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 애치슨
연표
1893
[탄생]
미국 코네티컷주 미들타운에서 영국 성공회 성직자 에디워드 캠피언 애치슨과 캐나다 증류주 제조업자 가문의 엘리노어 거트루드 구더햄 사이에서 태어났다.
딘 구더햄 애치슨은 1893년 4월 11일 미국 코네티컷주 미들타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영국 성공회 성직자로 캐나다를 거쳐 미국으로 이주해 코네티컷주의 미국 성공회 주교가 되었고, 모친은 캐나다의 현저한 증류주 제조업자 가문의 손녀였다.
1919
[대법원 서기 근무]
하버드 로스쿨 졸업 후 미국 대법원의 루이스 브랜다이스 재판관의 서기로 2년간 근무하며 법률 경력을 시작했다. 이는 당시 영리한 법학생들이 대법원에서 서기로 근무하는 새로운 전통의 일환이었다.
그로턴 스쿨, 예일 대학교를 거쳐 1915년부터 1918년까지 하버드 로스쿨에서 수학했다.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미국 대법원의 루이스 브랜다이스 재판관의 서기로 근무하며 법률 분야에서의 실무 경험을 쌓았다. 이는 펠릭스 프랭크퍼터 교수의 추천으로 이루어졌다.
1933
[재무 부장관 임명]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재무 부장관으로 임명되며 정부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은행 예금 보험에 반대하고 금 가격 변동 계획에 회의적인 등 경제 문제에 보수적인 입장을 보였다.
평생 민주당원이었던 애치슨은 워싱턴 D. C.의 로펌에서 국제 법률 문제를 다루다 1933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재무 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은행 예금 보험을 반대하고 루스벨트의 금 가격 변동 계획에 비판적이었으나 공개적으로 루스벨트를 공격하지는 않았다.
1941
[대일본 석유 봉쇄 설계]
일본의 석유 공급 95%를 차단하는 미국-영국-네덜란드 연합 석유 봉쇄를 설계해 일본과의 긴장을 극대화시켰다. 이 봉쇄는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애치슨이 알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루어졌으며, 결국 태평양 전쟁 발발에 큰 영향을 미쳤다.
1940년 루스벨트 대통령에 의해 국무부 연장자 공무원으로 정부에 복귀한 애치슨은 연합국에 대항하는 미국에 의해 수행된 경제 전쟁의 상당 부분을 개발했다. 특히 1941년에는 일본의 석유 공급 95%를 차단하는 미국/영국/네덜란드의 석유 봉쇄를 설계했으며, 이는 일본과의 위기를 확대시키고 결국 전쟁 발발에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역사가들은 루스벨트가 봉쇄의 범위를 완전히 이해하고 찬성했는지에 대해 논란이 있지만, 애치슨은 이것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1944
[브레튼우즈 회의 참여]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국무부 대표로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전후 국제 경제 질서의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이 회의에서 국제 통화 기금(IMF), 세계은행, 관세 무역 일반 협정(GATT, 훗날 WTO)의 설립 기반이 마련되었다.
1944년 애치슨은 국무부 대표로서 브레튼우즈 회의에서 중앙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회의에서는 전쟁 이후의 국제 경제 기구가 설계되었으며, 국제 통화 기금, 세계은행과 세계 무역 기구로 전개될 관세 무역 일반 협정의 출생지가 되었다.
1947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 설계]
트루먼 대통령의 그리스와 터키 원조 청원서를 작성, 소련의 침략보다 전체주의의 위험을 강조한 연설로 트루먼 독트린으로 알려진 미국의 외교 정책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이와 함께 유럽 경제 원조 프로그램인 마셜 플랜을 설계했다.
1945년 후순 해리 S. 트루먼에 의해 국무 부장관으로 발탁된 애치슨은 이오시프 스탈린을 향한 회유적 태도를 버리고 헌신적이고 영향력 있는 냉전 시대의 정치가가 되었다. 1947년 그는 소련의 침략보다 전체주의의 위험을 강조한 연설로 그리스와 터키에 원조를 위한 트루먼 대통령의 청원서를 작성했으며, 이는 트루먼 독트린으로 알려진 미국의 외교 정책에 기본적인 변화를 특정 지었다. 또한 애치슨은 마셜 플랜으로 알려진 유럽에 경제 원조 프로그램을 설계했다. 그는 스탈린의 공산주의를 봉쇄하고 미래의 유럽의 투쟁을 방지하는 최고의 방향은 서유럽으로 경제적 번영을 회복하고 국가간 협력을 증진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1949
[제51대 국무 장관 취임 및 NATO 창설 주도]
미국의 제51대 국무 장관으로 임명되어 냉전 시기 소련 봉쇄를 위한 작업 틀을 만들었다. 그는 군사 동맹인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주요 설계자 중 한 명으로서 협정에 서명하며 미국의 역사적인 '얽힌 동맹' 회피 정책으로부터 극적인 변화를 이끌었다.
1949년 1월 21일 애치슨은 제51대 국무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직위에서 그는 격리를 위한 작업 틀을 만들었으며, 이는 처음에 애치슨의 정책 계획부의 우두머리를 지낸 조니 케넌에 의하여 공식화되었다. 애치슨은 군사 동맹인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의 주요 설계자였으며 미국을 위하여 협정에 조인하였다. 북대서양 조약 기구의 형성은 아무 '얽힌 동맹'을 피하는 역사적인 미국의 외교 정책 목적들로부터 극적인 출발이었다.
1950
[논란의 애치슨 선언 발표]
국가 언론 클럽에서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며 한국을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한다고 언급했다. 많은 학자들은 이 선언이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북한의 남침 시 미국이 중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오판하게 하여 한국 전쟁 발발에 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한다.
애치슨의 가장 논쟁적인 진술은 그가 한국을 미국의 방어선으로부터 제외한 1950년 1월 국가 언론 클럽 앞에서 아시아를 향한 미국의 정책에 대한 '애치슨 선언'으로 알려진 그의 연설이었다. 많은 학자들은 엄연하게 트루먼 행정부의 정책을 대표하였어도 애치슨 선언이 만약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것이라면 미국이 중재하지 않을 것을 소련의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결론을 내리는 데 이끌었다는 것이 확신되었다. 그런 소련이 지지한 남침이 그해 6월 25일에 일어나 한국 전쟁(1950년 ~ 1953년)으로 이끌었다.
[공화당으로부터 직무 해임 요구]
중국 국공 내전에서의 중국공산당 승리와 애치슨 선언에 대한 비판으로 미국 하원 공화당원들이 애치슨의 직무 해임을 만장일치로 결의했으나, 이는 소용이 없었다. 그는 조지프 매카시 상원의 반공주의 조사들에 기소된 국무부 사원들을 방어했다.
중국 본토에서 있던 국공 내전에서 1949년 중국공산당의 승리를 방지하는 데 미국의 실패는 애치슨이 자신의 솔직한 회상록에서 '기초 요소들의 공격'으로 언급하는 시기로 애치슨의 재직 기간으로 결성된 반대의 몇년을 촉진시켰다. 자신이 완고한 반공주의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유지하였어도 그는 공산당 정부들의 단순한 봉쇄보다 국내외적으로 공산주의를 공격하는 더욱 활동적인 역할을 취하지 않은 것으로 다양한 반공주의자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았다. 그와 국방부 장관 조지 마셜은 둘다 조지프 매카시 같은 남성들로부터 공격을 받았으며 애치슨은 유화 정책과 함께 봉쇄를 동일시하는 데 노력한 어떤 미국인들에게 웃음거리가 되었다. 1950년 12월 15일 미국 하원에서 공화당원들은 그가 직무로부터 제거될 것을 만장일치로 소용이 없다고 해결하였다.
1953
[국무 장관 퇴임 및 비공식 고문 활동]
국무 장관 임기가 만료된 후 개인 법률 실행으로 복귀했지만,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집권 기간 동안 민주당 정책 단체들의 우두머리를 맡는 등 계속해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유연한 대응 정책도 그의 단체가 작성한 문서에서 비롯되었다.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이 있던 후, 애치슨은 자신의 개인적 법률 실행으로 복귀하였다. 자신의 공식적인 정부 경력이 끝났어도 그의 영향력은 끝나지 않았다. 애치슨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세월 동안 민주당 정책 단체들의 우두머리를 맡았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유연한 대응 정책들의 거의는 이 단체에 의하여 작성된 직위 문서들로부터 왔다.
1964
[대통령 자유 훈장 수훈]
대통령 자유 훈장을 수훈했다. 이는 미국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수여하는 최고 영예 중 하나로, 그의 국가에 대한 봉사와 기여를 인정받은 결과였다.
1964년 애치슨은 대통령 자유 훈장을 받았다.
1970
[퓰리처상 수상]
국무부 재직 시절을 다룬 회고록 <창조에 오늘날 : 국무부에서 나의 세월>로 퓰리처상 역사 부문을 수상하며 작가로서의 역량도 인정받았다. 이 책은 그의 외교 정책 경험과 냉전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다.
1970년 애치슨은 국무부에서 자신의 재직 기간에 관한 그의 회상록 <창조에 오늘날 : 국무부에서 나의 세월>로 퓰리처상의 역사상을 수상하였다.
1971
[사망]
메릴랜드주 샌디스프링에 있는 자신의 농장집에서 78세의 나이에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는 아들 데이비드 캠피언 애치슨과 딸 메리 번디를 남겼다.
1971년 10월 12일 애치슨은 메릴랜드주 샌디스프링에 있는 자신의 농장집에서 78세의 나이에 엄청난 뇌졸중으로 사망하였다. 그는 아들 데이비드 캠피언 애치슨과 딸 메리 번디에 의하여 생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