스템스 창립]

GM과의 결별 이후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정보기술 서비스 기업을 텍사스에 다시 한번 설립합니다. 과거의 성공 공식을 바탕으로 사업을 키워나갔으며, 훗날 이 회사는 아들이 경영권을 물려받아 세계적인 PC 제조사의 인수 대상이 됩니다.
텍사스주 플라노에서 IT 솔루션 및 서비스 제공업체인 '페로 시스템스(Perot Systems)'를 전격 창립했습니다. 사업은 빠르게 번창하였고 훗날 아들인 로스 페로 주니어가 CEO 자리를 승계했으며, 이 회사는 2009년 9월 글로벌 기업인 델(Dell)에 39억 달러(2024년 기준 55억 달러)에 매각되었습니다.

1990

[기득권 정치 비판 광고 후원]

정치권의 위선과 무능에 분노한 한 시민 단체의 전국적인 신문 광고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자금 후원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서서히 정치적 목소리를 키우며 대중적 불만을 결집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은퇴한 재무 설계사 잭 가간이 전국적인 임금 정체 상황에서 의원들이 자신들의 급여만 꼼수로 인상한 것을 규탄하며 "나는 화가 나서 미치겠다, 더 이상 참지 않겠다"라는 영화 대사를 인용해 시작한 신문 광고 캠페인을 전폭적으로 재정 지원했습니다. 이는 기득권 정치에 대항하는 그의 행보를 상징하는 중요한 첫걸음이 되었습니다.

1992

[1992년 대선에서 이례적인 득표율 기록]

우여곡절 끝에 완주한 대통령 선거에서 선거인단 확보에는 실패했지만, 기록적인 수치의 득표율을 달성하며 미국 정치사에 큰 획을 긋습니다. 양당 체제에 굳건히 균열을 내며 제3지대 후보로서 엄청난 잠재력을 전 세계에 증명했습니다.
캠페인 도중 돌연 출마 포기와 재선언을 번복하는 큰 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본선에서 조지 H. W. 부시와 빌 클린턴을 상대로 선전했습니다. 단 하나의 선거인단도 확보하지 못했지만 무려 1,970만 표 이상을 얻어 전체 득표율 18.9%를 기록했으며, 이는 미국 대선 역사상 제3당이나 무소속 후보가 거둔 가장 성공적인 득표 결과 중 하나로 꼽힙니다.

[무소속 대통령 선거 출마 선언]

유명 텔레비전 생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국민들의 지지가 있다면 대권에 도전하겠다는 폭탄 선언을 합니다. 기득권 양당 정치에 지친 유권자들에게 새로운 대안으로 급부상하며 전국적인 돌풍을 일으켰습니다.
CNN의 간판 토크쇼 '래리 킹 라이브(Larry King Live)'에 출연해 열성 지지자들이 50개 주 전체에서 자신을 투표용지에 올려준다면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기습 선언했습니다. 연방 예산 균형, 총기 규제, 일자리 해외 유출 방지, 전자 타운홀 미팅을 통한 직접 민주주의 도입 등의 파격적인 공약으로 단숨에 양당 후보를 위협하는 유력 대선 주자로 떠올랐습니다.

1993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반대 토론]

자유무역이 국가 경제와 일자리에 미칠 악영향을 경고하며 현직 부통령과 생방송 토론 맞대결을 벌입니다. 특유의 직설적인 화법으로 시청자들의 이목을 끌었으나, 토론 결과 여론의 역풍을 맞으며 정치적 타격을 심하게 입게 되었습니다.
'래리 킹 라이브'에 다시 출연하여 앨 고어 부통령을 상대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비준에 반대하는 격렬한 맞장 토론을 펼쳤으며, 이 방송은 약 1,600만 명의 시청자를 끌어모았습니다. 페로는 "엄청난 일자리 빨아들이는 소리"가 날 것이라며 협정이 미국 제조업 일자리를 멕시코로 빼앗아갈 것이라고 맹공을 퍼부었으나, 토론 도중 억양 섞인 목소리로 반복해서 "내 말 끝까지 좀 들어보라"고 호소하는 태도가 조롱거리가 되며 협정 찬성 여론이 오히려 급등하는 역효과를 낳았습니다.

1995

[개혁당(Reform Party) 창당]

자신의 정치적 철학과 비전에 공감하는 풀뿌리 지지자들을 규합하여 새로운 전국 규모의 정당을 공식적으로 창당합니다. 재정 건전성과 선거 제도 개혁을 최우선 가치로 내걸고 기존 양당 정치권에 대한 견제를 본격화했습니다.
1992년 대선 캠페인을 열렬히 지지했던 풀뿌리 운동 지지 세력을 핵심 기반으로 삼아 개혁당(Reform Party)을 공식 창당했습니다. 재정 보수주의와 선거 개혁에 집중하며 미국의 양당 독점 체제를 타파하고 국민을 위한 진정한 대안 정치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96

[개혁당 후보로 두 번째 대선 출마]

자신이 직접 창당한 정당의 공식 대선 후보로 선출되어 다시 한번 백악관의 문을 두드립니다. 지난 선거보다 저조한 성적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유의미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고정 지지층의 저력을 재확인했습니다.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 개혁당 후보로 출마하여 빌 클린턴 대통령 및 밥 돌 공화당 후보와 다시 한번 경쟁했습니다. 1992년에 비해서는 적은 자비만을 지출했고 타인의 기부금을 허용하는 등 선거 자금 전략을 수정했으며, 최종적으로 8.4%의 득표율을 기록하여 여전히 미국 선거 기준에서는 이례적으로 성공적인 제3당 후보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2008

[밋 롬니 대선 후보 공식 지지]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난 후 오랜만에 특정 정당의 유력 대선 후보에 대한 공개적인 지지 의사를 표명합니다. 잦은 독자 출마로 양당 구도를 뒤흔들었던 과거와 달리 주류 보수 진영의 후보에게 든든한 힘을 실어주었습니다.
2008년 1월, 공화당 경선에 나선 존 매케인 후보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대신 기업인 출신의 밋 롬니 후보를 대통령으로 적극 지지한다고 선언했습니다. 더불어 국가 부채와 사회 보장 제도 등 국가 경제 이슈를 심도 있게 다루는 새로운 블로그를 개설하여 보수 여론 환기에 나섰으며, 2012년 대선에서도 다시 한번 롬니를 지지했습니다.

2019

[백혈병으로 투병 끝에 사망]

고향인 텍사스의 자택에서 노환 및 혈액암 투병 끝에 파란만장했던 삶의 막을 내립니다. 미국의 비즈니스 혁신과 제3지대 정치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위대한 이단아의 죽음에 각계의 묵직한 애도가 이어졌습니다.
텍사스주 댈러스에서 오랫동안 백혈병과 싸우다 향년 89세의 나이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습니다. 스파크먼-힐크레스트 메모리얼 파크 묘지(Sparkman-Hillcrest Memorial Park Cemetery)에 안장되었으며, 사후에도 그의 기업가 정신과 독특한 정치적 포퓰리즘은 현대 미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대표적인 사례로 활발히 회자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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