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브 그롤
데이브 그롤은 너바나의 전설적인 드러머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뒤, 푸 파이터즈의 리더로서 록 음악의 제왕 자리를 30년 넘게 지켜온 현대 음악계의 거장입니다. 커트 코번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비극을 딛고 스스로 마이크를 잡아 전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록 스타로 거듭난 그의 여정은 불굴의 투지와 예술적 열정을 상징합니다. 그래미 어워드 15회 수상과 로큰롤 명예의 전당 2회 헌액이라는 금자탑을 쌓으며, 그는 단순한 뮤지션을 넘어 대중문화 전반에 영감을 주는 시대적 아이콘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연표
1969
[록의 거장 탄생]
오하이오주 워런에서 언론인 아버지와 교사 어머니 사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버지니아주로 이주하여 성장하며 다양한 음악적 환경에 노출되었습니다. 훗날 세계를 뒤흔들 위대한 음악가의 역사가 이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본명은 데이비드 에릭 그롤(David Eric Grohl)이며, 아버지는 제임스 그롤, 어머니는 버지니아 헨런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한 뒤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며 주체적인 사고방식과 예술적 감수성을 키웠습니다. 어린 시절의 평범한 생활은 그가 훗날 대중과 친밀하게 소통하는 '록의 신사' 이미지를 갖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982
[펑크 록과의 만남]
사촌과 함께 시카고를 방문했다가 펑크 록 공연을 보고 커다란 충격과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때부터 독학으로 기타를 배우고 친구들과 밴드를 결성하며 음악에 몰두하기 시작했습니다. 단순한 취미를 넘어 인생의 행로가 결정된 결정적인 시기였습니다.
시카고의 '네이키드 레이건(Naked Raygun)' 공연을 본 것이 그의 인생을 바꾼 터닝 포인트였습니다. 그는 학교 수업보다 기타 연습에 매진했으며, 잡지나 라이브 공연을 보며 자신만의 스타일을 정립했습니다. 버지니아의 펑크 신(Scene)에서 활동하며 '프릭 베이비(Freak Baby)' 등 여러 지하 밴드를 거쳤습니다.
1986
[스크림의 드러머 발탁]
좋아하던 밴드인 스크림의 드러머 오디션에 합격하여 본격적인 뮤지션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나이를 속이고 합류할 정도로 팀에 대한 열정이 넘쳤으며 전미 투어와 유럽 공연을 경험했습니다. 이 시기에 쌓은 실전 경험은 그를 괴물 같은 드러머로 성장시켰습니다.
당시 그는 불과 17세였으나 밴드에 합류하기 위해 학교를 중퇴하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약 4년 동안 스크림과 함께하며 여러 장의 앨범을 녹음하고 라이브 무대에서의 압도적인 파워를 증명했습니다. 이 시기의 활동은 훗날 너바나의 커트 코번과 크리스 노보셀릭의 눈에 띄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0
[너바나 합류와 운명]
스크림이 해체된 후 버즈 오스본의 소개로 너바나의 오디션을 보고 즉시 멤버로 영입되었습니다. 커트 코번은 그가 드럼을 치는 순간 자신들이 찾던 마지막 조각임을 직감했습니다. 시애틀 그런지의 전설을 완성할 최고의 라인업이 구축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시애틀로 건너간 그는 크리스 노보셀릭의 아파트 소파에서 잠을 자며 연습에 매진했습니다. 그의 강력한 타격감과 정교한 리듬은 너바나의 거친 사운드에 세련된 안정감을 부여했습니다. 합류 직후부터 팀은 새로운 앨범 작업을 위한 곡들을 다듬으며 메이저 레이블로의 도약을 준비했습니다.
1991
[네버마인드의 충격]
너바나의 메이저 데뷔 앨범인 'Nevermind'가 발매되어 전 세계 음악 시장을 평정했습니다. 마이클 잭슨을 차트 1위에서 밀어내며 얼터너티브 록이 대중문화의 중심이 되는 이변을 일으켰습니다. 데이브 그롤의 폭발적인 드럼은 전 세계 청년들의 심장을 고동치게 했습니다.
타이틀곡 'Smells Like Teen Spirit'은 엑스세대의 찬가가 되었으며 록 음악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데이브 그롤은 앨범 수록곡 중 일부에서 백보컬로 참여하며 보컬리스트로서의 잠재력도 드러냈습니다. 이 앨범은 전 세계적으로 3,0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90년대 대중음악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92
[레딩 페스티벌의 전설]
영국 레딩 페스티벌에서 너바나와 함께 역사상 최고의 라이브 공연 중 하나를 선보였습니다. 불화설과 건강 위기설을 비웃듯 무대를 압도하며 밴드의 건재함을 과시했습니다. 데이브 그롤의 지치지 않는 에너지는 수만 명의 관중을 하나로 묶었습니다.
커트 코번이 환자복을 입고 휠체어를 타고 등장한 이 공연은 너바나 역사상 가장 상징적인 라이브로 꼽힙니다. 데이브 그롤은 무대 뒤에서 멤버들 사이의 갈등을 중재하고 팀의 분위기를 끌어올리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 공연 이후 너바나는 명실상부한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록 밴드로 공인받았습니다.
1993
[인 유테로의 실험]
너바나의 마지막 정규 앨범인 'In Utero'를 통해 더 원초적이고 타협하지 않는 사운드를 선보였습니다. 성공에 대한 피로감과 혼란을 음악에 담아내며 예술적 진정성을 추구했습니다. 데이브 그롤은 더욱 정교해진 드럼 사운드로 앨범의 완성도를 높였습니다.
빌보드 차트 1위로 데뷔하며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으나, 밴드 내부는 커트 코번의 중독 문제로 위태로웠습니다. 데이브 그롤은 이 시기에 'Marigold'라는 곡을 써서 싱글의 B-사이드로 수록하며 처음으로 자작곡을 발표했습니다. 그는 팀의 위기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음악에만 전념하는 프로다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1994
[첫 번째 결혼식]
사진작가인 제니퍼 영블러드와 첫 번째 결혼식을 올리며 가정을 꾸렸습니다. 너바나의 활동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에 개인적인 안식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밴드의 해체와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 결혼 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녀는 너바나의 앨범 내지 사진 작업 등에 참여하며 음악적 동료로서도 교류했습니다. 데이브 그롤은 바쁜 투어 일정 중에도 아내와 함께 시간을 보내려 노력했으나 스타덤의 압박은 컸습니다. 이후 두 사람은 성격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1997년에 공식적으로 이혼하게 됩니다.
[커트 코번의 비극]
밴드의 리더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커트 코번이 세상을 떠나면서 너바나는 공식적으로 해체되었습니다. 거대한 슬픔 속에서 한동안 스틱을 잡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정신적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고통스러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는 한동안 음악을 그만둘까 고민하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은둔 생활을 했습니다. 주변의 수많은 러브콜이 있었으나 그는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홀로 마음을 추스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 비극은 훗날 그가 '푸 파이터즈'를 통해 다시 일어서게 만드는 강력한 내면의 동기가 되었습니다.
[푸 파이터즈의 탄생]
비극을 딛고 일어나 홀로 스튜디오에 들어가 거의 모든 악기를 직접 연주하며 15곡을 녹음했습니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새로운 음악적 방향을 모색한 실험이었습니다. 이것이 훗날 록의 전설이 될 '푸 파이터즈'의 시초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내세우는 대신 '푸 파이터즈(Foo Fighters)'라는 가상의 팀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녹음된 테이프의 퀄리티가 너무 뛰어나 대형 레이블들의 경쟁적인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드럼에서 기타와 보컬로 자신의 주 전공을 바꾸는 모험을 감행했습니다.
1995
[데뷔 앨범 발표]
녹음했던 곡들을 모아 첫 정규 앨범을 발표하고 라이브 공연을 위해 밴드 멤버들을 구성했습니다. 드러머 윌리엄 골드스미스 등을 영입하며 본격적인 그룹 활동의 닻을 올렸습니다. 너바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세상에 공개한 역사적 해였습니다.
데뷔 앨범 'Foo Fighters'는 평론가들로부터 창의적인 멜로디와 에너지를 극찬받았습니다. 타이틀곡 'This Is a Call'은 차트에서 선전하며 푸 파이터즈의 밝은 미래를 예고했습니다. 그는 무대 중앙에서 기타를 메고 노래하는 자신의 새로운 모습에 점차 적응하며 카리스마를 구축했습니다.
1997
[컬러 앤 쉐이프]
두 번째 앨범 'The Colour and the Shape'를 통해 밴드로서의 정체성을 완벽히 확립했습니다. 'Everlong'과 'My Hero' 같은 불멸의 히트곡들을 탄생시키며 전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푸 파이터즈가 단순한 프로젝트가 아닌 거물급 밴드임을 증명한 수작이었습니다.
테일러 호킨스가 새로운 드러머로 합류하며 운명적인 파트너십이 시작되었습니다. 수록곡들은 그의 이혼 과정에서 느낀 복잡한 감정들이 녹아들어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이 앨범은 90년대 얼터너티브 록의 정수를 담은 명반으로 현재까지도 추앙받고 있습니다.
1999
[그래미 첫 수상]
세 번째 앨범 'There Is Nothing Left to Lose'를 발표하고 이듬해 그래미 어워드 최우수 록 앨범상을 수상했습니다. 자신의 집 지하실에서 녹음한 소박한 앨범이 최고의 영예를 안으며 그의 프로듀싱 능력도 인정받았습니다. 음악적 실험과 대중적 성공을 동시에 거머쥔 값진 성과였습니다.
타이틀곡 'Learn to Fly'는 유쾌한 뮤직비디오와 함께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 되었습니다. 이 앨범은 밴드 역사상 가장 편안하고 멜로디가 강조된 작품으로 평가받습니다. 이후 푸 파이터즈는 그래미의 단골 손님이자 록 부문의 절대 강자로 자리 잡기 시작했습니다.
2002
[드러머로의 깜짝 복귀]
퀸즈 오브 더 스톤 에이지의 앨범 녹음과 투어에 참여하며 드러머로서의 전설적인 기량을 다시 뽐냈습니다. 자신의 밴드 활동 중에도 다른 아티스트와의 협업을 멈추지 않는 유연한 예술성을 보여주었습니다. 많은 팬들은 그가 드럼 스틱을 쥔 모습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습니다.
이 앨범의 드럼 연주는 록 역사상 가장 강력한 드럼 녹음 중 하나로 손꼽힙니다. 그는 무명 시절처럼 작은 클럽 투어를 함께 돌며 음악적 초심을 다지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이 시기의 에너지는 곧이어 제작된 푸 파이터즈의 차기 앨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원 바이 원의 성공]
앨범 'One by One'을 통해 다시 한번 차트 정상을 차지하며 2000년대 록의 제왕임을 선언했습니다. 'All My Life' 등의 곡들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전 세계 투어의 규모를 키웠습니다. 멤버들 간의 깊은 유대감을 바탕으로 밴드는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앨범 제작 초기 녹음본을 모두 폐기하고 2주 만에 재녹음하는 완벽주의적 면모를 보였습니다. 이 앨범으로 그는 또다시 그래미 최우수 록 앨범상을 수상하며 독보적인 입지를 굳혔습니다. 무대 위의 퍼포먼스는 더욱 노련해졌으며 그는 록 음악의 생명력을 증명하는 전도사로 불렸습니다.
2003
[조딘 블룸과 재혼]
TV 제작자 조딘 블룸과 결혼하여 인생의 새로운 동반자를 맞이했습니다. 첫 번째 결혼의 아픔을 뒤로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며 음악 활동에 더욱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했습니다. 그녀는 훗날 데이브 그롤의 수많은 음악적 여정을 곁에서 지지해 준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로스앤젤레스 저택에서 열린 결혼식에는 록계의 수많은 거물들이 하객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는 결혼 이후 아버지가 된 뒤 자신의 가치관이 더욱 성숙해졌음을 인터뷰를 통해 고백했습니다. 두 사람은 할리우드에서 보기 드문 잉꼬부부로 알려지며 세 딸을 얻게 됩니다.
2004
[프로봇 프로젝트]
어린 시절의 우상이었던 헤비메탈 보컬리스트들과 협업한 솔로 프로젝트 'Probot'을 발표했습니다. 자신이 모든 곡을 쓰고 악기를 연주한 뒤 보컬만 다른 가수들에게 맡기는 독특한 형식으로 메탈 팬들을 열광시켰습니다. 자신의 음악적 뿌리에 대한 존경과 애정을 담은 앨범이었습니다.
모터헤드의 레미 킬미스터 등 전설적인 인물들이 대거 참여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상업적 이익보다는 순수한 팬심으로 기획된 이 앨범은 언더그라운드 메탈 신에서도 큰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장르를 가리지 않는 전방위 음악가로서의 역량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2005
[인 유어 아너]
강렬한 록 음악과 차분한 어쿠스틱 음악을 두 장의 CD에 담은 앨범 'In Your Honor'를 출시했습니다. 밴드의 상반된 매력을 완벽하게 담아내어 평단과 팬들로부터 동시에 극찬을 받았습니다. 이는 푸 파이터즈의 음악적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준 명작이었습니다.
앨범 발매 후 진행된 어쿠스틱 투어는 오페라 하우스 등에서 열리며 색다른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타이틀곡 'Best of You'는 빌보드 핫 100 상위권에 오르며 큰 인기를 누렸습니다. 그는 이 앨범을 통해 단순한 록 스타를 넘어 작곡가로서의 깊이를 한 층 더 끌어올렸습니다.
2006
[첫 딸 바이올렛 탄생]
첫째 딸 바이올렛 메이 그롤이 태어나며 아버지가 되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자녀의 탄생은 그의 창작 활동에 새로운 영감을 주었으며 삶의 우선순위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딸을 위해 쓴 곡들을 선보이며 다정한 아버지의 면모를 드러냈습니다.
바이올렛은 훗날 아버지의 무대에 코러스로 함께 서며 음악적 재능을 물려받았음을 증명했습니다. 데이브 그롤은 딸들이 자라나는 과정을 지켜보며 록 음악에 대한 열정을 더욱 긍정적인 방향으로 승화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슬하에 두 딸을 더 얻으며 행복한 다둥이 아빠의 삶을 살게 됩니다.
2009
[슈퍼그룹 결성]
레드 제플린의 존 폴 존스, 조쉬 호미와 함께 슈퍼그룹 'Them Crooked Vultures'를 결성했습니다. 록 역사에 남을 거장들의 만남으로 전 세계 음악팬들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그는 다시 드럼 앞에 앉아 선배 뮤지션들과 함께 신들린 듯한 연주를 선보였습니다.
밴드는 그래미 최우수 하드 록 퍼포먼스상을 수상하며 그 실력을 공인받았습니다. 데이브 그롤은 평생의 우상이었던 존 폴 존스와 한 팀에서 연주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했습니다. 이 활동은 그가 여전히 세계 최고의 테크니컬 드러머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킨 계기였습니다.
2011
[웨이스팅 라이트]
디지털 장비를 배제하고 자신의 차고에서 아날로그 테이프 방식으로 녹음한 앨범 'Wasting Light'를 발표했습니다. 현대 음악의 흐름에 반하는 파격적인 시도였으나 오히려 더 생동감 넘치는 사운드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앨범은 영국과 미국 차트 1위를 동시에 석권했습니다.
앨범 제작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Back and Forth'를 통해 록 스피릿의 진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이 앨범으로 그래미 5관왕을 달성하며 밴드 경력의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수록곡 'Walk'는 삶의 의지를 북돋우는 가사로 전 세계 팬들에게 큰 위로를 주었습니다.
2013
[영화 감독 데뷔]
다큐멘터리 영화 '사운드 시티'의 감독을 맡아 영화계에 성공적으로 데뷔했습니다. 전설적인 녹음실의 역사를 기록하고 음악 제작의 본질에 대해 질문을 던졌습니다. 선댄스 영화제에 초청받으며 감독으로서의 뛰어난 역량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영화 제작을 위해 직접 인터뷰를 진행하고 방대한 자료를 수집하는 열정을 보였습니다. 영화와 함께 발매된 사운드트랙 앨범은 전설적인 아티스트들의 협업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했습니다. 이후 그는 '소닉 하이웨이즈' 시리즈를 연출하며 스토리텔러로서의 행보를 넓혔습니다.
2014
[명예의 전당 헌액]
너바나의 멤버로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며 전설의 반열에 등극했습니다. 세상을 떠난 커트 코번을 대신해 동료들과 무대에 서서 감동적인 소감을 전했습니다. 90년대 록 혁명을 이끌었던 공로가 역사적으로 공식 인정받은 순간이었습니다.
헌액식 무대에서 여러 여성 보컬리스트들과 함께 너바나의 곡들을 재현하여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는 커트 코번의 어머니를 안아주며 비극을 넘어선 화해와 추모의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가 너바나의 드러머를 넘어 현대 음악사를 지탱하는 기둥임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2015
[골절 투혼과 왕좌]
스웨덴 공연 도중 무대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으나, 응급처치 후 돌아와 공연을 마쳤습니다. 이후 '기타로 만든 왕좌'를 제작하여 다리에 깁스를 한 채 전 세계 투어를 이어갔습니다. 그의 압도적인 투혼은 전 세계 록 팬들에게 거대한 감동과 존경을 안겼습니다.
사고 직후 그는 마이크를 잡고 "다리가 부러진 것 같지만 공연은 계속해야 한다"고 말해 관객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왕좌 위에서 연주하는 그의 모습은 '록의 제왕'이라는 수식어와 완벽하게 어우러졌습니다. 이 사건은 록 음악이 지닌 생명력과 팬들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는 역대급 에피소드로 남았습니다.
2021
[스토리텔러 출간]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담은 회고록 'The Storyteller'를 출간하여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겪은 수많은 일화들을 특유의 위트와 진솔함으로 풀어내어 극찬을 받았습니다. 음악가이자 감독에 이어 작가로서도 정점에 올랐음을 증명했습니다.
팬데믹 기간 동안 인스타그램에 올린 짧은 글들이 기초가 되어 한 권의 책으로 완성되었습니다. 너바나 시절의 뒷이야기부터 평범한 아버지로서의 일상까지 진솔하게 담아내어 평단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책은 출간 직후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며 그의 뛰어난 스토리텔링 능력을 다시 한번 입증했습니다.
[명예의 전당 2회 헌액]
푸 파이터즈의 리더로서 자신의 두 번째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습니다. 너바나의 드러머와 푸 파이터즈의 프론트맨으로 모두 성공한 극소수의 뮤지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록 음악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영원히 각인되었습니다.
폴 매카트니가 헌액사를 맡아 데이브 그롤의 음악적 업적을 극찬하며 훈훈한 우정을 과시했습니다. 그는 소감에서 자신과 함께해 준 모든 밴드 멤버들과 팬들에게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로써 그는 당대 록 음악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독보적인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2022
[파트너 호킨스의 별세]
25년간 영혼의 파트너였던 드러머 테일러 호킨스가 투어 도중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커트 코번에 이어 또다시 절친한 동료를 잃은 그는 깊은 실의에 빠져 모든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밴드와 그의 인생에 닥친 최대의 시련이자 슬픈 정적이었습니다.
그는 테일러 호킨스를 자신의 '형제'라고 부르며 누구보다 아꼈던 사이였습니다. 전 세계 음악계가 애도하는 가운데 그는 조용히 친구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며 슬픔을 견뎌냈습니다. 이후 런던과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대규모 추모 공연은 음악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헌사로 기록되었습니다.
2023
[거장의 위대한 귀환]
테일러 호킨스를 추모하고 상실의 고통을 노래한 앨범 'But Here We Are'를 발표하며 복귀했습니다. 데이브 그롤이 직접 드럼 연주까지 맡아 밴드의 뿌리로 돌아간 듯한 원초적인 사운드를 들려주었습니다. 슬픔을 예술로 승화시킨 거장의 복귀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앨범 수록곡 전반에 걸쳐 떠난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삶에 대한 철학이 깊게 투영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드러머 조시 프리즈와 함께 다시 무대에 서서 팬들에게 눈물 섞인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이 앨범은 평단으로부터 밴드 후기 커리어 중 최고의 완성도라는 극찬을 이끌어냈습니다.
2024
[개인적인 고백과 파문]
자신의 SNS를 통해 혼외자의 탄생 사실을 공개하며 전 세계 팬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가족들에게 용서를 구하며 책임감 있게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모범적인 가정적인 이미지 뒤에 숨겨진 개인적인 시련이 드러난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하며 신뢰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이 소식은 록계의 최고 신사로 통하던 그의 명성에 적지 않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실수를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식을 선택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2025
[멈추지 않는 록 스피릿]
현재까지도 데이브 그롤은 푸 파이터즈의 리더로서 전 세계를 돌며 라이브 공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많은 굴곡을 거쳐온 그의 연혁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며 후배 아티스트들에게 살아있는 교과서가 되고 있습니다. 그는 오늘도 무대 위에서 록의 생명력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음악 아카이브를 정리하며 미래 세대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 지원에도 힘쓰고 있습니다. 그의 열정은 나이를 무색케 하며 여전히 전 세계 록 페스티벌의 섭외 1순위로 군림하고 있습니다. 데이브 그롤의 역사는 고통을 이겨낸 예술이 어떻게 세상을 치유하는지를 보여주는 위대한 기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