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 1세
연표
BC 6C
[7인의 결단, 황제 다리우스]
위기에 처한 제국을 구하고자 다리우스는 오타네스를 비롯한 여섯 명의 페르시아 귀족들과 함께 찬탈자 가우마타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는 곧 아케메네스 제국의 새로운 황제로 선포되며, 대제국의 재건과 영광을 이끌 다리우스 시대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베히스툰 비문과 그리스 역사가들의 기록은 다리우스의 즉위 과정에 대해 약간의 차이를 보입니다. 비문에는 다리우스가 캄비세스 2세의 창병으로 복무했으며, 귀족들과 함께 가우마타를 살해한 뒤 황제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스 역사가들은 캄비세스의 동생 스메르디스를 사칭한 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다리우스와 귀족들이 이를 축출하고 다리우스를 황제로 옹립했다고 전합니다. 어느 쪽이든 다리우스가 혼란기를 수습하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황위에 올랐다는 공통점을 보여줍니다.
[대제국 반란의 진압]
황위에 오르자마자 다리우스 1세는 제국 전역에서 발생한 대규모 반란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바빌로니아, 엘람, 앗시리아 등 각지의 반란을 강력하게 진압하며 자신의 통치권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특히 바빌로니아 반란 진압 과정에서 '노새가 말을 낳을 때'라는 유명한 일화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바빌로니아 반란 당시, 반란군의 조롱에 다리우스는 1년 반 동안 도시 공략에 실패하며 좌절했습니다. 하지만 조피루스의 노새가 기적적으로 말을 낳자, 다리우스는 이를 신의 계시로 여기고 조피루스를 탈영병으로 위장시켜 바빌론에 침투시키는 기발한 계책으로 마침내 도시를 함락시켰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리우스의 끈기와 지략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찬탈자, 황위 강탈 시도]
캄비세스 2세가 동생 바르디야를 비밀리에 살해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틈을 타, 가우마타라는 사내가 자신이 바르디야라고 속이며 황위에 대한 반란을 일으켜 페르시아를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제국은 곧 찬탈자의 지배하에 놓이게 됩니다.
다리우스의 베히스툰 비문에는 캄비세스 2세가 형제 바르디야를 살해했으나, 이 사실이 페르시아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상황에서 가우마타가 바르디야를 사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신전 재건 완료]
다리우스 1세의 칙령에 따라 예루살렘 신전 재건 사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이는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신전이 파괴된 지 정확히 70년 만의 일로, 구약성서 예레미야의 예언이 성취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록됩니다.
다리우스의 종교적 관용과 포용 정책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다리우스 1세는 조로아스터교 신봉자였지만, 정복지의 다른 종교를 존중하고 지원했습니다. 그는 유대교 신전 복구 사업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그리스 문화에 호의적이었고 이집트 신 아문을 위한 사원을 짓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관용 정책은 제국의 안정과 통합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BC 5C
[세계 최초 표준 금화 '다라야카' 발행]
다리우스 1세는 약 5.40g의 순도 95.83% 금화 '다라야카'를 포함한 새로운 통화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이는 세계 최초의 표준화된 금화 중 하나로, 제국의 경제를 혁신하고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페르시아의 경제적 번영을 상징했습니다.
이로써 제국 전역의 교역이 훨씬 원활해졌습니다.
다라야카 금화 외에도 약 8g 무게의 은화가 함께 사용되었습니다. 다리우스는 무역 진흥을 위해 지하수로를 뚫고 운하를 건설했으며, 도로망을 개선하고 역참을 설치하여 제국 전역의 물류와 정보 흐름을 혁신했습니다.
[나일강-홍해 운하 건설]
다리우스 1세는 현재의 자가지그에서 수에즈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운하를 건설하여 나일강과 홍해를 연결했습니다.
이는 당시 세계 최대 규모의 운하 사업 중 하나로, 무역을 진흥하고 제국의 해상력을 강화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집트의 전략적 가치를 높인 이 운하는 다리우스의 통치 역량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입니다.
운하 건설을 위해 다리우스는 이집트로 직접 이동하여 사업을 진두지휘했습니다. 운하 완공 후 그는 이집트의 법을 정비하고 반역자를 처형하는 등 이집트 통치 기반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이외에도 수사, 바빌론, 페르세폴리스 등 주요 도시에 대규모 건설 계획을 추진하여 제국의 위용을 과시했습니다.
[마라톤 전투, 페르시아의 첫 좌절]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다티스 장군이 이끄는 2만 명의 페르시아 대군이 그리스 마라톤 평원에 상륙했습니다.
그러나 밀티아데스가 지휘하는 아테네와 플라타이아이 연합군에게 뜻밖의 패배를 당하며, 페르시아의 첫 번째 그리스 침공은 좌절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훗날 서양 문명의 향방을 가른 중요한 전환점이 됩니다.
페르시아 군은 수적으로 우세했으나, 아테네 중장보병들의 용맹함과 밀티아데스의 탁월한 전술에 밀려 큰 손실을 입고 퇴각했습니다. 이 패배는 페르시아의 무적 신화에 금이 가게 했으며, 이후 벌어질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서막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대제국 황제, 영원한 안식에 들다]
마라톤 전투 패배 후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정벌하기 위한 대규모 원정을 직접 지휘하려 했던 다리우스 1세는 3년간의 준비 기간 중 이집트의 반란과 건강 악화로 인해 계획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그는 결국 세상을 떠났고, 수년 전부터 준비했던 나크쉐 러스탐의 바위를 깎아 만든 웅장한 묘실에 안장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가 뒤를 이어 황위에 올랐습니다.
다리우스의 죽음은 아케메네스 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자 중 한 명의 시대를 마감하는 동시에,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가 이어받을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이라는 거대한 숙제를 남겼습니다. 다리우스는 '베히스툰 비문'을 통해 자신의 족보, 즉위 과정, 그리고 업적을 후대에 남겨, 현대 언어학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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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황제의 탄생]
훗날 아케메네스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 다리우스 1세가 페르시아의 유력 가문인 히스타스페스의 장자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탄생은 혼란기를 거쳐 대제국을 건설할 위대한 군주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다리우스는 권력을 잡기 전 캄비세스 2세의 이집트 원정에서 창병으로 활동하며 실전 경험을 쌓았다고 전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