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키 라우다
연표
1949
안드레아스 니콜라우스 '니키' 라우다(Andreas Nikolaus 'Niki' Lauda)가 오스트리아 빈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다수의 제지공장을 운영하는 자산가 한스 라우다였다.
1966
[레이서의 꿈을 품다]
뉘르부르크링 독일 그랑프리 관전을 계기로 레이서의 길을 결심했으나, 가업을 잇길 바랐던 가족의 반대에 부딪혔다.
1966년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독일 그랑프리를 관전한 것을 계기로 레이서로서의 길을 결심하지만, 가업을 잇길 바랐던 가족은 허락하지 않았다. 가족에게 비밀로 데뷔 레이스에 참전하여 2위를 차지하며 신문에 게재되어 가족이 알게 되었고, 할아버지의 레이스 금지령이 선고되었다. 다음 레이스에서 우승하자 가족과 의절하고 집을 나오게 되었다.
1971
[F1 데뷔]
맥스 모슬리가 대표로 있던 마치 엔지니어링 소속으로 F1에 데뷔했다. 데뷔는 할아버지의 반대로 은행에서 자신의 생명 보험을 담보로 대출받아 이루어졌다.
유럽 포뮬러 투 선수권 등에서 활약한 후 1971년 9월, 맥스 모슬리가 대표로 있던 마치 엔지니어링에서 포뮬러 원(F1)에 데뷔하였다. 데뷔 자금은 할아버지의 반대로 은행에서 자신의 생명 보험을 담보로 대출받아 마련했다. 라우다는 경주 전에 자신의 레이스 계획 및 향후 전망에 대해 기자회견을 하는 새로운 유형의 드라이버였다. 자금이 부족한 마치 팀은 팀 동료 로니 피터슨만 후원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1972
피터슨에 손색 없는 속도였지만 1972년, 마치는 갑작스럽게 니키 라우다를 해고했다.
1973
[페라리 이적 확정]
말보로-BRM 팀에 지참금을 내고 이적했다.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페라리를 리드하는 경주를 펼쳐 엔초 페라리의 눈에 띄었고, BRM 동료의 추천과 루카 코루데로 디 몬테제모로 감독의 제안으로 페라리 이적이 확정되었다.
위기에 처한 라우다는 말보로-BRM에 지참금을 가져가는 조건으로 1973년 시즌을 보장받았다. 모나코 그랑프리에서 페라리를 리드하는 경주를 펼쳐 엔초 페라리의 눈에 들었다. BRM 동료였던 클레이 레가조니의 추천도 한몫했다. 여름에는 1974년부터 페라리의 감독이 된 루카 코루데로 디 몬테제모로의 대타로서 라우다의 페라리 영입을 권유받았고, BRM과의 계약을 끝내고 페라리 이적이 확정되었다.
1974
[F1 첫 우승 및 폴 포지션]
스페인 그랑프리에서 폴투윈으로 F1 첫 승리를 장식했으며, 시즌 중반 드라이버 포인트 선두에 올랐다. 최다 9번의 폴 포지션을 획득했지만, 종반 리타이어로 타이틀을 놓쳤다.
1974년 남아공 그랑프리에서 처음으로 폴 포지션을 획득하였다. 같은 해 스페인 그랑프리에서는 폴투윈으로 첫 승리를 장식하였고, 시즌 중반에는 드라이버 포인트 선두로 올라섰다. 영국 그랑프리에서는 레이스 종료 직전 피트인했을 때, 관객 난입으로 코스에 복귀하지 못하고 5위가 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이 해에는 2승과 최다 아홉 번의 폴 포지션을 획득했지만, 종반에 5회 연속 리타이어를 기록해 타이틀을 놓쳤다.
1975
[첫 F1 월드 챔피언 등극]
페라리 312T 머신으로 5승 9 폴 포지션을 획득하며 월드 챔피언이 되었고, 페라리의 컨스트럭터 타이틀 획득에도 기여했다.
지속적인 테스트를 거듭한 끝에 페라리 312T가 개발되었다. 라우다는 5승 9 폴 포지션을 획득하며 속도와 안정된 주행으로 포인트를 모아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 또한 페라리 컨스트럭터 타이틀 획득에도 기여하였다. 감독 몬테제몰로, 엔지니어 마우로 포르기에리와의 관계도 양호하였으나, 몬테제몰로는 이 시즌에 감독직에서 물러나 피아트로 돌아갔다.
1976
[뉘르부르크링 대형 사고와 불사조의 귀환]
뉘르부르크링 독일 그랑프리에서 대형 사고를 당해 전신 70%에 달하는 심각한 화상과 유독 가스 흡입으로 사경을 헤맸다. 하지만 사고 6주 만에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복귀하여 '불사조'라는 별명을 얻었다.
봄에 결혼한 라우다는 10차전 끝에 5승을 거두며 포인트 선두를 달리고 있었다. 그러나 뉘르부르크링에서 열린 11차 독일 그랑프리에서 참극을 당하였다. 레이스 도중 베르켄베르크 바로 앞 코너에서 연석에 부딪혀 중심을 잃고 캐치 펜스를 뚫고 나온 바위와 충돌하였고, 발화된 머신은 서킷 한가운데에서 돌았다. 이때 브레트 런저의 서티즈 TS16과 충돌한 충격으로 라우다의 헬멧이 날아갔다. 미국 드라이버 가이 에드워드 등 5명이 목숨을 건 소화 및 구조 활동을 펼쳤다. 경기 전 비상회의에서 비에 젖은 서킷이 위험하다며 경주 중단을 호소한 라우다였다. 큰 화상 및 섬유 강화(FRP) 된 차체 화재의 유독 가스를 흡입하였기 때문에 전신 약 70%의 혈액을 교체하며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맸다. 그러나 중상의 고비를 넘기고, 라우다는 엄청난 속도로 회복하였다. 사고 발생 6주 후, 12차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복귀하며 4위로 서킷을 완주하였다. 오른쪽 얼굴과 귀에 화상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상태였다.
[타이틀 놓침과 엔초 페라리와의 불화]
최종전 일본 그랑프리에서 폭우로 인한 위험을 이유로 경주를 기권하여 제임스 헌트에게 월드 챔피언 타이틀을 내주었다. 이로 인해 엔초 페라리와의 관계가 틀어졌다.
타이틀 싸움은 최종전 1976년 포뮬러 원 월드 챔피언십 인 재팬에서 결정짓게 되었다. 이때 점수는 라우다가 단 3점을 리드하고 있었다. 후지 스피드웨이에서의 결승전은 서킷에 웅덩이가 생길 정도로 폭우가 쏟아졌다. 레이스 중지 소문이 돌았지만 경주는 강행되었고, 라우다는 단 두 바퀴를 천천히 달리고 너무 위험하다며 경주를 기권하였다. 한편 헌트는 레이스 중 많은 시간을 1위로 리드하다 타이어 문제로 피트 스톱을 한 후 3위로 입상해 1점으로 라우다를 꺾고 1976년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 엔초는 경주를 포기하고 왕좌를 내놓은 라우다를 비판했고, 빠르게 관계가 틀어졌다.
1977
[두 번째 F1 월드 챔피언 등극]
3승 2위 6회로 안정적인 주행을 선보이며 미국 그랑프리에서 두 번째 월드 챔피언을 확정했다. 하지만 페라리를 떠나 브라밤과 계약하며 팀을 옮겼다.
1977년 남아공 그랑프리에서 시즌 첫 승을 하고 팀 체제를 다시 자신 쪽으로 돌려놓는다. 3승과 2위 6회, 안전된 주행으로 15차 미국 그랑프리에서 두 번째 월드 챔피언을 확정지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경위에 따라 페라리를 떠나기로 결심한 라우다는 고든 머레이가 디자인한 브라밤 BT46에 매료되어 버니 에클레스턴과 사인하였다. 함께 이적을 희망한 메카닉이 해고된 것에 분노한 라우다는 미국 그랑프리 후 2차전을 남겨놓고 페라리를 떠났다.
1978
[라우다 항공 설립]
브라밤 소속으로 2승을 기록했으나 머신 신뢰성 문제로 종합 4위에 머물렀다. 이 해 라우다 항공을 설립하여 전세기 시장에 진출했다.
1978년 완주한 레이스는 2승과 2위 3회, 3위 2회 등으로 안정적이었지만, BT46은 라우다의 전망과는 달리 신뢰성이 낮아 총 16차전 중 6차전에서 머신 트러블을, 3차전에서 사고로 기권하는 등 종합 순위 4위에 머물렀다. 스웨덴 그랑프리에서는 BT46B로 우승했지만, 리어 엔드에 부착된 냉각팬이 공력 장치에 해당한다는 의견이 제시되어 다음 레이스부터 이 시스템 사용이 금지되었다. 이 해에 라우다는 라우다 항공을 설립하여 전세기 시장에 진출하였다.
1979
[F1 은퇴]
캐나다 그랑프리 예선 시작 전 F1 은퇴를 발표하며 '같은 장소(서킷)를 몇 번이나 돌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이후 라우다 항공 경영에 전념했다.
1979년 캐나다 그랑프리 예선 시작 전, 갑자기 은퇴를 발표하였다. 라우다는 "같은 장소(서킷)를 몇 번이나 돌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고 말하며, "피트에서 에클레스턴과 대화한 것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라고 설명하였다. 은퇴 후 라우다는 라우다 항공에 전념하였다.
1981
[F1 현역 복귀]
맥라렌의 론 데니스와 말보로의 초청으로 MP4/1 테스트에 참여한 후, 1982년부터 맥라렌 소속으로 F1 복귀를 발표했다.
1981년 시즌 종료 직전, 맥라렌의 론 데니스와 말보로로부터 도닝턴 파크에서 열린 MP4/1 테스트에 초대되었다. 11월, 1982년부터 맥라렌 소속으로 포뮬러 원에 참전하는 것이 발표되었고, 은퇴 2년 반 만에 복귀하였다. "2년간 모터 레이싱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았다. 1981년 오스트리아 그랑프리 때 문득 복귀를 생각했다."라고 라우다는 설명하였다. 복귀한 라우다의 헬멧은 라우다 항공 여객기의 꼬리와 같은 모양으로 디자인되어 있었다.
1982
[복귀 후 첫 승리]
복귀 후 3차 미국 웨스트 그랑프리에서 첫 승을 신고했으며, 영국 그랑프리를 포함해 총 2승을 올리며 종합 5위에 랭크되었다.
시즌 전, 레이디얼 타이어에 위화감이 있었지만 이전과 마찬가지로 테스트 주행으로 감각을 되찾아 갔다. 또한 뉘르부르크링에서의 사고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지원받은 트레이너와 체력 만들기를 하며 개막에 대비하였다. 3차 미국 웨스트 그랑프리에서 복귀 첫 승을 신고했고, 9차 영국 그랑프리를 포함해 2승을 올리며 5위에 랭크되었다.
1983
[머신 트러블과 새 엔진 투입]
총 15차전 중 7차전에서 머신 트러블로 기권하여 종합 10위에 올랐다.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는 TAG의 후원을 받아 포르쉐 터보 V6 엔진을 탑재한 MP4/1E를 투입했다.
총 15차전 중 7차전에서 머신 트러블로 기권하여 10위에 올랐다. 12차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는 TAG의 후원을 받아 포르쉐의 1.5리터 터보 V6 엔진을 탑재한 MP4/1E를 투입하였다.
1984
[세 번째 F1 월드 챔피언 등극 (최소 점수차)]
팀 동료 알랭 프로스트와 치열한 타이틀 경합을 벌여 0.5점 차이라는 역대 최소 점수 차이로 세 번째 월드 챔피언에 등극했다. 이는 폴 포지션 없이 월드 챔피언이 된 마지막 사례였다.
라우다는 르노 F1에서 이적한 알랭 프로스트와 타이틀 경합을 벌이게 되었다. 라우다는 5승, 프로스트는 7승으로, 예선에서도 프로스트가 라우다를 능가했지만, 결승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아 점수를 확실하게 쌓은 것은 라우다였다. 이 해의 5승에는 라우다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고향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의 우승도 포함되었다. 최종전 포르투갈 그랑프리까지 라우다와 프로스트의 경합은 이어졌지만, 2위를 차지한 라우다가 프로스트에 불과 0.5% 포인트 차이로 세 번째 월드 챔피언이 되었다. 맥라렌은 컨스트럭터 타이틀도 획득하였다. 라우다는 맥라렌에 있던 4시즌 동안 폴 포지션은 한 번이었지만, 폴 포지션을 한 번도 획득하지 못하고 월드 챔피언이 된 드라이버는 이 시즌의 라우다를 마지막으로 나오지 않았다.
1985
[F1 최종 은퇴]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포뮬러 원 은퇴를 발표했고,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시즌 유일한 승리를 거두며 F1 마지막 우승을 기록했다.
총 10차전 중 7차전을 기계적 문제로 기권하였다. 그 중 10차 오스트리아 그랑프리에서 포뮬러 원 은퇴를 발표하였다. 다음 1985년 네덜란드 그랑프리에서 시즌 유일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것이 라우다의 마지막 포뮬러 원 승리가 되었다. 이 그랑프리에서는 예선 10번 째로 스타트 했으며 종반에 프로스트의 추격을 교묘하게 차단, 0초 232 차이로 이겼다. 최종전 오스트레일리아 그랑프리에서는 잠시 1위 주행을 하기도 했지만, 브레이크 문제로 기권하였다.
1990
1990년대 초반, 페라리 어드바이저로 취임하였다.
1991
[라우다 항공 추락 사고 및 이혼]
라우다 항공의 보잉 767 항공기가 태국에서 추락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마를린과 이혼했다.
1991년 기체 설계 결함으로 태국에서 자사의 보잉 767 항공기가 추락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그 후 라우다 항공 경영권을 오스트리아 국영 항공사에 양도하였다. 같은 해 마를린과 이혼했다.
2002
2002년에는 바비 레이홀의 후임으로 재규어 자동차 팀 매니저가 되기도 했지만, 내부 인사의 혼란으로 단기 해임되었다.
2003
2003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붙인 저가 항공사 니키 항공을 설립하였다.
2005
2005년, 오스트리아 우체국에서 라우다의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2008
2008년 8월에 30세 연하의 전 라우다 항공 승무원 비르기트와 재혼하였다.
2009
2008년 8월에 30세 연하의 전 라우다 항공 승무원 비르기트와 재혼하였으며, 2009년 9월 16일에는 환갑의 나이에 맥스(Max)와 미아(Mia) 쌍둥이 남매의 아버지가 되었다.
2011
2011년 공동 투자자인 에어 베를린에 회사를 매각하고 에어 베를린의 사외이사로 취임하였다.
2012
[메르세데스-AMG 비상근 회장 취임]
에어 베를린 임원을 사임하고 메르세데스-AMG의 업무 집행 권한이 없는 비상근 회장으로 취임했다.
2012년 9월, 라우다는 에어 베를린의 임원을 사임하고 메르세데스-AMG에서 업무 집행 권한이 없는 비상근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2013
[영화 《러시: 더 라이벌》 개봉]
론 하워드 감독에 의해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의 1976년 F1 전투를 다룬 영화 《러시: 더 라이벌》이 개봉했으며, 라우다는 영화 마지막에 카메오로 출연했다.
2013년, 론 하워드 감독에 의해 라우다와 제임스 헌트의 1976년 F1 전투가 영화화된 《러시: 더 라이벌》이 개봉하였다. 영화에서는 라이벌로 묘사되었지만, 실제 라우다와 헌트는 포뮬러 쓰리 시절부터 친구 사이였다. 라우다는 영화 마지막에 카메오로 출연하였다.
2019
2019년 5월 20일, 니키 라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는 사망 전까지 메르세데스-AMG 페트로나스 F1 비상임 이사회의 의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