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게 겐조
연표
1913
[단게 겐조, 오사카 사카이시에서 출생]
일본 오사카부 사카이시에서 태어나 스미토모은행 사원이던 아버지의 전근으로 태어나자마자 중국 한커우로 이주했습니다.
1913년 9월 4일 오사카부 사카이시에서 단게 도키요와 데이의 삼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스미토모은행 사원이던 아버지의 전근으로 인해 태어나자마자 중국 한커우로 이주했고, 수년 후 다시 상하이 영국 조계로 옮겨 살았습니다.
1918
1918년 상하이 일본심상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1920
1920년 아버지의 출신지인 에히메현 이마바리시로 가족이 이주하여 이마바리 제2심상소학교(현재의 이마바라시립 후키아게 소학교)에 편입했습니다.
1926
1926년 구제 이마바라 중학(현재의 이마바라니시 고교)에 입학했습니다.
1930
[르 코르뷔지에를 통해 건축가의 꿈을 키우다]
이마바라 중학을 월반으로 수료하고 히로시마 고교에 진학했습니다. 도서실에서 르 코르뷔지에에 대한 기사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건축가를 목표로 삼게 되었습니다.
1930년 이마바라 중학 4년 수료(월반) 후 구제 히로시마 고교 이과갑종에 진학했습니다. 동교 도서실에서 외국 잡지에 실린 르 코르뷔지에 기사를 접하고 깊은 감명을 받아 건축가를 지망하게 되었으며, 잠시 경도되었던 마르크스주의에서 실재주의로 전향했습니다.
1933
[도쿄제국대학 건축과 수험 실패 및 일본대학 재적]
도쿄제국대학 건축과 입학 시험에 두 번 실패하고, 징병을 피하기 위해 일본대학 예술학부 영화학과에 재적했으나 거의 등교하지 않고 문학과 철학을 탐독했습니다.
1933년부터 1934년까지 도쿄제국대학 건축과 수험에 2번 실패했습니다. 도호쿠제국대학 금속학과 수험에도 낙제했으며, 징병을 회피하기 위하여 일본대학 예술학부 영화학과에 재적하였으나 등교는 거의 하지 않았고, 발레리, 지드, 프루스트, 도스토옙스키, 헤겔, 하이데거 등을 탐독했습니다.
1935
1935년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건축과에 입학하여 우치다 요시카즈, 기시다 히데토, 무토 기요시에게 사사했습니다.
1938
[다쓰노상 수상 및 마에카와 구니오 건축사무소 입소]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건축과 졸업 후 다쓰노상을 수상하고, 마에카와 구니오 건축사무소에 입소하여 전문 건축가로서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938년 도쿄제국대학 공학부 건축과 졸업 후 다쓰노상을 수상했습니다. 이어서 마에카와 구니오 건축사무소에 입소했습니다.
1939
[미켈란젤로에 대한 논문 발표]
잡지 《현대건축》에 〈미켈란젤로 송 -르 코르뷔지에론의 서설로서-〉라는 논문을 발표하며 학계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1939년 단게는 잡지 《현대건축》에 논문 〈미켈란젤로 송 -르 코르뷔지에론의 서설로서-〉(ミケランジェロ頌-ル・コルビュジエ論への序説として-)를 발표했습니다.
1941
[기시 기념체육회관 설계 및 대학원 입학]
마에카와 구니오 건축설계사무소에서 기시 기념체육회관 설계를 담당했으며,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다카야마 에이카 연구실에서 도시 계획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1941년 마에카와 구니오 건축설계사무소에서 기시 기념체육회관의 설계를 담당했습니다. 같은 해 도쿄제국대학 대학원에 입학하여 다카야마 에이카의 연구실에 들어갔습니다. 동시기의 대학원 시대부터 제2차 세계대전 후를 조금 지나는 기간 동안 주로 도시 계획의 연구·업무에 종사했습니다.
1942
1942년 대동아건설기념영조계획경기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그의 안은 휴먼 스케일을 아득히 뛰어넘은 플랜으로 요코야마 다이칸풍의 일본화를 연상시키는 퍼스펙티브로 후세까지 사람들의 기억에 남았습니다.
1943
1943년 재반곡 일본문화회관 설계경기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1945
[히로시마 원폭 및 부모님 사망 소식 접함]
히로시마 원폭 투하일, 위독하다는 아버지의 소식에 고향으로 향했으나, 도착 다음 날 아버지가 이미 사망했으며, 어머니 또한 이마바리시 공습으로 사망했음을 알게 되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된 날,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접하고 고향길에 올랐으나, 잿더미로 변한 생가에 도착한 이튿날 7일, 아버지는 이미 2일에 타계한 것과, 히로시마 원폭 투하와 같은 날 실시된 이마바리시 공습으로 어머니 역시 동시에 돌아갔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1946
[히로시마 도시계획업무 참여]
비극을 겪었던 히로시마의 부흥 계획에 자원하여 아사다 다카시, 오타니 사치오 등 연구실 스태프들과 함께 히로시마 도시계획 업무에 종사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를 통해 건축가를 지망하게 된 추억의 장소인 히로시마의 궤멸적 피해를 목격하고, 히로시마의 부흥계획이 전재부흥원에서 도마 위에 올랐음을 알고 잔류방사능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자원하여 담당을 신청했습니다. 1946년 여름, 아사다 다카시, 오타니 사치오를 비롯한 동대의 연구실 스태프들과 더불어 히로시마를 방문하여 도시계획업무에 종사하였습니다.
[도쿄대학 조교수 취임 및 전재 부흥 도시 계획 참여]
도쿄대학 조교수에 취임하여 후쿠시마, 다치카와, 왓카나이 등 여러 도시의 계획을 담당하며 전재 부흥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습니다.
1946년 8월 도쿄대학 조교수에 취임한 후 후쿠시마시의 의뢰에 따른 후쿠시마 지구 도시계획, 다치카와 기지 적지(跡地)의 문화도시설계, 홋카이도 왓카나이시의 도시계획(1950년에서 52년까지) 따위에 손을 댔습니다. 전재 부흥사업의 일환으로 행하여진 도쿄도 도시계획경기 및 문교도시계획, 1947년부터 전재부흥원(이후의 건설성, 현재의 국토교통성)에 따른 각지의 전재부흥도시계획에 참가하였으며, 당초에 담당했던 것은 군마현 마에바시시와 이세사키시였습니다.
1948
1948년 〈건축을 둘러싼 제문제〉(建築をめぐる諸問題) 연구 소논문을 집필했습니다.
1950
1950년 경제안정본부 자원조사회 사무국 지역계획반의 의뢰에 따라 〈지역계획의 이론〉(地域計画の理論)이라는 연구 소논문을 집필했습니다.
1951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콘페 1위 입선]
히로시마시 주최 평화기념공원 콘페에서 도시적 스케일의 계획안으로 1위에 입선하며, 십자형 도시축을 통해 히로시마를 평화도시로 재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원폭 돔을 랜드마크로 재조명한 것도 그의 공로입니다.
히로시마시 주최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콘페에 참가하여 훌륭히 1위에 입선하는 형태로 그 성과가 결실되었습니다. 다른 설계안이 공원 안만을 고려한 설계안에 그친 데 비하여 단게는 히로시마시를 동서로 관통하는 평화대로와 직교하는 남북축선상에 위령비와 원폭 돔을 자리시켜, 그 계획안의 도시적 스케일이 콘페에서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이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히로시마시의 골격을 세운 것은 단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단순한 폐허였던 원폭 돔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추고 중심성을 가진 도시 공간으로서의 히로시마를 재건하며 랜드마크로서의 '원폭 돔'을 사실상 발견한 인물로 평가됩니다.
1954
1954년 일본건축학회작품상을 수상했습니다. 이후 1955년, 1958년에도 같은 상을 몇 번 더 수상했습니다.
1955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완공 (사실상 데뷔작)]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건축의 시작을 알리는 기념비적인 작품인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을 완공했습니다. 치장 콘크리트와 도시적 스케일의 필로티를 통해 히로시마의 부흥을 강력하게 표현했습니다.
자재가 바닥난 제2차 세계대전 시대 및 대전 종결 직후에 젊은 시절을 보낼 수밖에 없었던 단게 겐조에게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은 사실상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치장 콘크리트의 단정한 프로포션을 도시적 스케일의 필로티로 대지에서 가뿐히 들어올림으로써 히로시마의 초토에서의 부흥을 강력하게 인상에 남겨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건축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할 정도의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습니다. 르 코르뷔지에의 영향과 함께 일본 건축의 전통 양식을 디자인 소스로 구하여 서양 기원의 모더니즘과 일본 건축의 전통 양식을 처음으로 기념비적 레벨로 결정(結晶)시켰습니다.
1958
1958년 미국 건축가협회(AIA) 제1회 범태평양상을 수상했습니다.
1959
1959년 박사 학위 논문 〈도시의 지역구조와 건축형태〉(都市の地域構造と建築形態)를 발표했습니다.
1961
[단게 겐조 도시·건축설계연구소 설립 및 '도쿄계획 1960' 발표]
단게 겐조 도시·건축설계연구소를 설립하고, 일본 최초의 해상도시설계인 〈도쿄계획 1960〉을 발표하여 세계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평생 도시에 대한 종합적인 디자인에 열정을 쏟았습니다.
1961년 단게 겐조 도시·건축설계연구소(丹下健三・都市・建築設計研究所)를 설립했습니다. 같은 해 발표된 해상도시설계 〈도쿄계획 1960〉(東京計画1960)은 일본발 도시계획의 효시로서 세계적으로도 평가가 높습니다. 단게는 평생에 걸쳐 '건축가로서 토탈하게 도시를 디자인하는 것'에 계속하여 정열을 가졌으며, 이것에 의거하여 도시적 관점에서 구상한 여러 가지 종합적 건축계획이 탄생했습니다.
1963
1963년 신설된 도쿄대학 공학부 도시공학과 교수에 취임했습니다.
1964
[도쿄 올림픽 국립옥내종합경기장 등 건축력의 정점]
도쿄 카테드랄 성 마리아 대성당과 도쿄 올림픽 국립옥내종합경기장을 완성하며 자신의 건축력의 정점에 도달했습니다. 최첨단 구조 기술과 독자적 발전을 융합하여 모던 디자인의 걸작으로 세계에 충격을 주었습니다.
장년기의 단게는 일본 국외로부터 수입되어온 셸 구조, 절판구조 따위의 여러 가지 신기술과 건축의 신사조를 정력적으로 소화하면서, 1964년 도쿄 카테드랄 성 마리아 대성당과 도쿄 올림픽 국립옥내종합경기장(정식명칭은 국립 요요기 옥내종합경기장)에서 자신의 건축력의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양 작품 모두 당시 최선단의 구조 기술을 사용하면서도 독자적 발전을 보여, 도쿄 카테드랄 성 대성당은 HP 셸 구조를, 국립옥내종합경기장에서는 장력구조를 활용하여 구조와 형태를 고도한 차원으로 융합하며 지고성까지 표현하는 데 성공한 모던 디자인의 걸작입니다.
1965
1965년 일본건축학회 특별상 수상과 함께 영국 RIBA 골드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1966
[동양인 최초 AIA 골드 메달 수상]
동양인 최초로 미국 건축가협회(AIA) 골드 메달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 상은 건축 분야에서 최고 권위 있는 상 중 하나입니다.
1966년 동양인 최초로 미국 건축가협회(AIA) 골드 메달을 수상했습니다.
1970
[오사카 만국박람회 종합 프로듀서 및 오마쓰리 광장 설계]
오사카 만국박람회에서 종합 프로듀서를 맡아 중심 시설인 오마쓰리 광장을 설계했습니다. '오야네'와 '태양의 탑'을 결합한 오카모토 다로와의 협업은 오늘날까지 회자되는 역작입니다.
1970년 오사카 만박에서는 교토대학 교수 니시야마 우조와 함께 종합 프로듀서를 맡아 그 중심 시설인 오마쓰리 광장의 설계도 담당했습니다. '오야네'를 잭을 써서 선구적인 리프트 업 공법으로 추어올려 그것을 태양의 탑이 미어뜨려 우뚝 솟게 한다는 오카모토 다로와의 콜라보레이션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또한 로마법왕청 성 그레고리오 대훈장을 수훈했습니다.
1970년 로마법왕청 성 그레고리오 대훈장 수훈.
1973
1973년 프랑스 건축 아카데미 골드 메달 수상.
1974
1974년 도쿄대학을 정년 퇴관하고 명예교수가 되었습니다.
1976
1976년 서독일 정부로부터 푸르 르 메리트 수훈.
1979
1979년 이탈리아 국가유공훈장 코멘다토레 수훈.
1980
1980년 문화훈장 수훈.
1984
1984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코망되르 수훈.
1986
1986년 일본건축학회대상 수상.
1987
[세계 최고 권위 프리츠커상 수상]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미국 프리츠커상을 수상하며 세계 최고 건축가 반열에 올랐습니다. 신일본건축가협회 초대회장도 역임했습니다.
1987년 미국 프리츠커상 수상. 신일본건축가협회 초대회장도 역임했습니다.
1991
1991년 도쿄도청사 제일일본청사 완공. 만년에는 포스트모던의 경향도 수용한 도쿄도청이나 닛코 동조궁 객전·신사무소 따위 작품도 있습니다. 최후의 대작인 도쿄도 신청사는 고딕 건축인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의 쌍탑 형태를 인용함과 더불어 외벽면을 복잡하게 요철시켜 음영을 짙게 하고, 외벽 PC판에 농담이 두 종류인 화강암을 박아넣음으로써 중후함을 연출했습니다. 단게 자신의 말에 의하면, 격자문을 연상시키는 디자인으로 화풍을 느끼게 하는 동시에 정보화 시대를 IC(집적회로)의 그리드 패턴으로 상징시킨 데에 포스트모던성이 있다고 합니다.
1993
1993년 다카마쓰노미야 전하기념 세계문화상 건축 부문 수상.
1994
1994년 훈일등서보장 수훈.
1996
1996년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
2005
[91세로 서거 및 도쿄 카테드랄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장례식]
심부전으로 91세에 서거했습니다. 자신이 설계한 도쿄 카테드랄 성 마리아 대성당에서 장례식이 엄수되었으며, 그의 세례명인 '요셉'이 알려졌습니다.
2005년 3월 22일 심부전으로 91세에 서거했습니다. 자신이 설계한 도쿄 카테드랄 성 마리아 대성당(가톨릭 세키구치 교회)에서 장례식이 이루어졌으며, 장례식에서 이소자키 아라타가 조사를 낭독했습니다. 생전 가톨릭의 수선을 받았으며, 세례명은 성모 마리아의 남편으로 목수였던 요셉이었음이 이때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