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자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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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작가 문학가(시인/소설가)

일본의 대표적인 소설가이자 무뢰파 작가로, 인간 내면의 고뇌와 허무를 깊이 탐구했습니다. 「달려라 메로스」, 「사양」, 그리고 일본 문학사에서 손꼽히는 베스트셀러 「인간실격」 등 뛰어난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는 등 불안정한 삶을 살았으며, 결국 39세의 젊은 나이에 애인과 동반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섬세한 여성 화자 시점과 기독교적 관심이 특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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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835

[쓰시마 가문의 데릴사위 류노스케]

쓰시마 소스케의 조부인 류노스케가 가세노무라의 야마나카 히사고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쓰시마 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두부 행상과 대금업으로 재산을 쌓아 올렸습니다.

쓰시마 소스케의 조부인 류노스케는 가세노무라 사람인 야마나카 히사고로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야마나카 집안의 선조는 노토국의 야마나카 장에 있던 야마나카 성주의 일족이었다고 전합니다. 류노스케는 안세이 6년(1835년)에 쓰시마 집안의 데릴사위로 들어갔습니다. 이후 그는 두부 행상을 하면서 대금업으로 재산을 쌓아 올렸습니다.

1867

[류노스케, 3대 소스케 이름 계승]

쓰시마 가문의 데릴사위 류노스케가 게이오 3년(1867년)에 2대 소스케의 타계와 함께 당주로서 3대 '소스케'의 이름을 이어받았습니다.

게이오 3년(1867년)에 2대 소스케의 타계와 함께 류노스케가 당주로서 3대 '소스케'의 이름을 이어받아, 가문의 명성을 이어갔습니다.

1894

[쓰시마 소스케, 군회의원 당선]

쓰시마 소스케가 메이지 27년(1894년) 기타쓰가루 군의 군회의원 대지주 호선의원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쓰시마 소스케는 1894년(메이지 27년)에 기타쓰가루 군의 군회의원 대지주 호선의원으로 당선되어, 지역 사회에서의 입지를 다졌습니다.

1895

[쓰시마 소스케, 소득세조사위원 당선]

쓰시마 소스케는 이듬해인 1895년에 현지의 소득세조사위원 선거에 당선되었습니다.

1895년에 쓰시마 소스케는 현지의 소득세조사위원 선거에 당선되어, 경제 분야에서도 영향력을 확대해 나갔습니다.

1897

[쓰시마 소스케, 귀족원 의원 호선 자격 획득]

메이지 30년(1897년), 쓰시마 소스케는 다시 군회의 대지주의원이 되어 현 내의 고액납세자 순위 12위로서 귀족원 의원의 호선 자격을 얻었습니다.

메이지 30년(1897년), 쓰시마 소스케는 군회의 대지주의원으로 재선되었고, 현 내 고액납세자 12위의 자격으로 귀족원 의원의 호선 자격을 손에 넣어 가문의 명성을 더욱 높였습니다.

1909

[다자이 오사무 탄생]

아오모리현 쓰가루군 가네키무라에서 지방 유지이자 대지주인 쓰시마 겐고에몬과 타네 사이에서 11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다자이 오사무는 1909년 6월 19일, 아오모리현 쓰가루군 가네키무라에서 지방의 명망 있는 대지주인 아버지 쓰시마 겐고에몬과 어머니 타네 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1남매 중 막내로, 그의 형제자매 중 두 명은 그가 태어날 무렵 이미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현의 회의원, 중의원 의원, 귀족원 의원까지 역임한 지역의 명사였습니다.

1916

[소학교 입학]

1916년(다이쇼 5년), 가나키제일심상소학교에 입학하며 학업을 시작했습니다. 4년 후 소학교를 졸업하고 학력 보충을 위해 1년간 메이지고등소학교에 다녔습니다.

1916년(다이쇼 5년)에 가나키제일심상소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아버지는 공무로 바쁘고 어머니는 병약하여 유모 등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4년만인 1922년(다이쇼 11년) 4월에 소학교를 졸업하고 현지 4개 마을에서 조합으로 세운 메이지고등소학교에 다시 1년간 통학하였습니다.

1923

[부친 쓰시마 겐고에몬 사망]

아오모리 현립 아오모리중학교 입학 직전인 3월, 그의 아버지가 도쿄에서 사망했습니다.

1923년(다이쇼 12년) 3월, 다자이의 아버지가 도쿄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1922년 귀족원 의원이 되었으나, 이듬해 폐암으로 사망했습니다.

[아오모리중학교 입학]

1923년(다이쇼 12년) 4월에 아오모리 현립 아오모리중학교에 입학하여 형들의 영향으로 교내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습니다.

1923년(다이쇼 12년) 4월에 아오모리 현립 아오모리중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중학교 시절까지는 형들의 영향으로 교내 수석을 차지할 정도로 학업 성적이 우수했습니다.

1925

[작가 지망 및 습작 집필]

17세에 습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후」를 집필하고 동인지를 발행하기 시작하며 작가를 지망하게 되었습니다.

17세 때인 1925년(다이쇼 14년)에 습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최후」를 집필하면서 동인지를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부터 동인지에 실을 소설이나 희곡, 수필을 쓰며 작가의 꿈을 키워나갔습니다.

1927

[히로사키 고등학교 입학]

1927년(쇼와 2년) 4월, 관립 히로사키 고등학교 문과・갑류에 입학하여 이즈미 교카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에 심취하기 시작했습니다.

1927년(쇼와 2년) 4월에 관립 히로사키 고등학교 문과・갑류에 입학한 뒤로는 이즈미 교카나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에 심취했습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가 그 해 7월에 자살하자 크게 충격을 받았으며, 좌익 운동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1928

[『세포문예』 창간 및 작품 발표]

1928년(쇼와 3년) 5월에 동인지 『세포문예』를 발행하고 '쓰시마 슈지'(본명과 발음은 같지만 한자가 다름)라는 이름으로 작품 「무간나락」을 발표했습니다.

1928년(쇼와 3년) 5월에 동인지 『세포문예』를 발행하여 지면에 '쓰시마 슈지'(辻島衆二)라는 이름으로 작품 「무간나락」을 발표했습니다. 이 잡지는 9월에 4월호를 낸 것을 마지막으로 폐지되었습니다. 그밖에도 고스게 긴키치라는 필명이나 본명인 쓰시마 슈지로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1929

[첫 자살 시도]

자신의 '계급'에 대한 고민 끝에 1929년(쇼와 4년) 12월에 카르모틴으로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1929년(쇼와 4년) 12월, 자신의 '계급'은 과연 어디에 속하는가를 고민하다 카르모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1930

[동거녀와 동반 투신자살 시도 (미수) 및 기소유예]

1930년, 동거하던 술집 여급 다나베 시메코와 가마쿠라의 바다에서 동반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시메코만 사망하고 다자이는 홀로 살아남아 자살방조 혐의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습니다.

대학 재학 중에 만나 동거하던 유부녀 여급 18세의 다나베 시메코와 1930년 월에 가마쿠라의 고시고에 바다에서 동반 투신자살을 기도했으나, 시메코만 죽고 다자이는 혼자 살아남았습니다. 이 일로 다자이는 자살방조 혐의로 검사로부터 조사를 받았지만, 형 분지 등의 탄원으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습니다. 담당 검사가 아버지 친가 친척이었고, 담당 형사도 동향 출신이었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히로사키 고등학교 졸업]

1930년(쇼와 5년) 3월, 히로사키 고등학교 문과・갑류를 76명 가운데 46번이라는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1930년(쇼와 5년) 3월, 히로사키 고등학교 문과・갑류를 76명 가운데 46번이라는 성적으로 졸업했습니다.

[동경제국대학 불문학과 입학]

프랑스어를 전혀 하지 못하면서도 프랑스 문학을 동경하여 1930년 4월에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불문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프랑스어를 전혀 하지 못하면서도 프랑스 문학을 동경해 1930년 4월에 동경제국대학 문학부 불문학과에 입학했지만, 높은 수준의 강의 내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친가에서 부쳐주는 돈으로 방탕하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자기 혐오와 마르크시즘에 심취했고, 공산주의 활동에 몰두하느라 강의조차 대부분 출석하지 않았습니다.

[이부세 마스지 제자 및 '다자이 오사무' 필명 사용 시작]

소설가가 되기 위해 1930년 5월부터 이부세 마스지의 제자로 들어갔으며, 이때부터 본명인 쓰시마 슈지가 아닌 '다자이 오사무'라는 필명을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1930년 5월부터 이부세 마스지의 제자로 들어가면서, 본명인 쓰시마 슈지가 아닌 '다자이 오사무'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거듭된 유급과 수업료 미납으로 결국 제적되었습니다.

1931

[오야마 하쯔요와 동거 시작]

1931년 2월부터 아오모리에서 알게 된 기녀 오야마 하쯔요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1931년 2월부터 아오모리에서 알게 된 기녀 오야마 하쯔요와 동거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1935년 아쿠타가와상 전형위원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 그의 사생활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1933

[단편 「열차」, 「어복기」 발표하며 작가 활동 시작]

1933년(쇼와 8년), 단편소설 「열차」를 「선데이 히가시오쿠」에 발표하고 동인지 『해표』에 참가해 「어복기」를 발표하며 본격적인 작가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33년(쇼와 8년), 단편소설 「열차」를 「선데이 히가시오쿠」에 발표했고, 동인지 『해표』에 참가하여 「어복기」를 발표하며 작가로서의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1934

[문예지 『푸른 꽃』 창간]

1934년(쇼와 9년) 12월, 단 카즈오 등과 합심해 문예지 『푸른 꽃』을 창간했지만, 창간호로 폐간되는 아쉬움을 겪었습니다.

1934년(쇼와 9년) 12월에는 단 카즈오, 야마기시 가이시, 키야마 슈헤이, 나카하라 츄야, 쯔무라 노부오 등과 합심하여 문예지 『푸른 꽃』을 창간했습니다. 하지만 이 잡지는 창간호 발행 후 바로 폐간되었습니다.

1935

[「역행」 발표 및 사토 하루오 사사]

1935년에 소설 「역행」을 동인지 외의 문예지 「문예」에 처음으로 발표했습니다. 이 해에 사토 하루오를 알게 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1935년(쇼와 10년)에는 소설 「역행」을 「문예」에 발표했습니다. 이는 동인지 이외의 문예지에 그가 발표한 첫 작품이었습니다. 같은 해에 사토 하루오를 알게 되어 그로부터 사사하게 되었습니다.

[제1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

1935년에 제정된 제1회 아쿠타가와 상에 그의 소설 「역행」과 「어릿광대의 꽃」이 후보에 올랐으나, 사생활 비난 등으로 결국 수상에는 실패했습니다.

1935년에 처음으로 아쿠다가와 상이 제정되었고, 다자이의 「역행」과 「어릿광대의 꽃」이 제1회 수상작 후보에까지 올랐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다자이는 수상을 강력히 소망했지만, 당시 전형 위원이던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다자이의 「어릿광대의 꽃」을 그의 실제 생활(기녀 오야마 하쯔요와의 동거)과 연관 지어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수상은 좌절되었습니다. 이에 다자이는 가와바타에게 공개적으로 반격하기도 했습니다.

[「다스 게마이네」 발표 및 아쿠타가와 상 좌절]

1935년 10월, 회심의 역작 「다스 게마이네」를 발표하며 제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을 강력히 기대했으나, 후보에도 오르지 못하고 수상은 다시 한번 좌절되었습니다.

1935년 10월에 자신의 회심의 역작 「다스 게마이네」를 발표했습니다. 다자이와 스승 사토 하루오는 이 작품이 반드시 제2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하리라 기대했지만, 「다스 게마이네」는 후보에도 오르지 못한 채 그 해 아쿠타가와 상도 '해당작품 없음'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후 다자이는 도신문사에 입사하지 못하고 또다시 가마쿠라에서 자살을 시도하나 미수에 그쳤습니다.

1936

[첫 단편집 『만년』 간행 및 아쿠타가와 상 최종 좌절]

1936년(쇼와 11년), 전년부터 이어진 파비날 중독 치료에 전념하며 첫 단편집 『만년』을 간행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 또한 제3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올랐음에도 수상에 실패하며 아쿠타가와 상 도전은 완전히 끝이 났습니다.

1936년(쇼와 11년), 전년부터 이어진 파비날 중독 치료에 전념하는 한편, 그의 첫 단편집 『만년』을 간행했습니다. 『만년』이 상반기 대상의 제3회 아쿠타가와 상의 대상 후보에 고려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 다자이는 자존심을 접고 사토 하루오는 물론 예전의 적이었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에게까지 사정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제3회 아쿠타가와 상은 다른 작품에게 돌아갔고, 다자이의 아쿠타가와 상 수상은 또다시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아쿠타가와 상 후보 선정 기준이 '한 번 후보에 오른 작가의 작품은 다시 선정하지 않는다'로 확립되면서, 다자이의 아쿠타가와 상 수상 도전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1937

[오야마 하쯔요와 동반자살 미수 및 이별]

1937년(쇼와 12년), 연인 오야마 하쯔요와 카르모틴 동반 자살을 시도했으나 또다시 미수에 그쳤고, 이후 그녀와 이별하고 1년간 절필했습니다.

1937년(쇼와 12년), 오기쿠보의 벽운장에서 친척으로부터 그가 다자이의 연인 오야마 하쯔요와 간통하고 있었다는 고백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 충격으로 하쯔요와 카르모틴 자살을 시도했으나 또다시 미수에 그쳤고, 이후 그녀와 이별했으며 1년간 붓을 꺾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1938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

1938년(쇼와 13년) 11월, 스승 이부세 마스지의 중매로 고후시 출신의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하며 정신적인 안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938년(쇼와 13년), 스승 이부세의 초대로 야마나시현 미사카 고개에 있는 덴가사야를 방문해 석 달 동안 머물렀습니다. 이후 이부세의 중매로 고후시 출신의 이시하라 미치코와 11월에 결혼하며, 삶에 큰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1939

[고후 정착 및 주요 단편 발표]

결혼 이듬해인 1939년(쇼와 14년) 1월, 고후에 정착하며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았고, 「후지 산 백경」, 「직소」, 「달려라 메로스」 등의 뛰어난 단편을 발표했습니다.

결혼 이듬해인 1939년(쇼와 14년) 1월에 고후의 미사키초에 살며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았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후지 산 백경」, 「직소」, 「달려라 메로스」 등 오늘날까지도 높이 평가받는 뛰어난 단편들을 활발하게 발표했습니다. 전쟁으로 어수선한 와중에도 「쓰가루」, 「옛날 이야기」 등 창작 활동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1945

[일본문학보국회 의뢰작 「석별」 발표]

전쟁 막바지인 1945년(쇼와 20년), 중국의 사상가 루쉰의 일본 유학 시절 이야기를 그린 소설 「석별」을 일본문학보국회의 의뢰에 따라 발표했습니다.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1945년(쇼와 20년), 다자이는 소설 「석별」을 발표했습니다. 이 작품은 중국의 사상가이자 문인이었던 루쉰의 일본 유학 시절 이야기를 그린 것으로, 전시체제하 일본 군부가 문학을 정치 선전에 이용하고 전쟁 참여를 독려하기 위해 만든 일본문학보국회의 의뢰에 따라 쓴 것이었습니다. 다만 당시 평론가들은 이 작품을 '실패작'으로 간주했습니다.

1947

[장편소설 『사양』 발표 및 유행 작가 등극]

패전 후인 1947년(쇼와 22년), 몰락 화족을 그린 장편소설 「사양」이 큰 평판을 얻으며 시대의 유행 작가로 급부상했습니다.

패전 뒤인 1947년(쇼와 22년), 몰락 화족을 그린 장편소설 「사양」이 큰 평판을 얻어 유행 작가가 되었습니다. 다자이는 패전 뒤 갑작스럽게 민주주의를 외치는 문인들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으며, 이것이 「사양」을 집필하는 한 동기가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1948

[대표작 『인간실격』 발표]

그의 대표작이자 일본 문학의 금자탑으로 불리는 장편소설 『인간실격』이 1948년에 발표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일본 국민 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판매수를 기록했습니다.

1948년에 그의 삶의 고뇌와 허무주의적 시각을 담아낸 대표작 장편소설 『인간실격』이 발표되었습니다. 이 작품은 일본 교과서에 등장할 정도로 후세에 많은 영향을 끼쳤으며, 신초문고본으로만 일본 국민작가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판매수를 기록하며 그의 문학적 정점을 보여주었습니다.

[애인과 동반자살로 생 마감]

「인간실격」과 「앵두」를 마무리한 직후인 1948년 6월 13일, 타마가와 죠스이에서 애인 야마자키 토미에와 동반 자살로 39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습니다.

「인간실격」, 「앵두」를 마무리한 직후인 1948년 6월 13일, 타마가와 죠스이에서 애인 야마자키 토미에와 동반자살하였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는 39세였습니다. 이 사건은 발표 직후부터 온갖 억측을 낳았으며, 그의 유서에는 '소설을 쓰는 것이 싫어졌다'는 등의 취지가 적혀 있었습니다. 자신의 컨디션 저조나 다운증후군을 앓던 외아들의 처지에 대한 비관도 자살의 한 원인이 되었을 거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의 유해는 스기나미 구 호리노우치에서 화장되었습니다.

['앵두 기일'에 사체 발견]

1948년 6월 19일, 그의 사체가 발견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이 날은 그의 생일이었습니다. 이 날은 '앵두 기일'이라 불리며 팬들이 그의 무덤을 찾는 날이 되었습니다.

다자이의 사체가 발견된 1948년 6월 19일은 공교롭게도 그의 생일이었습니다. 죽기 직전에 쓴 단편 「앵두」와도 관련해, 생전에 다자이와 동향으로 교류가 있던 곤 간이치에 의해 '앵두 기일'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 날은 다자이 문학의 팬들이 그의 무덤이 있는 도쿄도 미타카시의 젠린사를 찾는 날이기도 합니다.

1955

[본격적인 전집 출판]

1955년, 지쿠마 서방에서 다자이의 시중 작품뿐 아니라 주고받았던 편지와 미발표 습작까지 완비한 본격적인 「다자이 오사무 전집」이 출판되었습니다.

다자이의 작품 전집은 이미 그가 죽기 직전인 1948년부터 「다자이 오사무 전집」이라는 이름으로 야쿠모 서점에서 간행되었지만 출판사가 도산하면서 중단되었습니다. 그 뒤 창예사에서 새로이 「다자이 오사무 전집」을 간행했고, 1955년에 지쿠마 서방에서 비로소 그의 시중 작품뿐 아니라 그가 주고받았던 편지나 미발표 습작까지 완비한 본격적인 전집이 출판되었습니다.

1999

['앵두 기일'에서 '탄생제'로 명칭 변경]

다자이 오사무 탄생 90주년을 맞아, 유족의 요망에 따라 '앵두 기일'이 '다자이 오사무 탄생제'로 이름을 바꾸어 기념 행사를 열었습니다.

다자이가 태어난 아오모리 현 카나기마치에서도 '앵두 기일'에 맞춰 다자이를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는데, 다자이의 탄생지에서 다자이의 탄생을 축하하는 것이 옳다는 유족의 요망도 있어 다자이 오사무 탄생 90주년이 되는 1999년부터는 「다자이 오사무 탄생제」로 이름을 고쳤습니다.

2009

[GHQ 검열 사실 밝혀짐]

2009년, GHQ의 검열 자료인 '프란게 문고'를 통해 다자이의 여러 작품들이 GHQ에 의해 삭제 지시를 받았음이 밝혀졌습니다.

2009년, 미국 메릴랜드 대학의 '프란게 문고'에 소장된 자료를 통해, 다자이가 패전 뒤 GHQ가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시기에 발표했던 「인어의 바다」, 「철면피」, 「교장 3대」, 「화폐」, 「오손 선생 언행록」, 「길일」, 「수상한 암자」 등은 GHQ의 검열에 의해 삭제하도록 지시받고 있었음이 밝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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