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num_of_likes 112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연혁 피인용 수 1
작곡가, 피아니스트, 소련 예술가 + 카테고리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는 20세기 소비에트 러시아를 대표하는 천재 작곡가입니다. 정부의 극찬과 혹독한 비판 사이에서 고뇌하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교향곡과 현악 사중주를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통해 시대의 비극과 인간 본연의 감정을 깊이 있게 담아내 전 세계 음악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06

[천재 작곡가의 탄생]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에서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가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사회 현상에 깊은 관심을 보였고, 음악적 재능을 일찍이 드러내 주목받았습니다.

1915

[음악 여정의 시작]

9살이 되던 해, 어머니 소피아 바실리에프나로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또래보다 월등한 피아노 실력과 작곡 재능을 보이며 음악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1919

[음악 엘리트 코스 진입]

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하여 작곡과 피아노를 모두 공부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다양한 형식과 장르의 곡을 쓰며 음악적 깊이를 더했습니다.

1925

[졸업 작품으로 세계를 놀라게 하다]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작곡과를 졸업하며, 졸업 작품으로 첫 번째 교향곡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젊은 작곡가로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으며, 당대 최고의 지휘자들에게 소개되었습니다.

1926

[성공적인 데뷔]

제1번 교향곡이 마리코 지휘로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교향악단에 의해 성공적으로 초연되었습니다.

이 작품을 통해 쇼스타코비치의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1927

[재능을 인정받다]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피아노 부문 HM에 입상하며 연주자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았습니다.

같은 해 10월 혁명에 바치는 제2번 교향곡이 초연되었습니다.

1929

[혁명 주제의 교향곡]

'메이데이'라는 부제를 가진 제3번 교향곡을 작곡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교향곡 외에도 오페라, 발레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 깊은 관심을 보이며 활발히 창작했습니다.

1930

[다양한 작품의 초연]

레닌그라드 음악원 대학원을 수료하고, 오페라 <코>, 발레 <황금시대>, 그리고 제3번 교향곡 '메이데이'가 초연되었습니다.

젊은 예술가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1932

[논란을 부른 오페라와 결혼]

전통 오페라와는 다른 파격적인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작곡했습니다.

같은 해 니나 바르자르와 결혼하며 개인적으로도 중요한 변화를 맞이했습니다.

1934

[파격적인 오페라 발표]

1932년에 작곡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전위적이었으며, 후일 소련 당국의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됩니다.

1936

[숙청의 서막, 비판에 직면하다]

소련 공산당 기관지 '프라우다'에서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음악이 아니라 혼란'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큰 충격을 받았고, 완성된 제4번 교향곡의 초연마저 무산되어 무려 25년간 연기되었습니다.

이 비판은 쇼스타코비치의 창작 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당시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대한 예술가들의 압박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는 이 충격 속에서도 제4번 교향곡을 완성했지만, 결국 초연은 25년 후인 1961년에야 이루어졌습니다.

1937

[오명 씻고 국민적 영웅으로]

이전 비판을 딛고 제5번 교향곡을 작곡하여 혁명 20주년 기념 공연에서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작품은 '인간성의 확립'을 주제로 국민들에게 큰 호평을 받아 위기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페테르부르크 음악원 작곡 교수로 임용되었습니다.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한 비판 이후, 쇼스타코비치는 '형식주의' 비판을 깨기 위해 이 작품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이 작품의 주제를 '인간성(인격)의 확립'이라고 이야기했으며, 베토벤의 5번 교향곡과 비교될 만큼 높은 작품성을 인정받았습니다.

1938

[실내악 분야 진출]

현악 4중주곡 제 1번 C장조를 작곡하고 초연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다양한 음악적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39

[새로운 교향곡 발표]

제6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같은 해 므라빈스키 지휘로 레닌그라드 필하모니 교향악단에 의해 초연되었습니다.

1940

[국가적 영예, 스탈린상 수상]

피아노 5중주곡 G단조를 작곡하고 초연했습니다.

이 작품으로 소련 최고의 영예 중 하나인 스탈린상을 수상하며 국가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1941

[전쟁 속에서 피어난 불멸의 명작]

아돌프 히틀러의 레닌그라드 침공이라는 비극적인 상황에서 제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음악원의 대공 감시원으로 활동하며 전쟁의 참상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레닌그라드 포위 중 작곡된 이 작품은 곧 '레닌그라드 교향곡'으로 불리게 되었으며, 쇼스타코비치는 이 곡을 '전쟁의 시(詩)이며, 뿌리 깊은 민족정신의 찬가이다'라고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전쟁의 고통을 가장 극적으로 반영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1942

['레닌그라드' 교향곡, 전 세계를 감동시키다]

제7번 교향곡 '레닌그라드'가 초연되며 소련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습니다.

토스카니니 지휘의 NBC 교향악단이 미국 전 방송국을 통해 중계하여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전의 비판과는 달리 '프라우다'에서도 이 곡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1943

[전쟁의 고통을 담은 8번 교향곡]

제8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같은 해 므라빈스키 지휘로 초연했습니다.

이 작품은 전쟁의 고통을 가장 극적으로 반영한 교향곡으로 평가받습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작곡 교수도 겸하게 됩니다.

1945

[스탈린의 기대를 저버린 9번 교향곡]

제9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초연했습니다.

전쟁 종결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걸맞은 대작을 기대했던 스탈린은 경쾌하고 짧은 이 곡에 크게 실망했고, 이는 즈다노프 비판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1947

[정치적 역할 확장]

러시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소비에트 회의의 레닌그라드 대표 의원으로 취임하며 정치적인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1948

[즈다노프 비판의 희생양]

'즈다노프 비판'으로 인해 '형식주의자'로 낙인찍혀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직을 사임했습니다.

스탈린이 사망할 때까지 교향곡 작곡을 중단하고 선전용 영화음악만 작곡하는 암흑기를 보냈습니다.

1948년 1월에 진행된 음악 분야 토론회에서 전후 서유럽에서 도입된 형식주의적 사상과의 투쟁을 목표로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이 형식주의자로 비난받았습니다. 이 비판은 그의 창작 활동에 큰 제약을 가했습니다.

1949

[검열 속 대성공과 해외 활동]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를 작곡하고 초연하여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시기 미국을 방문하며 국제적인 활동도 이어갔습니다.

1950

[피아노곡 명작 탄생]

피아노를 위한 <24개의 전주곡과 푸가>를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그의 피아노곡 중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는 걸작입니다.

1952

[<24개의 전주곡과 푸가> 초연]

1950년부터 1951년에 걸쳐 작곡한 <24개의 전주곡과 푸가>가 초연되었습니다.

1953

[스탈린 사망, 새로운 시대 개막]

쇼스타코비치의 오랜 압박의 원인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이 사망했습니다.

이로써 쇼스타코비치는 오랜 침묵을 깨고 다시 창작 활동에 박차를 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스탈린 사후 첫 교향곡 발표]

스탈린 사망 후 8년 만에 제10번 교향곡을 발표하고 초연했습니다.

이 곡은 전 세계의 큰 관심을 받았으며, 그의 예술적 부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1954

[사랑하는 아내와의 이별]

첫 번째 아내 니나 바르자르가 사망하며 개인적인 슬픔을 겪었습니다.

1956

[혁명을 주제로 한 교향곡]

'1905년'이라는 부제를 가진 제11번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곡은 표제 음악적 특징을 지니며 혁명을 주제로 다룹니다.

1957

[11번 교향곡 초연]

1956년부터 1957년에 걸쳐 작곡된 제11번 교향곡 '1905년'이 초연되었습니다.

1960

[혁명 주제 교향곡 이어가다]

'1917년'이라는 부제를 가진 제12번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곡 역시 혁명을 주제로 한 표제 음악적 특징을 보입니다.

1961

[잃어버린 교향곡의 부활]

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로 복귀하며 교육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또한, 작곡된 지 무려 25년 만에 초연이 무산되었던 제4번 교향곡이 드디어 세상에 공개되어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같은 해 제12번 교향곡도 초연되었습니다.

제4번 교향곡은 쇼스타코비치의 작품 중 가장 많은 인원(총 134명)이 필요한 기악곡입니다. '프라우다'지의 비판 사건으로 초연이 연기되었던 이 작품이 오랜 기다림 끝에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1962

[새로운 삶과 논란의 오페라 재탄생]

이리나 스핀스카야와 재혼했습니다.

또한, 과거 '프라우다' 비판으로 상연이 금지되었던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을 개정한 오페라 <카테리나 이즈마일로바>가 초연되었습니다.

합창이 들어간 제13번 교향곡도 초연되며 다양한 활동을 펼쳤습니다.

1966

[건강 악화와 명작의 탄생]

심장 발작으로 쓰러지며 건강이 악화되었으나, 같은 해 첼로 협주곡 제 1번이 초연되었습니다.

이 시기 현악 4중주곡 제 11번도 작곡하며 꾸준히 창작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1967

[10월 혁명 50주년 기념]

<블로크의 시, 7개의 로만스>와 10월 혁명 50주년을 기념하는 교향시 <10월 혁명>이 초연되었습니다.

민족적 주제에 대한 깊은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1969

[죽음을 노래한 14번 교향곡]

합창이 포함된 제14번 교향곡 '죽은 자의 노래'를 작곡하고 초연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를 음악에 담아냈습니다.

1971

[마지막 교향곡, 15번]

생의 마지막 교향곡인 제15번 교향곡을 작곡하고 초연했습니다.

이 곡은 순수 기악곡으로, 심근경색으로 병상에 있으면서도 예술혼을 불태워 완성한 작품입니다.

1975

[위대한 거장의 마지막 숨결]

마지막 작품인 비올라 소나타를 작곡했습니다.

같은 해 8월 9일, 심장 발작으로 모스크바에서 69세를 일기로 영원히 눈을 감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세계 음악계에 큰 슬픔을 안겨주었습니다.

계속적인 치료에도 불구하고 심장병은 악화되었고,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