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미첨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로버트 미첨은 미국의 전설적인 배우이자 가수로, 필름 느와르 장르와 반영웅(antihero) 캐릭터의 대명사로 꼽히는 인물입니다. 불우했던 어린 시절과 방랑 생활을 거쳐 영화계에 입문한 그는 《과거로부터》, 《사냥꾼의 밤》, 《케이프 피어》 등 수많은 고전 명작에서 무심하면서도 위협적인 특유의 매력을 발산하며 압도적인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1945년 《지.아이. 조의 이야기》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으며, 후기에는 텔레비전 미니시리즈 《전쟁의 폭풍》 등에서도 맹활약했습니다. 마리화나 스캔들조차 그의 인기를 꺾지 못할 만큼 대중의 굳건한 사랑을 받았으며, 1992년 골든 글로브 세실 B. 데밀 상을 수상하고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가장 위대한 남성 스타 23위에 오르는 등 영화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연표
1917
[커네티컷주 브리지포트에서 출생]
로버트 찰스 더먼 미첨은 커네티컷주 브리지포트에서 감리교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아일랜드, 원주민, 노르웨이 혈통을 물려받았습니다.조선소 및 철도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스코틀랜드-아일랜드 및 원주민 혈통이었으며, 어머니는 노르웨이 이민자이자 선장의 딸이었습니다. 훗날 함께 배우 생활을 하게 되는 누나 줄리(Julie)는 그보다 앞선 1914년에 태어났습니다.
1919
[아버지의 비극적인 사망]
미첨이 채 두 살도 되기 전에 아버지가 사우스캐롤라이나주 찰스턴의 철도 조차장에서 발생한 사고로 압사당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당시 어머니는 임신 중이었습니다.아버지를 잃은 후 가족은 남편의 고향에 잠시 머물다 다시 커네티컷으로 돌아왔습니다. 이후 어머니는 정부 연금을 받았으며, 자녀들을 부양하기 위해 브리지포트 포스트의 라이노타이프 조작원으로 취직했습니다.
1926
[델라웨어의 조부모 댁으로 이주]
어린 시절부터 장난기가 많고 잦은 싸움과 말썽에 휘말리던 미첨은 어머니에 의해 남동생과 함께 델라웨어주 우드사이드 근처의 조부모 농장으로 보내졌습니다.이곳에서 그는 펠턴 고등학교에 다녔으나 말썽을 피워 결국 퇴학당하고 말았습니다. 펠턴 학교에 다니던 11살 무렵에는 처음으로 가출을 감행하기도 하며 반항적인 기질을 드러냈습니다.
1929
[누나와 함께 생활하기 시작]
미첨과 그의 남동생은 동부 해안에서 보드빌 공연자로 경력을 쌓기 시작한 누나 줄리와 함께 살기 위해 필라델피아로 보내졌습니다.이듬해인 1930년에는 가족 모두가 뉴욕 맨해튼의 헬스 키친으로 이사하여 누나 부부와 아파트를 공유했습니다. 이곳에서 하렌 고등학교에 다녔으나 다시 한번 퇴학을 당했습니다.
1933
[조지아주에서의 체포와 탈출]
14세에 집을 나와 화물 열차를 몰래 타며 방랑 생활을 하던 미첨은, 1933년 여름 조지아주 서배너에서 부랑죄로 체포되어 지역의 쇠사슬 죄수 노동형(chain gang)에 처해졌습니다.미첨의 회고에 따르면,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쇠사슬을 끊고 도망쳐 델라웨어주 라이징선으로 히치하이킹을 해 돌아갔습니다. 그해 가을 다리를 잃을 뻔한 부상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훗날 아내가 될 14세의 도로시 스펜스를 만났습니다.
1934
[서부 캘리포니아로의 이주]
시민보존계획(CCC)에 소속되어 몇 달간 도랑을 파고 나무를 심는 막일을 하던 미첨은 다시 길을 떠나 누나가 살고 있던 캘리포니아주 롱비치로 향했습니다.이후 3년 동안 미첨은 미국 전역을 돌며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습니다. 이 기간 동안 27번의 프로 복싱 경기에 출전하기도 했으나, 코가 부러지고 왼쪽 눈에 흉터가 남는 부상을 입은 뒤 링에서 은퇴했습니다.
1937
[플레이어스 길드 합류 및 무대 데뷔]
캘리포니아 롱비치에 정착한 미첨은 누나 줄리가 활동하던 지역 극단 '플레이어스 길드(Players Guild)'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어머니의 권유로 길드에 합류하여 연극 무대에 데뷔했습니다.연극 활동을 하며 두 편의 어린이 연극을 집필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누나가 카바레 가수로 일하기 시작하자 미첨은 가사 작가로도 활동하며 쇼 비즈니스계와의 인연을 점차 넓혀갔습니다.
1939
[오슨 웰스와의 오라토리오 작업]
미첨은 다재다능한 창작의 재능을 발휘하여 오라토리오의 대본을 쓰고 작곡에 참여했습니다. 이 작품은 오슨 웰스가 직접 제작하고 감독을 맡아 유대인 난민을 위한 자선 공연으로 무대에 올려졌습니다.이후 점성술사 캐럴 라이터의 조수로 일하며 동부 해안을 투어하기도 했습니다. 쇼 비즈니스 주변부에서 작가, 작곡가, 연극배우 등 여러 역할을 경험하며 예술적 역량을 다졌습니다.
1940
[도로시 스펜스와의 결혼]
미첨은 동부 해안 투어 중 델라웨어로 돌아가 16살 때 만났던 도로시 스펜스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이후 부부는 다시 캘리포니아로 돌아와 가정을 꾸렸습니다.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록히드 항공사에서 판금 노동자로 취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계 소음으로 인한 청력 손상과 불면증, 일시적 실명 등 극심한 스트레스성 질환을 겪고 퇴사하게 됩니다.
1942
[영화계 정식 데뷔]
록히드 항공사를 그만둔 미첨은 연극계 지인의 소개로 오디션을 본 후,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의 서부극 시리즈 《호팔롱 캐시디》의 단역 악당으로 캐스팅되며 본격적인 영화 경력을 시작했습니다.이 시기 촬영한 그의 데뷔작 《보더 패트롤》은 1943년에 개봉했습니다. 1943년 한 해에만 무려 19편의 영화에 단역과 조연으로 출연하며 할리우드에서 배우로서의 입지를 서서히 다져나갔습니다.
1944
[RKO 라디오 픽처스와의 장기 계약]
영화 《웬 스트레인저스 매리》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친 미첨은 RKO와 주당 350달러의 조건으로 7년 전속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데이비드 O. 셀즈닉의 뱅가드 필름이 계약의 일부를 인수했습니다.RKO와 계약한 뒤 미첨은 B급 서부극에서 주연으로 발돋움하기 시작했습니다. 《네바다》와 《웨스트 오브 더 페코스》 같은 영화들이 흥행에 성공하며 그가 메이저 스타로 성장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습니다.
1945
[《지.아이. 조의 이야기》와 아카데미상 후보 지명]
전쟁 영화 《지.아이. 조의 이야기》에서 전쟁에 지친 장교 역을 완벽하게 소화해 대중과 평단의 엄청난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작품으로 그는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습니다.아이젠하워 장군은 이 영화를 자신이 본 최고의 전쟁 영화라고 극찬했습니다. 한편, 미첨은 이 영화가 개봉하기 전에 미국 육군에 징집되어 캘리포니아 포트 맥아더에서 의무병으로 군 복무를 수행했습니다.
1947
[필름 느와르 장르에서의 눈부신 도약]
이 해는 미첨의 경력에 있어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크로스파이어》, 《퍼슈드》, 그리고 걸작 느와르인 《과거로부터(Out of the Past)》에 잇따라 출연하며 느와르의 아이콘으로 급부상했습니다.특히 자크 투르뇌르 감독의 《과거로부터》에서 냉소적이고 과거에 얽매인 사립탐정 역을 완벽하게 연기해 내며 RKO 최고의 스타로 떠올랐습니다. 이 시기에 RKO는 그의 주급을 3,000달러로 파격 인상하며 새로운 7년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1948
[마리화나 소지 혐의 스캔들]
할리우드에서 마리화나 소지 혐의로 경찰의 함정 수사에 걸려 체포되는 엄청난 스캔들을 겪었습니다. 그는 1949년에 이 사건으로 인해 43일간 교도소 및 농장 수용소에서 구금 생활을 했습니다.통상적인 배우라면 경력이 끝날 위기였지만, 대중들은 오히려 그의 '배드 보이' 이미지에 열광했습니다. 스캔들 직후 서둘러 개봉한 영화 《레이첼과 이방인》은 그해 RKO의 최고 흥행작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1951
[마리화나 유죄 판결 최종 취소]
1948년에 있었던 마리화나 소지 혐의 유죄 판결이 로스앤젤레스 법원과 지방 검찰청의 조사 결과, 의도적인 함정 수사에 의한 것으로 밝혀지면서 최종적으로 취소되었습니다.재판 결과가 번복되었음에도 그는 이미 법적 처벌로 인한 구금 생활을 부당하게 겪은 후였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미첨 특유의 무심하고 굴하지 않는 반항적인 이미지를 대중의 뇌리에 깊이 각인시키는 결과만을 남겼습니다.
1954
[RKO 전속 계약 만료 및 독립]
7년간 이어졌던 RKO 라디오 픽처스와의 전속 계약이 만료되면서 스튜디오 소속 배우 생활을 청산하고 프리랜서 배우로 전향했습니다.마지막 무렵에는 스튜디오가 배정하는 획일화된 역할과 대본에 상당한 불만을 표출하고 있었습니다. 프리랜서가 된 같은 해에 그는 마릴린 먼로와 함께 20세기 폭스의 서부극 《돌아오지 않는 강》에 출연하여 흥행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1955
[DRM 프로덕션 설립]
미첨은 자신과 아내의 이니셜을 딴 독립 제작사 'DRM 프로덕션'을 설립하고,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와 5편의 영화 제작을 골자로 하는 계약을 맺었습니다.이로써 단순한 배우를 넘어 영화 제작자로서도 직접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1958년에 자신이 직접 제작, 대본 공동 집필, 주연을 맡은 영화 《선더 로드》를 개봉시켜 컬트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습니다.
[《사냥꾼의 밤》에서의 역사적 명연기]
명배우 찰스 로튼이 유일하게 메가폰을 잡은 영화 《사냥꾼의 밤》에서 사이코패스 전도사 해리 파월 역을 맡아 영화 역사에 길이 남을 소름 끼치는 악역 연기를 선보였습니다.손가락 마디에 'LOVE'와 'HATE' 문신을 한 그의 모습은 대중문화에 깊은 충격과 영감을 주었습니다. 개봉 당시에는 상업적으로 실패했으나, 오늘날에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화 중 하나이자 미첨의 최고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962
[《케이프 피어》의 막스 케이디 역]
J. 리 톰슨 감독의 심리 스릴러 《케이프 피어》에서 변호사 가족을 집요하게 괴롭히고 복수하려는 흉악한 전과자 막스 케이디 역을 맡아 또 한 번의 전설적인 악역 캐릭터를 완성했습니다.이 캐릭터가 뿜어내는 원초적이고 위협적인 매력은 당대 관객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훗날 1991년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이 연출하고 로버트 드 니로가 주연을 맡은 리메이크작에서는 미첨이 경찰 서장으로 카메오 출연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1970
[《라이언의 딸》에서의 연기 변신]
데이비드 린 감독의 대작 서사 영화 《라이언의 딸》에서 아일랜드의 조용하고 온화한 시골 학교 교장 찰스 쇼너시 역을 맡아 파격적인 연기 변신을 감행했습니다.그동안 주로 연기했던 거칠고 마초적이거나 위협적인 배역들과는 완전히 상반된, 섬세하고 인내심 강한 캐릭터를 훌륭히 소화해 내어 평론가들로부터 새로운 연기 지평을 열었다는 극찬을 받았습니다.
1983
[미니시리즈 《전쟁의 폭풍》 출연]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초대형 TV 미니시리즈 《전쟁의 폭풍 (The Winds of War)》에서 미 해군 대령 빅터 '퍼그' 헨리 역을 맡아 브라운관에서도 압도적인 존재감을 증명했습니다.이 시리즈는 방영 당시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며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1988년에 방영된 후속작 《전쟁과 추억 (War and Remembrance)》에서도 동일한 역할로 출연하여 노년에도 흔들림 없는 스타성을 과시했습니다.
1997
[산타바바라에서의 타계]
로버트 미첨은 폐암과 폐기종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투병하다가 1997년 7월 1일 캘리포니아주 산타바바라에서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태평양 앞바다에 뿌려졌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불과 몇 주 뒤에 동료 배우 제임스 스튜어트마저 사망하면서, 할리우드는 고전 시대를 이끌던 두 명의 거대한 별을 연이어 잃는 슬픔을 겪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