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몽 항쟁
연표
1219
[몽골과의 첫 만남]
몽골에 쫓겨 고려 국경을 침범한 거란족(후요)을 고려와 몽골이 함께 진압하며 양국은 처음으로 접촉했다.
이 과정에서 몽골은 고려에 매년 공물을 요구하며 이후 관계 악화의 씨앗을 뿌렸다.
1231
[제1차 몽골 침입]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을 빌미로 몽골군이 고려를 처음 침략했다.
몽골은 고려를 남송 및 일본 정벌의 기지로 삼으려 했고, 수도 개경까지 진격했으나 귀주성 박서 장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다.
고려는 결국 강화를 요청했고, 몽골은 감독관을 남기고 철수했다.
1232
[강화 천도]
최우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항복 주장을 묵살하고,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는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이 결정은 몽골을 자극하여 2차 침입을 유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제2차 몽골 침입과 살리타 사망]
강화 천도에 자극받은 몽골군이 2차 침입을 감행, 홍복원의 안내로 한강 이남까지 진격했다.
그러나 몽골의 총사령관 살리타가 김윤후 장군에게 사살되는 예상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자 몽골군은 급히 철수했다.
몽골군은 이후에도 약 30년간 총 7차례에 걸쳐 침입을 계속하며 고려에 항복과 황제 친조를 요구했지만, 고려는 강화도에서 끈질기게 항전했다. 이 시기 항전은 주로 농민들에 의해 수행되었으며, 관악산 초적과 충주 노예군 등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몽골군의 잔인한 보복으로 농촌은 황폐화되고 인구는 감소했으며, 황룡사 9층 목탑과 부인사 대장경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소실되는 비극을 겪었다. 특히 고려의 뛰어난 인쇄술과 불심을 보여주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인 팔만대장경을 조판하며 국가적 역량을 결집했다.
1257
[최씨 정권의 몰락 시작]
대몽 항쟁이 장기화되면서 재정 악화와 통솔력 약화로 무신정권은 위기에 직면했다.
최우의 아들 최항이 사망하며 최씨 정권의 몰락이 시작되었다.
1258
[최의 제거, 최씨 정권 종말]
최항의 뒤를 이은 최의가 김준에게 제거되면서, 약 60년간 고려를 지배했던 최씨 무신정권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
이는 대몽 강화를 주장하는 문신 세력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1259
[태자, 몽골에 입조]
최씨 정권 몰락 후 왕에게 권력이 돌아가면서 대몽 강화가 결정되었다.
태자(후일 원종)가 몽골에 입조하여 항복을 표하고, 강화도 성곽을 파괴하며 강화 의지를 피력했다.
[고려-몽골 강화 성립]
최씨 정권의 몰락과 몽골의 요구 조건 양보 속에, 몽케 칸 사망 직후 몽골에 파견된 고려 태자(원종)가 쿠빌라이를 만나 강화 조약을 성립시켰다.
쿠빌라이는 고려의 요구 6개 조항(왕국 존속 보장, 몽골군 철수 등)을 모두 수락하며 호의를 보였다.
1264
[친조 요구와 반몽 여론]
강화가 성립된 이후에도 몽골이 고려 왕의 친조와 일본 원정 병력 및 물자 지원을 요구하자, 무신들을 중심으로 다시금 반몽 여론이 고조되며 원종의 강화론과 충돌했다.
1269
[임연, 원종 폐위]
김준이 살해되고 집권한 임연은 친몽 정책을 수행하는 원종을 독단적으로 폐위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몽골에 있던 세자(충렬왕)의 요청으로 몽골 지원을 받아 원종이 복위되었으나, 이는 몽골의 고려 내정 간섭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270
[삼별초의 항쟁 시작]
무신정권 종말 후 개경 환도 명령에 반대한 삼별초가 배중손을 중심으로 반기를 들었다.
원종의 아우 승화후 온을 새로운 왕으로 옹립하고 진도를 거점으로 삼아 몽골에 대한 마지막 항전을 시작했다.
[무신정권의 완전한 종말]
임연이 병사했으나 그의 아들 임유무가 집권하여 반몽 노선을 고수했다.
임유무는 개경 환도를 명하는 원종과 대립하다 살해되었고, 이로써 약 100년간 이어져 온 고려 무신정권은 완전히 막을 내렸다.
개경 환도가 결정되며 제정이 복고되었다.
1271
[진도 함락]
삼별초가 거점으로 삼았던 진도가 고려 조정의 진압군과 몽골 연합군에게 함락되었다.
김통정을 중심으로 한 잔여 세력은 제주도로 옮겨 항전을 이어갔다.
1273
[삼별초 항쟁 종결]
제주도로 옮겨 마지막까지 저항하던 김통정의 삼별초 세력이 결국 고려-몽골 연합군에 의해 완전히 평정되었다.
이로써 몽골에 대한 고려의 약 50년에 걸친 대몽 항쟁이 마침내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