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테 마사무네
연표
1567
[독안룡, 세상에 나오다]
훗날 '오슈의 독안룡'으로 불리게 될 다테 마사무네가 데와국 요네자와 성에서 다테 데루무네와 요시히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567년 9월 5일, 후일 '오슈의 독안룡'이라 불리게 될 다테 마사무네는 데와국 요네자와 성에서 아버지 다테 데루무네와 어머니 요시히메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1571
[오른쪽 눈을 잃다]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을 잃게 되며, 훗날 '독안룡'이라는 별명을 얻는 계기가 됩니다. 그의 생모는 이 신체적 결함을 싫어해 동생을 편애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1571년, 어린 마사무네는 천연두를 앓아 오른쪽 눈을 잃게 되었습니다. 이는 후일 그에게 '독안룡'이라는 별명을 안겨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됩니다. 그의 생모는 마사무네의 신체적 결함을 싫어해 동생을 편애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1577
[성인식을 치르다]
원복(성인식)을 치르며 문무를 겸비한 선조의 이름을 따 '마사무네'라는 이름을 정했습니다. 당시 쇼군이 쫓겨난 상황이라 전통을 따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1577년, 마사무네는 성인식을 치렀습니다. 무로마치 막부의 전통에 따라 쇼군의 이름을 받아야 했지만, 당시 쇼군이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쫓겨난 상태였으므로 문무겸전의 선조 이름을 따 '다테 마사무네'라 정했습니다.
1579
1579년, 마사무네는 센도 지역의 센고쿠 다이묘 미하루 성주 다무라 기요아키의 딸 메고히메와 혼인했습니다. 이는 다테 가문의 세력 확장을 위한 중요한 혼인이었습니다.
1581
1581년, 마사무네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이웃 소마씨와의 전투에 처음 출전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는 그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여주는 첫걸음이었습니다.
1584
[가독 상속, 당주가 되다]
아버지 다테 데루무네에게 가독을 상속받아 다테 가문의 제17대 당주가 되며 본격적으로 가문을 이끌기 시작했습니다.
1584년, 다테 마사무네는 아버지 다테 데루무네로부터 가독을 물려받아 다테 가문의 17대 당주가 되었습니다. 아버지가 아직 한창 나이였음에도 가독을 물려주며 마사무네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렸습니다.
1585
[오데모리 성 학살]
오데모리 성을 공격하여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학살과 파괴를 자행하는 비정한 모습을 보이며 주변 다이묘들에게 공포를 심어주었습니다.
1585년, 마사무네는 오우치 사다쓰나가 니혼마쓰 요시쓰구와 손잡고 대항하려 하자 오데모리 성을 공격했습니다. 그는 항복을 인정하지 않고 성을 철저히 학살하고 파괴하는 잔인한 모습을 보여 오슈 지역의 호족들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이는 주변에 대한 경고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히토토리바시 전투]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니혼마쓰 성을 포위하고, 사타케 요시시게가 규합한 반(反)다테 연합군과 '히토토리바시 전투'에서 고전했으나, 상대의 퇴각으로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1585년, 마사무네는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복수로 니혼마쓰 성을 포위했습니다. 아시나, 소마, 이와키 등 3만 명의 반다테 연합군과 아다치군의 대군과 '히토토리바시 전투'에서 맞붙었습니다. 다테군은 수적으로 1/5 이하의 열세로 고전했으나, 중신 오니니와 요시나오의 분전으로 마사무네는 목숨을 건졌습니다. 결국 사타케 가문이 내부 사정으로 퇴각하면서 연합군도 물러나 다테 가문은 위기를 넘겼습니다.
[아버지의 죽음과 복수]
아버지 다테 데루무네가 니혼마쓰 요시쓰구에게 납치된 후, 그 일행을 뒤쫓아 몰살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아버지도 사망했습니다. 이 사건은 마사무네의 잔혹성과 복수심을 보여주는 일화로 회자됩니다.
1585년, 니혼마쓰 요시쓰구가 데루무네를 납치하자 마사무네는 격렬히 뒤쫓아 사격을 명령, 요시쓰구 일행을 전원 몰살시켰고, 이 과정에서 아버지 데루무네도 죽었습니다. 이 사건에 대해서는 데루무네가 마사무네에게 그렇게 하도록 시켰다는 설도 있고, 마사무네가 의도적으로 아버지를 죽이고자 했다는 설 등 여러 설이 있습니다.
1588
[고오리산 전투 승리]
고오리산 전투에서 승리하며 후쿠시마 현 중부까지 지배하고,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총무사령'을 무시한 채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1588년, 마사무네는 고오리산 전투에서 승리하여 상대국의 영토를 빼앗고, 아내 메고히메의 친정 다무라 가문의 협력을 얻어 후쿠시마 현 중부까지 지배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당시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총무사령'을 내려 개인적인 전투를 금지했지만, 마사무네는 이를 무시하고 전쟁을 계속했습니다.
[오자키 전투 패배]
오자키 가문의 내분에 개입하여 1만 군사로 침공했지만, 완강한 저항과 아군의 배반, 폭설로 인해 패배하고 궁지에 몰렸습니다. 어머니 요시히메의 중재로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1588년, 마사무네는 북방 오자키 가문의 내분에 개입하여 1만 군사로 침공했지만, 오자키 가문의 완강한 저항과 아군 구로카와 하루우지의 배반, 그리고 폭설로 인해 패배했습니다. 이 틈을 타 다테 영지 남쪽에는 아시나, 니카이도 가문 등이 침공해왔으며, 외삼촌 모가미 요시미쓰와도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갔지만, 어머니 요시히메의 중재로 화해가 성립되어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습니다.
1589
[도호쿠의 패자, 스리아게하라 전투]
도호쿠 패권을 걸고 아시나-사타케 연합군과 '스리아게하라 전투'를 벌여 승리하고 아시나 가문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를 통해 아이즈 지방을 지배하며 전국 굴지의 영토를 자랑하게 되었습니다.
1589년, 마사무네는 도호쿠의 패권을 놓고 아이즈의 아시나 요시히로와 사타케 요시노부 연합군과 '스리아게하라 전투'에서 싸웠습니다. 당시 아시나 가문은 히데요시를 따르고 있었기에 이는 히데요시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습니다. 마사무네는 이 전투에서 아시나 연합군을 격파하고 구로카와 성을 함락시켜 아시나 가문을 멸망시켰습니다. 이로써 아이즈 지방을 지배하게 된 마사무네는 후쿠시마, 아이즈, 야마가타 남부, 미야기 남부를 다스리며 전국적으로도 굴지의 영토 규모를 자랑하는 대영주로 성장했습니다.
1590
[히데요시에게 복종]
오다와라 정벌에 늦게 참전했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본령을 인정받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재치 있는 행동으로 히데요시의 감탄을 사기도 했습니다.
1590년 5월 9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오다와라 정벌에 뒤늦게 참여한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에게 복속했습니다. 그는 히데요시의 병력을 감안해 히데요시와 맞서 싸우기보다는 복종을 택했고, 히데요시는 마사무네의 본령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아이즈 영지는 히데요시 명령에 반한 행위로 간주되어 몰수, 72만 석으로 감봉되었습니다. 이때 오다와라 공격에 늦게 참여한 이유로 히데요시에게 감금 위협을 받았지만, '센노 리큐에게 다도를 배우고 싶다'는 말로 히데요시의 감탄을 샀다는 일화가 전해집니다.
1591
[잇키 선동 혐의]
가사이·오자키 가문의 잇키(반란)를 평정했지만, 잇키를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아 히데요시에게 변명해야 했습니다. 결국 요네자와 성에서 이와데야마 성으로 감봉되었습니다.
1591년, 마사무네는 가모 우지사토와 함께 가사이·오자키 가문의 잇키를 평정했지만, 자신이 잇키를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습니다. 마사무네가 썼다는 잇키 세력에게 보내는 편지가 발견되고, 잇키가 농성하는 성에 마사무네의 깃발이 세워져 있다는 소문이 돌았기 때문입니다. 마사무네는 교토로 올라와 편지가 가짜라고 변명하여 용서받았지만, 요네자와 성에서 이와데야마 성으로 거처를 옮기고 58만 석으로 감봉되었습니다. 이때 히데요시로부터 '하시바' 성씨를 받았습니다.
1592
[임진왜란 참전과 '다테모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임진왜란에 참전했습니다. 그의 부대는 황금빛 진사가를 쓰는 등 화려한 치장으로 '다테모노'라는 유행어를 만들었습니다.
1592년,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임진왜란에 참전했습니다. 다테 가문의 부대는 황금으로 된 긴 진사가를 쓰고 옷을 화려하게 입어 '다테모노(伊達者)'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유명했습니다. 이는 고쿠다카가 많았던 마사무네가 참전하기 싫은 전투에 억지로 참전하며 히데요시에게 잘 보이기 위한 행동이었습니다.
1593
[조선 전선 활동]
임진왜란 중 부산에 상륙하여 9월 나고야로 귀환하기까지 진주성 등지에서 전투를 치렀습니다. 조선의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전투에 염증을 느끼고 정유재란에는 불참했습니다.
1593년 4월, 임진왜란에 참전한 마사무네는 부산에 상륙했습니다. 그해 9월 나고야의 대본영으로 돌아오기까지 진주성 등에서 전투를 치렀습니다. 조선 침략에 소극적이었던 그는 축성에는 적극적이었으나 전투에는 태만하여 부하들과 팔씨름을 하거나 제2차 진주성 전투 외에는 직접 참전한 전투가 거의 없었습니다. 추운 겨울 날씨 때문에 전투에 큰 염증을 느끼고 정유재란에는 불참했습니다.
1595
[히데쓰구 사건 연루]
도요토미 히데쓰구 모반 사건에 연루될 뻔했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변호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일로 이에야스에게 큰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1595년, 히데요시로부터 모반 혐의를 받은 간파쿠 도요토미 히데쓰구가 할복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히데쓰구와 친했던 마사무네는 모반에 관여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적극적인 변호로 무혐의가 입증되어 연좌를 피하고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사건은 마사무네가 훗날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군에 가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1599
[이에야스 지지 선언]
히데요시의 유언을 어기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아들과 자신의 맏딸을 약혼시키며 이에야스 지지 세력으로 확고히 자리매김했습니다.
159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마사무네와 고다이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히데요시의 '다이묘 자녀 간 결혼 금지' 유언을 어기고 마사무네의 맏딸 이로하히메와 이에야스의 여섯째 아들 마쓰다이라 다다테루를 약혼시켰습니다. 이로써 마사무네는 히데요시에 대한 염증을 버리고 이에야스의 강력한 지지자로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1600
[논공행상과 감봉]
이에야스 몰래 난부씨 영지에서 잇키를 선동한 사실이 발각되어 49만 석 추가 약속이 백지화되고, 영지는 62만 석으로 최종 조정되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마사무네가 이에야스 몰래 시라이시 무네나오를 시켜 난부씨 영지에서 잇키를 선동한 사실이 발각되었습니다. 이에야스는 이 사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마사무네에게 약속했던 49만 석 증가(총 백만 석) 약속을 백지화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센다이 개부 허가와 무쓰국 갓타군 2만 석 추가로 영지는 60만 석이 되었고, 후에 오미국과 히타치국 2만 석이 더해져 총 62만 석이 되었습니다.
[우에스기 토벌 참여]
이에야스의 우에스기 토벌에 종군하여 시라이시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승리 후 49만 석의 영지를 더 주겠다는 편지를 보내 동군 참가를 독려했습니다.
1600년 7월 25일,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이즈 영주 우에스기 가게카쓰에게 모반 혐의를 씌워 토벌에 나섰고, 마사무네도 이에 종군하여 우에스기 지성인 시라이시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에야스는 마사무네에게 승리 후 49만 석의 영지를 더 주겠다는 편지를 보내 동군 참가를 독려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 동군 가담]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에 가담하여 우에스기 가케카쓰를 견제하고 하시도성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 후쿠시마성을 포위했으나 견고한 방어에 밀려 퇴각했습니다.
1600년 9월, 세키가하라 전투가 발발하자 마사무네는 동군에 가담했습니다. 이시다 미쓰나리와 협력하는 우에스기 가게카쓰를 막기 위해 하시도성에 출전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모니와 쓰나모토에게 명하여 우에스기씨 소유의 유바라 성을 공격했고, 10월 6일 미야지로에서 혼조 시게나가가 지휘하는 우에스기군을 격퇴했습니다. 다테군은 거듭 후쿠시마성을 포위했지만 성의 견고한 방어에 밀려 다음날 퇴각했습니다.
1601
[센다이 번 개창]
센다이 성과 도시 건설을 시작하여 센다이 번을 개창했습니다. 62만 석의 수확량은 당시 전국 3위의 대규모 번이었습니다.
1601년, 마사무네는 센다이 성과 센다이 성 아래 도시 건설을 시작하여 거점을 옮겼습니다. 이는 다테 마사무네를 번조(藩祖)로 하는 센다이 번의 탄생이었습니다. 62만 석이라는 수확량은 당시 전국에서 가가 마에다, 사쓰마 시마즈에 이어 3위였습니다. 그는 마쓰다이라 성씨를 받아 '마쓰다이라 무쓰노카미'라 칭했으며, 센다이 성 아래 도시는 거의 1백만 명의 인원이 동원된 전면적인 개발이었습니다.
1613
[유럽에 사절 파견]
에스파냐 국왕 사절의 협력을 받아 갤리온선 '산후안바우티스타 호'를 건조하고,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가 등 '게이초 견구사절'을 로마 교황에 파견했습니다. 센고쿠 다이묘 중 유일한 로마 교황 사절 파견 기록입니다.
1613년, 마사무네는 센다이 번과 에스파냐 간의 태평양 무역을 꾀했습니다. 센다이 영내에 있던 에스파냐 사절 세바스티안 비스카이노의 협력을 받아 갤리온선 '산후안바우티스타 호'를 건조했습니다. 이에야스의 승인을 얻어 프란시스코회 선교사 루이스 소텔로를 사절로 임명하고, 가신 하세쿠라 쓰네나가 등 일행 180여 명을 누에바 에스파냐(멕시코), 에스파냐, 그리고 로마에 파견했습니다. 이는 '게이초의 견구(遣毆)사절'로 불립니다.
1614
1614년, 오사카 겨울 전투에서 야마토구 방면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진을 쳤습니다. 화해가 성립된 후, 다테군은 오사카성 바깥쪽 해자 매립 공사의 임무를 맡아 수행했으며, 이 공로로 쇼군 히데타다로부터 이요 우와군에 영지를 하사받았습니다.
1615
[오사카 여름 전투]
오사카 여름 전투의 도묘지 전투에서 고토 모토쓰구 부대를 격파했으나, 사나다 노부시게의 반격으로 후퇴했습니다.
1615년, 오사카 여름 전투 중 도묘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고토 모토쓰구 등과 싸웠습니다. 모토쓰구는 다테 가신의 공격을 받아 할복했습니다. 다테 부대는 고토 부대를 괴멸시켰으나, 혼다 마을에서 사나다 노부시게의 반격을 받고 후퇴해야 했습니다. 선봉장이던 미즈노 가쓰나리가 재공격을 세 번 요청했지만, 마사무네는 탄약 부족과 군사 부상 등을 이유로 거절했습니다.
[아군 오폭 논란]
일설에 의하면, 덴노지 전투에서 아군인 진보 스케시게 부대를 일부러 공격해 몰살시켰다는 논란이 있었습니다. 진위는 불분명하나 마사무네의 냉철함을 보여주는 일화로 전해집니다.
일설에 의하면 1615년 5월 7일 벌어진 덴노지 전투에서 마사무네는 후네바구치에 진군해 교전 중이던 아군 진보 스케시게 부대 약 3백 명을 일부러 공격해 몰살시켰다고 합니다(6일의 도묘지 전투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생존자들이 마사무네에게 항의했지만, 마사무네는 정색하며 '다테의 군법은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에도 막부 기록에는 '분전하다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신빙성은 부족하며, 이에야스가 마사무네의 조력이 필요했기에 불문에 부쳤다는 설도 있습니다.
1636
[독안룡, 에도에서 잠들다]
에도에서 향년 70세(만 68세)로 서거했습니다. 사인은 암성 복막염 혹은 식도암으로 추정됩니다. 막부에서는 이례적으로 고산케 외의 인물에게 상복을 입으라고 명했습니다.
1636년 5월 24일 아침, 다테 마사무네는 에도에서 서거했습니다. 향년 70세(만 68세)였습니다. 사인은 암성 복막염 또는 식도암으로 추정되며, 임종 때조차 당당한 얼굴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막부는 에도에서 7일, 교토에서 3일간 상복을 입으라고 명했는데, 이는 고산케를 제외하면 상례에서 벗어난 특이한 예였습니다.
1636년 5월 26일, 마사무네 서거 이틀 뒤 적자 다테 다다무네에게 마사무네가 남긴 영지 상속이 허락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오다]
마사무네의 사체는 수은 등으로 방부 처리되어 상여에 실려 생전의 다이묘 행차처럼 센다이로 돌아왔습니다. 그의 죽음을 따라 15명의 가신과 5명의 배신이 순사했습니다.
1636년 6월 3일, 마사무네의 사체는 쇼쿠다이 차림으로 목관에 안치되었고, 사체가 썩지 않게 수은, 석회, 소금을 채운 다음 상여에 실려 생전의 다이묘 행차처럼 떠받들어져 센다이에 돌아왔습니다. 그의 죽음을 따라 15명의 가신과 5명의 배신이 순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