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스미스
1982년 맨체스터에서 결성된 잉글랜드의 전설적인 록 밴드입니다. 보컬 모리세이의 문학적이고 풍자적인 가사와 기타리스트 조니 마의 독보적인 쟁글 기타 사운드가 조화를 이뤘습니다. 1980년대 영국 인디 음악 신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밴드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당시 유행하던 신시사이저 위주의 댄스 팝을 거부하고 독자적인 음악 세계를 구축했습니다. 내부 갈등으로 1987년 해체되었지만 롤링 스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노래 목록에 다수 포함되는 등 그들의 유산은 오늘날까지 수많은 밴드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연표
1982
[밴드명 '더 스미스' 탄생]
모리세이가 밴드 이름을 '더 스미스(The Smiths)'로 결정합니다.
그는 가장 평범한 이름을 통해 세상의 평범한 이들이 전면에 나설 때라고 생각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전설의 시작, 밴드 결성]
기타리스트 조니 마가 보컬리스트 스티븐 모리세이를 찾아가 밴드 결성을 제안합니다.
시와 문학이라는 공통 관심사로 빠르게 가까워진 두 사람은 첫 리허설을 갖고 자작곡 작업을 시작합니다.
이들의 협업은 훗날 밴드 더 스미스의 음악적 초석이 됩니다.
[첫 데모 음원 녹음]
맨체스터의 데시빌 스튜디오에서 드러머 사이먼 울스텐크로프트의 도움을 받아 첫 데모 음원을 녹음합니다.
여기에는 초기에 작업했던 'The Hand That Rocks the Cradle'과 'Suffer Little Children'이 포함됩니다.
[역사적인 첫 라이브 공연]
맨체스터 리츠에서 열린 학생들의 음악 및 패션쇼 오프닝 무대에 오르며 대중 앞에서 첫 공연을 갖습니다.
모리세이가 기획한 연출로 클라우스 노미의 'The Cold Song'을 배경 음악으로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깁니다.
[앤디 루어크 합류]
밴드의 핵심 멤버가 될 베이시스트 앤디 루어크가 합류합니다.
기존 베이시스트 데일 히버트가 밴드의 분위기와 음악적 방향성에 불만을 표하며 교체된 결과였습니다.
1983
[히트 싱글 연이은 발매]
싱글 'This Charming Man'과 'What Difference Does It Make?'가 각각 영국 싱글 차트 25위와 12위에 오르며 본격적으로 음악적 인정을 받기 시작합니다.
이 과정에서 B-사이드 곡 'Handsome Devil'이 소아성애 논란에 휩싸였으나 밴드는 강력히 부인합니다.
[데뷔 싱글 발매 및 계약]
런던의 인디 레이블 러프 트레이드 레코드와 계약을 맺고 첫 싱글 'Hand in Glove'를 발매합니다.
꽤 괜찮은 판매량을 기록했지만, 영국 톱 40 진입에는 실패합니다.
하지만 이후 BBC 라디오 출연 등으로 팬층을 넓혀나갑니다.
1984
[첫 톱10 싱글 탄생]
앨범 미수록 싱글 'Heaven Knows I'm Miserable Now'가 영국 톱 10에 처음으로 진입하며 대중적인 인기를 증명합니다.
이 곡은 밴드의 오랜 협력자인 프로듀서 스티븐 스트리트와의 작업을 알리는 시작이 됩니다.
['살인사건' 연상곡 논란]
B-사이드 곡 'Suffer Little Children'이 '무어 살인사건'을 연상시킨다는 논란에 휩싸입니다.
피해자 가족의 항의를 받았으나, 모리세이와의 대화로 오해가 풀리고 오히려 피해자 어머니와 친분을 쌓는 계기가 됩니다.
[데뷔 앨범, 차트 상위권]
대망의 데뷔 앨범 를 발매하고 영국 앨범 차트 2위에 오르며 큰 성공을 거둡니다.
이 앨범은 곧바로 밴드의 상징적인 사운드를 확립하며 평단의 극찬을 받습니다.
그러나 일부 수록곡에 대한 소아성애 논란이 다시 불거지기도 했습니다.
1985
[유일한 1위 앨범 발매]
두 번째 정규 앨범 를 발매합니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 1위에 오르며 밴드의 정규 앨범 중 유일하게 1위를 기록하는 금자탑을 쌓습니다.
채식주의, 반체벌 등 더욱 과격하고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아냈습니다.
이 앨범은 2003년 롤링 스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500장' 중 295위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모리세이는 이 시기 언론 인터뷰를 통해 대처 정부, 영국 귀족, 기근 구호 프로젝트 밴드 에이드 등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986
[멤버 해고와 복귀]
베이시스트 앤디 루어크가 헤로인 사용 문제로 잠시 밴드에서 해고되는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합니다.
그를 대체할 크레이그 개넌이 영입되지만, 앤디 루어크는 2주 만에 복귀하고 개넌은 리듬 기타리스트로 남아 5인조로 활동하게 됩니다.
앤디 루어크의 해고 통보가 자동차 유리창에 포스트잇으로 붙어있었다는 일화는 유명합니다. 모리세이는 이를 부인했습니다.
[명반 ]
세 번째 정규 앨범 를 발매합니다.
러프 트레이드와의 법적 공방으로 발매가 7개월이나 미뤄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은 영국 차트 2위에 오르며 평단과 팬덤 모두에게 명작으로 인정받습니다.
[마지막 라이브 공연]
런던 브릭스톤 아카데미에서 남아프리카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공연을 펼칩니다.
이 공연은 더 스미스의 마지막 라이브 무대로 기록되며, 밴드의 역사에 중요한 한 획을 긋습니다.
1987
[EMI와 메이저 계약]
러프 트레이드와의 계약 만료 후 EMI와 새로운 계약을 체결합니다.
이는 팬들과 음악 언론의 비판을 불러일으켰으나, 밴드는 주류 레이블로의 이적을 통해 더 큰 성공을 모색하려 했습니다.
[조니 마의 전격 탈퇴]
밴드의 음악적 핵심이었던 기타리스트 조니 마가 밴드를 떠나기로 결정합니다.
모리세이의 음악적 경직성과 NME 기사 오해 등 복합적인 내부 갈등이 원인이었습니다.
이는 밴드 해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밴드 해체 및 마지막 앨범]
네 번째이자 마지막 정규 앨범 을 발매하며 공식적으로 해체됩니다.
이 앨범은 영국 차트 2위에 오르고, 빌보드 200에서 55위를 기록하며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스미스 앨범으로 남습니다.
모리세이와 조니 마는 이 앨범을 스미스 앨범들 중 가장 좋아한다고 밝혔습니다. 조니 마는 특히 모리세이가 1960년대 팝 아티스트 노래에 집착하는 것에 지쳤다고 언급하며 '실라 블랙 노래를 부르는 밴드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고 해체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1988
[모리세이 솔로 데뷔]
모리세이가 첫 솔로 앨범 을 발표하며 솔로 활동을 시작합니다.
이 앨범은 발매 직후 영국 차트 1위에 오르며 그의 변함없는 영향력을 입증합니다.
1989
[로열티 분쟁 시작]
드러머 마이크 조이스와 베이시스트 앤디 루어크가 모리세이와 조니 마를 상대로 로열티 분배에 대한 법적 소송을 제기합니다.
기존 40:40:10:10의 분배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각각 25%의 수익 분배를 요구했습니다.
앤디 루어크는 재정난으로 인해 83,000 파운드와 로열티 10%를 받는 조건으로 즉시 합의하고 소송을 포기했습니다.
1996
[조이스, 로열티 소송 승소]
마이크 조이스는 고등법원까지 소송을 이어간 끝에 승소합니다.
법원은 조이스에게 미지급 로열티 1백만 파운드와 함께 이후 수익의 25%를 지급하라고 판결합니다.
판사는 모리세이와 조니 마의 증언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 판결은 밴드 해체 이후 멤버들 간의 깊은 불화를 다시 한번 드러냈습니다. 모리세이는 판결에 항소했으나 기각되었고, 앤디 루어크도 이후 파산 선고를 받습니다.
2012
[롤링 스톤 선정 명반/명곡]
롤링 스톤이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반 500장' 목록에 더 스미스의 정규 앨범 네 장이 모두 포함됩니다.
또한 'William, It Was Really Nothing'과 'How Soon Is Now?'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래 500곡' 목록에 이름을 올리며 밴드의 음악적 위상을 재확인합니다.
2014
[명예의 전당 후보 지명]
더 스미스는 록앤롤 명예의 전당 후보에 지명됩니다.
이듬해인 2015년에도 다시 후보에 오르며, 대중음악 역사에 끼친 그들의 지대한 영향을 인정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