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보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당나라 최고 현실주의 시인이자 '시성(詩聖)'으로 추앙받는 두보의 험난하고도 위대한 일대기입니다. 몰락해 가는 뼈대 있는 가문의 후예로 태어나 젊은 시절 호기롭게 천하를 주유했던 그는, 안사의 난이라는 참혹한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백성들과 피눈물을 함께 흘렸습니다. 정치적 이상은 좌절되고 평생 가난과 유랑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굶주림 속에서도 나라를 걱정하는 우국충정과 민중의 고통을 붓끝에 담아냈습니다. 그의 시는 역사가 되었고, 고난 속에서 피어난 1,500여 수의 절창은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간의 마음을 울리는 불멸의 예술로 찬란히 빛나고 있습니다.
연표
712
[위대한 시성의 탄생]
당나라를 대표하는 현실주의 시인이자 '시성'으로 불리는 인물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황실과 맞닿은 뼈대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신동으로 불립니다. 훗날 중국 고전 문학에 지울 수 없는 거대한 발자취를 남기게 될 일생의 막이 오릅니다.음력 1월 1일(양력 2월 12일), 하남부 공현(현재의 허난성 궁이시)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할아버지 두심언은 초당 시대의 유명한 시인이었으며, 이러한 명망 있는 가문의 배경은 그가 일찍부터 학문을 닦고 문학적 재능을 꽃피우는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731
[청년기의 첫 유람]
젊은 혈기를 안고 고향을 떠나 여러 지역을 돌며 견문을 넓히기 시작합니다. 호연지기를 기르며 넓은 세상을 직접 마주하고 훗날 시 창작의 바탕이 될 다양한 경험을 쌓습니다. 끝없는 호기심으로 각지의 풍속과 문화를 생생하게 몸에 익힙니다.청년기에 접어든 두보는 산시성의 쉰샤(郇瑕) 지역을 유람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오월(吳越) 지역을 수년 동안 돌아다니며 강산의 아름다움과 풍속을 두루 체험하고 세상을 향한 식견을 넓혔습니다.
735
[향공에 응시하다]
긴 유람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에서 치르는 과거 시험에 응시하며 본격적인 출셋길을 모색합니다. 자신의 재능을 펼치고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큰 뜻을 품고 첫 도전에 나섭니다. 당찬 포부를 안고 정치 무대에 발을 들여놓을 준비를 마칩니다.당 현종 개원 23년, 오월 지역 유람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고향인 공현으로 돌아와 향공(鄉貢)에 참가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매진했던 그는 국가에 헌신하고자 하는 굳은 의지를 다졌습니다.
736
[낙방의 쓴잔을 마시다]
황도의 중심 낙양에서 열린 진사 시험에 당당히 응시했으나 뜻밖에 낙방의 고배를 마십니다. 이를 계기로 다시 긴 여행길에 올라 제나라와 조나라 일대를 자유롭게 누비며 청춘의 방황과 낭만을 만끽합니다. 시련을 딛고 오히려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기풍을 시에 담아냅니다.개원 24년 진사 시험에 떨어졌으나 크게 좌절하지 않고, 당시 연주 사마로 있던 아버지를 뵈러 가며 '제조(齊趙)의 유람'을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사냥과 노래를 즐기며 자유분방하고 쾌활한 청년기를 보냈으며, 초기 시 창작에 호방한 특징이 묻어나게 됩니다.
741
[수양산 아래의 삶과 혼인]
오랜 유람을 마치고 낙양으로 돌아와 산기슭에 거처를 마련합니다. 이 무렵 양 가문의 훌륭한 규수와 백년가약을 맺고 평안한 가정을 꾸립니다. 안정된 생활 속에서도 세상을 향한 큰 뜻과 창작의 열정은 여전히 가슴 깊이 품고 있었습니다.개원 29년 유람을 마치고 낙양으로 돌아와 수양산(首陽山) 아래에 집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사농소경을 지내던 양이(楊怡)의 딸 양씨와 결혼하여, 훗날 험난한 유랑 길에도 평생을 함께할 든든한 반려자를 맞이했습니다.
744
[이백과의 역사적인 만남]
낙양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또 다른 천재 시인 이백과 우연히 조우합니다. 서로의 비범한 재능을 깊이 알아본 두 사람은 훗날 양송 지역을 함께 유람하기로 약속하며 끈끈한 우정을 나눕니다. 중국 문학사에서 가장 빛나는 두 거장이 교감을 나눈 기념비적인 순간입니다.천보 3재 4월, 조정에서 물러나 낙양에 머물던 시선 이백(李白)과 운명적으로 만났습니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두 사람은 선도를 찾고 시문과 도를 논하며 한 이불을 덮고 잘 정도로 깊은 우정을 쌓았으며, 이후 '이두(李杜)'라 병칭되며 전설이 되었습니다.
747
[권신 이임보의 농간]
황제의 부름을 받고 다시 한번 장안에서 열린 과거 시험에 도전합니다. 하지만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횡포한 재상의 농간으로 인해 응시자 전원이 낙방하는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겪습니다. 정상적인 관직 진출의 길이 막혀버리며 권세가들을 쫓아다니는 험난한 장안 체류 생활이 시작됩니다.천보 6재 당 현종이 한 가지 재주라도 통달한 자를 부르는 칙령을 내려 시험을 치렀으나, 간신 이임보가 "야인 중에는 더 이상 숨은 현자가 없다(野無遺賢)"는 핑계로 전원을 낙방시켰습니다. 이후 장안에서 10년 동안 빈곤하게 지내며 고위 관료들을 찾아다니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751
[황제에게 바친 대례부]
황실의 성대한 제사를 웅장하게 기려 지은 글을 황제에게 바쳐 드디어 문학적 능력을 인정받습니다. 황제의 특별한 눈에 들어 집현원에 대기하는 영광을 얻지만, 간신의 방해로 실제 관직을 얻지는 못합니다. 출사의 희망이 눈앞에서 좌절되며 또다시 기나긴 빈곤과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냅니다.천보 10재 정월, 당 현종의 성대한 제사에 맞춰 지은 『삼대례부(三大禮賦)』를 바쳤습니다. 현종의 큰 칭찬을 이끌어냈으나 주관자가 여전히 이임보였던 탓에 직책 분배에서 밀려나 기약 없는 대기 발령 상태에 놓였습니다.
755
[마지못해 수락한 말단 관직]
오랜 기다림 끝에 변방의 작은 관직을 제안받지만 자존심이 상해 단호히 거절합니다. 이후 무기를 관리하는 말단 무관직을 제안받고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를 수락합니다. 원대한 정치적 포부를 품었던 그에게는 너무나도 늦고 초라한 출사의 시작이었습니다.처음에는 하서위(河西尉)라는 작은 직책이 내려졌으나 굴욕감을 느껴 거절했고, 결국 우위솔부병조참군(右衛率府兵曹參軍)이라는 창고 열쇠를 관리하는 말단 직책에 임명되었습니다. 사십 대 중반의 늦은 나이에 생계를 위해 소용없는 관직을 받아들인 슬픔이 그의 시에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참혹한 굶주림과 비극]
가족을 돌보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여 고향 집으로 당도했으나, 문을 열자마자 가족들의 참담한 통곡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극심한 가난과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어린 아들이 목숨을 잃는 처절한 비극을 마주합니다. 무능한 자신과 불합리한 현실 앞에서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통절한 시를 남깁니다.봉선현(奉先縣)에 남겨둔 가족들을 찾아갔으나 집에 들어서자마자 막내아들이 굶어 죽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비통한 경험과 장안 10년의 울분을 담아 불후의 명작 『자경부봉선현영회오백자(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를 지었습니다.
[안사의 난 발발]
국가를 뒤흔든 거대한 반란이 폭발하며 전 국토가 핏빛 전란의 깊은 소용돌이에 빠져듭니다. 태평성대를 구가하던 제국은 순식간에 잿더미로 변하고 백성들의 삶은 무참히 짓밟힙니다. 그의 삶 역시 국가의 몰락과 궤를 같이하며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피난의 험난한 여정으로 내몰립니다.천보 14재 11월, 평로절도사 안녹산이 반란을 일으키며 당나라 역사상 가장 끔찍한 내전인 '안사의 난'이 발발했습니다. 이듬해 6월 동관이 함락되고 현종이 장안을 버리고 촉으로 피난을 떠나는 등 제국이 붕괴될 엄청난 위기가 도래했습니다.
756
[반란군에 포로로 잡히다]
새롭게 즉위한 황제를 모시기 위해 가족을 숨겨둔 채 홀로 험난한 여정에 오릅니다. 하지만 도중에 반란군의 손에 붙잡혀 적의 수중인 장안으로 강제 압송되는 끔찍한 위기를 맞습니다. 적진 한가운데서 억류된 채 폐허가 된 수도를 바라보며 깊은 비애와 우국충정을 붓끝에 쏟아냅니다.지덕 원년 8월, 숙종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듣고 황제를 모시기 위해 영무(靈武)로 향하다가 반란군에게 포로로 잡혀 장안으로 끌려갔습니다. 이 억류 기간 동안 나라의 참담한 현실을 노래한 『춘망(春望)』, 『애강두(哀江頭)』 등의 명작을 남겼습니다.
757
[목숨을 건 장안 탈출]
자신의 관직이 낮아 반란군의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 포위망을 뚫고 목숨을 건 탈출을 감행합니다. 험난한 전선을 뚫고 새 황제가 있는 피난처까지 기적적으로 당도하여 뜨거운 충성을 맹세합니다. 헤진 옷과 낡은 신발 차림으로 나타난 그의 모습은 황제의 깊은 감동을 자아냅니다.지덕 2재 4월, 장안성 서쪽 금광문을 몰래 빠져나와 곽자의(郭子儀)가 이끄는 당나라 진영을 통과해 봉상(鳳翔)에 있던 숙종에게 피신했습니다. 찢어진 소매와 삼베 신발 차림으로 나타난 그의 굳건한 충성심에 황제와 신하들은 크게 감격했습니다.
[좌습유에 임명되다]
목숨을 건 탈출과 충성심을 크게 인정받아 황제에게 간언을 올리는 핵심 직책인 좌습유에 전격 발탁됩니다. 이로써 세인들에게 '두습유'라는 명예로운 칭호로 불리며 드디어 뜻을 펼칠 기회를 얻습니다.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올바른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결의로 의욕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합니다.757년 5월 16일, 숙종에 의해 종8품상에 해당하는 간관직인 좌습유(左拾遺)로 임명되었습니다. 평생의 소원이었던 정치적 포부를 펼칠 기회를 얻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방관(房琯)을 구명하려다 숙종의 분노를 사며 곧바로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758
[화주 사공참군으로 좌천]
조정의 정치적 세력 다툼에 부당하게 휩쓸려 결국 중앙에서 밀려나 지방 관직으로 강등되어 좌천됩니다. 충언을 올렸으나 철저히 외면받고 끝내 황도 장안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영원한 이별의 순간입니다. 정치적 이상은 무너졌지만, 도리어 전란에 휩싸인 백성들의 끔찍한 고통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하는 전환점이 됩니다.건원 원년 6월, 방관의 옥사에 연루되어 숙종의 눈 밖에 났고 화주 사공참군(華州司功參軍)이라는 지방직으로 좌천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끝으로 그는 평생 다시는 중앙 조정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한 많은 인생을 살아야 했습니다.
759
[불후의 명작 '삼리삼별']
임지로 향하는 길에 늙은이와 부녀자까지 전쟁터로 강제로 끌려가는 백성들의 비참한 참상을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합니다. 피눈물 나는 민중의 고통과 관군의 횡포를 생생하게 기록하며 현실주의 시의 위대한 절정을 완성합니다. 시대의 끔찍한 아픔을 외면하지 않고 써 내려간 이 연작시는 훗날 '시로 쓴 역사(시사)'라는 영광스러운 칭호를 얻게 됩니다.건원 2년 봄, 낙양에서 화주로 돌아가는 길에 당나라 군대의 징집으로 인해 찢어지는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했습니다. 이 처절한 현실을 바탕으로 지은 『신안리(新安吏)』, 『석호리(石壕吏)』 등의 '삼리삼별(三吏三別)'은 시대를 고발하는 그의 가장 뛰어난 대표작으로 평가받습니다.
[관직을 버리고 떠난 유랑]
극심한 굶주림과 전란 속에서 더 이상 부조리한 지방 관리의 역할을 지속할 수 없음을 깨닫고 미련 없이 관직을 버립니다. 가솔들을 이끌고 서남쪽을 향한 고단하고 끝없는 유랑 길에 오르며 천지사방을 떠도는 험난한 처지로 전락합니다. 벼랑 끝에 몰린 굶주림과 추위 속에서도 백성과 나라를 향한 따뜻한 시선만큼은 거두지 않았습니다.건원 2년 7월, 화주에서의 관직을 버리고 진주(秦州, 현재의 간쑤성 톈수이)를 거쳐 동곡(同谷)으로 향했습니다. 이때부터 시작된 끝없는 서남부 지역 표박 생활은 굶주림에 허덕이며 도토리를 주워 연명해야 할 만큼 참혹하고 절망적이었습니다.
[마침내 성도에 닿다]
굶어 죽을 위기를 간신히 넘기며 천신만고 끝에 산세가 험한 촉나라 땅으로 피난처를 옮깁니다. 연말에 이르러 성도에 무사히 당도하며 길고 험난했던 떠돌이 생활에 귀중한 쉼표를 찍습니다. 다행히 옛 지인들의 따뜻한 도움을 받아 마침내 정착의 기틀을 마련하고 한숨을 돌리게 됩니다.759년 12월, 동곡에서의 지독한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가족을 이끌고 험준한 산길을 넘어 촉나라 성도(成都)로 이주했습니다. 당시 성도윤으로 있던 옛 친구 엄무(嚴武)의 전폭적인 환대와 물심양면의 지원을 받아 마침내 극단적인 궁핍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760
[완화계 언덕의 초당 생활]
친지들의 도움을 받아 성도 서교의 맑고 아름다운 시냇가에 소박한 초가집을 짓고 여장을 풉니다. 오랜 전란과 떠돌이 유랑이 남긴 뼈아픈 상처를 달래며 자연과 벗 삼아 평화롭고 안온한 일상을 누립니다. 비로소 심리적 안정을 되찾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수많은 서정시를 쏟아내며 창작의 황금기를 맞이합니다.상원 원년 봄, 성도 서쪽 완화계(浣花溪) 물가에 거처를 짓고 머물렀는데, 이곳이 바로 훗날 수많은 문인들의 성지가 된 '성도 두보초당(杜甫草堂)'입니다. 이 시기 험난했던 과거를 잊게 해주는 빼어난 풍광 속에서 다수의 아름다운 서정시를 창작했습니다.
764
[검교공부원외랑 제수]
절도사로 다시 부임한 옛 벗의 간곡한 천거를 받아들여 다시 한번 관직에 이름을 올리며 막료 생활을 시작합니다. 비록 실권이 없는 자리였으나 훗날 세인들에게 '두공부'라는 친숙한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중요한 연원이 됩니다. 하지만 자유로운 시인의 영혼을 가졌던 그에게 얽매인 막료 생활은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광덕 2년 6월, 다시 성도로 돌아온 엄무의 표창을 받아 절도참모 겸 검교공부원외랑(檢校工部員外郎)에 임명되었습니다. 엄무의 그늘에서 안정을 얻었으나, 엄무의 난폭한 성격 탓에 오해가 생겨 자칫 목숨을 잃을 뻔한 아찔한 위기를 겪기도 했습니다.
765
[성도를 떠나는 나그네]
자신을 굳건히 보호해 주던 막역한 벗이자 후원자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더 이상 성도에 머물 곳을 잃고 맙니다. 든든한 바람막이가 사라진 초당을 뒤로한 채 늙고 병든 몸으로 또다시 가족을 이끌고 작은 배에 오릅니다. 양쯔강의 물결을 따라 하류로 향하며 끝을 알 수 없는 기약 없는 유랑에 다시 몸을 싣습니다.영태 원년 4월 엄무가 갑작스럽게 병으로 사망하자 가장 든든한 보호막을 잃은 두보는 5월 성도를 떠나 배를 타고 험난한 강줄기를 따라 남하했습니다. 가주, 융주, 충주 등을 거치며 그의 만년의 처량한 표박 생활이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766
[기주에서의 마지막 불꽃]
험준한 협곡이 자리한 기주에 임시로 정착하며 생애 마지막 창작의 거대한 불꽃을 화려하게 태워 올립니다. 나이 들고 쇠약해진 몸이었지만 협곡의 장엄한 풍경 속에서 머무는 2년여 동안 무려 수백 편의 다작을 쏟아냅니다. 웅장한 대자연과 고향을 향한 지독한 그리움이 절묘하게 빚어낸 만년 문학적 성취의 최고 절정기입니다.대력 원년 늦봄, 기주(夔州, 현재의 충칭시 펑제현)로 이주하여 약 2년 동안 머물렀습니다.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무려 400여 수의 시를 쏟아내며 『추흥팔수(秋興八首)』, 『등고(登高)』와 같은 후세에 영원히 남을 만년의 최고 걸작들을 완성했습니다.
770
[강물 위에서 스러진 별]
고향으로 살아서 돌아가고픈 애절한 소망을 가슴에 품은 채 작은 배에 몸을 싣고 떠돌다 끝내 차가운 물 위에서 눈을 감습니다. 한 시대의 참혹한 전란을 온몸으로 겪어낸 위대한 시성은 모진 병마와 가난에 시달리다 쓸쓸히 생애의 막을 내립니다. 안타까운 죽음 이후에야 그의 시는 영원한 생명을 얻어 세상을 찬란하게 비추는 불멸의 문학이 되었습니다.대력 5년 겨울,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상강(湘江)을 떠도는 배 안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했습니다. 극심한 당뇨병(소갈증)이나 풍질로 사망했다고 전해지며, 훗날 그가 피로 쓴 1,500여 수의 절창이 『두공부집(杜工部集)』으로 엮여 수많은 후대인들의 심금을 울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