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샤오핑

num_of_likes 110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덩샤오핑
중국 최고지도자, 개혁가, 혁명가, 정치가 + 카테고리

덩샤오핑은 중국의 3대 최고지도자이자 개혁개방의 총설계사이다. 그는 흑묘백묘론을 내세우며 이념보다 실용을 강조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창시했다. 문화대혁명의 시련을 딛고 복귀하여 경제 성장 세계 1위를 달성했고 홍콩 반환 협정을 이끌어냈다. 타임 올해의 인물에 두 차례 선정되며 20세기 아시아 위인 중 1위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04

[덩샤오핑 탄생]

청나라 쓰촴성 광안의 지주 집안에서 덩원밍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낙관적이고 원만한 성격을 가졌으며, 이는 훗날 정치적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아버지는 그에게 '공자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뜻의 선성(先聖)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청나라 쓰촴성 광안의 지주 집안에서 덩원밍의 첫 아들로 태어났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 낙관적이고 원만한 성격을 가졌으며, 이는 훗날 정치적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아버지는 그에게 '공자보다 나은 사람'이라는 뜻의 선성(先聖)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으나, 다섯 살 때 서당 훈장이 희현으로 고쳐주었다.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 당원이 된 후 만들어진 별명이다.

1920

[프랑스 유학 시작]

16세에 '근공검학'(근면하게 일하고 검약하여 공부한다) 정신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파리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자본주의와 노동운동, 사회주의를 접했다.

이때 훗날의 동지이자 평생의 큰형님으로 따르게 될 저우언라이를 만났다.

16세에 '근공검학'(근면하게 일하고 검약하여 공부한다) 정신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노동력이 부족했던 프랑스와 서구 문물을 배우려는 중국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 1,500명의 중국인이 프랑스에서 공부했다. 덩샤오핑은 파리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하며 자본주의와 노동운동, 사회주의를 접했다. 이때 훗날의 동지이자 평생의 큰형님으로 따르게 될 저우언라이를 만나 깊은 유대관계를 맺게 된다.

1924

[공산주의 청년동맹 가입]

프랑스 유학 중 중국 공산주의 청년동맹 유럽지부에 가입하며 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기관지 '적광'(붉은 태양)을 만드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굳혔다.

프랑스 유학 중 중국 공산주의 청년동맹 유럽지부에 가입하며 혁명가의 길로 들어섰다. 기관지 '적광'(붉은 태양)을 만드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며 자신의 정치적 신념을 굳혔다. 이 시기는 그의 사상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926

[소련 유학 및 공산당 입당]

프랑스의 공산주의 청년동맹 탄압을 피해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중산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수학했다.

이 시기에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면서 본격적인 공산주의 혁명가로 성장한다.

프랑스의 공산주의 청년동맹 탄압을 피해 소비에트 연방 모스크바 중산 대학교에서 정치학을 수학했다. 이 시기에 중국공산당 당원이 되면서 본격적인 공산주의 혁명가로 성장한다. 소련에서의 학습은 그의 공산주의 이념을 더욱 공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7

[중국 혁명 활동 시작]

소련 유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혁명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조국에서 혁명의 일선에 뛰어들며 그의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이 시작되었다.

소련 유학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혁명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후 다양한 직책을 맡으며 중국공산당의 핵심 인물로 성장해 나갔다.

1929

[제7군 정치위원 취임]

중국공산당 제7군 정치위원에 임명되며 당내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의 군사 및 정치 경력의 중요한 시작점이 되었다.

중국공산당 제7군 정치위원에 임명되며 당내 주요 직책을 맡아 활동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부터 그는 군사 조직 내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1933

[마오쩌둥과의 첫 시련]

중국공산당 내 소련파와 마오쩌둥파의 당권 경쟁에서 마오쩌둥이 패배하자, 그를 지지했던 덩샤오핑도 함께 실각하는 시련을 겪었다.

이 시기에 두 번째 아내 진웨이잉이 그를 떠나기도 했다.

중국공산당 내 소련파와 마오쩌둥파의 당권 경쟁이 치열했는데, 마오쩌둥이 지면서 덩샤오핑도 실각하는 시련을 겪었다. 이 시기에 두 번째 아내 진웨이잉이 그를 떠나기도 했다. 하지만 소련파의 이론이 중국 현실에 맞지 않고 마오쩌둥의 농민 소비에트 주장이 옳음이 입증되면서 복귀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1934

[대장정 합류]

중국공산당의 역사적인 '대장정'(大長征)에 참여하며 혁명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이 여정 도중에 열린 회의에서 마오쩌둥의 이론이 인정받게 되면서, 그의 정치적 재기를 위한 중요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중국공산당의 역사적인 '대장정'(大長征)에 참여하며 혁명가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대장정 도중에 열린 회의에서 소련파의 도시 노동자 중심 혁명론 대신 마오쩌둥의 농민 소비에트론이 인정받게 되면서, 그의 정치적 재기를 위한 중요한 발판이 마련되었다.

1938

[줘린과의 세 번째 결혼]

윈난성의 실업가 딸인 줘린과 세 번째 결혼을 했다.

그녀는 1938년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이듬해 야난에 있는 마오쩌둥의 동굴 앞에서 덩샤오핑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슬하에 2남 3녀를 두었다.

덩샤오핑은 세 번의 결혼을 했다. 첫 아내 장 시유안은 소련 유학 시절 동료였으나 첫아이 출산 후 24세에 사망했다. 두 번째 아내 진웨이잉은 1933년 그의 정치적 실각 직후 떠났다. 세 번째 아내인 줘린은 윈난성 실업가의 딸로, 1938년 공산당에 입당했으며 이듬해 야난에서 덩샤오핑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5명의 자식(2남 3녀)을 두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었다.

1945

[공산당 중앙위원 선출]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며 당내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이는 훗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에 이바지하고 최고 지도자의 반열에 오르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중국공산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며 당내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는 마오쩌둥의 오랜 전우로서 혁명 직후 공산당의 비서장으로 임명되는 등 중용되었다.

1946

[국공내전의 승리 주역]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어진 국공내전에서 류보청 사단장과 함께 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으로 활약했다.

특히 화이하이 대전에서 6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100만 국민당 군대를 대파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혁명 성공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어진 국공내전에서 류보청 사단장과 함께 팔로군 129사단 정치위원으로 활약했다. 특히 화이하이 대전에서 60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100만 국민당 군대를 대파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며 혁명 성공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이 승리로 화중, 화남, 서남지방을 정복하고 서남지방 4개 성의 제1서기가 되는 등 혁명 성공의 핵심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1949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공신]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정무원 부총리, 재정 부장,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 등 주요 직책을 연이어 역임하며 신생 국가 건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수립 후 정무원 부총리, 재정 부장, 당 정치국 상무위원 겸 중앙서기처 총서기, 중소 회담 중공측 대표단장 등 주요 직책을 연이어 역임하며 신생 국가 건설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54

[중앙조직부 부장 취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에 오르고,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 부장을 겸직하며 당 조직을 총괄하는 핵심 인사가 되었다.

이는 그의 당내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부총리에 오르고, 중국공산당 중앙조직부 부장을 겸직하며 당 조직을 총괄하는 핵심 인사가 되었다. 이 시기부터 그는 중국의 주요 정책 결정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1957

[당 비서장으로서 국정 총괄]

반우파투쟁에서 마오쩌둥을 공식적으로 지원한 이후, 중국공산당의 비서장이 되어 나라의 일상 업무를 총괄하는 막강한 실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대약진 운동 실패 후 마오쩌둥의 권력이 약화되면서 그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1957년의 반우파투쟁에서 마오쩌둥을 공식적으로 지원한 이후, 덩샤오핑은 중국공산당의 비서장이 되어 나라의 일상 업무를 총괄하는 막강한 실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인한 아사사태로 마오쩌둥에게 비판의 화살이 쏟아지자, 덩샤오핑은 류사오치와 함께 실질적인 권력을 쥐고 합리적인 경제개혁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1962

["흑묘백묘론" 제시]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는 유명한 '흑묘백묘론'을 제시하며, 이념보다 실용성을 우선하는 경제 정책의 방향을 암시했다.

이는 훗날 그의 개혁개방 노선의 핵심 철학이 된다.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잡는 게 좋은 고양이다"는 유명한 '흑묘백묘론'을 제시하며, 이념보다 실용성을 우선하는 경제 정책의 방향을 암시했다. 이 발언은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 모델을 구축하는 데 결정적인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1966

[문화대혁명으로 첫 실각]

마오쩌둥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으로 인해 실권하여 당직에서 물러나는 시련을 겪었다.

이는 그의 정치 인생에서 여러 차례 반복될 복귀와 실각의 시작이었다.

권력 누수를 우려한 마오쩌둥이 문화대혁명을 유발시켰고, 이 시기에 덩샤오핑은 실각하여 당직에서 은퇴하는 시련을 겪었다. 이는 그의 정치 인생에서 여러 차례 반복될 복귀와 실각의 시작이었다.

1968

[홍위병 박해와 가족의 비극]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의 박해를 받으며 큰아들 덩푸팡이 베이징대 추락 사고로 하반신 마비라는 비극을 겪었다.

이는 그에게 가장 큰 슬픔으로 남았으며, 아들은 이후 장애인 인권 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의 박해를 받으며 큰아들 덩푸팡이 베이징대학교 추락 사고로 하반신 마비라는 비극을 겪었다. 이는 그에게 가장 큰 슬픔으로 남았으며, 덩푸팡은 이후 장애인복지기금, 중국장애인연합회 등을 설립하며 장애인 인권 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덩샤오핑 자신도 여러 번 마오쩌둥의 박해를 받았다.

1971

[국무원 상무부총리 역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상무부총리 직책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이는 문화대혁명 중에서도 그의 정치적 경험과 능력이 여전히 필요했음을 보여준다.

1971년 9월 13일부터 1976년 1월 1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상무부총리 직책을 맡아 국정 운영에 참여했다. 이 시기는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그의 정치적 경험과 능력이 여전히 필요했음을 보여준다.

1972

[국무원 총리 권한대행 수행]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권한대행을 수행하며 잠시 국가의 행정 최고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이는 그가 복귀하는 과정에서 맡았던 중요한 직책 중 하나다.

1972년 11월 12일부터 1973년 1월 1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권한대행을 수행하며 잠시 국가의 행정 최고 책임자 역할을 맡았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의 탁월한 행정 능력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1973

[부총리로 기적적 복권]

문화대혁명으로 실권한 지 7년 만에 다시 부총리로 기적적으로 복권되며 정치적 생명력을 과시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숙청당했다가 복귀하는 모습을 보여 '오뚜기' 또는 '부도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문화대혁명으로 실권한 지 7년 만에 다시 부총리로 기적적으로 복권되며 정치적 생명력을 과시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 숙청당했다가 복귀하는 모습을 보여 '오뚜기' 또는 '부도옹'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의 불굴의 의지와 뛰어난 정치 수완이 입증된 사건이다.

1974

[정치 전면에 재복귀]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다시 정치 전면에 복귀하며 최고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중국 정치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임을 증명하는 과정이었다.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도 다시 정치 전면에 복귀하며 최고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시작했다. 그의 복귀는 중국의 미래 방향 설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1975

[핵심 요직에 재등용]

중화인민지원군 총참모장에 내정되고 당 부주석 겸 정치국 상무위원직을 맡는 등 다시 핵심 요직에 등용되며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이 시기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중화인민지원군 총참모장에 내정되고 당 부주석 겸 정치국 상무위원직을 맡는 등 다시 핵심 요직에 등용되며 권력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1975년 베이징에서 제럴드 포드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지며 국제 외교 무대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냈다.

1976

[또 다른 실각과 복직]

또다시 고초를 겪으며 실각했으나, 그 해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사망 이후 기적적으로 복직하여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마오쩌둥에게 '공이 7이요 과는 3이다'라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또다시 고초를 겪으며 실각했으나, 그 해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사망 이후 기적적으로 복직하여 중국의 최고 지도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그는 마오쩌둥에게 '공이 7이요 과는 3이다'라는 냉정한 평가를 내리며 사적인 원한을 품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자신에게 잠재적인 정적이 될 만한 세력의 숙청을 감행하며 권력을 공고히 했다.

1977

[국무원 상무부총리 재임]

다시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상무부총리 직책을 맡으며 개혁개방을 위한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이는 그의 재등장이 중국의 변화를 예고하는 중요한 신호였다.

1977년 1월 8일부터 1980년 9월 9일까지 다시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상무부총리 직책을 맡으며 개혁개방을 위한 기틀을 다지기 시작했다. 그의 강력한 리더십 아래 중국은 새로운 변화의 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했다.

1978

[개혁개방 총설계사의 시작]

문화대혁명 후 완벽하게 복권되어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에 취임하며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이 제일의 생산력이다"라는 명언으로 국가 발전의 방향을 제시했으며, 타임지 선정 '올해의 인물'에 처음으로 선정되었다.

문화대혁명 후 완벽하게 복권되어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에 취임하며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과학기술이 제일의 생산력이다"라는 명언으로 국가 발전의 방향을 제시했으며, 그의 업적을 인정받아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처음으로 선정되었다.

[정치협상회의 주석 취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으로 취임하며 국가 최고 정책 결정 과정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 직책은 1983년까지 유지되었다.

1978년 3월 8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전국위원회 주석으로 취임하며 국가 최고 정책 결정 과정에 깊이 관여하기 시작했다. 이 직책은 1983년 6월 22일까지 유지되었다.

[중국의 최고 지도자 등극]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리고 중국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로 등극했다.

비록 공식 직함은 아니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군림하며 개혁개방을 이끌었다.

1978년 12월 22일부터 1989년 11월 9일까지 중국의 실질적인 최고 지도자로 등극했다. 중국공산당 내 그의 지지자들을 선동하여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화궈펑을 교묘하게 따돌리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의 공식 직함은 공산당 중앙 군사위원회 의장이었지만, 1990년대 중반까지 중국의 지도자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1979

[서방과의 관계 증진]

미국을 방문하여 지미 카터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고, 카터 대통령은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정식 공인했다.

덩샤오핑의 권력기에 서방과의 관계가 확연히 증진되는 계기가 되었다.

덩샤오핑이 권력에 있을 때, 서방과의 관계가 확연히 증진되었다. 197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여 백악관에서 지미 카터 대통령과 만났다. 카터 대통령은 마침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정식 공인했다.

1980

[당정분리 원칙 제시]

"당정을 나누지 않고 당이 정부를 대신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당과 정부의 권력 분립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는 공산당의 장기적 안정과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그의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당정을 나누지 않고 당이 정부를 대신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언급하며, 당과 정부의 권력 분립 필요성을 역설했다. 본래의 계획은 당에서 정책을 개발하고 정부에서 수행하도록 하여, 권력이 개인의 취향에 영향을 받지 않도록 분립되도록 했다.

1981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취임]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하며 군부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력을 확보,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 직책은 1989년까지 유지되었다.

중국공산당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하며 군부에 대한 절대적인 통제력을 확보, 명실상부한 중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이는 그가 모든 공식 직함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실권을 쥐고 있을 수 있게 한 핵심 직책이었다.

[국가주석 권한대행 수행]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대행을 수행하며 국가원수로서의 역할도 겸했다.

이는 리셴녠 국가주석이 정식 취임하기 전까지 중국을 대표하는 중요한 직책이었다.

1981년 5월 29일부터 1983년 6월 18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주석 대행을 수행하며 국가원수로서의 역할도 겸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중국의 최고지도자로서 국내외 정책을 총괄했다.

[최고권력자로서 군림 시작]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에 취임하며 1989년까지 중국의 최고권력자로 군림했다.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통해 실권을 굳건히 쥐고 있었다.

1981년 6월 28일부터 1989년 11월 7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취임하며 중국의 최고권력자로 군림했다.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통해 실권을 굳건히 쥐고 있었다.

1982

[중국 특색 사회주의 창시]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기치를 내걸며, 자본주의 시장 경제 요소를 도입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모델인 '덩샤오핑 이론'을 창시했다.

이는 중국의 비약적인 경제 성장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으며, 세계 1위 경제 성장을 달성하는 기반이 되었다..

"중국 특색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기치를 내걸며, 자본주의 시장 경제 요소를 도입한 새로운 형태의 사회주의 모델인 '덩샤오핑 이론'을 창시했다. 이는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4대 현대화를 목표로 한 공산주의 시장경제 전략으로, 중국의 비약적인 경제 성장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덩샤오핑 취임 이후 중국의 경제 성장은 세계 1위를 달성하며 약 2경 원에 달하는 경제적 효과를 창출했다.

1983

[부패 개혁 '엄타' 단행]

범죄 척결과 부패 개혁을 명분으로 '엄타(嚴打)'를 단행했다.

이는 형법을 수정하여 범죄자들에게 최고형을 적용할 수 있도록 했으며, 사회 질서 유지와 공산당 권력 공고화에 기여했다.

이 정책으로 최소 86만 명이 처리되고 2만 4천 명 이상이 사형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3년 9월 2일, 전국인대 상임위원회는 <사회치안을 엄중하게 위해하는 범죄분자를 엄벌하는데 관한 결정>등 3개의 중대한 결정을 통과시켰다. 이는 형법에 대한 근본적인 수정으로, 깡패죄 등 10여 종의 범죄에 대해 "형법에 규정한 최고형 이상으로 처형하고, 사형까지 처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이 엄타 정책으로 최소 861,000명이 처리되고 24,000명이 총살로 사형당한 것으로 기록된다. 1996년, 2001년에도 전국적인 엄타가 진행되며 중국공산당 권력을 공고화했다.

[국가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취임하여 군부에 대한 최고 통수권을 행사했다.

이 직책은 1990년까지 유지되었으며, 그가 명목상 직책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실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1983년 6월 6일부터 1990년 3월 23일까지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취임하여 군부에 대한 최고 통수권을 행사했다. 그는 이 직책을 통해 국가의 안정과 발전, 그리고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했다.

[과도정부 체제 종식]

약 8년 5개월간 지속되던 중화인민공화국 과도정부 체제가 종식되고, 리셴녠이 정식 국가주석으로 취임했다.

덩샤오핑은 국가원수직에서 물러났지만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통해 실권을 유지했다.

약 8년 5개월간(1975년 1월 17일~1983년 6월 18일) 지속되던 중화인민공화국 과도정부 체제가 종식되고, 리셴녠이 정식 국가주석으로 취임했다. 덩샤오핑은 국가원수직과 인민정치협상회의 주석직에서 물러났지만 군사위원회 주석직을 통해 실권을 유지하며 막후에서 중국 정치를 이끌었다.

1984

[홍콩 반환 협정 체결]

영국과 '중영 공동 선언'을 체결하여 1997년 7월 1일에 홍콩이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될 것을 합의했다.

그는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를 향후 50년간 간섭하지 않겠다는 '1국 2체제' 원칙을 제시했다.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 간에 체결한 '중영 공동 선언'에 따라 홍콩이 1997년 7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될 것을 합의했다. 덩샤오핑은 99년 동안의 조차를 마치는 홍콩에 대하여 향후 50년 간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를 간섭하지 않겠다는 '1국 2체제' 원칙을 제시했으며, 이러한 접근방법은 중국 재통일의 근거로 대두되고 있다.

1985

[두 번째 타임 올해의 인물]

1978년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다.

이는 그의 국제적 영향력과 개혁 성과를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다.

1978년에 이어 두 번째로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한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었다. 이는 그의 국제적 영향력과 개혁 성과를 다시 한번 전 세계에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으며, 그가 20세기와 21세기의 아시아 위인 중 1위로 평가받는 이유 중 하나이다.

1987

[국가 경영 철학 역설]

"정치는 1류, 관료는 2류, 백성은 3류, 기업은 4류다.

4류 장사치가 설치는 나라는 망한 나라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국가 운영의 우선순위와 기업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정치는 1류, 관료는 2류, 백성은 3류, 기업은 4류다. 4류 장사치가 설치는 나라는 망한 나라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국가 운영의 우선순위와 기업 활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중국 특색 사회주의 건설의 핵심 가치를 보여주는 발언이다.

1989

[톈안먼 사태 진압 주관]

1989년 톈안먼 사건의 강경 진압을 주관하며 민주화 요구 시위를 강력하게 억압했다.

이 사건은 그의 통치 기간 중 가장 큰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건으로 기록된다.

1989년 톈안먼 사건의 강경 진압을 주관하며 민주화 요구 시위를 강력하게 억압했다. 당시 양상쿤 주석과 협력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를 진압했다. 이 사건 후 그는 양상쿤을 몰락시키고 장쩌민을 후계자로 내정하는 등 막후 실력을 행사하며 권력 이양을 준비했다.

[모든 공식 직함에서 퇴임]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에서 퇴임하며 모든 공식 직함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이후에도 '원로'로서 막후 실력을 행사하며 중국 정치에 큰 영향력을 미쳤다.

1989년 11월 7일, 중화인민공화국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에서 퇴임하며 모든 공식 직함에서 물러났다. 이는 표면적인 은퇴였을 뿐, 이후에도 '원로'로서 장쩌민을 권력의 중심에 올려놓고 중국 정치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1992

[시장경제에 대한 통찰]

"계획이 곧 사회주의가 아닌 것처럼, 시장경제도 자본주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역설하며, 경제 체제의 유연성을 강조했다.

이는 그의 실용주의 노선을 명확히 보여주는 발언이다.

"계획이 곧 사회주의가 아닌 것처럼, 시장경제도 자본주의 전유물이 아니다"라고 역설하며, 경제 체제의 유연성을 강조했다. 그의 이러한 통찰은 중국 경제 개혁의 성공에 중요한 이론적 기반이 되었다.

1997

["도광양회" 유언 남김]

임종을 앞두고 "미국에 대들지 말고, 힘을 키워라"는 유언을 남기며,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내실을 다지고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도광양회' 외교 전략의 핵심을 제시했다.

이는 오늘날 중국의 외교 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임종을 앞두고 "미국에 대들지 말고, 힘을 키워라"는 유언을 남기며, 중국이 국제사회에서 내실을 다지고 국력을 키워야 한다는 '도광양회' 외교 전략의 핵심을 제시했다. 이 유언은 이후 중국의 대외 정책 기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93세로 서거]

93세의 나이로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서거했다.

그는 저우언라이의 유언처럼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홍콩 앞바다에 뿌려달라고 했고,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처리되었다.

1997년 2월 19일 93세의 나이로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서거했다. 그는 저우언라이의 유언처럼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여 홍콩 앞바다에 뿌려달라고 했고,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처리되었다. 죽고 난 뒤 장쩌민의 지도 아래 중국은 연평균 8%의 GDP 성장을 계속하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1인당 국민소득 성장률을 기록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덩샤오핑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