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케다 신겐
연표
1521
[가이의 호랑이, 세상에 나오다]
가이 국 슈고 다케다 노부토라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후에 '신겐 공 산탕 우물'이라 불리는 요가이 산성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진다.
다이에이 원년 음력 11월 3일(1521년 12월 1일), 가이 국의 슈고 다케다 노부토라의 적장자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니시 군의 유력 고쿠진 오오이 씨의 딸 오오이 부인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다로였다. 신겐이 태어날 당시 아버지는 이마가와 군세와 전투 중이었고, 어머니 오오이 부인은 배후의 요가이 산성으로 물러나 신겐을 낳았다고 한다. 신겐의 탄생으로 다케다 군세의 사기가 올라 이마가와 군세를 격퇴할 수 있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1523
다이에이 3년(1523년), 네 살 연상의 손윗형 다케마쓰가 일곱 살로 요절하면서 다로(신겐)는 적남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이로써 다케다 가문의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다지게 되지만, 이후 아버지 노부토라의 총애는 동생 노부시게에게로 옮겨갔다고 한다.
1533
덴분 2년(1533년), 아버지 노부토라의 의향에 따라 오기야 우에스기 씨 집안의 당주 우에스기 도모오키의 딸 '우에스기 마님'이 하루노부의 정실이 되었다. 이 결혼은 정략적인 것이었으나 둘 사이의 금슬은 좋았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듬해인 덴분 3년(1534년) 우에스기 마님은 난산으로 아이와 함께 세상을 떠났다.
1536
원복한 뒤 하루노부는 계실로 사다이진 산조 긴요리의 딸 산조 부인을 맞이하였다. 이 혼인은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가독을 이어받은 후 다케다 씨와 화친하면서 교토 구게와 긴밀했던 이마가와 씨의 알선으로 이루어졌다고 알려져 있다.
덴분 5년(1536년) 3월, 다로(신겐)는 원복(관례)을 치르고 무로마치 바쿠후 제12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하루의 이름자 '하루'를 하사받아, 이름을 '하루노부'라고 하였다. 교토 조정으로부터 종5위하 다이젠다이후로 서위, 임관되었다.
다케다 가문에서 첫 출진은 대개 원복 직후에 행해지는 경우가 많았으며, 《고요군칸》에 따르면 하루노부의 첫 출진은 덴분 5년(1536년) 11월, 사쿠 군 운노구치 성의 성주 히라가 젠신을 공격하는 것이었다. 《고요군칸》에 실려 있는, 하루노부가 성을 하룻밤만에 함락시켰다고 하는 전승은 의문시되고는 있지만, 시기적으로는 하루노부의 첫 출진이 이 무렵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1541
[아버지 노부토라 추방과 가독 상속]
하루노부는 중신들과 함께 아버지 다케다 노부토라를 스루가로 추방하고, 19대 가독을 상속받았다.
덴분 10년(1541년) 6월, 고후로 돌아온 하루노부는 슈쿠로인 중신 이타가키 노부카타, 아마리 도라야스, 오부 도라마사 등에 의해 아버지 노부토라의 스루가 추방이 이루어져, 다케다 집안의 제19대 가독을 상속하게 되었다. 아버지 노부토라의 추방과 하루노부의 가독 상속은 가이의 자국민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부토라의 과도한 군역과 세금, 그리고 하루노부와의 불화 등이 추방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1542
[스와-오가사와라 연합 격퇴 (세자와 전투)]
가독 상속 직후 시나노의 스와 요리시게와 오가사와라 나가토키가 가이를 공격해 왔으나, 하루노부는 이를 세자와 전투에서 격퇴했다.
노부토라를 추방한 직후 덴분 11년(1542년) 3월, 시나노의 스와 우에하라 성 성주 스와 요리시게와 하야시 성 성주이자 시나노 슈고인 오가사와라 나가토키가 가이에 공격해 오지만, 하루노부는 이를 세자와 전투에서 격퇴한다. 이 전투의 존재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덴분 11년(1542년) 6월, 하루노부는 스와 씨 서류인 이나의 다카토 요리쓰구와 함께 스와령 영지로의 침공을 개시했다. 마침 스와 씨 내부에서는 스와 요리시게와 다카토 요리쓰구에 의한 스와 종가를 둘러싼 정쟁이 일어나고 있었고, 하루노부는 이것에 개입하여 요리쓰구의 편을 들었다. 구와바라 성 전투에서 스와 씨는 화목을 제의하였는데, 스와 요리시게를 고후로 연행하여 자결로 몰아갔으며, 스와 영지를 제압하였다.
덴분 11년(1542년) 9월 25일, 다케다군과 다카토 요리쓰구의 군이 시나노국의 미야가와에서 싸웠다. 다케다 측은 이를 격파하여 스와 지역을 장악한다. 이어서 10월에는 스와령 분할 문제로 다카토 요리쓰구와 대립하고, 다카토 군을 고부치자와에서 격파한다.
1543
덴분 12년(1543년), 다케다 측은 이어서 시나노 국 나가쿠보 성 성주 오이 사다타카를 쳐서 자결로 몰아간다. 이는 신겐의 시나노 평정 과정의 일환이었다.
1544
덴분 13년(1544년), 아버지 노부토라 시대에는 대립했던 고호조 씨와 화목하였다. 이 화목은 훗날 고소슨 삼국동맹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1545
덴분 14년(1545년), 이마가와 씨와 고호조 씨의 대립(제2차 가토의 난)을 중재하여 두 가문에 빚을 만들었다. 이에 따라 서쪽에 안도를 얻은 호조 우지야스는 가와고에 성 전투에서 승리하였고, 그러한 움직임이 훗날 고소슨 삼국동맹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카토 성 함락]
가미이나 군의 다카토 성을 공격하여 다카토 요리쓰구마저 멸망시키고, 후쿠요 성주 후지사와 요리치카도 쫓아냈다.
덴분 14년(1545년) 4월, 가미이나 군의 다카토 성을 쳐서 다카토 요리쓰구마저 멸망시켰다. 이어서 6월에는 후쿠요 성 성주 후지사와 요리치카도 쫓아냈다(다카토 합전). 이로써 이나 지역의 주요 세력들이 제압되었다.
1547
[오다이바라 전투 대승과 법도 제정]
간토칸레이의 지원을 받던 시가 성의 가사하라 기요시게를 오다이바라 전투에서 격파하고, 분국법인 《고슈 법도지차제》를 제정하여 령국 지배의 기반을 다졌다.
덴분 16년(1547년), 간토칸레이의 지원을 받고 있던 시가 성의 가사하라 기요시게를 쳐서 8월 6일 오다이바라 전투에서 다케다는 우에스기-가사하라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시가 성 주변에 적군의 수급 3천을 늘어놓아 전의를 꺾고 성을 함락시켰다. 또한 령국 지배에 있어서도 같은 해에는 분국법인 《고슈 법도지차제》(신겐 가법)을 정하였다.
1548
[우에다하라 전투의 참패]
호쿠신 지방의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우에다하라에서 격돌했으나 대패하여 주요 중신들을 잃고 자신도 부상당했다.
덴분 17년(1548년) 2월, 하루노부는 호쿠신(시나노 북부) 지방에서 세력을 자랑하고 있던 가쓰라오 성의 성주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우에다하라에서 격돌하였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병력이 우세했던 다케다는 무라카미에 패했고, 슈쿠로인 이타가키 노부카타와 아마리 도라야스를 비롯 많은 장병을 잃는다. 하루노부 자신도 부상당해 고후의 유무라 온천에서 30일간 치료를 받았다.
[시오지리토게 전투 승리]
우에다하라 전투 패배 직후 오가사와라 나가토키가 스와로 쳐들어왔으나, 하루노부는 시오지리토게 전투에서 이를 격파했다.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패배한 것을 기회로 4월, 오가사와라 나가토키가 스와로 쳐들어 왔으나, 하루노부는 7월에 시오지리토게 전투에서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의 군을 격파하였다. 이는 하루노부가 패배 후 빠르게 전력을 회복하고 반격했음을 보여준다.
1550
[마쓰모토 분지 평정]
오가사와라 영지인 마쓰모토 분지를 침공하여 오가사와라 나가토키를 쫓아내고 시나노 중부를 다케다의 지배 아래 두었다.
덴분 19년(1550년) 7월, 하루노부는 오가사와라령 영지인 마쓰모토 분지를 침공했다. 이에 니시나 모리요시가 다케다에 내통하였고,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에게는 이미 저항을 계속할 힘이 없어 하야시 성을 버리고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로 달아났다. 이렇게 시나노 중부의 마쓰모토 분지는 다케다의 지배 아래 들게 된다.
[도이시쿠즈레 대패]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지성인 도이시 성을 공격했으나, 후세에 '도이시쿠즈레'라 불릴 대패를 겪으며 1천 명 이상의 장병을 잃었다.
마쓰모토 분지 평정의 기세로 다케다는 9월,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지성 도이시 성을 쳤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다케다는 패배를 겪는다. 후세에 도이시쿠즈레라고 불릴 대패였다. 이 대패에서 요코타 다카토시와 오야마다 노부아리를 비롯해 1천 명 이상의 장병을 잃었다.
1551
[사나다 유키타카의 책략으로 도이시 성 함락]
사나다 유키타카의 책략으로 도이시 성이 함락되며 다케다 군이 시나노 평정에서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덴분 20년(1551년) 4월, 지난 해 대패를 안겼던 도이시 성이 사나다 유키타카의 책략으로 함락되었고, 이를 계기로 다케다 군은 순탄하게 우위에 서게 되었다.
1553
[동부 시나노 평정]
무라카미 요시키요가 가쓰라오 성을 버리고 에치고의 나가오 가게토라(우에스기 겐신)에게 도망치면서 동부 시나노가 다케다의 지배하에 들었다.
덴분 22년(1553년) 4월, 무라카미 요시키요는 가쓰라오 성을 버리고 에치고의 고쿠슈 나가오 가게토라(훗날의 우에스기 겐신) 아래로 도망쳤다(가쓰라오 성 전투). 이렇게 도신(동부 시나노) 지방도 다케다의 지배 아래 들게 되었고, 하루노부는 호쿠신(북부 시나노) 지방을 제외한 시나노 대부분을 평정하게 된다.
[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시작]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호쿠신 호족들의 요청을 받은 나가오 가게토라(우에스기 겐신)가 시나노로 출병하며 다케다와 에치고 간의 첫 가와나카지마 전투가 시작되었다.
덴분 22년(1553년) 4월, 무라카미 요시키요나 호쿠신 지역 호족들의 요청을 받은 나가오 가게토라는 5천 병력으로 본격적인 시나노 출병을 개시하였고, 그 이후 평야 지대인 젠코지다이라의 주도권을 놓고 가이와 에치고의 대결의 단초가 시작된다(제1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다케다군은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가쓰라오 성을 함락시켰지만, 5월 하치만에서 무라카미 요시키요에게 패하고 성은 다시 빼앗겼다. 나가오 가게토라는 시나노 영내로 침공하였고 아라토 성과 고쿠조 산성을 함락시켰으나, 하루노부는 결전을 피하며 양쪽 모두 물러났다.
1554
[고소슨 삼국동맹 체결]
이마가와 씨, 고호조 씨와 혼인 동맹을 맺어 고소슨 삼국동맹을 성립하며 시나노 진출에 대한 후방 안정을 도모했다.
다케다 하루노부는 시나노 진출에 즈음하여 나가오 가게토라에 대항하고 후방을 안정화하기 위해, 이마가와 씨와 고호조 씨와의 관계 개선을 진행하였다. 덴분 23년(1554년), 적남 다케다 요시노부의 정실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딸을 맞이하여 고슨 동맹을 강화하였다. 또한 신겐 자신의 딸을 호조 우지야스의 적남 호조 우지마사에게 시집보내어 고소 동맹을 맺었다. 이로 인해 이마가와 씨와 고호조 씨도 혼인을 맺어 고소슨 삼국동맹이 성립되었다.
1555
[제2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나가오 군과 가와나카지마에서 200여 일간 대치하였으나,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개로 화목하고 양군 모두 물러났다.
덴분 24년(1555년) 음력 4월, 다케다 측의 젠코지벳토 구리타 에이주가 아사히 산성에서 농성하자, 나가오 가게토라는 스소바나 강을 끼고 대안에 가쓰라 산성을 쌓았다. 이후 가와나카지마에서 200여 일을 나가오군과 대치하였는데, 이 전투에서는 뎃포 300정, 활 800장이 동원되었으며 다케다 씨의 합전에서 처음으로 뎃포 사용이 확인되었다. 이 제2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중개로 화목하였고, 10월에 양군은 물러났다. 화목 조건은 다케다 측의 아사히 산성 파쇄가 있었다.
1557
[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가쓰라야마 성을 모략으로 함락시키고 호쿠신으로 세력을 확장하고자 했으나, 나가오 가게토라와 결판을 내지 못했다.
고지 3년(1557년) 2월 15일, 신겐은 가쓰라야마 성을 모략으로 함락시켰다. 이 해에 하루노부의 호쿠신(북부 시나노)로의 세력 확장에 반격하고자 나가오 가게토라가 출진했지만, 하루노부는 결전을 피하고 결판은 나지 않았다. 이 싸움을 우에노하라 전투라고도 한다. 무로마치 바쿠후의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에 의한 고에쓰 화목 명령이 내려졌고, 신겐은 시나노 슈고 직책을 요구하며 수락하여 시나노 슈고로 보임되었다. 나가오 가게토라가 가와나카지마로 출병해 옴에 따라, 재차 다케다 군과 나가오 군이 대치하기 시작하나(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양군 모두 전과가 없었고, 가게토라가 없는 사이에 이코 잇키가 일어나 나가오 군은 철퇴한다.
1559
에이로쿠 2년(1559년) 2월, 제3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뒤에 신겐은 출가하였다. 《가이 국지》에 따르면 하루노부는 조센지의 주지 기슈 겐파쿠를 도사로 하여 출가하였고, '도쿠에이켄 신겐'이라고 호칭하였다고 한다. 신겐의 출가 배경에는 시나노를 거의 평정한 시기라는 점, 시나노 슈고로 보임되었던 것이 계기가 되었을 수 있으며, 대기근 상황에서 세대 교체를 연출하는 수단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1561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대격돌]
2만의 다케다군과 1만 3천의 우에스기군이 맞붙은 최대 규모의 가와나카지마 전투로, 양측 모두 큰 피해를 입었다.
에이로쿠 4년(1561년) 8월, 2만의 다케다군과 1만 3천의 우에스기 마사토라(겐신) 군이 맞붙은 제4차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일련의 대결 속에서 최대 규모의 전투로, 양군 합쳐 6천여 명의 전사자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다케다 측은 신겐의 친동생 다케다 노부시게를 비롯한 중신 모로즈미 도라미쓰, 야마모토 간스케 등 유력 가신을 잃었고, 신겐 자신도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고 한다.
1564
[제5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우에스기 겐신이 히다 국 침입을 막기 위해 가와나카지마로 출진했으나, 신겐은 결전을 피하고 충돌 없이 끝났다.
에이로쿠 7년(1564년), 우에스기 겐신이 다케다군의 히다 국 침입을 막기 위해 가와나카지마로 출진하였으나, 신겐은 결전을 피하고 시오자키 성에 포진했을 뿐, 별다른 충돌 없이 끝났다(제5차 가와나카지마 전투). 이로써 다섯 차례에 걸친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마무리되었다.
1566
[미노와 성 함락과 고즈케 서부 장악]
나가노 나리마사의 아들 나가노 나리모리를 격렬히 공격하여 미노와 성을 함락하고 고즈케 서부를 제압했다.
고지 3년(1557년) 가와나카지마 전투와 병행하여, 신겐은 공격 방향을 고즈케로 전환했으나, 우에스기 노리마사의 옛 신하였던 나가노 나리마사의 선전 때문에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에이로쿠 4년(1561년) 나리마사가 죽자 다케다 군은 대를 이은 나가노 나리모리를 격렬히 공격, 에이로쿠 9년(1566년) 9월 미노와 성을 함락하고 고즈케 서부를 제압하는 데 성공한다. 이로부터 미노와 성은 고호조 씨와의 전투에서 최전선이 되었다.
1567
에이로쿠 3년(1560년) 5월, 다케다 가의 맹우였던 이마가와 씨의 당주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이마가와 가는 쇠퇴하기 시작한다. 신겐은 이마가와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스루가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지만, 요시모토의 딸과 결혼한 적자 다케다 요시노부와 그의 스승 오부 도라마사가 격렬히 반대했다. 이에 1565년 오부 도라마사를 할복시키고, 1567년 음력 10월에는 요시노부를 폐적시키고 자살로 몰아갔다(병사설도 있다). 이 사건은 스루가 침공의 서막이 되었다.
1568
[스루가 침공 시작]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공동으로 스루가로 침공을 개시하여 이마가와 군을 격파하고 이마가와야카타에 입성했다.
1568년 음력 12월,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공동으로 스루가로 침공을 개시한다. 이마가와 군도 저항했지만, 마쓰노산에서 오기 기요타카를, 삿타산에서 이마가와 우지자네를 격파하고 이마가와야카타로 입성한다. 그러나 이마가와 씨와 친척 관계인 호조 우지야스가 이마가와 씨의 원군으로 오고, 스루가 정복을 기획한 이에야스도 우지야스와 동맹을 맺고 신겐을 적대하면서 상황이 불리해진다.
1569
[미마세 고개 전투 대승]
호조 씨를 제압하기 위해 간토를 침공, 오다와라 성을 포위한 후 퇴각 중 미마세 고개에서 호조 군을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1569년 음력 9월, 신겐은 2만의 대군을 이끌고, 호조 씨를 억누르기 위해 고즈케, 무사시, 사가미로 침공한다. 음력 10월 1일에는 오다와라 성을 포위하지만, 4일 후에 재빨리 포위를 풀었다. 호조 우지야스는 호조 우지테루, 호조 우지쿠니 등을 다케다 군의 가이로의 퇴각로에 포진시키고, 오다와라로부터는 호조 우지마사를 출진시켜 양동작전하는 구상을 했지만, 음력 10월 8일 미마세 고개에서 다케다 신겐 군과 우지테루, 우지쿠니 군이 격돌, 다케다 군이 대승한다.
1570
미마세 고개 전투로 호조 우지야스를 제압한 후, 1570년 음력 7월 재차 스루가를 침공, 완전히 평정한다. 이로써 다케다 가문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다.
1571
[이에야스 견제, 도토미/미카와 침공]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노부나가 토벌령에 호응하여 노부나가의 맹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치기 위해 도토미와 미카와를 침공했다.
오다 노부나가가 상경하여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옹립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요시아키와 노부나가는 대립하게 되었다. 요시아키는 노부나가를 멸하기 위해 신겐에게 노부나가 토벌 어내서를 발행했고, 신겐도 노부나가의 세력 확대를 우려했다. 이에 1571년 음력 2월 노부나가의 맹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치기 위해 도토미와 미카와를 침공한다. 신겐은 음력 5월까지 오야마 성, 아스케 성, 다미네 성, 노다 성, 니렌기 성을 접수한 후에 가이로 귀환한다.
[고소 동맹 재결성]
호조 우지야스 사후 그의 아들 우지마사와 고소 동맹을 다시 맺어, 고호조 씨와의 적대 관계를 종식시켰다.
겐키 2년(1571년) 음력 10월 3일, 호조 우지야스가 오다와라에서 죽고, 대를 이은 적자 우지마사는 선친의 유언에 따라 겐신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동생 호조 우지타다, 호조 우지노리를 인질로서 가이로 보냈다. 그리고, 음력 12월 27일에는 신겐과 고소동맹을 맺어, 고호조 씨와의 싸움은 그쳤다. 이 동맹은 덴쇼 7년(1579년) 3월까지 이어졌다.
1572
1572년 음력 10월 3일,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노부나가 토벌령에 호응해서 노부나가와의 동맹을 사실상 파기하고, 상경을 하기 위해 고후를 출발한다. 약 3만의 전군 중 아키야마 노부토모에게 3천을 주어 노부나가 영토의 히가시 미노에, 야마카타 마사카게에게 5천을 주어 이에야스의 영토 미카와에 보내고, 스스로는 바바 노부하루와 함께 2만의 대군을 이끌고 도토미로 공격해 들어갔다.
신겐이 이끄는 본대는 음력 10월 13일 다다라이 성, 아마카타 성 등 도쿠가와의 여러 성들을 하루 만에 접수했다. 이에야스는 음력 10월 14일, 다케다 군과 도토미의 히토코토자카에서 싸우지만, 병력 차이와 신겐의 교묘한 전술에 패한다.
1572년 음력 12월 19일, 신겐은 도토미의 요충지로 있는 후타마타 성을 함락시킨다. 이는 상경 작전 중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력의 거점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단계였다.
[미카타가하라 전투 대승리]
도토미 미카타가하라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군을 병력 우세와 뛰어난 전술로 결정적으로 격파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처음으로 하마마쓰에서 농성을 생각했지만, 다케다 군의 움직임을 봐서 병사 만천을 이끌고 출진, 도토미의 미카타가하라에서 음력 12월 22일 신겐과 일대 결전을 준비한다. 그러나 병력 차이와 함께 신겐의 전술 앞에 이에야스 군은 대패하고, 많은 장병을 잃고 패주한다. 이에야스는 도주할 때 공포에 질려 말 위에서 변을 봤다고 전해질 정도로 큰 패배였다.
1573
미카타가하라 전투 승리 이후, 1573년 음력 1월에 다시 미카와를 침공하고 음력 2월 10일에는 노다 성을 접수한다. 노다 성은 이에야스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풍운아 신겐, 고마바에서 숨을 거두다]
노다 성 접수 직후 지병이 악화되어 가이로 철퇴하던 중 시나노 고마바에서 병사했다.
노다 성을 접수한 직후부터 신겐의 지병이 악화되어, 다케다 군은 돌연 진격을 멈춘다. 이 때문에 신겐은 나가시노 성에서 요양했지만, 별 진전이 없어 음력 4월 초순에는 결국 가이로 철퇴를 결의하게 된다. 음력 4월 12일(1573년 5월 13일), 가이로 돌아오는 도중 시나노국 고마바에서 병사했다. 향년 53세였으며, 묘소는 야마나시현 고슈시의 에린지이다. 지병은 폐결핵, 폐렴, 위암 또는 식도암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