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나카 가쿠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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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총리, 기업인 + 카테고리

고등소학교 졸업이라는 학력으로 일본 정치계에 입문해 64·65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낸 인물입니다. '컴퓨터를 단 불도저'로 불리며 일본열도 개조론을 주창하고 중일 국교 수립 등 굵직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록히드 사건으로 뇌물수수 혐의를 받아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음에도 '그림자 쇼군'으로 불리며 막후에서 일본 정치를 움직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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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18

[출생 및 상경]

니가타현 가리와군 후타다 촌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졸업 후 상경하여 독학으로 건축 기술을 익혔습니다.

1918년 5월 4일 니가타현 가리와군 후타다 촌(지금의 가시와자키 시)에서 태어났습니다. 1933년 후타다진조고등소학교를 졸업하고 1934년 3월 도쿄로 상경하여 더부살이를 하면서 주오 공학교 토목과에 입학했습니다. 1936년 3월 주오 공학교를 졸업하고 건축기사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1939

[군 입대 및 제대]

군에 소집되어 만주국에서 병역을 시작했으나, 중병을 앓아 귀국 후 제대했습니다.

1939년 4월 군으로 소집되어 만주국에서 병역을 시작했으나, 1941년 2월 중병을 앓아 일본으로 귀국했습니다. 1941년 10월 병을 치유하고 제대했습니다.

1941

[건축사무소 및 토건공업 설립]

제대 후 도쿄에 '다나카 건축사무소'를 개설하고 1943년에는 다나카 토건공업을 설립하며 급성장했습니다.

1941년 10월 병을 치유하고 제대한 후 도쿄의 이다바시에 '다나카 건축사무소'를 개설했습니다. 1943년 12월 다나카 토건공업을 설립하고 이화학연구소의 산업부문 등을 맡으면서 급성장했습니다.

1947

[정치 입문]

제23회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일본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이전에 한번 낙선한 경험이 있습니다.

1946년 4월 제22회 중의원 총선거에 진보당 공천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습니다. 이듬해인 1947년 4월 23회 총선거에 니가타의 3선거구에서 민주당 공천을 받아 출마해 당선되었습니다.

1948

[탄광국가관리 의혹 체포 및 무죄]

법무정무차관으로 재직 중 탄광의 국가 관리 의혹으로 체포되었으나, 이후 무죄가 확정되었습니다.

1948년 10월 제2차 요시다 내각의 법무정무차관으로 취임했으나, 1948년 12월 탄광의 국가 관리 의혹으로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중의원이 해산되자 옥중에서 출마했습니다. 1951년 6월 탄광국가관리사건에서 무죄가 확정되었습니다.

1957

[최연소 장관 취임]

제1차 기시 개조 내각에서 우정성 장관으로 취임하며 30대 최초로 장관이 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1955년 11월 자유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957년 7월 제1차 기시 개조 내각에 우정성 장관으로 취임하여 30대로는 처음 장관이 되었습니다.

1972

[《일본열도 개조론》 발표]

저서 《일본열도 개조론》을 발표하여 일본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1972년 5월 사토 에이사쿠의 파벌에서 다나카파가 분리되었고, 같은 해 6월 저서 《일본열도 개조론》을 발표했습니다. 이 책은 일본의 국토 균형 발전을 주장하며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총리 취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에서 후쿠다 다케오를 물리치고 당선되었으며, 제1차 다나카 내각이 성립되며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습니다.

1972년 7월 5일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사토 에이사쿠가 지지하던 후쿠다 다케오를 물리치고 당선되었습니다. 다음날 제1차 다나카 내각이 성립되었으며, 7월 7일 일본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습니다.

[중일 국교 수립]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 마오쩌둥과 회담 후 중·일 국교 수립 공동 성명을 발표하며 양국 관계를 정상화했습니다. 이는 다나카의 가장 큰 외교적 공적으로 평가됩니다.

1972년 9월 29일 오히라 마사요시 외무성 장관 등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베이징에서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과 회담을 가진 후 중·일간의 국교를 수립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같은 날 타이베이 정부는 대일 국교 단절을 선언했습니다.

1973

[김대중 납치사건]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 처리와 관련하여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해 주권침해와 한국측의 일방적인 정치적 결론을 수락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1973년 8월 8일 김대중 납치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다나카 내각은 박정희 정권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해 주권침해와 한국측의 일방적인 정치적 결론을 수락했다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이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습니다.

1974

[문예춘추 스캔들]

잡지 '분게이슌슈'에 다나카의 자금 출처와 인맥을 폭로하는 기사가 게재되며 사퇴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했습니다.

1974년 11월 잡지 '분게이슌슈' 특별호에서 다치바나 다카시가 쓴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그 금맥과 인맥〉과 고다마 다카시야의 〈외로운 에쓰잔카이의 여왕〉의 두 기사가 게재되었습니다. 이 기사들은 다나카의 자금 출처와 인맥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며 그의 총리 사퇴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내각 총사직 및 총리 퇴임]

국회에서 자금 출처 추궁이 이어지자 내각이 총사직하며 총리직에서 물러났습니다.

1974년 12월 9일 국회 등이 자금의 출처를 추궁하면서 내각이 총사직하였고, 다나카 가쿠에이는 총리직에서 퇴임했습니다.

1976

[록히드 사건 체포]

록히드 사건으로 5억 엔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로 체포되었으며, 일본 의회민주주의 역사상 처음으로 현직 총리가 뇌물수수죄로 구속되는 세계적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후 자민당을 탈당했습니다.

1976년 미국 상원의 외교위원회에서 록히드사가 국제적으로 항공기 판매 시 뇌물을 헌납했다는 의혹이 부상했습니다. 같은 해 7월 27일 다나카 가쿠에이는 록히드 사건으로 5억 엔의 뇌물을 수수한 혐의와 외환·외국무역관리법 위반 혐의로 비서 등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이는 일본 의회민주주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현직 총리가 뇌물수수죄로 구속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때 자민당을 탈당했으며, 다음 달에 보석으로 석방되었습니다.

1982

[나카소네 내각 지지]

차기 총리로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취임과 동시에 제1차 나카소네 내각이 발족하는 데 전면적인 지지를 제공하며 '다나카소네 내각'으로 불리게 했습니다.

1982년 11월 차기 총리로 나카소네 야스히로의 취임과 동시에 제1차 나카소네 내각이 발족했습니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전면적인 지지를 받아 '다나카소네 내각'으로 불렸습니다.

1983

[록히드 사건 1심 유죄 선고]

록히드 사건 1심 재판에서 징역 4년, 추징금 5억엔을 선고받으며 유죄가 인정되었으나 즉시 항소했습니다.

1983년 10월 도쿄 지방재판소에서 열린 록히드 사건 1심 재판에서 징역 4년, 추징금 5억엔을 선고받았습니다. 일본 사법부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가 뇌물죄를 지었다고 인정하여 징역형과 재산형으로 처벌한 것입니다. 피고 다나카 가쿠에이는 당일 항소했습니다.

1985

[뇌경색 발병]

뇌경색으로 쓰러져 입원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언어 및 행동 장애가 남아 사실상 정치활동이 불가능해졌습니다.

1985년 2월 27일 뇌경색으로 쓰러져 입원했습니다. 이후 언어장애나 행동장애가 남아 정치활동은 불가능해졌으며, 같은 해 6월 다나카 가쿠에이의 사무소가 폐쇄되었습니다.

1987

[록히드 사건 항소심 기각]

록히드 사건 항소심 재판에서 항소가 기각되자, 다시 상고했습니다. 이는 이후 타케시타 노보루 파벌의 분열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1987년 7월 도쿄 고등재판소에서 열린 록히드 사건 항소심 재판에서 항소가 기각되자, 다시 상고했습니다. 같은 달 다케시타 노보루의 파벌에 다나카 파의 대부분이 참가하는 등 다나카 파가 분열되었습니다.

1990

[정계 은퇴]

중의원 해산과 함께 43년간의 정치 생활을 마감하고 정계를 은퇴했습니다.

1989년 10월 사위 다나카 나오키가 차기 총선거에서의 다나카 가쿠에이의 불출마를 발표했습니다. 1990년 1월 24일 중의원 해산과 함께 정계를 은퇴했습니다. 16선 의원으로 43년간 재직하였으며, 후원회였던 에쓰잔카이도 해산했습니다.

1993

[사망]

향년 75세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사망으로 록히드 사건 상고심 심리는 기각되었습니다.

1993년 12월 16일 향년 75세로 사망했습니다.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에 있는 자택에 묻혔습니다. 록히드 사건은 상고심 심리 중 피고가 사망하였으므로 기각되었습니다.

1995

1995.2 사후 2년

[록히드 사건 뇌물죄 유죄 확정 (사후)]

최고재판소는 록히드 사건 상고심 판결에서 다나카 가쿠에이가 록히드사로부터 5억엔의 뇌물을 받은 사실을 인정하며 뇌물죄 유죄를 확정했습니다.

1995년 2월 일본 최고재판소는 에노모토 도시오의 록히드 사건 상고심 판결에서 다나카 가쿠에이가 5억엔을 록히드사로부터 받은 뇌물죄를 인정하여 뇌물죄 유죄를 확정했습니다. 이는 다나카 사망 후 이루어진 판결입니다.

1998

1998.4 사후 5년

[기념관 개관]

다나카 가쿠에이의 업적을 기리는 기념관이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에 개관했습니다.

1998년 4월 《다나카 가쿠에이 기념관》이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에 개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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