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 (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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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95
1895
[분노가 지핀 항일의 불씨]
국모가 시해되고 단발령이 선포되자 전국 각지의 유생과 평민들이 분연히 일어납니다. 이들은 무기를 들고 관아를 습격하며 초기 형태의 무장 항일 운동을 전개합니다. 비록 자진 해산의 길을 걸었으나 향후 무장 투쟁의 굳건한 토대가 됩니다.명성황후 시해 사건(을미사변)에 분노한 유인석, 이소응 등의 유생들이 주도하여 봉기한 '을미의병'입니다. 이후 고종의 아관파천과 단발령 철회, 그리고 해산 권고 조칙에 따라 대부분 스스로 무기를 내려놓았습니다. 하지만 이때의 경험과 조직망은 훗날 전국적인 의병 활동과 독립군 편성의 귀중한 자산으로 작용했습니다.
1905
1905
[외교권 강탈에 맞선 항전]
강제적인 늑약 체결로 국가의 외교권이 박탈당하자, 다시 한번 전국적인 무장 봉기가 일어납니다. 전직 관료와 평민 출신 지도자들이 합세하여 항일 투쟁의 저변이 크게 확대됩니다. 단순한 반발을 넘어선 본격적인 구국 전쟁의 성격을 띠기 시작합니다.을사늑약의 원천 무효를 주장하며 민종식, 최익현, 신돌석 등이 중심이 되어 거병한 '을사의병'입니다. 특히 일개 평민 출신이었던 의병장 신돌석의 등장은 항일 투쟁이 양반 신분 계급을 넘어 전 민족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사건으로 평가받습니다.
1907
1907
[정규군의 합류와 확전]
제국주의 세력에 의해 대한제국 군대가 강제로 해산당하는 수모를 겪습니다. 해산된 군인들이 최신 무기를 들고 의병에 대거 합류하면서 조직력과 전투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합니다. 이때부터 무장 항쟁은 전면적인 의병 전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고종의 강제 퇴위와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에 이은 군대 해산 조치에 반발한 시위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이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체계적으로 훈련받은 정규 군인들의 합류로 의병은 진법과 전술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고, 일본군 정규 부대와의 정면충돌이 격화되는 '정미의병' 양상을 띠게 되었습니다.
1908
1908
[심장부를 노린 최후 진격]
전국 단위의 연합 의병 부대가 결성되어 일제의 통치 심장부인 수도 탈환을 시도합니다. 각지의 병력을 규합해 진격했으나 지휘관의 부재와 압도적인 화력 차이로 작전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국내에서의 대규모 무장 투쟁은 큰 타격을 입게 됩니다.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만여 명의 '13도 창의군'이 결성되어 서울 탈환을 목표로 동대문 밖 30리 밖까지 진격한 서울 진공 작전입니다. 하지만 작전 직전 이인영이 부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르겠다며 귀향하고, 일본군의 우세한 화력과 선제 기습 공격에 밀려 결국 후퇴하고 맙니다.
1910
1910
[국권 피탈과 근거지 이동]
국가의 주권을 완전히 상실하는 치욕스러운 조약이 강제 공포되며 나라를 잃게 됩니다. 일제의 무자비한 토벌로 국내 활동이 불가능해지자, 항일 무장 세력은 국경을 넘어 국외로 이동합니다. 척박한 이국땅에서 장기적인 독립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험난한 여정이 시작됩니다.한일병합조약(경술국치) 체결 이후 일제의 무단통치와 가혹한 '남한 대토벌 작전'이 이어졌습니다. 살아남은 의병과 독립지사들은 서간도, 북간도, 연해주 등지로 망명하여 한인 촌락을 형성하고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하는 데 매진했습니다. 이는 향후 거대한 국외 독립군 군단이 형성되는 토양을 마련한 역사적 변곡점입니다.
1911
1911
[항일 무장 투쟁의 요람]
국외 독립운동 기지 개척의 일환으로 서간도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군사 학교가 설립됩니다. 전 재산을 바친 애국지사들의 헌신으로 척박한 땅에서 체계적인 군사 훈련이 시작됩니다. 수많은 정예 군관을 배출하며 훗날 무장 투쟁의 중추적인 리더십을 형성합니다.이회영, 이동녕 등 신민회 간부들이 서간도 삼원보에 설립한 '신흥강습소'가 그 모태입니다. 훗날 '신흥무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1920년 폐교될 때까지 약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습니다. 이곳 출신들은 봉오동 전투, 청산리 대첩은 물론 의열단과 한국광복군 등 독립운동 전반에서 핵심적인 지휘관으로 맹활약했습니다.
1919
1919
[평화 시위에서 무장 투쟁]
전 민족적인 비폭력 저항 운동이 일제의 잔혹한 총칼 앞에 유혈 진압되는 참상을 겪습니다. 이를 계기로 평화적인 방법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뼈저린 교훈을 얻게 됩니다.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무장 독립군의 편성과 조직화가 폭발적으로 가속화되는 기폭제가 됩니다.3.1 운동의 평화적 만세 시위에 대한 일제의 제암리 학살 등 무자비한 진압은 한민족 전체에 큰 분노와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로 인해 '무장 투쟁'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무장독립 절대론'이 대중적으로 확산되었고, 수많은 청년들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북간도와 서간도의 독립군 부대에 자원입대하게 됩니다.
1919
[전설적인 유격 부대 창설]
평민 의병장 출신 지도자를 중심으로 북간도 지역에서 강력한 무장 부대가 결성됩니다. 국경을 넘나들며 일본군 수비대와 경찰서를 습격하는 치고 빠지기식 유격전을 활발히 전개합니다. 압도적인 전과를 올리며 고통받는 동포들에게 통쾌한 승리의 희망을 안겨줍니다.포수 출신인 홍범도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창설된 '대한독립군'입니다. 이들은 주로 함경북도 갑산, 혜산 일대로 깊숙이 진입하여 일제의 군경 시설을 파괴하고 친일파를 처단하는 등의 '국내 진공 작전'을 활발히 수행했습니다. 뛰어난 기동력과 산악 지형을 활용한 매복 전술로 일본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습니다.
1919
[암살과 파괴의 비밀 결사]
만주 지린성에서 적국의 심장부를 직접 타격하기 위한 급진적인 무장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됩니다. 요인 암살과 주요 식민 통치 기관 파괴를 목표로 목숨을 건 비밀 작전을 수행합니다. 일제 수뇌부에 극도의 공포를 심어주며 정규전과는 다른 형태의 항일 투쟁을 엽니다.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여 신흥무관학교 출신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중심이 되어 창설한 '의열단'입니다. 단재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을 절대적인 행동 지침으로 삼아 조선총독부, 종로경찰서 등 일제의 심장부에 폭탄을 투척하며 맹활약했습니다. 단원들은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 항상 자결용 총탄을 품고 다녔습니다.
1920
1920
[정규군을 상대로 첫 대승]
국경을 넘어 침입한 적의 정규 부대를 험준한 산악 지대로 깁숙이 유인해 포위망을 구축합니다. 연합 부대의 완벽한 매복과 기습 공격에 적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내고 쫓겨갑니다. 독립 전쟁 역사상 적의 정규군을 상대로 거둔 최초이자 가장 통쾌한 대승리입니다.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군무도독부, 안무의 국민회군 등이 연합한 '대한북로독군부'가 만주 지린성 봉오동 골짜기에서 추격해오던 일본군 월강추격대대를 완전히 궤멸시킨 '봉오동 전투'입니다. 이 압도적인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고, 무장 투쟁의 가능성과 희망을 온 세계에 증명했습니다.
1920
[임시정부 직할 무장 부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휘를 직접 받는 특공 부대가 만주에서 체계적으로 조직됩니다. 미국 의원단의 방한 일정에 맞춰 일제의 만행을 국제 사회에 폭로하기 위한 국내 진공을 계획합니다. 결사대를 파견해 적의 주요 기관에 폭탄을 투척하며 무력 항쟁 의지를 천명합니다.임시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의 지시로 오동진 등이 결성한 '광복군총영'입니다. 1920년 8월 미국의회 시찰단이 내한할 때를 즈음하여, 3개 결사대를 국내로 은밀히 파견해 평남도청, 평양경찰서 등에 폭탄을 투척하는 대규모 무장 시위 작전을 성공적으로 전개했습니다.
1920
[무장 투쟁 사상 최대 승리]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포위망을 좁혀오는 적의 대군을 엿새 동안 치열한 백병전과 유격전으로 산산조각 냅니다. 탁월한 전술과 지형의 이점을 활용하여 수적 열세를 극복하고 적군을 무너뜨립니다. 국외 독립군 전사에서 가장 위대한 승리이자 영원히 빛날 금자탑을 세웁니다.김좌진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등 연합 부대가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등지에서 10여 차례의 맹렬한 교전을 벌여 일본군 1개 여단 병력을 섬멸한 '청산리 대첩'입니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1천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되며, 이는 열악한 무기와 환경 속에서도 조국 독립을 향한 결기가 만들어낸 기적적인 승리입니다.
1920
[뼈아픈 보복과 학살의 비극]
연이은 참패에 앙심을 품은 적군이 한인 거주지에 무차별적인 보복 공격과 방화를 자행합니다. 수많은 무고한 동포들이 끔찍하게 학살당하고 삶의 터전 전체가 잿더미로 변합니다. 독립군의 기반을 원천적으로 무너뜨리려는 잔혹한 만행으로 인해 조직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습니다.청산리 대첩에서 뼈아픈 패배를 당한 일본군이 '간도 참변(경신참변)'을 일으켜 북간도 일대의 한인 마을을 초토화시켰습니다. 1921년 초까지 이어진 이 학살로 수천 명에서 많게는 만 명 이상의 한인 양민이 희생되었습니다. 군수물자와 식량 지원의 젖줄이었던 동포 사회가 파괴되자, 독립군 부대들은 생존을 위해 매서운 혹한을 뚫고 북상을 감행해야만 했습니다.
1921
1921
[생존을 위한 대규모 연합]
가혹한 탄압과 토벌을 피해 북상한 여러 무장 부대들이 대규모 연합 군단을 새롭게 결성합니다. 흩어진 병력을 하나로 규합하고 단일화된 지휘 체계를 확립하여 조직을 정비합니다. 안전한 거점을 확보하고 재기를 도모하기 위해 국경을 넘어 러시아 영토로의 이동을 결정합니다.간도 참변을 피해 러시아 국경 지대인 밀산(Mishan)에 집결한 10여 개의 독립군 단체들이 서일을 총재로 추대하며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했습니다. 총 병력은 약 3,500명에 달했으며, 이들은 무기 지원과 안전한 활동 공간을 보장받기 위해 볼셰비키 혁명군이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령 자유시(스보보드니)로의 이주를 선택합니다.
1921
[붉은 군대 배신과 대분열]
동맹이라 굳게 믿었던 타국 군대의 무장 해제 요구에 응하지 않자 무자비한 기습 공격을 받습니다. 내부의 이념과 파벌 갈등까지 겹치며 수많은 병력을 잃고 거대 조직이 와해되는 참극이 벌어집니다. 가장 치명적인 타격을 입은 독립 무장 투쟁 역사상 최악의 비극적 사건입니다.러시아 스보보드니(자유시)에 집결한 독립군 사이에서 지휘권을 둘러싼 내부 파벌 투쟁(이르쿠츠크파 vs 사할린파)이 발생했습니다. 이에 개입한 소련 적군이 무장 해제를 강요하며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선제공격을 감행해 수백 명의 독립군이 사살되거나 익사하고 포로로 잡혔습니다. 이 '자유시 참변'으로 인해 만주 지역의 무장 독립운동 역량은 회복하기 힘들 정도로 궤멸적인 타격을 입었습니다.
1922
1922
[잿더미에서 재건된 조직]
분열과 참변의 끔찍한 상처를 극복하고 남만주 일대의 단체들이 다시 하나로 뭉치기 시작합니다. 단순한 군사 조직을 넘어 민간 자치 행정까지 아우르는 포괄적인 연합 기구를 출범시킵니다. 무너진 항일 무장 투쟁을 재건하고 불안에 떠는 동포 사회를 보호하기 위한 새로운 구심점이 됩니다.환인현에 모인 남만주 지역의 8개 독립운동 단체가 뜻을 모아 통합하여 '대한통의부'를 결성했습니다. 김동삼, 오동진 등이 주도했으며, 무장 부대인 의용군을 편성하여 국내 진공 작전과 친일 밀정 처단 등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하지만 고질적인 이념 대립과 파벌 차이로 인해 훗날 조직이 다시 분열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1923
1923
[남만주 자치 행정 기구]
기존 연합체에서 갈라져 나온 세력이 상하이 임시정부와 공식적으로 연계하여 새로운 조직을 구성합니다. 험준한 국경 지대에서 무장 항쟁을 주도하며 행정과 군사를 겸비한 정부 형태의 조직으로 발전합니다. 만주 지역을 통치하는 3부(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성립의 첫 신호탄을 쏘아 올립니다.정식 명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입니다. 임시정부의 직할 군단임을 명확히 선언했으며, 압록강 연안의 집안현 일대를 중심으로 자치 행정과 유격전을 병행했습니다. 1924년에는 압록강을 순시하던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저격하려다 아쉽게 실패한 '마적달 사건'으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1924
1924
[남만주 새로운 통합 기구]
기존 단체들이 해체된 후 그 기반 위에 더욱 강력한 군사 조직과 자치 행정 기관이 설립됩니다. 입법, 사법, 행정의 현대적인 삼권 분립 체제를 갖추며 사실상의 독립적인 국가 기관 역할을 수행합니다. 체계적인 세금 징수와 민족 교육을 통해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든든한 기반을 다집니다.대한통의부를 비롯해 길림과 무순 지역의 여러 분산된 단체가 통합하여 지린성에서 '정의부'를 결성했습니다. 이상룡, 김동삼 등이 이끌었으며, 3부 중에서 가장 거대한 세력과 탄탄한 조직망을 자랑했습니다. 자체적인 헌장 제정과 의회(중앙의회) 구성 등을 통해 교민 사회의 안정과 독립군 양성에 절대적으로 기여했습니다.
1925
1925
[북만주 호령할 자치 단체]
비극적인 참변 이후 북만주로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군사 지도자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단체를 출범시킵니다. 군사 활동에 최우선 중점을 두어 정예 군대 양성과 무장 투쟁에 조직의 총력을 기울입니다. 이로써 광활한 만주 지역에 3개의 강력한 독립군 자치 정부인 이른바 '3부 체제'가 완성됩니다.김좌진 장군을 위원장으로 하여 대한독립군단, 북로군정서 출신 핵심 인사들이 북만주 닝안현에서 조직한 '신민부'입니다.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유사시에는 전투에 참여하는 '둔전병 제도'를 강력히 실시하여 군사 훈련과 자급자족을 동시에 도모했습니다. 항일 무장 투쟁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노력이었습니다.
1925
[현상금이 걸린 최악의 위기]
적국과 현지 군벌 사이에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한 치명적이고 추악한 밀약이 체결됩니다. 무장 세력에 대한 체포와 인도가 막대한 현상금을 조건으로 거래되며 전례 없는 위협에 직면합니다. 합법적인 활동 공간이 완전히 사라지고 수많은 지사가 밀고로 희생되는 혹독한 시련기를 맞이합니다.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와 만주 군벌 장쭤린이 맺은 '미쓰야 협정(한인 취체에 관한 협정)'입니다. 중국 관헌이 한국 독립운동가를 체포하여 일본 경찰에 인계하면 포상금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핵심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독립군들은 일본군뿐만 아니라 돈에 눈이 먼 중국 군벌과 마적단의 표적이 되어 극심한 병력 손실을 겪었습니다.
1928
1928
[분열 딛고 추진된 통합]
거센 외부의 탄압에 맞서기 위해 삼분오열된 세력을 하나로 모으려는 치열한 통합 노력이 시작됩니다. 단일화된 연합체 구성을 최우선 목표로 북만주 일대의 단체들이 모여 새로운 기구를 발족합니다. 완벽한 단일 대오 형성은 아쉽게 실패했으나 향후 항일 역량 결집을 위한 중요한 징검다리가 됩니다.만주 지역 3부(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통합 운동의 결과물로, 촉성회파를 중심으로 북만주 지역의 신민부 일부와 참의부 일부가 연합하여 결성한 '혁신의회'입니다. 비록 이념 차이와 주도권 다툼으로 인해 만주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조직으로의 발전에는 한계를 보였지만, 이후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 창설의 결정적인 모태가 되었습니다.
1929
1929
[남만주 유일 자치 정부]
치열했던 통합 운동의 또 다른 결실로 남만주 지역의 단체들이 합심하여 강력한 단일 자치 정부를 출범시킵니다. 민간 행정과 군사 조직을 분리하는 보다 현대적인 통치 체제를 과감히 도입합니다. 이후 당, 정, 군의 삼위일체 체계를 완벽히 갖추며 한 차원 높은 항일 투쟁의 기반을 마련합니다.협의회파를 중심으로 정의부 중심의 세력과 신민부, 참의부의 일부가 연합하여 남만주에서 결성한 '국민부'입니다. 국민부는 교민 자치와 민정 행정을 전담하고, 훗날 정치 조직인 조선혁명당과 군사 조직인 조선혁명군을 창설하여 이른바 '당·정·군'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이는 조직적인 무장 투쟁을 위한 고도화된 시스템 구축이었습니다.
1931
1931
[적의 적은 동지, 한중 연합]
제국주의 군대가 침략 전쟁을 기습적으로 일으키며 대륙 전체가 거대한 화약고로 돌변합니다. 공통의 거대한 적을 상대하게 된 이웃 국가의 무장 세력과 자연스럽게 군사 동맹을 맺게 됩니다. 극심한 탄압으로 침체되었던 무장 투쟁이 대규모 연합 작전으로 화려하게 부활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일본 제국주의가 철도 폭파 자작극(류탸오후 사건)을 핑계로 만주를 전격 침략한 '만주사변'이 발발했습니다. 일본의 노골적인 야욕에 생존의 위협을 느낀 중국의 반만항일군(호로군, 구국군 등)은 한국 독립군 부대들과 본격적인 연합 전선을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이 다시금 맹활약할 수 있는 군사적 환경이 극적으로 조성된 것입니다.
1932
1932
[북만주 흔든 연합군 승전]
북만주 일대에서 맹활약하던 독립군 부대가 동맹국 군대와 연합하여 적의 핵심 전략 요충지를 기습 공격합니다. 치열한 공방전과 백병전 끝에 적의 수비대를 완전히 격파하고 성을 점령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한중 연합 작전의 압도적인 위력을 과시하며 대륙 전역에 항일의 기운을 들불처럼 고취시킵니다.지청천 장군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지린성의 교통 요지인 쌍성보를 점령한 '쌍성보 전투'입니다. 일본군과 만주국군 연합 부대를 대파하고 막대한 무기와 식량을 노획하는 등 눈부신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후 사도하자, 동경성 전투 등 북만주 지역 한중 연합 작전의 화려한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1933
1933
[남만주 수호한 결사 항전]
남만주를 굳건히 지키던 군대가 동맹군과 함께 적의 대대적이고 파상적인 공세에 맞서 결사 방어전을 펼칩니다. 극심한 병력과 화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맹렬한 기세로 적을 몰아내고 기적 같은 대승을 거둡니다. 조직의 존립을 위협하던 치명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무장 세력으로서의 위상을 드높입니다.양세봉 장군이 이끄는 조선혁명군이 중국 구국군과 연합하여 랴오닝성 신빈현 영릉가에서 일본군과 만주국군 대부대를 크게 무찌른 '영릉가 전투'입니다. 영릉가 전투와 이어지는 흥경성 전투의 잇따른 승리로 조선혁명군은 남만주 지역에서 불패의 신화를 썼지만, 안타깝게도 이듬해 양세봉 사령관이 밀정의 함정에 빠져 전사하며 쇠퇴기를 맞게 됩니다.
1935
1935
[이념 넘어선 좌우 합작]
이념으로 분열된 무장 세력을 하나로 거대하게 통합하기 위해 좌익과 우익 세력이 총망라된 단일 정당이 창립됩니다. 국외에 뿔뿔이 흩어진 수많은 독립운동 단체들이 대거 합류하여 전례 없이 강력한 항일 공동 전선을 구축합니다. 단일화된 정규 군대 양성을 위한 가장 든든한 정치적 구심점이 마련됩니다.중국 난징에서 김원봉, 지청천, 조소앙 등 거물급 인사들이 주도하여 의열단,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5개 단체가 연합해 창당한 '민족혁명당'입니다. 비록 노선 차이로 우파 인사들 일부가 이탈하여 완전한 결속을 끝까지 이어가진 못했으나, 무장 투쟁 세력 전체의 대동단결을 향한 항일 운동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정치적 성과 중 하나로 꼽힙니다.
1938
1938
[대륙 최초 정규 한인 부대]
전면전으로 치닫는 대륙의 참혹한 전장에서 타국 정부의 공식적인 재정 지원을 받는 한국인 최초의 정규 군사 조직이 탄생합니다. 뛰어난 어학 능력과 선전 전술을 바탕으로 대적 심리전과 정보전에서 종횡무진 맹활약합니다. 최전방 전투부터 포로 심문까지 다양한 전장에서 독보적인 기여를 남깁니다.중국 한커우(우한)에서 김원봉의 주도 아래 창설된 '조선의용대'입니다. 중국 관내(만리장성 이남)에서 결성된 역사상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로, 유창한 중국어와 일본어 실력을 무기로 선전포고, 삐라 살포, 일본군 포로 심문 등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훗날 병력의 일부는 북상하여 조선의용군이 되고, 나머지는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합류하며 무장 역량을 극대화합니다.
1940
1940
[태어난 조국의 정규 군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륙의 깊숙한 피난처에서 마침내 오랜 숙원이었던 정규 국가 군대를 창설하고 성대한 선포식을 거행합니다. 수십 년간 흩어져 각개 전투를 벌이던 항일 무장 세력을 하나로 완벽하게 집결하는 거대한 용광로가 됩니다. 국제 사회에 국가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당당한 참전국으로 나설 준비를 마칩니다.중국 충칭에서 지청천을 총사령관, 이범석을 참모장으로 하여 임시정부 정규군인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중국 국민당의 작전 통제(9개 준승)를 받는 수모를 겪었으나 끈질긴 외교 노력으로 이를 폐기하고 자주적인 군사 작전권을 회복했습니다. 이듬해 조선의용대 병력까지 흡수하며 사실상 한민족 무장 독립운동 진영을 하나로 완성한 역사적인 결실입니다.
1941
1941
[제국주의 향한 전면전 선포]
세계 대전의 참화가 태평양으로 번지자, 임시정부는 주권 국가의 당당한 자격으로 적국에 공식적인 선전포고를 단행합니다. 동맹국과 굳게 연합하여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전면적으로 참여할 것을 전 세계에 선언합니다. 단순한 게릴라 저항 단체가 아닌 교전국으로서의 확고한 지위를 국제 사회에 명확히 밝힙니다.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소앙이 기초한 '대일선전포고문'을 즉각적으로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전승국의 지위를 얻어 완전한 주권 독립을 보장받기 위한 매우 치밀하고 중요한 정치·외교적 포석이었습니다.
1943
1943
[세계를 누비는 연합군 참전]
최정예 엘리트 요원들로 구성된 특수 공작대가 동남아시아의 험준한 열대 우림 전선에 파견되어 동맹국 군대와 어깨를 나란히 합니다. 적군의 무전 도청, 암호 해독, 전단 살포 등 고도의 특수 임무를 완벽하게 수행하며 연합군의 승리에 절대적으로 기여합니다. 활동 무대를 세계로 넓히며 정예 군대의 뛰어난 작전 능력을 거침없이 입증합니다.한국광복군 특수 공작대 9명이 영국군의 공식적인 파견 요청으로 인도-미얀마(버마) 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인면전구공작대(印緬戰區工作隊)'로 불린 이들은 뛰어난 어학 실력을 바탕으로 일본군 포로 심문, 대적 회유 방송, 적 문서 번역 등의 심리전과 정보전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한국광복군이 연합군과 수행한 가장 성공적인 국제 공동 군사 작전으로 꼽힙니다.
1945
1945
[조국 탈환 멈춰진 시계]
동맹국의 최고 정보국과 합작하여 조국 땅에 은밀히 강하할 대규모 비밀 공수 작전을 철저하게 준비합니다. 가혹한 훈련을 마친 정예 요원들이 출격 명령만을 기다리던 중, 적국의 갑작스러운 무조건 항복으로 작전이 허무하게 무산됩니다. 마침내 꿈에 그리던 해방을 맞이하지만 스스로의 피와 땀으로 조국을 되찾지 못한 짙은 아쉬움을 남깁니다.미국 전략정보국(OSS, 현 CIA의 전신)과 합작하여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을 치밀하게 계획하고 한반도 침투를 위한 특수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이범석, 김학규 등의 지휘 아래 '국내 정진군'을 편성하여 국내 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으나,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으로 작전은 끝내 실행되지 못했습니다. 김구 주석은 자력 탈환의 기회가 무산된 것을 두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아쉬움'이라며 깊이 통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