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그 함마르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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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그 함마르셸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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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관, 유엔 사무총장, 노벨 평화상 수상자 + 카테고리

다그 함마르셸드는 스웨덴 외교관이자 제2대 유엔 사무총장으로, 국제 평화와 협력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재임 중 한국 전쟁 포로 석방, 수에즈 위기 중재, 콩고 내전 해결 노력 등 세계 분쟁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조국보다는 국제 공동체의 대표라는 입장을 견지했습니다. 콩고 평화 협상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으나, 사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며 그의 공헌을 인정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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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05

[스웨덴 옌셰핑에서 출생]

스웨덴 옌셰핑에서 스웨덴 총리 얄마르 함마르셸드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엘리트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았습니다.

다그 얄마르 앙네 칼 함마르셸드는 1905년 7월 29일 옌셰핑에서 스웨덴 총리 얄마르 함마르셸드와 아그네스 알름퀴스트의 4번째이자 막내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대부분을 대학 도시 웁살라에서 보냈으며, 그의 조상들은 17세기 이래 스웨덴 왕실을 섬긴 명문가 출신입니다.

1925

[웁살라 대학교 문학사 학위 취득]

웁살라 대학교에서 언어학, 문학, 역사학을 전공하여 문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학업적 기반을 다졌습니다.

함마르셸드는 18세 때 웁살라 대학교에서 자신의 전공들을 시작하여 1925년 영예롭게 졸업하며 문학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의 주요 전공들은 언어학, 문학, 역사학이었습니다.

1928

[웁살라 대학교 경제학 석사 학위 취득]

웁살라 대학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며 자신의 학문적 깊이를 더했습니다.

그는 웁살라에서 자신의 전공들을 지속하여 1928년 경제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30

[웁살라 대학교 법학 학사 학위 취득]

웁살라 대학교에서 법학 학사 학위를 취득하며 다방면의 전문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함마르셸드는 1930년 웁살라 대학교에서 법학 학사를 취득하며 학업을 마무리했습니다.

[정부 위원회 서기 및 박사 학위 취득]

정부 위원회의 서기로 공직 경력을 시작했으며, 이후 스톡홀름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함마르셸드는 무직에 정부 위원회의 서기였습니다. 그는 또한 박사 학위 논문 <비즈니스 순환의 퍼짐>을 썼고, 1933년 스톡홀름 대학교로부터 경제학에서 자신의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36

[스웨덴 은행 서기 및 재무부 차관 임명]

스웨덴 은행의 서기로 임명된 후, 이듬해 재무부에서 영구적 차관으로 승진하여 정부의 핵심 요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1936년 그는 스웨덴 은행의 서기가 되었고, 단 1년 후에 함마르셸드는 정부에서 가장 어려운 직업들 중의 하나로 숙고된 재무부에서 영구적 차관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41

[스웨덴 국립은행 이사회 의장 겸직]

스웨덴 국립은행 이사회 의장을 겸직하여, 정부와 국립은행의 중요 직책을 동시에 수행한 첫 번째 인물이 되며 뛰어난 행정 능력을 입증했습니다.

1941년부터 1948년까지 함마르셸드는 정부의 임명으로 스웨덴 국립은행의 이사회 의장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그는 동시에 2가지 임무를 가지는 데 첫 사람이었습니다.

1945

[내각 고문으로 경제 회복 주도]

재정과 경제 문제에 대한 내각 고문이 되어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경제 문제 완화 계획을 조율했습니다.

1945년이 시작되면서 함마르셸드는 재정과 경제적 문제들에 내각으로 조언자가 되었습니다. 이 직위에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시기의 경제적 문제들을 완화하는 데 정부의 계획들을 조정했습니다.

1947

[외무부 임명 및 마셜 플랜 회의 참석]

스웨덴 외무부에 임명되어 경제 문제를 담당했고, 마셜 플랜을 설립한 파리 회의에 대표로 참석했습니다.

함마르셸드는 1947년 스웨덴 외무부로 임명되어 지속적으로 경제 문제들을 다루는 책임을 지었습니다. 또한 1947년 그는 마셜 플랜을 설립한 파리 회의에 대표였습니다.

1948

[경제 협력 개발 기구 회의 참석]

경제 협력 개발 기구 회의에 참석하며 유럽 경제 재건에 기여했습니다.

그는 1948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의 회의에 참석하러 다시 파리로 갔습니다.

1949

[외무부 국가 서기 임명]

외무부를 위한 국가 서기가 되며 스웨덴 외교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습니다.

1949년, 그는 외무부를 위한 국가 서기가 되었습니다.

1950

[UNISCAN 스웨덴 대표단 우두머리]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간의 경제 협력 증진을 위한 UNISCAN의 스웨덴 대표단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1950년 함마르셸드는 UNISCAN에 스웨덴 대표단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이 조직은 영국과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사이에 경제 협력을 흥행하는 목적을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1951

[무임소 장관 및 유엔 총회 부의장]

무임소 장관이자 사실상 외무부 부장관이 되었으며, 유엔 총회 6차 회의에서 스웨덴 대표단 부의장으로 국제 무대에서 활동했습니다.

다음해 그는 무임소 장관이 되어 본질적으로 외무부의 부장관이었습니다. 1951년 함마르셸드는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의 6차 정규 회의로 스웨덴 대표단의 부의장이 되었습니다.

1952

[유엔 총회 임시 대행 의장]

유엔 총회 7차 회의에 스웨덴 대표단의 임시 대행 의장이 되어 국제 외교 역량을 발휘했습니다.

그는 1952년 7차 유엔 총회에 스웨덴 대표단의 임시 대행 의장이 되었습니다.

1953

[제2대 유엔 사무총장 취임]

트뤼그베 리의 사임 이후 만장일치로 제2대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되어 국제 평화 유지의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되었습니다.

1953년 트뤼그베 리가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자신의 직위로부터 사임하였을 때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함마르셸드에게 놀라웠던 직위로 그를 추천하였습니다. 유엔 총회는 4월 7일부터 4월 10일까지 회의에서 만장일치로 그를 선출하였고, 그는 4월 10일 취임했습니다.

1954

[스웨덴 한림원 회원 선출]

노벨상 수상자를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부친의 비워진 의석을 차지하는 데 선출되었습니다.

1954년 12월 20일 함마르셸드는 스웨덴 한림원에서 부친의 비워진 의석을 차지하는 데 선출되었습니다. 스웨덴 한림원은 노벨상 수상자들을 선택하면서 맡아진 조직입니다.

1955

[한국 전쟁 미군 조종사 석방 협상]

한국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15명의 미군 조종사 석방을 위해 중화인민공화국과 직접 협상하여 성공적인 외교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955년 함마르셸드는 한국 전쟁에 복무하고 중공군에 의하여 사로 잡힌 15명의 미군 조종사들의 석방을 협상하러 중화인민공화국에 갔습니다.

1956

[유엔 긴급군 설립]

국제 평화 유지를 위한 유엔 긴급군을 설립하여 국제 안보에 중요한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56년 그는 유엔 긴급군을 설립하였습니다.

1957

[유엔 사무총장 재선 및 수에즈 위기 중재]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선되었고, 이듬해 수에즈 위기 중재를 통해 중동 평화 유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며 국제 분쟁 해결에 핵심적인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1957년 그는 유엔 사무총장으로 재선되었고 이듬해 수에즈 위기에 중재하였습니다.

1960

[콩고 내전 개입과 소련의 비난]

콩고민주공화국 내전 해체를 위한 유엔 원조를 진두지휘하며 아프리카 비식민지화를 지지했으나, 소련의 강력한 비난과 사임 요구에 직면했습니다.

1960년 새롭게 독립한 콩고민주공화국이 심화되는 내전을 해체하는 것에 유엔의 원조를 요청하자, 함마르셸드는 콩고로 4번의 여행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의 비식민지화를 향한 그의 노력들은 소련에 의하여 불충분한 것으로 숙고되었고, 9월 소련은 그의 결정을 비난하며 사임과 사무총장직의 대체를 요구했습니다.

1961

[콩고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 및 노벨 평화상 수상]

콩고 내전의 휴전 협상을 위해 이동 중 비행기 추락 사고로 사망했으나, 그의 헌신을 인정받아 사후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었습니다.

1961년 9월, 함마르셸드는 비전투 유엔군과 카탕가 주 군대들 사이에 싸움이 있었다는 것을 듣고 북로디지아(현재 잠비아)의 은돌라 근처에서 그의 비행기가 추락하였을 때 9월 17일 ~ 18일의 밤에 휴전을 협상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그와 다른 15명이 사망했습니다. 사망한지 얼마 안 되어 '인류와 국가들 중에 평화와 친설을 창조하는 데 그가 한 모든 감사함으로써, 그가 달성한 것으로서, 그가 싸운 것으로서' 1961년 11월 노벨 평화상이 수여되었습니다.

[다그 함마르셸드 도서관 봉헌]

유엔 본부 근처 맨해튼에 그의 이름을 딴 다그 함마르셸드 도서관이 봉헌되어 그의 업적을 기렸습니다.

조직으로 다그 함마르셸드의 서비스의 기념에 적절한 기념비를 세우는 데 욕망한 유엔은 함마르셸드의 이름을 딴 새로운 도서관으로 선출하였습니다. 도서관은 1961년 11월 16일 봉납되었습니다.

1963

[일기 묵상집 <길잡이> 출판]

그의 일기 묵상집인 <길잡이>가 출판되어 기독교 신비주의자로서의 내면을 드러내며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함마르셸드의 단 하나의 저서 <길잡이>는 1963년에 출판되었습니다. 그 책은 그가 20세였던 1925년에 시작되어 1961년 그의 사망에 끝나는 그의 일기 묵상들의 수집입니다. 함마르셸드는 일기의 항목들을 통하여 기독교 신비주의자로서 자신을 드러내며 자신의 외교 생활을 '내면의 여정'의 측면에서 묘사합니다.

1998

1998.8.19 사후 37년

[비행기 추락 사건 관련 정보부 연루 폭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진실·화해 위원회는 1961년 함마르셸드 비행기 추락 사건에 영국 MI5, 미국 CIA, 남아프리카공화국 정보부가 연루되었다는 편지들을 폭로했습니다.

1998년 8월 19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진실·화해 위원회의 의장 데스먼드 투투 대주교는 1961년 함마르셸드의 비행기의 추락 사건에 이전적으로 폭로된 편지들이 영국의 M15, 미국의 CIA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정보부를 연루시킨 것을 드러냈습니다.

2005

2005.7.29 사후 44년

[사망 원인에 대한 총상 증언 공개]

함마르셸드의 탄생 100주년 기념 인터뷰에서 노르웨이 소장 비에른 에게는 그의 이마에 총상이 있었고 사진이 수정되었다는 충격적인 증언을 했습니다.

2005년 7월 29일 함마르셸드의 탄생의 정확히 100년 후에 노르웨이의 소장 비에른 에게는 함마르셸드의 사망을 둘러싼 이벤트들에 신문 <아프텐포스텐>에게 인터뷰를 주었습니다. 시체를 보는 데 첫 유엔군 사관이었던 에게에 의하면 함마르셸드는 그의 이마에 구멍이 났고, 이 구멍은 시체를 찍은 사진들로부터 즉시 에어브러시로 수정되었다고 합니다. 에게에게 함마르셸드가 비행기로부터 던져져 그의 손에 잔디와 잎들은 그가 추락을 생존하여 잔해에서 출격해야 했던 것을 가리켰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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