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즈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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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가, 애니메이션 제작자, 의사 + 카테고리

일본 만화와 애니메이션 역사에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거장. '일본 만화의 아버지', '일본 만화의 신'으로 불리며, 수많은 히트작과 선구적인 기술로 대중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창작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태운 예술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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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28

[데즈카 오사무 탄생]

일본 오사카부 도요노군 도요나카정에서 데즈카 유타카와 후미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날이 메이지 천황의 생일인 메이지세쓰였기에 이름에 '治'를 사용했다.

데즈카 오사무는 1928년 11월 3일, 일본 오사카부 도요노 군 도요나카 정(지금의 도요나카시)에서 데즈카 유타카와 어머니 후미코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태어난 날이 마침 메이지 천황의 생일인 메이지세쓰(明治節)이었기에 「메이지」(明治)에서 한 글자를 따서 「治」를 이름으로 짓게 되었다.

1933

[효고현 다카라즈카시로 이주]

다섯 살 때 할아버지의 저택이 있던 효고현 다카라즈카시로 이주했다. 다카라즈카의 근대도시 풍경은 그의 작품 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의 나이 다섯 살 때에 그의 집안은 1년 전에 타계한 할아버지의 저택이 있던 효고 현 가와베 군의 오하마 촌(지금의 다카라즈카시) 가와모로 이주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기 전의 다카라즈카에는 다카라즈카 소녀 가극단의 본거지였던 다카라즈카 대극장 등 행락시설이 차례로 세워져 일종의 별천지 비슷한 분위기를 조성했고, 다카라즈카의 인공적인 근대도시 풍경은 데즈카의 작품세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지고 있다.

1935

[이케다사범부속소학교 입학 및 만화 재능 발현]

이케다사범부속소학교에 입학했으며, 학교에서 따돌림을 겪다가 만화 그리는 재능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소학교 5학년 때 장편만화 '지나의 밤'을 완성하며 교사들의 묵인을 받았다.

이케다사범부속소학교(지금의 일본 오사카 교육대학부속 이케다 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머니가 도쿄 출신이었던 탓에 긴키 방언을 잘 하지 못했던 그는 학교에서 맴도는 존재였고 2학년때에는 '안경잽이 꼬마'라는 별명까지 붙어서 괴롭힘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그가 본 것을 그린 만화 그림이 오사무를 구원해 주게 되는데, 소학교 3학년 때 최초의 만화 '핑핑 세이쨩'을 완성했고, 그 뒤 만화 연습을 이어나갔으며 소학교 5학년 때에는 장편만화 '지나의 밤'을 완성하였다. 그 작품은 급우들 뿐 아니라 학교 교사들 사이에도 화제가 되는 등 이후 교사들로부터도 만화를 그리는 것을 묵인받았다고 한다.

1941

[기타노 중학교 입학 및 필명 '데즈카 오사무' 사용]

오사카 부립 기타노 중학교에 입학했으며, 곤충에 대한 흥미가 깊어져 필명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941년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 부립 기타노 중학교(지금의 일본 오사카 부립 기타노 고등학교)에 입학하였다. 이 시기에 오사무의 동급생 이시하라 마코토와 친해졌고, 그의 영향으로 곤충이나 과학, 천문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딱정벌레목 딱정벌레류(オサムシ)의 존재를 알았고, 이 시기부터 그의 필명 '데즈카 오사무(手塚治虫)'를 쓰기 시작하였다. 1950년 무렵까지는 '治虫'는 그대로 '오사무시'로 읽었다.

1944

[군수공장 동원]

학교에 다니는 대신 군수공장에 동원되어 격납고 지붕 슬레이트 제작 일을 했다.

1944년 9월부터는 학교에 다니는 대신 군수공장에 보내졌는데, 이곳에서 데즈카는 격납고 지붕을 덮는 슬레이트를 제작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1945

[기타노 중학 졸업]

전쟁에 따른 수업 연한 단축으로 기타노 중학을 4년만에 졸업했다.

1945년 3월, 전쟁에 따른 수업 연한 단축에 따라 기타노 중학을 4년만에 졸업했다.

[오사카 대공습 경험]

근로봉사 중 오사카 대공습을 겪었으며, 소이탄 투하 속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이 체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1945년 6월에 근로봉사로 감시초를 서고 있을 때 오사카 대공습이 벌어졌는데, 오사무의 머리 바로 위로 소이탄이 투하되는 와중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이 공습은 데즈카 자신의 체험담으로써 훗날 그가 1974년에 그린 만화 '종이상자'나 1979년부터 1년 간 그린 '세게 때리기' 등 자전적 작품 속에서 묘사된다. 이 체험 이후 데즈카는 공장에 다니는 것을 그만두고 집안에 틀어박혀 만화 그리기에 몰두한다.

[오사카 제국대학 의학전문부 입학]

패전 한 달 전 오사카 제국대학 의학전문부에 입학했다. 의학전문부는 군의관 속성 양성을 위해 임시로 부설된 곳이었다.

패전 한 달 전인 7월에 데즈카 오사무는 오사카 제국대학의 의학전문부에 응시해 입학을 허가받았다. 의학전문부는 전쟁의 장기화로 군의관을 속성으로 길러내기 위해 임시로 오사카 제국대학 내에 부설된 것으로 학제상으로는 구제 의학전문학교로 취급되었다.

1946

['마아짱의 일기장'으로 만화가 데뷔]

'소국민신문'에 4컷 만화 '마아짱의 일기장'을 연재하며 만화가로 공식 데뷔했다. 이 작품은 인형과 과자 캐릭터에 사용될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종전 후, 학생인 데즈카 오사무는 전시에 그린 장편 중에서 "유령남"을 마이니치 신문 학예부에 보냈다. 그 후, 이웃집에 살던 마이니치 신문의 인쇄국에 다니는 여성의 소개로 어린이의 소국민신문(현 매일소학생신문) 학예부의 호도노라는 사람을 만나, 그의 의뢰를 받아 소국민신문의 오사카 판에 4컷 만화 "마아짱의 일기장"을 연재(1946년 1월 1일~3월 31일), 이 작품이 데즈카의 데뷔작이 됐다. 이 "마아짱"은 로컬이면서 인기가 있고 인형과 바리 막과자의 캐릭터에 사용되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1947

['신보물섬' 베스트셀러 등극]

사카이 시치마 원안의 만화 단행본 '신보물섬'이 출판되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오사카에 '아카혼 붐'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전후 스토리 만화의 원점으로 평가받는다.

1946년 동인지 '망가만'의 정례회를 통해서 후원자인 사카이 시치마와 알게 되어 사카이에서 장편 스토리 만화의 합작의 이야기를 꺼낸다. 이렇게 대략적인 구성을 사카이가 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테즈카가 자유롭게 그리려고 하는 형태로 200쪽의 그림 장편 '신보물섬'이 제작된다. 1947년 1월에 출판되자 당시로서는 이례적인 베스트셀러였다. 영화적 구성과 빠른 이야기 전개를 가진 '신보물섬'은 일반적으로 전후 스토리 만화의 원점으로서 포착된다.

1948

['로스트 월드' 발표 및 SF 3부작 구성]

'지저국의 괴인'에서 비극적 전개를 도입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한 후, '로스트 월드'를 그려 '메트로폴리스', '와야할 세계'와 함께 초기 SF 3부작을 이룬다.

1947년에 발표된 "화성박사", "유령 코롱코 박사", "킹콩" 등은 어린이를 의식한 B급 영화적인 작품이었지만 1948년 "지저국의 괴인"에서는 비극적인 전개도 도입하게 되고 SF 모험 등을 소재로 작품 중에서 다양한 시도가 이뤄졌다. 그 해 말에 그려진 "로스트 월드"에서는 다양한 입장의 인물이 얽혀 지구 규모의 장대한 이야기가 그려지져, "메트로폴리스"(1949년) "와야할 세계"(1951년)와 함께 데즈카의 초기를 대표하는 SF 3부작을 이룬다.

1949

['권총 천사'에 아동 만화 최초 키스 장면 삽입]

서부 영화 '권총 천사'에서 아동 만화 최초로 키스 장면을 그렸다.

1949년 서부 영화 "권총 천사"에서는 아동 만화에서 최초의 키스 장면을 그렸다.

1950

[잡지 연재 개시]

신생각 출판사의 신창간 잡지 '소년 소녀 만화와 독서'에 '타이거 박사의 진여행'을 연재하며 최초의 잡지 연재를 시작했다.

데즈카는 오사카에서 아카모토 만화를 그리는 옆, 도쿄에 반입도 하고 있다. 당초에는 코단샤에서는 거절당했지만, 신생각이라는 출판사에서 반입이 성공해, 여기에서 몇 개를 읽은 뒤, 신창간된 잡지 '소년 소녀 만화와 독서'에 1950년 4월부터 '타이거 박사의 진여행'을 연재, 이것이 데즈카의 최초의 잡지 연재 작품이 되었다.

['정글 대제' 연재 개시]

잡지 '만화 소년'에서 '정글 대제' 연재를 개시했다. 또한 '만화대학' 같은 만화 입문 서적도 발표했다.

1950년 11월부터 잡지 '만화 소년'(학동사)에서 '정글 대제'의 연재를 개시, 1950년에는 문호 괴테의 '파우스트'를 만화화한 것 외에 '영화 제작의 무대 뒤를 보여드리겠습니다'라는 도입으로 시작되는 '신비 여행기', 자신의 만화 수법을 체계화하여 보여준 만화 입문 책의 선구적 작품 '만화대학' 등을 발표하고 있다.

1951

['아톰 대사' 연재 및 의학전문부 졸업]

'소년'에 '철완 아톰'의 전신인 '아톰 대사'를 연재했으며, 이 해에 의학 전문부를 졸업하며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다.

1951년에는 '철완 아톰'(1952년-)의 전신이 되는 '아톰 대사'를 '소년'(코분샤)에 연재하는 등 다수의 잡지에서 연재를 시작했고, 이 해에는 소년 만화지의 대부분에서 데즈카의 만화의 연재가 개시되었다. 학교를 그만둔 것이 아니라, 1951년 3월에 의학 전문부를 졸업(5년제, 1년 유급. 이 해에 전문부가 폐지되면서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다)하고 오사카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에서 1년간 인턴을 맡았다.

1952

[도쿄 이주]

만화가 활동을 위해 다카라즈카에서 도쿄로 이주했다.

사생활의 면에서는, 1952년에 다카라즈카에서 도쿄로 이주했다.

[의사 국가 시험 합격]

오사카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에서 인턴을 마친 후, 제12회 의사 국가 시험에 합격했다.

오사카 대학 의학부 부속 병원에서 1년간 인턴을 맡아 1952년 3월에 제십이회 의사 국가 시험에 합격했다.

1953

[도키와 장 입주 및 '리본의 기사' 연재 개시]

'만화 소년' 편집부 소개로 도쿄 도시마구의 전설적인 만화가 아파트 '도키와 장'에 입주했다. '소녀 클럽'에서 '리본의 기사' 연재를 시작하며 소녀 만화의 선구가 되었다.

1953년에 '만화 소년'편집부로부터의 소개로 도시마구의 도키와 장에 입주했다. 그 후 도키와 장에는 데즈카에 이어 테라다 히로오, 후지코 후지오가 입주했다. 데즈카는 자신이 살고 있던 14호실을 후지코 후지오의 두 사람에게 양도해 도키와 장에서 에서 이동했지만, 그 후에도 이시노모리 쇼타로, 아카츠카 후지오 등 후에 유명한 만화가가 되는 사람들이 잇달아 입주해 도키와 장은 만화가의 양산장이 되었다. 1953년에는 "소녀 클럽"(코단샤)에서 '리본의 기사'의 연재를 개시했다. 다카라즈카 가극이나 디즈니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이후의 소녀 잡지에 있어서의 이야기 만화의 선구가 되었다.

[의적 등록]

의사 국가 시험 합격 후 의적 등록을 마쳤다.

의사국가시험에 합격했을 때 그는 한창 '정글대제'와 '우주소년 아톰'을 연재하던 와중이었으며, 1953년 9월 18일에 의적이 등록된다.

1954

['불새' 연재 시작]

'정글 대제' 연재 완결 후 '만화 소년'에 '불새' 연재를 시작했으며, 이는 그의 라이프 워크가 되었다.

1954년에는 '정글 대제' 연재 완결 후에 '만화 소년'에 '불새'의 연재를 시작했다. '불새' 시리즈는 그 후도 휴간 등에 의해 COM, 만화 소년, 야성 시대와 게재지를 바꾸면서 오랜 세월로 그려져, 데즈카의 라이프 워크가 되었다.

1955

[성인향 만화 발표]

성인향 만화 잡지 '만화 독본'에 '제3제국 붕괴', '곤충 소녀의 방랑기'를 발표하며 성인향 터치를 시도했다.

"철완 아톰", "나의 손오공" 등 아동 만화의 인기 작품의 연재를 하면서 데즈카는 1955년에 성인향 만화 잡지 "만화 독본"( 분게이 슌주 신사)에 "제3제국 붕괴", "곤충 소녀의 방랑기"를 발표했으며, 여기에서는 어린이용의 둥그란 그림과 다른 성인향의 터치를 시도하고 있다.

[라디오 드라마 '리본의 기사' 방송 개시]

라디오 도쿄에서 연속극 '리본의 기사' 방송이 시작되었다.

1955년 4월 4일 라디오 도쿄에서 연속극 '리본의 기사' 방송 개시(~ 9. 26.).

1956

[SF 단편 및 학습 만화 발표]

SF 단편 시리즈 '라이언 북스'를 시작하고 '만화 생물학', '만화 천문학' 등 학습 만화를 발표하며 지적 흥미를 앞세운 작품들을 많이 냈다.

1955년부터 1958년에 데즈카는 지적 흥미를 앞세운 작품을 많이 냈으며, 1956년에 SF단편 시리즈 "라이언 북스"를 시작했고, 학습지 "만화 생물학", " 만화 천문학" 등 학습 만화를 발표했다.

1957

['만화 천문학'으로 쇼가쿠칸 만화상 수상]

'만화 천문학'이 제3회 쇼가쿠칸 만화상 대상 작품이 되었다.

학습지 "만화 천문학"은 제3회 쇼가쿠칸 만화상(1957년)의 대상 작품이 되었다.

1958

[극장용 장편 만화 영화 '서유기' 원안 구성]

토에이 동화의 연출가 시라카와 다이사쿠의 부탁으로 극장용 장편 만화 영화 '서유기'의 원안 구성을 맡았다.

1958년에는 토에이 동화(현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연출가 시라카와 다이사쿠에게 부탁 받고 이 회사의 촉탁이 된 극장용 장편 만화 영화 "서유기"("나의 서유기"가 원작)원안 구성을 맡고 있다.

1959

[주간 만화 잡지 연재 및 결혼]

'소년 매거진', '소년 선데이' 등 주간 만화 잡지 창간 붐에 맞춰 '스릴 박사' 등을 연재하고, 다카라즈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59년 주간지 붐을 타고 주간 만화 잡지 '소년 매거진'(코단샤) 및 '소년 선데이'(쇼가쿠칸)가 창간되며 이후 월간 소년지는 점차 사라지고 나가게 되었다. 이때 데즈카는 권유를 받고 쇼가쿠칸의 전속 작가가 되었는데 결국 소년 선데이 창간호에는 자신의 손에 의해 '스릴 박사'을 연재했다. 그 해, 다카라즈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1961

[데즈카 프로덕션 동화부 설립]

자신의 프로덕션인 데즈카 프로덕션에 동화부를 설립하며 애니메이션 제작의 꿈을 실현하기 시작했다.

1961년, 데즈카는 자신의 프로덕션인 데즈카 프로덕션에 동화부를 설립했다. 당초는 6명의 스태프에서 시작했다.

1962

['어떤 거리의 이야기' 제작 및 무시 프로덕션 개명]

데즈카의 만화 원고료로 제작된 40분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어떤 거리의 이야기'가 블루 리본상 등 다수 수상했다. 이후 동화부는 '무시 프로덕션'으로 개명했다.

처음 제작한 작품 "어떤 거리의 이야기"는 스태프의 급료에서 제작비까지 모두 데즈카가 그린 만화의 원고료로 충당했고, 1년 동안 40분의 컬러 장편 애니메이션 작품으로, 블루리본상이나 문부성 예술제 장려상 등 여러 가지 상을 받는다. 그 후 1962년에 동화부는 "무시 프로덕션"으로 개명했다.

1963

[일본 최초 TV 애니메이션 '우주소년 아톰' 방송 개시]

무시 프로덕션에서 일본 최초의 30분 TV 애니메이션 시리즈 '우주소년 아톰'을 제작하여 후지 테레비에서 방송하기 시작했다. 이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 기법을 활용하여 이후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에 큰 영향을 미쳤다.

무시 프로덕션에 개명 후, 일본 최초가 되는 30분 범위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 시리즈(당시는 텔레비전 만화라고 말했음) '철완 아톰'의 제작에 착수했다. 그러나 당초에는 총 10명에도 못 미치는 스태프로 매주 텔레비전 방송용으로 디즈니 같은 그림의 장수를 요구하는 풀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것은 작업량 면에서 전혀 불가능하며, 매주 방송이 가능하기 위해서 그림의 장수를 대폭 삭감하기 위한 다양한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수법을 이용하여 짜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기법과 양식은 이후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 전반에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무시 프로덕션의 아톰은 당시 일본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을 대표하는 대인기 작품이 되었다.

1966

[실험 만화 잡지 'COM' 창간]

실험 만화 잡지 'COM'을 창간하여 '불새' 등 의욕적인 작품들을 게재했다. 이는 시라토 산페이의 극화 '카무이전'을 간판 작품으로 하는 '갈로'에 대항한 것이었다.

1966년, 데즈카는 실험 만화 잡지 'COM'을 창간한다. 선행한 시라토 산페이의 극화 작품 "카무이전"을 간판 작품으로 하는 "갈로"에 대항한 것으로 데즈카의 "불새"를 주목적으로 이시노모리 쇼타로, 나가시마 신지 등의 의욕적인 작품이 게재되었다.

1967

['정글대제' 베네치아 국제 영화제 은사자상 수상]

자신의 만화가 원작인 '정글대제'(한국명: 밀림의 왕자 레오)가 제28회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산마르코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1967년에는 자신의 만화가 원작인 '정글대제'(한국명: 밀림의 왕자 레오)가 제28회 베네치아 국제영화제 산마르코 은사자상을 수상했다.

1968

[청년 만화 본격 시작]

'빅 코믹', '플레이 코믹' 등 청년지를 통해 '지구를 삼키다', '아야코', '키리히토 찬가' 등 청년층을 위한 작품을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이 시기 작품들은 사회적 배경을 반영해 어둡고 음참한 내용이 많았다.

1968년에는 청년지 '빅 코믹'(쇼가쿠칸), '플레이 코믹'(아키타 쇼텐) 등이 잇따라 창간해, 청년 만화가 본격적으로 스타트하고 있어, 데즈카도 '빅 코믹'에 '지구를 삼키다', '아야코', '키리히토 찬가', '플레이 코믹'에 '공기의 바닥' 시리즈 등 청년을 위한 작품을 다루고 있다. 이 시기의 데즈카의 청년용 작품은 안보 투쟁 등의 사회적인 배경도 있어, 어둡고 음참한 내용의 것이 많았다.

1969

['아니메 라마 3부작' 제작 시작]

어린이용 애니메이션과는 반대되는 성인용 극장 애니메이션 '아니메 라마 3부작'의 제작을 시작했다.

1969년부터 '아니메 라마 3부작'(두번째 작품 '클레오파트라'를 감독)이 제작된다. 이것은 종래의 어린이용 애니메이션 영화와는 반대의 위치에 있어, 성인용으로 만들어진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였다.

1973

[무시 프로덕션 파산 및 '블랙잭' 연재 개시]

자신이 경영하던 무시 프로 상사와 무시 프로덕션이 파산하고, 개인적으로 1억 5천만 엔의 부채를 지게 되며 '겨울의 시대'를 맞았다. 그러나 '주간 소년 챔피언'에서 '블랙잭' 연재를 시작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애니메이션 사업도 경영 부진이 계속되고 있어, 1973년에 스스로가 경영자로 있던 무시 프로 상사, 그 다음에 무시 프로덕션이 파산해, 데즈카도 개인적으로 추정 1억 5000만 엔의 부채를 짊어지게 되었다. 작가로서의 궁지에 세워져 있던 1968년부터 1973년을, 데즈카는 스스로 "겨울의 시대"였다고 회상하고 있다. 1973년에 "주간 소년 챔피언"(아키타 쇼텐)에서 연재 개시된 "블랙 잭"도, 원래는 소년지·유년지에서 인기가 침체하고 있던 데즈카의 최후를 간취하자는, 카베무라 타이조 편집장의 후의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나, 장기간 계속되는 싸움으로 독자를 유치하려고 하는 작품 뿐이었던 당시의 소년만화지에 있어서, "블랙 잭"의 매회 읽어낸 형식에서의 연재는 신선하고, 후기의 데즈카를 대표하는 히트작으로 성장해 가게 되었다.

1974

['세번째가 온다' 연재]

'주간 소년 매거진'에 '세번째가 온다' 연재를 시작하며 '블랙잭'에 이어 본격적인 부활을 이루었다.

1974년, "주간 소년 매거진"(코단샤) 연재의 "세번째가 온다"도 계속되어, 데즈카는 본격적 부활을 이루었다.

1975

['블랙잭'으로 일본 만화가 협회상 특별상 수상]

'블랙잭'으로 제4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1975년, '블랙잭'으로 제4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 특별상 수상.

1976

['불새' 연재 재개]

중단되었던 '불새' 시리즈가 '만화 소년' 창간과 함께 재개되었다. 이로써 데즈카의 라이프 워크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1976년, 중단된 채로 있던 "불새"가 "만화 소년"(아사히 소노라마)의 창간에 의해 재개되었다.

1977

['만화의 신' 평가 확립 및 전집 간행]

'블랙잭', '불새' 등 6개의 인기 작품을 연재하고, 과거 작품 재간 및 '코단샤 데즈카 오사무 만화 전집' 간행으로 '만화의 신'이라는 평가를 확고히 했다.

1977년 시점에서, 데즈카는 '블랙 잭', '세번째가 온다', '붓다', '불새', '유니코', 'MW'와 6개의 연재를 안고 있었다. 또, 동시기의 만화 문고본 붐에 수반해 데즈카의 과거의 작품도 잇달아 재간되고, 또한 같은 해 6월부터의 코단샤 '데즈카 오사무 만화 전집' 간행에 의해, 데즈카는 '만화의 일인자', '만화의 신'이라는 평가를 확실히 했다.

1980

[청년 만화 대표작 발표]

1980년대에 들어서 '양지의 나무', '아돌프에게 고한다' 등 청년 만화의 새로운 대표작을 발표했다. 이 작품들은 각각 쇼가쿠칸 만화상과 코단샤 만화상을 수상하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80년대가 되면 에도막부 말기 부터 메이지까지의 시대에 자신의 뿌리를 따랐던 '양지의 나무'(빅 코믹)와 아돌프 히틀러를 소재로 일반 주간지에서 연재된 '아돌프에게 고한다'(주간문춘) 등 청년만화의 새로운 대표작을 다루게 된다. '양지의 나무'는 제29회 쇼가쿠칸 만화상, '아돌프에게 고한다'는 제10회 코단샤 만화상 일반 부문을 수상했다.

1984

['점핑' 제작]

데즈카 프로에서 아트 애니메이션 '점핑'을 제작했다. 그는 상업 애니메이션에 대비해 이를 '실험 애니메이션'이라 불렀다.

아트·애니메이션(데즈카 자신은 상업 애니메이션에 대비해 '실험 애니메이션'이라고 말했다)의 분야에도 공적을 남기고 있다. 무시 프로로 '어떤 거리 이야기'(1962년, 38분), '오스'(1962년), '메모리'(1964년), '인어'(1964년), '담배와 재'(1965년), '시즈쿠'(1965년), '전시회의 그림'(1966년, 33분), '창세기'(1968년), 그 후 데즈카 프로에서 '점핑'(1984년) 등을 제작했다.

1985

['낡은 필름'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그랑프리 수상]

데즈카 프로에서 제작한 '낡은 필름'이 제1회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그랑프리에 선정되었다.

데즈카 프로에서 '점핑'(1984년), '낡은 필름' (1985년), 「푸시」(1987년), 「무라마사」(1987년), 「숲의 전설」(1987년, 29분 20초), 「자화상」(1988년)과 장편, 단편의 비상업작품을 제작했다. 제 1회 히로시마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그랑프리에 '낡은 필름'이 선정되고 있다.

1988

[위암 진단 및 입원]

복부 격통으로 구급 반송되어 진행성 스킬스 위암으로 판명, 한조몬 병원에 입원하여 위의 4분의 3을 절제했다. 당시 암이라는 사실은 본인에게 고지되지 않았다.

1988년 3월 15일, 갑자기 복부의 격통에 휩쓸려 구급 반송된다. 검사 결과 진행성의 스킬스 위암으로 판명되어 한조몬 병원에 입원, 위의 4분의 3을 절제한다. 당시 주치의에 의하면, 이 시점에서 이미 4단계이며, 복막까지 암이 전이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암이라는 것 자체는 당시의 의료관습에 의해 본인에게 끝까지 고지되지 않고 위궤양으로 통보되었다.

[퇴원]

수술 후 5월에 퇴원하여 이전과 다름없는 다작 활동을 보였지만, 점차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5월에 퇴원해 이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다작을 보였지만 입원전에 비해 점차 신체는 마르고 가늘고, 가끔 휴식을 끼지 않으면 계속 그릴 수 없을 정도로 체력이 떨어졌다.

[재입원]

10월에 다시 병원에 입원했다.

같은 해 10월에 재입원했다.

[상하이 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참석]

만전치 못한 몸으로 상하이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참석했으나, 귀국 후 상태가 악화되었다.

11월, 만전의 상태라고는 할 수 없는 가운데 '참가하지 않으면 국제 문제입니다'와 주위의 제지를 뿌리며, 중화인민공화국 상하이시에서의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 참석하지만, 귀국과 동시에 상태가 악화되었다.

[재수술 및 암 전이]

다시 수술을 받았지만, 이미 말기 상태로 간까지 암이 전이되었다.

12월에 다시 수술을 받지만, 이 시점에서는 이미 말기 상태이며, 간으로까지 암이 전이하고 있었다.

1989

[위암 사실 확인]

데즈카 프로 사장 마츠타니 타카유키에게 병상을 물어 위암임을 확인했다.

1989년 1월 21일에 데즈카 프로 사장의 마츠타니 타카유키가 병문안 왔을 때에는, 「내 병상은 무엇이야, 너 들어줘」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위암이라는 것은 엎드린 뒤 의사로부터 들은 것을 말하자면 "그런가…"라고 한마디만 말했다고 한다.

[혼수상태 진입]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의식이 회복되면 연필을 달라고 할 정도로 창작에 대한 강한 집착을 보였다.

같은 해 1월 25일 이후 혼수상태에 빠지지만 의식이 회복되면 '연필을 줘'라고 말했다. 아들 마코토는 "(이 무렵의 아버지는) 혼수가 깨면 연필을 쥐게 하지만 곧 의식이 없어지는 반복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죽을 때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부탁이니까 일을 시켜줘'라고 일어나려고 하고, 아내는 '이제 괜찮아'라고 잠들려고 하는 등 끝까지 일에의 집착심을 없애지 않았다.

[데즈카 오사무 별세]

일본 도쿄의 병원에서 위암 악화로 향년 60세로 별세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부탁이니까, 일을 하게 해줘"였다.

1989년 2월 9일 오전 10시 50분, 일본 도쿄의 병원에서 사망. 그의 나이 향년 60세. 데즈카 오사무의 죽음을 만난 마츠타니에 의하면, 데즈카 오사무의 마지막 말은, '부탁이니까, 일을 하게 해줘'. 이 말에서도 일에 대한 의욕이 넘쳐나고 있다. 그의 죽음으로 '그린고', '루드 비히 B', '네오 파우스트' 등의 작품이 미완인 채 남겨졌다.

1990

[일본 만화가 협회상 문부장관상 수상]

일생의 업적으로 제19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 문부장관상을 사후 수상했다.

1990년, 일생의 업적으로 제19회 일본 만화가 협회상 문부장관상 수상.

1994

[다카라즈카시립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 개관]

효고현 다카라즈카시에 시립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이 개관되었다.

1994년, 효고현 다카라즈카시에 시립 데즈카 오사무 기념관이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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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즈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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