딘 러스크
연표
1909
그의 부모는 학교 교사와 농부, 우편 근로자로 일하며 5명의 자녀에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가난 속에서도 자녀들이 가치 있는 교육을 받도록 노력했다.
1926
부모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고등학교 졸업 후 저축한 수입과 장학금을 활용하여 노스캐롤라이나주의 데이비드슨 칼리지에 입학 준비를 하였다.
1931
학군사관 프로그램에도 가입하며 학업에서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1934
[옥스퍼드 대학교 석사 학위 취득 및 미국 귀국]
명성 있는 로즈 장학금을 받아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국제 관계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미국으로 귀국했다.
귀국 후 캘리포니아주 밀스 칼리지의 교수진에 합류하며 학계 경력을 시작했다.
1937
[결혼 및 캘리포니아 대학교 교수진 합류]
버지니아 포이지와 결혼하여 3명의 자녀를 두었으며, 같은 해 캘리포니아 대학교의 교수진에 합류했다.
학계에서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며 가정을 꾸렸다.
1940
8년간 학군사관 회원으로 활동한 경력을 바탕으로 보병 대위로 임관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관리자와 분석가로서의 능력을 활용하는 직위로 옮겨졌다.
1941
1943년까지 군사 정보부에서 일하며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했고, 이후 인도로 옮겨 조지프 스틸웰 장군의 참모로 활동했다.
1945
[일본군 항복 문서 '일반명령 제1호' 초안 작성]
전략정책단 정책과 과장으로 재직 중, 일본군의 항복 조건이 담긴 항복 문서 '일반명령 제1호' 중 한반도와 극동 지역 관련 부분의 초안 작성 임무를 맡았다.
이 임무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아시아 지역의 질서 재편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1946
[군사 복무 제대 및 국무부 입부]
군사 복무에서 제대한 후, 헌신적이고 재능 있는 행정가로서의 명성을 얻으며 미국 국무부에 들어갔다.
국무부와 전쟁부에서 외교 계급을 거쳐 승진하며 국제 정세에 대한 중요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1947
1949년까지 이 직책을 수행하며 마셜 플랜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설립을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유럽-아시아 관계 전문가로 인정받았고, 유럽 식민주의로부터 해방되려는 아시아인들에게 동정적이었다.
1949
이 시기 그는 완고한 반공주의자로 알려졌으며, 미국이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세계를 방어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고 믿었다.
1950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국 차관보 취임]
미국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담당국 차관보로 임명되어 1951년 12월 9일까지 재직했다.
한국전쟁 발발 시기 미국의 외교 정책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한국전쟁 발발 사실 확인 지시]
한국전쟁 발발 직후, 극동국 섭외관으로부터 전쟁 발발 사실을 보고받고 주한 미국 대사 존 무초에게 서울 주재 특파원이 타전한 전쟁 발발 기사의 사실 여부를 즉각 확인하라고 지시했다.
이 지시는 미국의 초기 한국전쟁 대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52
다음 8년 동안 재단을 이끌며 저개발 국가와 빈곤 국가 내의 다양한 보건, 교육 및 경제 프로그램들을 감독했다. 이 기간 동안 미국의 선도적인 외교 전문가 중 한 명으로서 명성을 계속 쌓았다.
1961
[제54대 국무장관 취임]
존 F. 케네디 대통령 행정부에서 제54대 국무장관으로 취임하여 국가의 가장 강력한 외교 정책 입안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기쁘게 초청을 수락하며 백악관에 합류한 후, 관리자이자 행정가로서의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1962
이 위기는 미국이 쿠바에 설치된 소련 핵탄두 미사일 가능성을 발견한 후 미국과 소련이 전쟁 직전으로 치달았던 위험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케네디 대통령은 러스크의 신중한 스타일에 답답함을 느꼈고, 점차 로버트 F. 케네디, 로버트 맥나마라, 맥조지 번디 등 다른 내각 일원들의 의견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
1963
[케네디 암살 후 존슨 행정부에서 영향력 증대]
케네디 대통령 암살 후, 뒤를 이은 린든 B. 존슨 대통령 행정부에서 러스크의 시야와 영향력이 크게 증가했다.
러스크의 착실함, 충성심, 그리고 남부 출신 성분이 텍사스주 출신인 존슨 대통령에게 호소력이 있었다. 그 결과 국무장관은 위기에 처한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기획하는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부상했다.
1965
[베트남 전쟁 정책 주요 입안 및 옹호 시작]
베트남 전쟁을 공산주의를 저지하고 세계 민주주의 지도국으로서 미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중요한 시험대로 간주하며, 존슨 행정부의 베트남 정책을 강력하게 지지하고 입안했다.
미국이 남베트남을 공산국가 이웃들로부터 지키지 못한다면 중공이나 소련이 다른 국가들을 침략할 것이며, 이는 핵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미군 병력 투입에 대한 이전 반대를 철회하고 북베트남과 베트콩에 대한 점진적인 군사 전략 확대를 옹호했다. 존슨 대통령은 그의 조언에 따라 남베트남에 대규모 미군 병력을 투입하고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 작전을 시작했다.
1967
[글래스보로 회담 참석]
글래스보로 회담에서 레웰린 톰슨(소련 주재 미국 대사), 안드레이 그로미코(소련 외상) 등 주요 외교관들과 함께 회담에 참석했다.
1960년대 후반 베트남 전쟁이 심화되면서 국제 외교 무대에서의 그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1969
그는 8년 동안 국무장관을 지내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장기 재직한 국무장관이 되었으나,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의 역할로 인해 많은 미국인들에게 논쟁적인 인물로 기억되었다. 워런 코헨은 그를 "베트남에서 장기적이고 인기 없는 전쟁을 지킨 남자"로 기억될 것이라고 평했다.
1970
은퇴 후 학계로 돌아와 자신의 전문 지식을 학생들에게 전파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1977
또한 '딘 러스크 국제학 프로그램'도 그의 영예에 따라 이름 지어지는 등 그의 업적을 기리는 활동이 이어졌다.
1990
이 회고록과 다른 의견들에서 그는 베트남에서의 미국의 군사 개입이 정당하고 필요했다는 자신의 믿음을 굳건히 유지하며, 자신의 베트남전 역할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1994
일생 동안 미국의 외교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베트남 전쟁에 대한 그의 입장은 오랫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