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요시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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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군, 정치인, 도쿠가와 종가 당주 + 카테고리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으로, 격동의 막말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반 막부 세력과의 대립 속에서도 대정봉환을 통해 265년간 이어진 막부의 막을 스스로 내렸습니다. 이후 메이지 유신이라는 새 시대가 열리는 데 기여했으며, 은퇴 후에는 정치적 야심 없이 취미 생활에 몰두하며 여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일본 역사상 마지막 세이이타이쇼군으로 기록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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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37

[에도 미토 번에서 태어나다]

에도 막부 미토 번의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마쓰다이라 시치로마로'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덴포 8년(1837년) 9월 29일, 에도 고이시카와의 미토 번 번저에서 미토 번 제9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일곱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아리스가와노미야 오리히토 친왕의 딸 요시코 여왕이었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마쓰다이라 시치로마로였다.

1847

[쇼군의 후계 물망에 오르다]

쇼군 이에요시의 의향으로 어삼경 히토쓰바시 가문의 당주가 되어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라 이름하였으며, 쇼군의 후계자로 거론될 만큼 주목받았다.

고카 4년(1847년) 8월 1일 로주 아베 마사히로가 아키무네를 어삼경 히토쓰바시 집안의 뒤를 잇게 하라는 12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요시의 의향을 미토 번에 전달했다. 아키무네는 8월 15일에 미토를 떠나 9월 1일에 히토쓰바시 집안을 이었고, 12월 1일에 이에요시로부터 이름자 한 자를 받아 '히토쓰바시 요시노부'라 이름하였다. 이에요시는 종종 히토쓰바시 가문 저택을 방문하며 요시노부를 쇼군의 뒤를 이을 유력한 후보자로 생각했다.

1859

[막부 정치에 반발하다]

천황의 칙허 없이 미일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대노 이이 나오스케를 힐문하다가 '안세이의 대옥'으로 은거 근신 처분을 받았다.

가에이 6년(1853년) 페리 제독의 흑선 내항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 와중에 쇼군 이에요시가 병사하고, 병약한 이에사다가 쇼군이 되면서 후사 문제가 떠올랐다. 요시노부를 지지하는 히토쓰바시 파는 이이 나오스케가 지지하는 난키파에 밀려 힘을 잃었다. 안세이 5년(1858년) 대로가 된 이이 나오스케는 천황 칙허 없이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조인했고, 요시노부는 아버지 나리아키와 함께 에도로 가서 이를 힐문하다가 이듬해 안세이 6년(1859년) '안세이의 대옥'으로 은거 근신 처분을 받았다.

1862

[개혁의 선봉에 서다]

사쿠라다문 밖의 변으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된 후, 사쓰마의 시마즈 히사미쓰와 교토 조정의 칙사 개입으로 쇼군 후견직에 임명되어 '분큐의 개혁'이라는 막부 정치 개혁을 추진했다.

안세이 7년(1860년) 3월 3일 '사쿠라다문 밖의 변'으로 이이 나오스케가 암살되고, 10월 18일 요시노부에 대한 근신이 해제되었다. 분큐 2년(1862년) 시마즈 히사미쓰와 교토 조정의 칙사 오하라 시게토미가 에도로 들어와 막부 지도부 인사에 개입, 7월 6일 요시노부를 쇼군 후견직으로, 마쓰다이라 슌가쿠를 정사총재직으로 임명시켰다. 요시노부와 슌가쿠는 '분큐의 개혁'이라 불리는 막부 정치 개혁을 단행했다.

1866

[마지막 쇼군이 되다]

제2차 조슈 정벌의 실패와 쇼군 이에모치의 사망 후, 일본의 개국을 지향하는 태도를 명확히 하며 도쿠가와 막부의 제15대이자 마지막 쇼군으로 취임했다.

게이오 2년(1866년) 제2차 조슈 정벌에서 막부군이 패배하고, 7월 20일 쇼군 이에모치가 오사카 성에서 사망했다. 요시노부는 조정을 움직여 휴전 조칙을 이끌어냈다. 이에모치의 후계로 요시노부가 지목되었으나 고사하다 8월 20일에 도쿠가와 종가를 상속했고, 12월 5일에 쇼군 선하를 받고 나서야 제15대 쇼군으로 취임하였다. 이 무렵 요시노부는 확실하게 일본의 개국을 지향하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1867

[막부 시대의 막을 내리다 (대정봉환)]

내란을 피하고 새로운 정치 체제를 모색하고자 당시 16세의 메이지 천황에게 막부의 통치권을 반납하겠다는 뜻을 아뢰어 칙허를 받았다. 이는 265년간 이어진 막부 시대의 종말을 고한 '대정봉환'이었다.

쇼군 취임 후 요시노부는 프랑스로부터 원조를 얻고 요코스카 제철소 건설, 군제 개혁 등 '게이오 개혁'을 추진했다. 효고 개항 문제에서도 조정을 설득하여 칙허를 얻어냈다. 사쓰마-조슈 동맹이 무력으로 막부를 쓰러뜨릴 것을 예상한 요시노부는 게이오 3년(1867년) 10월 14일, 메이지 천황에게 이제까지 쇼군이 천황을 대신해 행사해오던 일본의 정권을 반환하겠다는 뜻을 아뢰어 올렸고, 다음날 칙허를 받았다. 이것이 바로 '대정봉환'이다.

1868

[보신 전쟁과 퇴각]

도바 후시미 전투에서 패퇴한 후 병력을 보유한 상태에서 지휘 부대를 두고 에도로 퇴각하였습니다.

[에도 막부의 종말]

가쓰 가이슈와 신정부군 참모 사이고 다카모리의 교섭으로 에도 성이 신정부군에게 넘겨지면서 도쿠가와 집안에 의한 정권은 막을 내렸고, 막부 제도와 세이이타이쇼군 관직이 폐지되었다.

교토 조정에 의해 요시노부를 '조적(朝敵)'으로 명시한 추토 명령이 정식으로 내려지고 신정부군은 동쪽으로 진군했다. 요시노부는 항전파를 누르고 조정에 공순할 것을 주장하며 가쓰 가이슈에게 사태 수습을 일임했다. 2월에는 우에노의 간에이지에서 근신에 들어갔고, 도쿠가와 종가의 가독은 양자인 다야스 가메노스케에게 넘겨주었다. 에도 총공격을 앞두고 이루어진 가쓰 가이슈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교섭으로 에도 성은 4월 11일에 신정부군에게 넘겨졌다. 요시노부는 간에이지를 떠나 미토로 향했고, 이후 7월 도쿠가와 집안이 슨푸로 이봉되면서 요시노부도 스루가 호다이인으로 옮겨 근신했다. 이로써 도쿠가와 집안에 의한 정권은 막을 내렸고, 일본에서 7백 년을 이어져 온 막부 제도나 세이이타이쇼군 관직은 폐지되었다.

1869

[은거와 취미 생활]

무진전쟁 종결과 함께 근신이 풀린 후, 정치적 야심은 전혀 드러내지 않고 사진, 사냥, 낚시 등 취미에 몰두하며 시즈오카에서 은거 생활을 보냈다.

메이지 2년(1869년) 9월, 무진전쟁의 종결을 맞아 요시노부의 근신도 풀렸다. 이후로도 그는 슨푸 즉 시즈오카에서 살았다. 오고쇼로써 정치 실권을 쥐었던 다른 쇼군들과는 달리, 요시노부는 정치적 야심은 전혀 드러내지 않고 윤택한 은거 수당을 가지고 사진 찍기, 사냥, 고기 잡기, 바둑, 요곡 등의 취미에 몰두하는 생활을 보냈고, '케이키 님'이라고 불리며 시즈오카 사람들에게 친근한 상대였다. 한편으로 옛 막부 신료들이 찾아와도 시부사와 에이이치 등 몇몇을 제외하고는 거의 만나지 않았다.

1902

[공작 작위와 명예직]

공작 작위를 받고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를 개창했으며 귀족원 의원에 취임했으나, 이는 완전한 명예직으로 정치에 능동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았다.

메이지 30년(1897년) 11월에 도쿄 스가모로 옮겼다. 이듬해 아리스가와노미야 다케히토 친왕의 중개로 메이지 천황을 알현하기도 했다. 메이지 34년(1901년) 12월에 도쿄 고이시카와 구 고히나타 제6천정으로 거처를 옮겨 살았으며, 메이지 35년(1902년) 공작 작위를 받았다. 도쿠가와 종가와는 따로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를 일으켜 귀족원 의원에도 취임하였으나, 이는 명예직으로 능동적으로 정치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1913

[마지막 쇼군의 죽음]

감기로 인한 합병증으로 7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265년간 일본을 통치했던 에도 막부의 마지막 쇼군이자, 일본 역사상 마지막 세이이타이쇼군으로 기록되었다.

다이쇼 2년(1913년) 11월 22일, 급성 폐렴을 동반한 감기로 인해 사망하였다. 향년 77세(만 76세 25일). 다이쇼 천황은 시종을 파견하여 조의금과 폐백을 보내고 칙어를 전달하며 그의 뜻을 기렸다. 그는 일본 역사상 마지막 세이이타이쇼군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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