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연표
1471
[연경궁의 탄생]
세조가 며느리 소혜왕후를 위해 마련한 사저였던 이곳은 성종 즉위 후 왕실에 바쳐지며 '연경궁'이라는 이름을 얻게 됩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곳이 처음으로 궁궐의 이름을 갖게 된 순간입니다.
1592
[임진왜란, 왕의 피난처]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불타자, 선조는 의주로 피난 후 환궁하여 월산대군의 집이었던 이곳을 임시 거처인 '정릉동 행궁'으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본래 사저였던 곳이 비로소 왕이 머무는 궁이 된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1608
[두 임금의 즉위지]
임진왜란 중 왕의 임시 거처가 된 이곳은 선조가 생을 마감한 장소이자, 그의 아들 광해군이 '즉조당'에서 즉위한 역사적인 공간입니다.
이후 인조반정으로 인조 역시 즉조당에서 왕위에 오르며, 이곳은 혼란스러운 시대 속 두 임금의 즉위 현장이 됩니다.
1611
['경운궁'으로 재탄생]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임시 행궁이었던 이곳에 정식 궁호 '경운궁'을 내립니다.
드디어 이곳은 왕궁으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됩니다.
1618
[서궁, 비극의 그림자]
광해군이 자신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하고 '서궁'이라 부르면서, 경운궁은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이 됩니다.
궁궐은 점차 퇴락해 별궁처럼 축소되었습니다.
1883
[외교의 중심지로 부상]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후 미국 공사관이 정동에 들어서면서, 영국, 러시아 등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이웃하여 들어옵니다.
경운궁 주변은 외국 세력의 영향력이 강한 '외국인 정착지'로 불리며 국제 외교의 요충지로 급부상합니다.
1896
[아관파천, 고종의 피난처]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합니다.
이때 경운궁은 왕비들의 거처로 사용되며, 고종은 곧 이곳을 새로운 궁궐로 만들고자 합니다.
1897
[대한제국의 법궁이 되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에서 경운궁으로 환궁하면서, 이곳은 비로소 실질적인 궁궐의 기능을 회복합니다.
주변 외국 공사관의 보호를 기대하며 선택된 이 궁은 혼란의 시대에 대한제국의 중심이 될 준비를 시작합니다.
[황제국 선포와 정궁 위용]
고종이 원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며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광무' 연호를 사용합니다.
동시에 경운궁은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으로서의 위용을 갖추기 시작하며, 이 땅에 자주 독립의 염원을 담은 황제국 시대가 열립니다.
1900
[전기가 들어온 최초 궁궐]
경운궁은 담장 공사를 마침과 동시에 궁내에 발전소를 설비하여 전기를 공급하기 시작합니다.
궁궐 안에 전등이 밝혀진 것은 경운궁이 세계 최초였으며, 이는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향한 의지를 상징합니다.
1901
[덕혜옹주 위한 유치원]
고종은 이곳 준명당에 어린 덕혜옹주를 위해 유치원을 마련해주며 애틋한 부정을 드러냈습니다.
궁궐 안에 유치원이 설립된 것은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파격적인 시도로, 고종의 특별한 사랑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역사입니다.
1902
[웅장한 중화전 완공]
경운궁의 법전인 중화전과 정문인 중화문이 마침내 완공됩니다.
2층 건물로 웅장하게 지어진 중화전은 대한제국의 위엄을 상징했으며, 비록 외문인 조원문이 공간 부족으로 동측으로 꺾이긴 했지만, 법궁으로서의 체계를 갖추는 데 큰 의미가 있었습니다.
1904
[대화재, 궁궐 집어삼키다]
함녕전에서 시작된 불은 거센 바람을 타고 순식간에 궁의 중심부를 휩쓸며 정전 중화전을 비롯해 즉조당, 석어당 등 대부분의 전각을 잿더미로 만듭니다.
고종은 큰 슬픔 속에서도 즉시 재건을 명하며 궁궐의 재기를 다짐합니다.
1905
['을사늑약' 비극적 현장]
화재 후 재건 중이던 이곳 중명전에서 일본의 강압적인 요구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됩니다.
이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고 국권을 빼앗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중명전은 한국 근대사의 가장 슬픈 현장 중 하나로 기억됩니다.
1906
['대한문' 새 이름, 새 정문]
경운궁의 동쪽 문인 '대안문'이 수리되면서 '대한문'으로 이름을 바꾸고 궁궐의 새로운 정문이 됩니다.
이는 국조의 영원한 번영을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오늘날 덕수궁의 상징적인 얼굴이 됩니다.
1907
['덕수궁'으로 개명되다]
헤이그 밀사 사건의 여파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위한 후,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며 이곳의 궁호가 '경운궁'에서 현재의 '덕수궁'으로 변경됩니다.
이는 양위한 상왕의 거처에 붙이던 관례적인 이름이었습니다.
1909
[한국 최초 서양식 건축]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신고전주의 양식의 석조 건물인 석조전이 마침내 완공됩니다.
총세무사 브라운의 권유로 영국인 하딩이 설계한 이 3층 석조 건물은 그리스 건축과 르네상스 양식이 어우러진 형태로, 덕수궁이 근대화를 향한 문을 여는 상징이 됩니다.
1912
[태평로 확장과 궁궐 축소]
일제강점기, 종로와 숭례문을 잇는 태평로(현 세종대로)가 건설되면서 덕수궁의 동쪽 궁벽이 허물어지고 대한문도 현재의 위치로 옮겨집니다.
이로 인해 덕수궁의 영역은 대규모로 축소되며 수난의 시대를 겪게 됩니다.
1919
[고종 서거, 궁궐 기능 상실]
덕수궁 함녕전에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고종이 서거합니다.
그의 죽음과 함께 덕수궁은 궁궐로서의 모든 기능을 상실하고, 일제강점기 동안 박물관이나 공원 등으로 그 용도가 변질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1931
[공원으로 대중에게 열리다]
일제는 덕수궁을 대중을 위한 공원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추진합니다.
이로 인해 중화전 주변 행각 등 많은 부분이 철거되지만, 역설적으로 덕수궁은 일반 대중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1950
[6.25 전쟁 속 지켜낸 궁]
6.25 전쟁 중 인민군이 덕수궁으로 숨어들자 미군은 포격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제임스 딜 중위는 "몬테카시노 수도원처럼 파괴되어선 안 된다"며 포격을 반대하여 궁궐을 지켜냅니다.
그의 결단 덕분에 덕수궁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1970
[대한문, 현재 위치로 이건]
태평로 확장으로 인해 도로 중앙에 '섬'처럼 남았던 덕수궁 대한문이 33미터 뒤로 옮겨져 현재의 위치에 자리하게 됩니다.
이로써 대한문은 오늘날 우리가 아는 덕수궁의 모습으로 최종적인 배치를 갖게 됩니다.
2011
['경운궁' 명칭 변경 보류]
덕수궁의 본래 이름인 '경운궁'으로 명칭을 회복해야 한다는 민원이 제기되었으나, 문화재청은 100년 이상 사용된 명칭 변경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비용을 고려하여 명칭 변경 안건 심의를 '보류'하기로 결정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