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라노 기요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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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 공경, 정치가 + 카테고리

다이라노 기요모리는 헤이안 시대 말기 무사로, 이세 헤이시 수장이자 무사 최초로 태정대신에 올랐다. 호겐과 헤이지의 난 승리로 '헤이케 천하'를 이룩했으나, 권력 독점과 고시라카와 법황 유폐 등으로 반발을 샀다. 후쿠하라 천도와 전국적 반란 속에서 병으로 사망하며 헤이케 몰락의 단초를 제공했다. 뛰어난 정치가이자 지휘관이었으나, 강경한 대처로 비판받기도 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118

[이세국 우부시나에서 출생]

이세 헤이시 두령 다이라노 다다모리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기온노 뇨고의 양자가 되었다.

겐에이 원년 이세 헤이시의 두령이었던 다이라노 다다모리의 장남으로 이세 우부시나에서 태어났다. 생모는 알 수 없으나 기온노 뇨고의 누나(혹은 여동생)라는 설이 유력하다. 어머니의 사후, 기온노뇨고의 양자가 되었다.

1129

[12살에 파격적인 승진]

12살의 나이로 종5위하인 사효에노스케 서임이라는 파격적인 승진을 했다.

다이지 4년 정월에 12살의 나이로 종5위하인 사효에노스케 서임이라는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되는데, 후지와라노 무네타다는 자신의 일기 《츄유키》에서 "사람의 이목을 놀라게 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평가한다.

[이와시미즈 임시제 무인 발탁]

이와시미즈 임시제 무인으로 발탁되어 기온노 뇨고의 비호 아래 성장했음을 시사했다.

기요모리는 3월 이와시미즈 임시제의 무인에 발탁이 되자, 기요모리의 말을 끌 마부를 기온노 뇨고의 양자였던 내대신 미나모토노 아리히토의 수행원이 맡았던 것에서 어릴적 기요모리는 기온노뇨고의 비호 아래 성장한 것으로 생각된다. 기온노 뇨고의 비호 아래 성장했기에 기요모리의 친아버지는 시라카와인이라는 설도 있다.

1137

[히고노카미 임명]

아버지 다다모리가 구마노 본궁을 조영한 공으로 인해 히고노카미에 임명되었다.

호엔 3년 다다모리가 구마노 본궁을 조영한 공으로 인해 기요모리는 히고노카미에 임명되었다.

1147

[셋째 아들 무네모리 출생]

후처 다이라노 도키코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 무네모리가 태어났다. 토키코의 아버지는 도바 법황의 판관 대리였다.

규안 3년 후처 다이라노 도키코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들 무네모리가 태어났다. 토키코의 아버지 도키노부는 도바 법황의 판관 대리로서 후지와라노 아키요리, 신제이와 더불어 원청의 실무를 담당했다.

[기온샤 사건으로 엔랴쿠사와 갈등]

기온샤 무악 봉납 중 휘하 노토와 신인 간 다툼으로 화살이 보전에 맞는 사건이 발생했으나, 도바 법황의 비호로 벌금형으로 그쳤다.

그 해 6월 15일, 기요모리는 야사카 신사로 무악을 봉납하러 갔으나 휘하의 노토들과 신인 사이에서 벌어진 작은 다툼에서, 부하들이 쏜 화살이 보전에 맞는 사건이 발생했다. 기온샤를 말사로 거느렸던 엔랴쿠지는 타다모리, 기요모리의 유형을 요구하며 강력하게 호소했으나 도바 법황은 엔랴쿠사의 공세로부터 다다모리 부자를 보호하면서 기요모리의 죄에 대한 처벌을 속동 30근이란 벌금형으로 그쳤다.

1149

[동생 이에모리 급서로 적통 지위 확고]

동생 이에모리가 급서하면서 기요모리의 헤이시 적통으로서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그러나 규안 5년 이에모리가 급서하면서 기요모리의 적통으로서의 지위는 확고해졌다. 아키노카미에 임명되어 세토 내해의 제해권을 손에 넣어 막대한 이익을 거둬, 아버지와 함께 서국으로 세력을 확대했다. 또한 그 시기부터 미야시마의 이쓰쿠시마 신사를 숭앙하게 되었다.

1153

[헤이시 일문의 동량 계승]

아버지 다다모리 사후, 헤이시 일문의 동량(수장)이 되었다.

닌페이 3년 다다모리 사후에 헤이시 일문의 동량이 되었다.

1156

[호겐의 난에서 고시라카와 천황 지지 승리]

호겐의 난에서 고시라카와 천황 측에 가담하여 승리했으며, 하리마노카미와 다자이노다이쇼니가 되었다.

호겐 원년에 일어난 호겐의 난에서는 양어머니 이케노젠니가 스토쿠 상황의 아들 시게히토 친왕의 유모였기에 기요모리의 입장은 난처했으나 일문의 결속을 위해 고시라카와 천황측에 가담해 승리를 거두고 하리마노카미, 다자이노다이쇼니가 되었다.

1159

[헤이지의 난 승리로 무사정권 기틀 마련]

헤이지의 난에서 반신제이파를 일소하고 겐지를 멸망시켜 무사들 중 제1인자가 되었으며, 무가정권 수립의 기초를 닦았다.

헤이지 원년의 헤이지의 난에서 정권을 장악한 후지와라노 노부요리, 후지와라노 쓰네무네, 후지와라노 고레카타 등 반신제이파를 일소하면서 급속히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높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미나모토노 시게나리, 미나모토노 스에자네, 미나모토노 미쓰야스 등의 유력 무사가 멸망했기 때문에 기요모리는 무사들 중 제 1인자가 되어 조정의 군사력, 경찰력을 장악했다. 이로 인해 기요모리는 무가정권 수립의 기초를 쌓게 되었다.

1161

[황자 노리히토 태자 책봉 획책]

고시라카와 상황과 다이라노 시게코 사이에 황자 노리히토가 태어나자, 태자 책봉을 획책했으나 니죠 천황의 격노로 고시라카와 상황의 인세이가 정지되었다.

오호 원년 9월 고시라카와 상황과 다이라노 시게코 사이에 황자 노리히토가 태어나자 다이라노 도키타다, 다이라노 노리모리가 태자 책봉을 획책했다. 니죠 천황은 이러한 움직임에 격노해 도키타다와 노리모리, 후지와라노 나리치카, 후지와라노 노부타카 등을 해임하고 고시라카와 상황의 인세이를 정지시켰다. 기요모리는 천황의 황거에 무사를 숙직시켜 경호하게 하면서 자신은 천황을 지지할 자세임을 명확히 보였다.

1162

[쓰네무네의 교토 귀환 허락]

헤이지의 난 때 유배되었던 니죠 천황 친정파 후지와라노 쓰네무네의 교토 귀환이 허락되었다.

이듬해 3월에는 헤이지의 난 때 유배되었던 니죠 천황 친정파 후지와라노 쓰네무네가 교토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고, 6월에는 도키타다나 미나모토노 스케카타가 니죠 천황을 가모 진쟈에서 저주한 죄로 유배되었지만, 기요모리는 니죠 천황의 두터운 신뢰를 받아 친정(親政)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

[도키타다 등 유배]

도키타다 등이 니죠 천황을 저주한 죄로 유배되었으나, 기요모리는 천황의 신뢰를 받았다.

이듬해 3월에는 헤이지의 난 때 유배되었던 니죠 천황 친정파 후지와라노 쓰네무네가 교토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고, 6월에는 도키타다나 미나모토노 스케카타가 니죠 천황을 가모 진쟈에서 저주한 죄로 유배되었지만, 기요모리는 니죠 천황의 두터운 신뢰를 받아 친정(親政)을 궤도에 올려 놓았다.

1164

[고시라카와 상황 위한 렌게오우인 건립]

고시라카와 상황을 위해 렌게오우인을 지어주고 장원과 영지를 기부하여 상황의 경제 기반을 강화시켰다.

인세이를 정지당한 고시라카와 상황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아, 조칸 2년에 렌게오우인을 고시라카와 상황을 위해 지어주고, 렌게오우인에 장원과 영지도 기부하여 상황의 경제 기반도 강화시켰다.

1165

[니조 천황 붕어]

니조 천황이 붕어했다.

고시라카와 상황의 움직임에 경계심을 품고 있었던 니조 천황은 조칸 3년에 시게모리를 산기에 임명하면서 헤이시에 대한 의존이 깊어졌으나 7월 28일 붕어했다.

1166

[나이다이진 취임]

나이다이진이 되었다.

10월 10일에는 노리히토 친왕의 태자 책봉으로 기요모리는 춘궁대부가 되었고, 11월에는 나이다이진이 되었다.

[셋쇼 모토자네 급사, 고시라카와 인세이 부활]

셋쇼 고노에 모토자네가 급사하면서 고시라카와 인세이가 부활했고, 정치 구도에 변화가 생겼다.

하지만 에이만 2년 7월 26일, 셋쇼이자 후지와라 집안의 씨장자였던 모토자네가 급사하면서 고시라카와 인세이는 부활하고 모토자네의 아들인 고노에 모토미치가 어리다는 이유로 모토후사가 섭정이 되었다.

[노리히토 친왕 태자 책봉으로 춘궁대부]

노리히토 친왕의 태자 책봉으로 춘궁대부가 되었고, 셋칸케 영지 관할권도 얻어냈다.

모토자네의 영지였던 셋칸케령이 모토후사에게 옮겨진다면 헤이시에게는 대타격이었다. 그러나 기요모리는 후지와라노 구니쓰나의 조언에 따라 덴카와타리령, 칸가쿠인령, 미도류사원령을 제외한 후지와라 집안 소유의 사적인 영지들을 모토자네의 미망인인 모리코가 상속받게 하는 것으로 셋칸케령의 관할권을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10월 10일에는 노리히토 친왕의 태자 책봉으로 기요모리는 춘궁대부가 되었고, 11월에는 나이다이진이 되었다.

1167

[무사 최초 태정대신 취임]

무사로는 최초로 최고 관직인 태정대신에 올랐다. (세계 최초)

다음해 닌난 2년 2월 태정대신이 되었다. 무사로서 태정대신이라는 지위에 오른 것은 기요모리가 처음이었다.

[태정대신 사임 및 정계 은퇴]

실권 없는 명예직이었던 태정대신을 석 달 만에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적자 시게모리에게 4개 도의 치안경찰권을 위임했다.

하지만 태정대신은 시라카와 천황의 치세에 후지와라노 모로자네와 셋칸을 다투다 패한 후지와라노 노부나가가 취임하면서 실권 없는 명예직으로 전락해 있었고, 석 달 뒤 기요모리는 태정대신을 사임하고 정계에서 은퇴하였으며, 대신 그의 적자인 시게모리가 닌난 2년 5월에 내려진 선지에 의해 도카이, 도산, 산요, 난카이 등 4개 도의 치안경찰권을 위임받아, 시게모리 자신이 가진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내외에 분명히 드러냈다.

1168

[병으로 출가 후 이쓰쿠시마 신사 정비]

병으로 쓰러져 출가한 뒤 이쓰쿠시마 신사 정비와 일·송 무역 확대에 몰두하였습니다.

1169

[고시라카와 법황과 함께 수계]

고시라카와 상황이 출가해 법황이 되자, 기요모리도 그와 함께 도다이지에서 수계 받았다.

가오 원년 고시라카와 상황은 출가해 법황이 되고, 기요모리는 고시라카와 법황과 더불어 도다이지에서 수계(受戒)를 받았다. 이는 도바 법황과 후지와라노 다다자네가 같은 날 수계를 받은 예를 모방한 것이었다. 이 무렵 고시라카와 법황이 후쿠하라를 방문한 송나라 사람과 면회하기도 하고, 기요모리의 딸 도쿠코가 다카쿠라 천황에게 출가하였으며, 후쿠하라에서 고시라카와 법황과 기요모리가 천승공양을 베풀면서 양자의 관계는 우호적으로 변했다.

1177

[시시가타니 음모 사건으로 인세이 세력 배제]

시시가타니의 음모 사건이 일어나, 인세이에서 고시라카와 법황을 떠받들던 근신 세력을 배제하려 했다.

지쇼 원년 6월 시시가타니의 음모 사건이 일어났다. 이것은 다다 유키쓰나의 밀고로 발각 되었으나 이것을 계기로 기요모리는 인세이에서 인의 근신세력을 배제하고자 했다. 사이코는 처형되고, 후지와라노 나리치카는 맏아들 시게모리의 처남이라는 이유로 목숨만 건져 비젠으로 유배(먹을 것조차 제대로 공급받지 못한 채 7월 9일 암살되었다), 슌칸 승도는 기카이가시마로 유배되었다. 다만 기요모리도 결국 법황에 대해서는 죄를 묻지 않았다.

1179

[딸 모리코 사망 후 장원 몰수]

딸 모리코 사망 후 고시라카와 법황이 상의 없이 모리코 소유의 장원을 몰수했다.

지쇼 3년 이 해는 기요모리에게 불행의 연속이었다. 6월에 딸 모리코가 사망하자 법황은 바로 모리코 소유의 장원을 기요모리와 상담도 하지 않고 몰수하였다.

[맏아들 시게모리 사망 후 영지 몰수]

맏아들 시게모리 사망 후에도 법황이 상의 없이 그의 지행국 에치젠을 몰수하자 기요모리의 불만이 고조되었다.

7월에는 맏아들 시게모리까지 42세를 일기로 병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이때는 기요모리도 정말로 낙담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을 정도로 슬픔에 잠겼으나, 법황은 시게모리의 사망과 동시에 또다시 기요모리에게 아무런 상담도 하지 않고 시게모리의 지행국이었던 에치젠을 몰수하고 말았다.

[지쇼 3년의 정변으로 쿠데타]

법황의 자신을 무시하는 시책에 격노하여 후쿠하라에서 군세를 이끌고 교토로 올라와 쿠데타(지쇼 3년의 정변)를 단행했다.

기요모리는 법황이 자신을 무시하는 시책에 격노하여 11월 14일 후쿠하라에서 군세를 이끌고 직접 교토로 올라와 쿠데타를 단행했다. 이것이 바로 지쇼 3년의 정변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기요모리는 간파쿠였던 후지와라노 모토후사·곤노주나곤 모로이에 부자를 비롯해 후지와라노 모로나가 등 반헤이케 성향을 지닌 구게와 인의 근신 39명을 모두 해임시키고 친헤이시측 구게를 임관시켰다.

[고시라카와 법황 유폐, 인세이 정지]

고시라카와 법황을 도바덴에 유폐시키고 인세이를 완전히 정지시켰다.

법황은 두려움을 느껴 기요모리에게 용서를 구했으나 기요모리는 이를 용서하지 않고, 11월 20일에는 법황을 도바덴에 유폐시키고 말았다. 이로써 고시라카와 인세이는 완전히 정지되었다.

1180

[미나모토노 요시나카 거병]

모치히토 왕의 영지에 따라 시나노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거병했다.

그 사이에 헤이케 추토를 명했던 모치히토 왕의 영지가 전국(특히 도고쿠)의 겐지들에게 퍼져 8월에는 이즈에 유배되어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이에서는 다케다 노부요시을 도료로 하는 가이 겐지 집안, 9월에는 시나노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거병했다.

[안토쿠 천황 즉위로 헤이케 괴뢰정권 수립]

다카쿠라 천황이 양위하고, 기요모리의 딸 도쿠코 소생의 황태자 노리히토 친왕이 안토쿠 천황으로 즉위하며 헤이케의 괴뢰정권이 수립되었다.

지쇼 4년 2월 다카쿠라 천황이 양위하고, 기요모리의 딸 도쿠코 소생의 황태자 노리히토 친왕이 즉위하였다. 명목상 다카쿠라 상황의 인세이였지만 헤이케의 괴뢰정권이라는 것은 누구의 눈에도 분명했다. 더욱이 법황을 유폐시켜 정치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많은 반헤이케 세력에게 거병할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다.

[모치히토 왕 거병 진압]

고시라카와 법황의 제3황자 모치히토 왕이 거병했으나, 기요모리의 재빠른 대책으로 토벌되었다.

헤이케 일문의 독주에 대한 반발의 첫 번째 신호탄은 고시라카와 법황의 제3황자 모치히토 왕의 거병이었다. 모치히토 왕은 우수했으나 겐슌몬인의 압력으로 친왕 선하도 받지 못했고, 하치죠인의 양자로서 즉위할 기회도 있었지만 지쇼 3년에 일으킨 정변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모치히토 왕에게는 하치죠인 직속의 무력이라 할 수 있는 미나모토노 요리마사나 시모코베 유키요시 · 아시카가 요시키요 · 미나모토노 나카이에 등이 따르고 있었고, 헤이케에 대한 반발이 강했던 고후쿠지나 온죠지도 이 움직임에 동조했다. 그러나 계획은 미연에 발각되어, 기요모리의 재빠른 대책으로 게비이시 후지와라노 가게타카 · 후지와라노 다다쓰나가 3백 기의 병사로 추격해 모치히토 왕과 요리마사 등을 토벌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거병]

모치히토 왕의 영지가 전국에 퍼지자 이즈에 유배되어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거병했다.

그 사이에 헤이케 추토를 명했던 모치히토 왕의 영지가 전국(특히 도고쿠)의 겐지들에게 퍼져 8월에는 이즈에 유배되어 있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가이에서는 다케다 노부요시을 도료로 하는 가이 겐지 집안, 9월에는 시나노의 미나모토노 요시나카가 거병했다.

[온죠지 소각 및 오미 평정]

넷째 아들 도모모리 등이 이끄는 군세가 온죠지를 불살라 버리고 오미 겐지를 격파하여 오미를 평정했다.

12월에 이르러 기요모리는 넷째 아들 도모모리와 손자 스케모리, 후지와라노 기요쓰나 등이 이끄는 군세를 파견해 온죠지를 불살라 버리고, 오미 겐지의 야마모토 요시쓰네·가시와기 요시카네를 격파하고 오미 평정에 성공했다.

[교토 떠나 후쿠하라쿄로 천도 강행]

힘 있는 지샤에 둘러싸인 교토의 불리함을 피하고자, 일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헤이케 거점인 후쿠하라로의 천도(후쿠하라쿄)를 강행했다.

그러나 지샤 세력 특히 온죠지는 물론, 친헤이케파였던 엔랴쿠지에서도 반헤이케 움직임이 나오자 기요모리는 힘 있는 지샤에 둘러싸여 헤이케에게는 지리적으로 불리한 교토를 포기하고, 지쇼 4년 6월 1일, 일문의 반대도 무릅쓰고 헤이케의 거점인 국제무역항 오와다노 도마리에 가까운 후쿠하라로의 행행를 강행했다. 즉 후쿠하라쿄로의 천도를 목표로 한 것이었다.

[전국적 반란으로 교토 귀환]

전국적인 반란과 일문 내의 반발로 후쿠하라 천도를 철회하고 교토로 귀환했다.

이에 기요모리는 이들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다이라노 고레모리를 총대장으로 한 대군을 간토로 파견했으나 이들은 후지 강에서 제대로 된 교전 한 번 치러보지 못한 채 철수하고 말았다. 이 패전을 계기로 지샤 세력 특히 모치히토 왕의 반란에 협조적이었던 온죠지나 고후쿠지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거기에 오미 겐지 집안이 봉기해 온죠지, 엔랴쿠지의 반헤이케 세력과도 제휴해 물류의 요충 비와호를 점거하고, 반란 세력은 교토를 공격할 정도의 세력으로까지 성장했다. 또한 규슈에서도 반란이 발발해 다카쿠라 천황이나 구게들은 물론 헤이케 일문 내에서도 천도를 바라지 않는 목소리가 높아져 결국 11월 23일, 기요모리는 교토로 귀환하게 되었다.

[난토 사찰들을 화공으로 불태움]

다섯째 아들 시게히라를 총대장으로 하는 대군을 난토에 파견하여 고후쿠지, 도다이지 등 여러 사찰들을 화공으로 불태웠다.

다음으로 기요모리는 배후의 위협을 제거하기로 결의하고, 다섯째 아들 시게히라를 총대장으로 하는 대군을 난토에 파견했다. 그리고 12월 28일, 고후쿠지나 도다이지 등 난토의 여러 사찰들은 시게히라의 화공으로 모조리 불타버렸다. 이로 하여 교토 주변의 반헤이케 움직임은 진정되었지만, 난토에서의 사찰 방화는 기요모리에게 그가 두려워하던 불적이라는 오명을 씌우고 말았다.

1181

[열병으로 쓰러지다]

도고쿠 추토를 결정한 다음날 열병으로 쓰러졌다.

2월 26일에는 진제이로 낙향하자는 시게히라의 제의도 물리치고 무네모리 이하 일족의 무사가 토고쿠 추토에 나서기로 결정했지만, 바로 다음날인 27일에 기요모리는 열병으로 쓰러졌다.

[열병으로 사망]

구죠가와라구치 다이라노 모리쿠니의 저택에서 열병으로 서거했다. 향년 64세.

죽음을 깨달은 기요모리는 자신의 사후 일은 모두 무네모리에게 맡기고, 무네모리와 협력해 정무를 진행하도록 법황에게 아뢰었지만 답변이 없었다. 한을 품은 기요모리는 "천하의 일은 무네모리에게 맡기고, 다른 의견은 없도록 하라"란 말을 남기고, 윤 2월 4일에 구죠가와라구치 다이라노 모리쿠니의 저택에서 서거하였다. 향년 64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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