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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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혁 비교
니콜라이 게다(Nicolai Gedda)는 스웨덴 출신의 세계적인 오페라 테너로, 1951년 데뷔 이래 2003년 77세의 나이로 마지막 오페라 녹음을 남길 때까지 무려 50년이 넘는 길고 성공적인 경력을 쌓았습니다. 스웨덴어, 러시아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영어, 체코어, 라틴어 등 다국어에 능통하여 폭넓고 다양한 레퍼토리를 원어로 완벽하게 소화했으며, 약 200개 이상의 음반을 남겨 역사상 가장 많은 녹음을 남긴 오페라 가수 중 한 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름다운 음색, 뛰어난 성악적 통제력, 그리고 깊이 있는 음악성으로 20세기 오페라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스웨덴 궁정 가수 칭호,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 수많은 영예를 안았으며, 2017년 91세의 나이로 스위스에서 영면했습니다.
연표
1925
이후 성씨의 철자를 'Gädda'에서 'Gedda'로 변경했습니다. 돈 코사크 합창단에서 베이스로 활동하고 러시아 정교회 성가대장으로 일했던 양아버지 미하일 우스티노프와 이모 올가 예다 밑에서 자라며, 어린 시절부터 스웨덴어와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이중언어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1929
라이프치히에 머무는 동안 그는 5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도시 내 정교회에서 보컬 콰르텟의 일원으로 참여하는 등 남다른 음악적 재능의 싹을 보였습니다.
1934
[스웨덴 귀국 및 학업 수행]
가족과 함께 다시 스웨덴으로 돌아온 후 스톡홀름의 카타리나 중학교와 쇠드라 문법학교에 진학하여 학업을 이어갔습니다.학교 정규 과정을 통해 영어, 프랑스어, 라틴어를 익혔으며, 졸업 후에는 이탈리아어까지 독학으로 마스터하여 훗날 다국어 오페라를 소화할 수 있는 강력한 어학적 기반을 확립했습니다.
1950
[스톡홀름 왕립 음악원 및 오페라 학교 진학]
은행원으로 일하며 부모를 부양하던 중, 칼 마르틴 외만의 제자로 성악을 배우기 시작해 왕립 음악원과 오페라 학교에 진학했습니다.초기에는 스승인 외만이 그의 어려운 형편을 고려해 무료로 성악 지도를 해주었으나, 뛰어난 실력 향상 덕분에 장학금과 크리스틴 닐슨 상을 받게 되면서 정식으로 레슨비를 지불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52년까지 쿠르트 벤딕스와 라그나르 힐텐카발리우스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1951
[첫 오페라 데뷔]
스톡홀름의 스웨덴 왕립 오페라 극장에서 하인리히 주터마이스터의 오페라 '붉은 장화(Der rote Stiefel)' 초연 무대에 오르며 정식 데뷔했습니다.보컬 콰르텟의 일원으로서 비교적 작은 역할로 무대에 섰으나, 이 공연은 세계적인 테너로 성장할 그의 화려한 오페라 경력의 뜻깊은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1952
[첫 번째 레코딩 계약 체결]
저명한 프로듀서 월터 레그(Walter Legge) 앞에서 치른 오디션에서 탁월한 기량을 인정받아 음반사 'His Master's Voice'와 세 건의 음반 녹음 계약을 맺었습니다.오디션에서 '카르멘'의 꽃 노래를 감명 깊게 부른 그는 레그의 즉흥적인 요구(피아니시모, 랄렌탄도, 디미누엔도 등)를 완벽하게 수행해내며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 음반에 캐스팅되는 쾌거를 이루었습니다.
[첫 주연 데뷔 성공]
26세의 나이에 아돌프 아당의 오페라 '롱쥐모의 우부(Le postillon de Lonjumeau)'에서 샤플루 역을 맡아 첫 주연 데뷔를 성공적으로 치렀습니다.이 작품의 핵심 아리아인 '우부의 론도'는 가공할 만한 하이 D 음을 요구해 오페라 전체에서도 가장 어려운 테너 곡 중 하나로 꼽힙니다. 게다는 이 아리아를 훌륭하게 소화하여 단숨에 관객과 비평가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1953
[밀라노 라 스칼라 데뷔 및 첫 번째 결혼]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에서 돈 오타비오 역을 맡아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에 데뷔했습니다.이어서 카를 오르프의 '아프로디테의 승리(Trionfo di Afrodite)' 초연에서도 테너 솔리스트로 활약했습니다. 같은 해에 피아니스트 나딘 사푸노프 노바와 첫 번째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1954
[파리 오페라 데뷔]
장필립 라모의 오페라 '우아한 인도의 나라들(Les Indes galantes)'에서 다몽 역을 맡아 파리 오페라 무대에 처음 섰습니다.이후 그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베버의 '오베론', 모차르트의 '마술피리' 등에서 활약했습니다. 또한 같은 해에 영국 런던의 코번트 가든 로열 오페라 하우스에서도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 역으로 성공적인 데뷔를 마쳤습니다.
1957
[미국 및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데뷔]
피츠버그에서 구노의 '파우스트' 타이틀 롤로 미국 무대에 데뷔한 데 이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도 같은 배역으로 데뷔 무대를 장식했습니다.이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26년 동안 28개의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그는 구 메트로폴리탄 극장의 고별 갈라 무대에서 피날레를 장식한 뜻깊은 기록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참가]
조지 셀이 지휘한 롤프 리버만의 '아내들의 학교(Die Schule der Frauen)' 3막 버전 초연에서 오론테 역을 맡아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무대에 올랐습니다.이 무대에서 그는 서정적인 테너의 기량과 더불어 대중의 예상을 뛰어넘는 생동감 넘치는 연기력을 보여주며 오페라 가수로서의 다재다능함을 입증했습니다.
1958
[오페라 '바네사' 세계 초연]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열린 새뮤얼 바버의 오페라 '바네사(Vanessa)' 세계 초연 무대에서 아나톨 역을 맡아 새로운 역할을 창조했습니다.그는 기존의 클래식 레퍼토리뿐만 아니라 잔 카를로 메노티의 '마지막 야만인' 미국 초연에도 참여하는 등 현대 오페라 초연 무대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1961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파우스트' 주연]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샤를 구노의 대표작 '파우스트'의 타이틀 롤을 훌륭하게 소화했습니다.음악 전문지 '디아파종'은 그를 동세대 최고의 프랑스어권 테너로 극찬하며, 그의 빼어난 가창이 로시니의 '빌헬름 텔'이나 엑토르 베를리오즈의 작품 등 프랑스 그랜드 오페라의 부흥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습니다.
1965
[스웨덴 궁정 가수 칭호 수여 및 두 번째 결혼]
스웨덴 성악가에게 주어지는 최고 영예인 스웨덴 왕실 궁정 가수(Court Singer) 칭호를 수여받았습니다. 같은 해 아나스타샤 카라비오티스와 재혼했습니다.이 영예를 통해 스웨덴의 국보급 가수로 공식적인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스계 미국인인 두 번째 아내 아나스타샤 카라비오티스와는 1991년까지 부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1966
[스웨덴 왕립 음악 아카데미 회원 선출]
오페라 가수로서 거둔 뛰어난 성과를 바탕으로 스웨덴 왕립 음악 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궁정 가수 칭호에 이어 자국 음악 아카데미의 회원으로 추대됨으로써, 음악계 전반에 걸친 그의 지대한 공헌과 예술적 성취가 확고히 자리매김하게 되었습니다.
[바그너 오페라 '로엔그린' 출연]
스톡홀름 무대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의 타이틀 롤을 맡아 공연했습니다. 이는 그의 경력을 통틀어 유일한 바그너 배역이었습니다.비평가들은 그가 반주 없이 홀로 등장하는 1막에서부터 보여준 완벽한 음정과 리듬감이 청중에게 경이로울 만큼 아름다운 인상을 심어주었다고 극찬했습니다.
1968
[리테리스 에트 아르티부스 훈장 수훈]
문화와 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인물에게 스웨덴 왕실이 수여하는 '리테리스 에트 아르티부스(Litteris et Artibus)' 훈장을 받았습니다.이 훈장은 그가 세계 무대에서 스웨덴을 대표하는 테너로서 자국의 문화 예술적 위상을 크게 드높인 공로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1976
[음악 예술 진흥 금메달 수상]
스웨덴 왕립 음악 아카데미로부터 음악계에 크게 헌신한 이에게 주어지는 '음악 예술 진흥 금메달'을 수상했습니다.수많은 명반과 완벽한 다국어 구사 능력을 통해 성악계 전반에 미친 막대한 영향과 예술적 공헌을 다시 한번 기념하는 자리였습니다.
1977
[첫 회고록 출간]
훗날 그의 세 번째 아내가 되는 언론인 아이노 셀레르마르크의 도움을 받아 스웨덴어로 된 회고록 '선물은 공짜가 아니다(Gåvan är inte gratis)'를 출판했습니다.이 회고록은 1999년 'Nicolai Gedda: My Life and Art'라는 제목의 영어판으로도 출판되어 전 세계 팬들에게 그의 음악 철학과 생애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4
[런던 왕립 음악 아카데미 명예 회원 위촉]
런던에 위치한 왕립 음악 아카데미(Royal Academy of Music)의 명예 회원(Honorary Member)으로 추대되었습니다.그는 이곳에서 객원 교수로 초빙되어 자신이 쌓아온 방대한 언어적, 음악적 지식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며 교육자로서의 역량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1997
두 사람은 부부의 연을 맺은 후, 2017년 니콜라이 게다가 타계할 때까지 반려자로서 함께 여생을 보냈습니다.
2003
[마지막 오페라 녹음 수행]
77세의 고령의 나이로 모차르트의 오페라 '이도메네오'에서 대사제 역을 맡아 자신의 길었던 오페라 녹음 경력의 마지막을 장식했습니다.앞서 2001년 푸치니의 '투란도트'에서 알툼 황제 역을 녹음한 것에 이은 뜻깊은 발자취로, 매우 드물게 노년까지 성악가로서의 기량을 유지한 그의 경이로운 롱런을 대변합니다.
2010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니콜라 사르코지로부터 프랑스 정부가 수여하는 최고 권위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습니다.게다가 프랑스어 오페라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프랑스 음악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린 지대한 공로를 프랑스 정부 차원에서 최고의 예우로 보답한 순간이었습니다.
2017
[사망]
스위스 보 주의 톨로체나스(Tolochenaz)에 위치한 자택에서 심장 마비로 인해 91세의 나이로 영면에 들었습니다.그의 안타까운 타계 소식은 한 달 뒤인 2017년 2월 9일에 유족들에 의해 대중에게 공식적으로 알려졌습니다. 고인의 유해는 스웨덴 스톡홀름의 무명 기념 구역에 안장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