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제9대 국회의원 선거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제9대 국회의원 선거는 박정희 정부의 10월 유신 선포와 유신 헌법 제정 이후 처음으로 실시된 총선으로, 입법부를 행정부의 시녀로 전락시킨 유신 체제의 완성을 의미합니다. 기존의 소선거구제에서 한 선거구당 2인을 선출하는 중선거구제로 선거법이 개정되었는데, 이는 여당인 민주공화당 후보의 동반 당선을 용이하게 하여 안정적인 의석을 확보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또한 전체 의석의 3분의 1을 대통령이 추천하고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선출하는 '유신정우회'로 채움으로써, 선거 결과와 무관하게 집권 세력이 개헌 저지선인 3분의 2 의석을 자동으로 확보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야당인 신민당은 내부 분열과 관권 선거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서 선전하며 민심의 이반을 보여주었으나, 제도적 한계로 인해 정국 주도권을 쥐지는 못했습니다.
연표
1972
1972.10.17
[10월 유신 선포 및 국회 해산]
박정희 대통령이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습니다. 정치 활동이 금지되고 헌정 질서가 중단되었습니다.대통령은 특별 선언을 통해 4가지 비상 조치를 발표했는데, 여기에는 국회 해산, 정당 및 정치 활동 중지, 헌법 일부 조항의 효력 정지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는 제8대 국회가 여소야대 형국으로 정부를 견제하자 이를 무력화하고 영구 집권 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친위 쿠데타적 성격이었습니다.
1972.12.30
[국회의원 선거법 전면 개정]
비상국무회의에서 소선거구제를 폐지하고 중선거구제를 도입하는 새로운 선거법을 통과시켰습니다. 한 선거구에서 2명의 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이 확정되었습니다.이 개정안은 여당 후보가 2위로라도 당선될 가능성을 높여 여당의 안정적 의석 확보를 보장하기 위해 설계되었습니다. 또한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을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선출하도록 하여 사실상 대통령이 임명하는 의원들이 국회를 장악하게 만들었습니다.
1973
1973.1.27
[민주통일당(통일당) 창당]
신민당의 유진산 당수 체제에 반발한 양일동 등 반진산계 인사들이 탈당하여 민주통일당을 창당했습니다. 야권이 분열된 상태로 선거를 치르게 되었습니다.신민당 전당대회 과정에서 발생한 '진산 파동'과 유신 헌법에 대한 입장 차이로 인해 야당의 내분이 격화되었습니다. 양일동을 대표로 하여 창당된 통일당은 선명 야당을 기치로 내걸었으나, 결과적으로 야권 표를 분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1973.2.27
[제9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 실시]
전국 73개 선거구에서 일제히 투표가 진행되었습니다. 중선거구제 도입으로 선거구당 2명씩 총 146명의 지역구 의원을 선출했습니다.투표율은 72.9%를 기록했으며, 이는 지난 제8대 총선과 유사한 수준이었습니다. 유신 체제에 대한 찬반 성격보다는 인물 위주의 선거 양상을 띠었으며, 여당의 조직력과 야당의 견제 심리가 맞붙는 양상이었습니다.
1973.2.28
[선거 개표 및 결과 확정]
개표 결과 집권 여당인 민주공화당이 지역구 146석 중 73석을 차지하여 제1당이 되었습니다. 신민당은 52석을 획득하며 선전했습니다.공화당은 전체 의석의 과반을 차지하지는 못했으나, 중선거구제의 혜택으로 다수 의석을 확보했습니다. 신민당은 당내 분열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부산 등 대도시에서 공화당을 앞서며 '여촌야도' 현상을 다시 한번 증명했습니다.
1973.2.28
[무소속 후보들의 돌풍]
기존 양당 구도 속에서 무소속 후보들이 19석이나 당선되는 이변을 연출했습니다. 이는 민주통일당의 2석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습니다.공천 과정에서 탈락한 여야 인사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대거 당선되었습니다. 특히 경북 지역에서는 무소속 당선자가 공화당 당선자 수를 넘어서는 등, 유권자들이 정당보다는 인물을 보고 투표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1973.2.28
[민주통일당의 참패]
야권 분열의 한 축이었던 민주통일당은 단 2석을 얻는 데 그쳤습니다. 창당 명분과 달리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습니다.대표최고위원이었던 양일동조차 서울 성동구에서 낙선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이로 인해 통일당은 원내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하고 군소 정당으로 전락하여 향후 정치적 입지가 크게 좁아졌습니다.
1973.3.5
[대통령 추천 유신정우회 후보 발표]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 헌법에 따라 국회의원 정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73명의 후보 명단을 일괄 추천했습니다.이 명단에는 학계, 언론계, 관료 출신 등 각계각층의 인사가 포함되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위 세력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들은 지역구 선거를 거치지 않고 간접 선거로 선출될 예정이었습니다.
이들은 '유신정우회(유정회)'라는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하게 되었습니다. 유정회 의원들의 임기는 3년으로 규정되었으며, 이들의 합류로 범여권은 국회 전체 의석의 3분의 2를 확보하여 헌법 개정을 저지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유신정우회는 정당이 아닌 원내 교섭단체 형태였으나, 실제로는 공화당보다 더 강력한 대통령의 친위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이들은 국회의원 세비 전액을 기탁하여 운영비로 사용하는 등 일반 정당과는 다른 운영 방식을 보였습니다.
국회는 개원과 동시에 국회의장단 선출에 들어갔습니다. 유신 헌법에 의해 국회의 권한이 대폭 축소된 상태에서 출발했으며, 국정 감사권이 폐지되고 회기가 단축되는 등 행정부를 견제할 기능이 마비된 '통법부'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부의장으로는 공화당의 김진만 의원과 신민당의 이철승 의원이 각각 선출되었습니다. 정일권 의장은 박정희 정권의 핵심 인물로서 국회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며 유신 체제를 뒷받침하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1973.8.8
[김대중 납치 사건의 파장]
9대 국회 초기,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일본 도쿄에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하여 국회 내외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이 사건은 유신 정권의 폭압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었으며, 9대 국회 내내 야당의 대정부 투쟁 소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정회와 공화당의 수적 우위로 인해 국회 차원의 진상 규명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1974
이 비극적인 사건은 9대 국회의 분위기에도 영향을 미쳐, 여야 간의 대립보다는 국가 안보와 체제 수호를 강조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긴급조치 등이 잇달아 발동되며 국회의 입지는 더욱 좁아졌습니다.
1979
9대 국회는 유신 헌법의 하위 기구로 전락했다는 오명을 썼으나, 후반기에는 선명 야당을 표방한 김영삼 체제의 신민당이 등장하며 치열한 대여 투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후 제10대 총선으로 이어지며 유신 체제의 몰락을 예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