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트 브레즈네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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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군인, 공산주의 지도자, 국가원수 + 카테고리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금속 노동자에서 소련 공산당 서기장 및 국가 원수까지 오른 인물입니다. 1964년부터 1982년까지 소련을 통치하며 '브레즈네프 독트린'으로 동유럽의 공산주의 체제를 수호하고, 서방과의 데탕트를 추진했습니다. 하지만 프라하의 봄 강경 진압, 아프가니스탄 침공 등 그의 정책은 국제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말년에는 소련 경제의 침체와 그의 건강 악화 속에서 사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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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06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출생]

우크라이나 카멘스코예에서 금속 공장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유년기를 보냈습니다.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1906년 12월 19일, 러시아 제국 카멘스코예(지금의 우크라이나 카미얀스케)에서 금속 공장 노동자였던 아버지 일리야 야코블레비치 브레즈네프와 어머니 나탈리야 데니소브나 마잘로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921

[제철소 근무 시작]

가족과 함께 쿠르스크로 이사한 뒤 15세의 나이로 제철소에서 근무를 시작하며 노동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브레즈네프는 1921년 가족과 함께 쿠르스크로 이사해 15세 때부터 그곳의 제철소에서 근무하였습니다.

1923

[콤소몰 참가]

공산당 청년 조직인 콤소몰에 참가하며 정치 활동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923년에는 공산당 청년 조직인 콤소몰에 참가하였습니다.

1931

[소련 공산당 입당]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에 입당하며 본격적인 공산당원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930년 카멘스코예로 돌아온 후 1931년 소비에트 연방 공산당에 입당하였습니다. 이후 드니프로제르진스크 야금 교육원에서 야금학을 배워 1935년 졸업한 뒤 우크라이나 동부의 제철소 기사가 되었습니다.

1939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 당위원회 서기 취임]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주 당위원회 서기에 올라 방위 산업 조직에 참여하며 핵심 간부로 성장했습니다.

193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간부가 되었고, 1939년에는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현재의 우크라이나 드니프로) 주 당위원회 서기에 올라 방위 산업을 조직하였습니다.

1941

[독소 전쟁 참전]

독소 전쟁이 발발하자 군 정치 위원으로 활동하며 조국 수호에 기여했습니다. 그의 군 경력은 정치 위원으로서의 역할이었습니다.

1941년 6월 독소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는 독일군에 점령당했지만, 브레즈네프는 시의 산업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전쟁의 시작과 동시에 군의 정치 위원으로 활약하였습니다. 그 해 10월 브레즈네프는 여단 인민 위원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남부 방면 군정치지도부 차장이 되었습니다. 1942년 캅카스 전선의 정치 지도부 차장으로 파견되었고, 1943년 4월 제18군의 정치 부장이 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나자 제4우크라이나 방면 군정치지도부 부장으로서 프라하에 들어갔습니다. 1946년 8월 소장 계급을 마지막으로 소련군을 떠났습니다.

1953

[스탈린 사망과 요직 임명]

스탈린 사망 후 정치적 격변기에 중장으로 승진하고 소련군정치총국장 제1대리로 임명되어 새로운 권력 구도에 편입되었습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1953년 3월에 사망하자 최고 회의 간부회가 폐지되고, 보다 작은 정치국이 재구성되었습니다. 브레즈네프는 정치국의 일원이 되지 않았지만, 그 대신에 중장 승진과 함께 소련군정치총국장 제1대리로 임명되었습니다.

1955

[카자흐 공산당 제1서기 취임]

카자흐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로 임명되어 카자흐 공화국의 개척 사업을 지휘하며 지도력을 발휘했습니다.

이것은 아마 그의 후원자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한 것이며, 1955년에는 카자흐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제1서기가 되어 소비에트 연방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개척 사업을 지도했습니다.

1960

[명목상 국가 원수 취임]

소비에트 연방 최고 회의 간부회 의장에 취임하여 명목상 국가 원수의 지위에 올랐습니다. 이 직위는 그의 국제적 활동 영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9년 브레즈네프는 소비에트 연방 최고 회의 간부회 부의장이 되었고, 1960년 의장에 취임해 명목상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 원수가 되었습니다. 실제 권력은 당의 제1서기인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있었지만, 의장의 지위는 외국으로의 여행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1964

[소련 공산당 제1서기 취임]

니키타 흐루쇼프가 실각하자, 소비에트 공산당 제1서기에 오르며 소련의 최고 지도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브레즈네프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1962년까지 흐루쇼프의 당 지도자로서의 지위는 튼튼했지만, 그가 연로함과 동시에 지도력 저하가 다른 지도진의 신뢰를 무너뜨려 그의 정치 기반이 흔들렸습니다. 브레즈네프는 1963년 알렉세이 코시긴, 니콜라이 포드고르니, 알렉산드르 셸레핀 등과 함께 흐루쇼프의 추방 계획에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흐루쇼프는 1964년 10월 13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총회의 결정으로 실각하였고, 브레즈네프는 소비에트 공산당 제1서기, 알렉세이 코시긴은 수상에 올랐습니다.

1966

[서기장 개칭 및 정책 회귀]

제1서기 직함을 스탈린의 직함이었던 서기장으로 개칭하고, 억압적인 문화 정책으로 회귀하며 스탈린 시대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는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브레즈네프는 니키타 흐루쇼프의 스탈린 독재 정치 비판과 희생자 명예 회복 정책을 지지했으나, 자신이 지도자가 되면서 일을 반대로 처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대독일 전승 20주년을 기념하는 1965년 5월 연설에서 처음으로 스탈린을 긍정적으로 언급하였고, 1966년 제1서기를 스탈린의 직함인 서기장으로 개칭하였습니다. 1966년 작가 율리 다니엘과 안드레이 시냡스키의 재판은 억압적인 문화적 정책 회귀의 상징이었습니다. 유리 안드로포프 지휘하의 국가보안위원회는 스탈린 밑에서 누렸던 영향력을 거의 대부분 회복하였습니다.

1968

[프라하의 봄 진압 (브레즈네프 독트린)]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의 봄' 개혁 운동을 '브레즈네프 독트린'에 의거하여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을 투입해 강경하게 진압하며 공산권 내 사회주의 체제 유지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브레즈네프 정권 최초의 위기는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의 서기장 알렉산데르 둡체크에 의한 개혁에 의해 초래되었습니다. 둡체크는 인간의 얼굴을 한 공산주의라는 기치 아래, 언론의 자유화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였습니다. 이 개혁에 호응해 여러 가지 개혁 운동이 전개되었으며, 이 움직임은 음악제의 이름에서 유래된 이른바 프라하의 봄이라고 불렸습니다. 브레즈네프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 운동이 다른 공산주의 국가에도 파급되어 공산당 체제의 기반이 무너질 것을 염려하였고, 또 소련 블록 전체를 흔드는 위험성으로부터 이를 방관치 못했습니다. 브레즈네프는 그 해 7월에 둡체크를 수정주의자로 비판하였으며, 한 달 후인 8월 20일에는 바르샤바 조약 기구군을 투입해 프라하의 봄을 강경 진압하였습니다. 공산주의를 보호한다는 명분 때문에 위성국의 국내 문제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는 주장은 브레즈네프 독트린 및 제한 주권론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69

[중소국경분쟁 발생]

우수리강 전바오섬에서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 군대 간 무력 충돌이 발생, '중소국경분쟁'으로 확산되며 양국 관계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과의 관계는 1960년대 초에 대립이 시작돼 계속해서 악화되어 나갔습니다. 1964년 저우언라이가 모스크바를 방문했지만 관계 개선에는 이르지 못했으며, 1969년에는 우수리강의 전바오섬에서 양국 군대가 무력 충돌함으로써 중소국경분쟁이 발생했습니다.

1972

[SALT I 조인 및 데탕트 시작]

미국 닉슨 대통령의 모스크바 방문에 맞춰 제1차 전략 무기 제한 협정(SALT I)에 조인하며 서방과의 '데탕트(긴장 완화)' 시대를 열었습니다.

1971년에 시작된 중화인민공화국과 미국 간의 관계 개선은 국제 관계에 있어서 새로운 과정이 되었습니다. 브레즈네프는 미중 동맹의 구축을 막기 위해 미국과의 교섭이라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미국과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 원수인 닉슨과 브레즈네프는 제1차 전략 무기 제한 협정에 조인하였습니다. 1973년 파리 평화 협정에서 베트남 전쟁의 공식적인 종료가 이루어져 미소 관계의 장애가 제거되었고, 브레즈네프는 그 해 5월에 서독, 6월에는 미국을 공식 방문하였습니다.

1976

[소비에트 연방 원수 승진]

소비에트 연방 원수로 승진하며 군 최고 지위를 획득, 군사력을 통한 자신의 통치력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브레즈네프는 1976년 5월 7일 소비에트 연방 원수가 되었습니다.

1977

[국가 원수 겸직, 권력 절정]

만장일치로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 원수가 되어 서기장 직함과 함께 명실상부한 소련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브레즈네프의 지배는 1977년 만장일치로 소비에트 연방의 국가 원수가 되면서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국제적 정상 회담 운영에 집중했고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 침체는 무시했습니다.

1979

[아프가니스탄 침공]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며 데탕트 시대에 종지부를 찍고, 미국과의 신냉전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는 소련 경제에 막대한 부담을 주어 붕괴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브레즈네프 정권의 치명적인 결정은 1979년 12월, 소비에트 연방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아프가니스탄 침공의 결정은 브레즈네프의 측근 인물들에 의해 결정된 것이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데탕트의 종말을 불렀고, 미국의 곡물 거래 정지로 소비에트 연방의 경제 침체는 심각해졌습니다. 미국은 지미 카터 정권 아래 재군비 프로그램을 개시해, 후임 로널드 레이건 아래에서 가속시켰습니다. 소련과 미국은 군비 확장 경쟁을 하며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했습니다.

1982

[레오니트 브레즈네프 사망]

모스크바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하며 18년간의 소련 통치를 마감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소련의 붕괴를 예고하는 전조가 되었습니다.

1982년 3월, 브레즈네프는 심장 발작을 일으켜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1982년 11월 10일 오전 8시 30분에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에서 심장 발작으로 사망해 붉은 광장의 원훈 무덤에 매장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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