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나 시몬

num_of_likes 144
등록된 키워드의 연표를 비교해서 볼 수 있습니다!
?
연혁 비교
니나 시몬
가수, 피아니스트, 작곡가, 시민권 운동가 대중음악 가수/아이돌

은반 위의 고결한 사제, 니나 시몬은 재즈와 클래식, 블루스의 경계를 허물며 투쟁의 목소리를 건반에 실어 보낸 불세출의 예술가입니다. 가난한 목사의 딸 유니스 웨이먼으로 태어나 클래식 피아니스트를 꿈꿨으나, 인종차별이라는 벽에 부딪혀 밤무대의 가수가 되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절망 대신 '니나 시몬'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선택하고, 자신의 음악을 인권 운동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승화시켰습니다. 영혼을 울리는 음색과 치열했던 삶의 궤적은 오늘날까지도 자유와 평등을 갈구하는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전하고 있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33

[유니스 웨이먼의 탄생]

노스캐롤라이나주 트라이언에서 가난한 목사 어머니와 사업가 아버지 사이의 딸로 태어납니다. 여덟 남매 중 여섯 번째로 태어나 음악적 환경 속에서 성장합니다.

본명은 유니스 캐슬린 웨이먼(Eunice Kathleen Waymon)입니다.
어머니 메리 케이트 웨이먼은 감리교 평신도 목사였고, 아버지는 수공업자이자 한때 유흥업소를 운영했던 존 디바인 웨이먼이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가 봉직하는 교회에서 음악을 접하며 감수성을 키웠습니다.

1936

[피아노와의 첫 만남]

세 살 무렵부터 독학으로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며 천재적인 재능을 드러냅니다. 악보를 보지 않고도 교회 찬송가를 연주하며 주변을 놀라게 합니다.

별다른 교육 없이도 귀로 들은 멜로디를 건반으로 옮기는 절대음감을 보여주었습니다.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찬송가를 반주하며 실력을 쌓았습니다.
이 시기 형성된 복음성가적 기초는 훗날 그녀의 음악적 정체성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1939

[후원자들의 도움]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지역 인사들의 후원으로 본격적인 클래식 피아노 교육을 받기 시작합니다. 인종차별이 심했던 당시 사회 분위기 속에서도 음악적 꿈을 키워나갑니다.

유니스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고용주와 지역 사회 구성원들이 '웨이먼 장학 기금'을 조성했습니다.
이를 통해 영국인 피아노 교사 뮤리엘 마자노비치에게 지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교육을 통해 바흐, 베토벤, 브람스 등 정통 클래식 음악의 기초를 완벽하게 다졌습니다.

1945

[첫 리사이틀의 저항]

열두 살의 나이에 열린 첫 피아노 리사이틀에서 부모님이 뒷좌석으로 밀려나자 연주를 거부합니다. 어린 나이에 인종차별의 부조리를 직접 목격하고 행동으로 맞섭니다.

지역 도서관에서 열린 리사이틀에서 백인 관객들을 위해 부모님이 맨 앞줄에서 쫓겨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녀는 부모님이 다시 앞자리로 돌아오지 않으면 연주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버텼습니다.
이 사건은 그녀의 삶 전체를 관통하는 인권 투쟁의 서막이 되었습니다.

1950

[앨런 고등학교 졸업]

애슈빌에 있는 앨런 여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며 장학생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합니다. 졸업생 대표인 발레딕토리안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학업 성적이 매우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음악적 성취도 독보적이었습니다.
졸업 후 더 큰 무대에서 공부하기 위해 뉴욕행을 결심하게 됩니다.
지역 사회는 그녀가 아프리카계 미국인 최초의 클래식 피아니스트가 되기를 기대하며 지지했습니다.

[줄리어드에서의 여름]

뉴욕 줄리어드 음대에서 여름 학기를 수강하며 커티스 음악원 입학을 준비합니다. 세계적인 교수진 밑에서 클래식 연주자로서의 기량을 가다듬습니다.

칼 프리드버그 교수에게 사사하며 커티스 입학 시험을 준비했습니다.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피아노 레슨과 반주 일을 병행하는 고단한 일상을 보냈습니다.
뉴욕이라는 대도시의 문화적 자극을 받으며 예술적 지평을 넓혔습니다.

1951

[커티스 음악원 탈락]

필라델피아의 명문 커티스 음악원 입학 시험에서 낙방하는 시련을 겪습니다. 그녀는 이 결과가 자신의 실력 부족이 아닌 인종차별 때문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커티스 음악원의 거절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큰 상처 중 하나로 남았습니다.
당시 학교 측은 정원이 찼다고 변명했으나, 그녀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배제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이 좌절은 그녀가 클래식 연주자라는 꿈을 포기하고 대중음악으로 눈을 돌리게 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2

[필라델피아에서의 정착]

커티스 음악원 근처로 이주하여 개인 레슨을 받으며 재도전을 꿈꿉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진 스튜디오에서 일하거나 학생들을 가르칩니다.

입학을 거절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음악적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블라디미르 소콜로프에게 개인 지도를 받으며 음악 이론과 실기를 연마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어려움이 지속되면서 점차 현실적인 선택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1954

[미드타운 바의 데뷔]

뉴저지 애틀랜틱시티의 바에서 연주를 시작하며 생계를 도모합니다. 클럽 주인이 노래를 부르지 않으면 고용하지 않겠다고 요구하자 처음으로 가창을 시작합니다.

본래 피아노 연주만을 원했으나 주인의 요구로 노래를 부르게 되었고, 이것이 전설적인 가창력의 발견으로 이어졌습니다.
밤무대 연주를 시작하면서 그녀의 독특한 음색과 클래식적 피아노 기교가 결합된 독보적인 스타일이 형성되었습니다.
이곳에서의 경험은 그녀를 클래식 연주자에서 엔터테이너로 변화시켰습니다.

[니나 시몬의 탄생]

어머니 몰래 클럽에서 노래하기 위해 '니나 시몬'이라는 가명을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스페인어로 '어린 소녀'와 프랑스 배우 시몬 시뇨레의 이름을 합친 것입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가 세속적인 '악마의 음악'을 하는 것을 알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니나'는 당시 남자친구가 지어준 애칭이었고, '시몬'은 동경하던 배우의 성을 따왔습니다.
이 이름은 곧 전 세계가 기억하게 될 위대한 예술가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1957

[베들레헴 레코드 계약]

뉴욕의 소규모 레이블인 베들레헴 레코드와 첫 음반 계약을 체결합니다. 하지만 불리한 조건의 계약으로 인해 훗날 막대한 금전적 손실을 보게 됩니다.

단돈 3,000달러에 모든 권리를 넘기는 불공정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로 인해 그녀의 초기 명곡들이 엄청난 수익을 올릴 때 정작 본인은 정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음반 산업의 구조적인 불합리함에 분노하게 된 배경이 됩니다.

1958

[돈 로스와의 결혼]

바에서 만난 비트닉 작가 돈 로스와 첫 번째 결혼을 올립니다. 그러나 성격 차이와 가치관의 대립으로 인해 결혼 생활은 1년 만에 파경을 맞습니다.

돈 로스와의 결혼은 그녀의 정서적 불안과 고립감을 해소해주지 못했습니다.
예술가로서의 자아와 가정 내에서의 역할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습니다.
결국 1959년에 이혼하며 홀로서기를 선택합니다.

[첫 앨범 발매]

데뷔 앨범 'Little Girl Blue'를 발표하며 음악계에 신선한 충격을 줍니다. 재즈, 클래식, 팝이 정교하게 섞인 그녀만의 스타일이 대중에게 각인됩니다.

이 앨범에는 바흐 스타일의 대위법이 가미된 'Love Me or Leave Me'와 같은 혁신적인 트랙들이 포함되었습니다.
평론가들은 그녀를 '재즈의 새로운 여사제'라고 칭송하기 시작했습니다.
대중적인 인기와 평단의 인정을 동시에 받으며 성공적인 데뷔를 치렀습니다.

1959

[포기(Porgy)의 히트]

조지 거슈윈의 오페라 곡인 'I Loves You, Porgy'를 리메이크하여 큰 성공을 거둡니다. 이 곡은 빌보드 차트 20위권 내에 진입하며 그녀의 유일한 상위권 히트곡이 됩니다.

빌리 홀리데이의 연주에 영감을 받아 녹음한 이 곡은 니나 시몬만의 처연하고 깊은 감성으로 재해석되었습니다.
이 곡의 성공으로 그녀는 뉴욕의 주요 클럽과 콘서트 홀에서 초청받는 스타가 되었습니다.
대중적인 인지도가 급격히 상승하며 커리어의 정점에 다가섭니다.

[콜픽스 레코드 이적]

더 큰 규모의 콜픽스 레코드로 적을 옮기며 예술적 전권을 보장받습니다. 창의적인 자유를 바탕으로 다양한 장르의 실험적인 곡들을 녹음합니다.

콜픽스 레코드와의 계약 조건에는 곡 선정과 편곡에 대한 그녀의 절대적인 권한이 명시되었습니다.
이 시기 'Nina Simone at Town Hall' 등 뛰어난 라이브 앨범들을 남겼습니다.
그녀는 특정 장르에 갇히기를 거부하며 'Black Classical Music'이라는 용어를 선호했습니다.

1960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전통 있는 뉴포트 재즈 페스티벌 무대에 올라 관객들을 압도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입니다. 라이브 공연의 강자로서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됩니다.

당시 실황은 앨범으로도 발매되어 평론가들로부터 극찬을 받았습니다.
무대 위에서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배력과 즉흥 연주는 독보적이었습니다.
이후 수많은 국제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활약하게 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1961

[앤드류 스트라우드와 재혼]

뉴욕 경찰 형사 출신인 앤드류 스트라우드와 결혼하며 안정을 찾는 듯 보입니다. 스트라우드는 곧 그녀의 매니저가 되어 경력을 체계적으로 관리하기 시작합니다.

스트라우드의 강력한 관리 덕분에 경제적인 수익은 개선되었으나, 결혼 생활은 폭력과 억압으로 얼룩졌습니다.
그는 니나의 예술적 감수성보다는 상업적 성공에 치중하는 경향을 보였습니다.
훗날 니나는 그와의 생활이 감옥 같았다고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1962

[딸 리사의 탄생]

외딸 리사 시몬 셀레스트 스트라우드를 출산하며 어머니가 되는 기쁨을 누립니다. 음악 활동 중에도 딸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쏟습니다.

바쁜 순회 공연 일정 속에서도 딸을 양육하려 노력했으나 정서적인 기복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기도 했습니다.
리사 시몬은 훗날 어머니의 뒤를 이어 가수이자 배우로 활동하며 어머니의 명성을 기리는 활동을 이어갑니다.
니나에게 가족은 고통과 사랑이 공존하는 복잡한 존재였습니다.

1964

[필립스 레코드 이적]

네덜란드 레이블인 필립스 레코드로 소속을 옮기며 음악적 주제를 사회 문제로 확장합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부터 그녀의 음악은 단순한 사랑 노래를 넘어 사회적 항거의 메시지를 담게 됩니다.
필립스 시절은 그녀의 가장 창의적이고 강력한 명곡들이 쏟아져 나온 황금기입니다.
인종차별에 대한 노골적인 비판을 가사로 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미시시피 갓댐 발표]

메드가 에버스의 암살과 교회 폭탄 테러에 분노하여 노래를 작곡해 발표합니다. 이 곡은 시민권 운동의 상징적인 찬가가 됩니다.

앨라배마주 버밍엄 교회에서 네 명의 흑인 소녀가 목숨을 잃은 사건에 큰 충격을 받고 단숨에 써 내려간 곡입니다.
남부의 인종차별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가사 때문에 일부 방송국에서는 음반을 파기하거나 방송을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녀가 순수 예술가에서 투쟁가로 변모한 결정적 사건이었습니다.

[타운 홀 공연]

뉴욕 타운 홀에서 역사적인 라이브 공연을 개최하며 관객들에게 전율을 선사합니다. 이 실황은 앨범으로 발매되어 큰 반향을 일으킵니다.

이 공연에서 처음으로 'Mississippi Goddam'을 대중 앞에 선보였습니다.
단순한 음악 공연을 넘어 흑인 인권에 대한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집회와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습니다.
그녀의 무대 매너는 더욱 단호해졌고 목소리는 깊은 분노와 희망을 동시에 담았습니다.

1965

[파스텔 블루스 발매]

명반 'Pastel Blues'를 통해 블루스의 정수를 보여주며 음악적 성취를 이어갑니다. 10분이 넘는 대작 'Sinnerman'이 수록되어 전 세계적인 찬사를 받습니다.

복음성가의 에너지를 블루스와 결합한 'Sinnerman'은 그녀의 편곡 능력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증명했습니다.
앨범 전반에 걸쳐 흑인의 고통과 회한을 처절하면서도 아름답게 묘사했습니다.
이 앨범은 훗날 수많은 힙합과 일렉트로닉 아티스트들에 의해 샘플링되는 고전이 되었습니다.

[셀마 행진 참여]

인권 운동의 분수령이 된 셀마-몽고메리 행진에 직접 참여하여 투쟁의 현장을 지킵니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와 함께 행동하며 예술가의 사회적 책임을 다합니다.

행진 도중 열린 콘서트에서 군중들을 위해 노래하며 사기를 북돋웠습니다.
그녀는 평화적인 비폭력 노선을 주장하는 킹 목사와 달리, 보다 급진적이고 강력한 대응을 지지하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그녀는 스토클리 카마이클 등 흑표당 지도자들과도 긴밀히 교류했습니다.

1966

[서정적 표현의 정점]

앨범 'Wild Is the Wind'를 발표하며 서정적이고 드라마틱한 표현력의 정점을 보여줍니다. 타이틀곡은 그녀의 가장 아름다운 발라드 중 하나로 꼽힙니다.

쟈니 마티스의 곡을 리메이크한 타이틀곡은 데이비드 보위 등 후배 가수들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Four Women'이라는 곡을 통해 흑인 여성이 겪는 다층적인 차별과 정체성을 직설적으로 노래해 큰 논란과 공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습니다.
음악을 통해 흑인 여성의 목소리를 대변한 선구적 시도였습니다.

1967

[RCA 빅터 계약]

대형 레이블인 RCA 빅터로 이적하며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적인 시기를 맞이합니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 명곡들이 이 시기에 쏟아져 나옵니다.

RCA 시절은 그녀의 음악이 팝적인 요소와 결합하여 대중에게 가장 친숙하게 다가간 때였습니다.
'Ain't Got No, I Got Life'와 같은 뮤지컬 곡의 재해석으로 차트 상위권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의 심장에는 인권에 대한 열망이 불타오르고 있었습니다.

1968

[킹 목사 추모 공연]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 사흘 뒤 그를 추모하는 연주를 선보입니다. 비통함에 젖은 흑인 사회를 음악으로 위로합니다.

그녀의 베이스 연주자 진 테일러가 암살 소식을 듣고 급히 쓴 곡 'Why? (The King of Love Is Dead)'를 연주했습니다.
공연 내내 흐느끼는 듯한 가창과 연주로 킹 목사의 죽음이 가져온 허망함과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이 실황 녹음은 시대의 비극을 기록한 가장 가슴 아픈 음악적 문서로 남았습니다.

1969

[자부심의 찬가 발표]

친구 로레인 핸즈버리의 유작에서 영감을 얻은 'To Be Young, Gifted and Black'을 발표합니다. 흑인 청년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는 국가와 같은 곡이 됩니다.

이 곡은 인종차별에 위축된 흑인 아이들에게 너희는 아름답고 재능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발표 직후 흑인 인권 운동의 비공식적인 애국가로 받아들여졌습니다.
훗날 아레사 프랭클린 등 수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하며 그 가치를 증명했습니다.

1970

[미국을 떠나는 망명]

심각한 인종차별과 세무 당국과의 갈등을 느끼고 미국을 떠납니다. 자유를 찾아 정처 없는 국외 망명 생활을 시작합니다.

당시 그녀는 FBI의 감시 대상이었으며, 자신의 수익이 베트남전쟁에 사용되는 것을 반대하며 세금 납부를 거부했습니다.
남편 앤드류 스트라우드와도 결별하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이후 바베이도스, 라이베리아, 스위스 등을 전전하며 안식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1971

[바베이도스의 평화]

카리브해의 바베이도스에 정착하여 한동안 평화로운 시간을 보냅니다. 그곳에서 총리 에롤 배로와 인연을 맺기도 합니다.

미국의 압박에서 벗어나 자연 속에서 치유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음악 활동보다는 개인적인 삶에 집중하며 정서적 안정을 꾀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정신적 고뇌와 우울증이 그녀를 따라다녔습니다.

1974

[라이베리아 이주]

가수 미리암 마케바의 권유로 아프리카 라이베리아로 거처를 옮깁니다. 조상의 땅에서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며 한동안 음악을 멈춥니다.

라이베리아에서의 삶은 그녀가 평생 갈망하던 '흑인이 주인이 되는 세상'을 직접 체험하는 시기였습니다.
딸 리사와 함께 지내며 평범한 삶을 꿈꿨으나, 경제적 여건이 악화되면서 다시 유럽 무대로 복귀를 고민하게 됩니다.
이 시기 그녀는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회고했습니다.

1976

[몽트뢰 무대 복귀]

스위스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 무대를 통해 화려하게 복귀합니다. 다소 불안정하지만 강렬한 감정이 담긴 이 공연은 전설적인 실황으로 기록됩니다.

수년간의 공백 끝에 선 무대에서 그녀는 관객들에게 호통을 치거나 갑자기 연주를 멈추는 등 기이한 행동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조울증 증세가 심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음악적 깊이만큼은 여전하여 관객들을 매료시켰습니다.

1978

[볼티모어 앨범 발표]

오랜만에 스튜디오로 복귀하여 새로운 앨범을 발표합니다. 세련된 편곡과 그녀의 성숙한 목소리가 어우러진 수작으로 평가받습니다.

랜디 뉴먼의 곡을 리메이크한 타이틀곡 'Baltimore'는 레게 리듬을 차용하여 현대적인 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음반 제작 과정에서 프로듀서와의 갈등으로 완성된 결과물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대중에게는 다시금 니나 시몬의 존재를 각인시킨 앨범이었습니다.

1979

[제네바 정착]

라이베리아 생활을 정리하고 스위스 제네바로 거처를 옮깁니다. 유럽 시장을 중심으로 활동을 재개하며 다시 피아노 건반 앞에 앉습니다.

경제적 빈곤을 타개하기 위해 작은 클럽 공연부터 다시 시작했습니다.
스위스에서의 생활은 다소 고립되어 있었으나 꾸준히 음악 작업을 이어가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이곳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인종차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투쟁적인 자세를 유지했습니다.

1980

[조울증 진단]

오랫동안 고통받아온 정서적 기복의 원인이 조울증임을 진단받습니다. 이후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안정을 찾으려 노력합니다.

수십 년간 이어진 폭발적인 분노와 깊은 우울이 질환의 증상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리튬 등의 약물을 복용하기 시작하면서 무대 위의 기행이 줄어들고 일상이 다소 안정되었습니다.
질환과 싸우면서도 그녀의 음악은 더욱 처절하고 깊어졌습니다.

1982

[자전적 앨범 제작]

프랑스 레이블에서 자신의 내면을 담은 앨범을 발표합니다. 아버지와의 관계와 방황을 담은 가장 개인적인 기록입니다.

앨범 'Fodder on My Wings'의 대부분의 곡을 직접 작사, 작곡하여 자신의 내면을 여과 없이 드러냈습니다.
라이베리아에서의 추억과 고독, 상처받은 자아를 노래한 곡들이 담겨 있습니다.
니나 시몬 자신이 가장 아끼는 앨범 중 하나로 꼽을 만큼 진정성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1987

[차트 역주행 히트]

유명 향수 광고에 쓰인 초기 곡이 유럽 차트를 휩씁니다. 수십 년 전의 노래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합니다.

'My Baby Just Cares for Me'가 영국 차트 5위까지 오르며 젊은 세대에게 그녀의 음악이 재발견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초기 계약의 독소 조항 때문에 이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돌아온 수입은 거의 없었습니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은 그녀에게 다시 한번 음악계에 대한 냉소를 불러왔습니다.

1988

[네덜란드 니메헨 이주]

네덜란드의 니메헨으로 거처를 옮겨 현지 음악가들과 협업합니다. 조용하고 안정적인 환경에서 말년의 창작 활동에 집중합니다.

네덜란드 팬들의 따뜻한 환대 속에서 건강을 회복하고 순회 공연을 준비했습니다.
현지 조력자들의 도움으로 복잡한 세금 문제와 법적 분쟁들을 하나씩 정리해 나갔습니다.
니나의 삶에서 보기 드문 평온한 시기였습니다.

1991

[자서전 출간]

자신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기록한 자서전 'I Put a Spell on You'를 출간합니다. 그동안 감춰왔던 상처와 투쟁의 비화를 공개합니다.

스티븐 클리어리와 함께 집필한 이 책은 그녀의 거친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솔직함으로 화제를 모았습니다.
커티스 음악원의 탈락부터 인권 운동, 해외 방황기까지를 상세히 담았습니다.
이 자서전은 그녀에 대한 대중의 오해를 풀고 예술가적 고뇌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습니다.

1993

[마지막 정규 앨범]

생전 마지막 스튜디오 앨범인 'A Single Woman'을 발표합니다. 고독한 여인의 내면을 담은 성숙한 음악을 선보입니다.

대규모 오케스트라 편곡과 함께 그녀의 차분하고 깊은 음색이 조화를 이룬 앨범입니다.
제목처럼 홀로 살아가는 여성으로서의 자아와 지나간 삶에 대한 회한을 노래했습니다.
이 앨범을 끝으로 그녀는 더 이상의 스튜디오 녹음을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 남부 안착]

프랑스 마르세유 근처의 작은 마을에 영구 정착합니다. 지중해의 따뜻한 햇살 아래서 여생을 보낼 마지막 안식처를 마련합니다.

프랑스는 그녀를 '위대한 예술가'로 대우하며 존경을 표했습니다.
이곳에서 그녀는 친구들과 교류하며 가끔 유럽 순회 공연을 나가는 식의 여유로운 삶을 즐겼습니다.
비로소 미국에서의 상처에서 벗어나 진정한 평화를 누리는 듯 보였습니다.

[명예 박사 학위 수여]

미국 대학에서 음악과 인문학 부문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습니다. 평생 갈구했던 학문적 성취와 예술적 공로를 인정받는 순간이었습니다.

애머스트 매사추세츠 대학에서 수여한 이 학위는 그녀에게 남다른 의미를 가졌습니다.
제도권 교육 기관이 그녀의 음악적 독창성과 사회적 기여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입니다.
수여식에서 그녀는 감격 어린 소감을 전하며 예술의 힘을 역설했습니다.

1999

[더블린 명예 상]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음악적 성취를 기리는 명예로운 상을 수여받습니다. 유럽 무대에서의 끊임없는 영향력을 다시 한번 확인합니다.

더블린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여하는 이 명예는 세계적인 거장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몸이 불편한 상황에서도 직접 행사에 참석하여 감사를 표했습니다.
유럽은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가장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주었습니다.

2000

[그래미 헌액]

그녀의 대표곡들이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불멸의 가치를 인정받습니다. 평생 그래미 상과 인연이 없었던 그녀에게 뒤늦은 보상이 주어집니다.

주류 음악 산업의 외면을 받았던 그녀의 음악들이 역사적 기록물로 공식 보존되게 되었습니다.
비록 전성기 시절에는 수상하지 못했지만, 후대의 음악가들이 그녀의 업적을 기리는 데 앞장섰습니다.
이 헌액은 그녀의 음악이 시대를 초월한 고전임을 확증했습니다.

2003

[52년 만의 사과]

사망 이틀 전, 자신을 거절했던 커티스 음악원으로부터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받습니다. 반세기 만에 이루어진 학교 측의 사과였습니다.

1951년 인종차별적 이유로 입학을 불허했던 커티스 음악원이 뒤늦게 그녀의 천재성을 인정했습니다.
니나는 병석에서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평생의 한을 풀고 생의 마지막 순간을 평화롭게 맞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설의 작별]

프랑스 자택에서 투병 끝에 향년 7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둡니다. 전 세계 음악계와 인권 단체는 위대한 별의 퇴장을 애도합니다.

잠을 자는 동안 평화롭게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에는 미리암 마케바, 패티 라벨 등 동료 예술가들이 참석하여 그녀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습니다.
유해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화장되어 여러 아프리카 국가의 땅에 뿌려졌습니다.

2018

2018.4.14 사후 15년

[명예의 전당 입성]

사후 15년 만에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거장으로 우뚝 섭니다. 그녀의 음악적 영향력이 여전히 유효함을 증명합니다.

메리 J. 블라이지가 헌사 문을 읽으며 그녀의 삶과 음악이 후배 여성 아티스트들에게 미친 영향을 강조했습니다.
장르를 규정할 수 없었던 그녀의 예술 세계가 '로큰롤'이라는 범주조차 뛰어넘어 인정받은 것입니다.
이로써 니나 시몬은 현대 음악의 가장 중요한 뿌리 중 하나로 영원히 기록되었습니다.

비교 연혁 검색
search
키워드 중복 확인
close
니나 시몬
+ 사건추가
이전 다음 위로 이동 아래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