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양키스
뉴욕 양키스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팀으로, 27번의 월드시리즈 우승과 40번의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기록했습니다. '브롱크스 폭격기'라는 별명처럼 막강한 공격력과 투수력을 자랑하며, 베이브 루스, 루 게릭, 조 디마지오 등 수많은 전설적인 선수들을 배출했습니다. 막강한 자금력으로 우수 선수를 영입하고 팜 시스템을 강화하여 끊임없이 강팀의 면모를 유지하며,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스포츠 구단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치열한 라이벌리로도 유명합니다.
연표
1901
[볼티모어 오리올스 창단]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라는 이름으로 팀이 창단되었습니다. 이 팀은 현재의 볼티모어 오리올스와는 다른 초기 아메리칸 리그 프랜차이즈 중 하나였습니다.
1900년 말 웨스턴 리그의 수장 밴 존슨이 동부의 세 도시를 추가하여 리그를 아메리칸 리그로 재조직했습니다. 뉴욕에 팀을 추가하려던 계획은 내셔널 리그의 뉴욕 자이언츠의 정치적 압력으로 무산되었고, 대신 메릴랜드주 볼티모어에 팀을 창설하여 '오리올스'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습니다.
[존 맥그로 감독 부임 및 이탈]
존 맥그로가 감독으로 부임하여 1901년부터 팀을 이끌었으나, 거친 플레이에 대한 통제 강화에 불만을 품고 뉴욕 자이언츠로 비밀리에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로 인해 오리올스 선수들의 유출이 발생했습니다.
존 맥그로가 감독으로 1901년부터 경기를 치렀으나, 1902년 시즌 중 리그 회장 존슨이 경기장 내 거친 플레이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맥그로는 불만을 품고 비밀리에 뉴욕 자이언츠로 옮겨갔습니다. 자이언츠는 맥그로를 통해 오리올스의 지배지분을 확보하여 선수들을 유출시켰습니다.
1903
[힐탑 파크를 새 홈구장으로 사용]
뉴욕으로 연고지를 옮긴 하이랜더스는 맨해튼 165번가와 브로드웨이 모퉁이에 '힐탑 파크'를 홈구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장이 고지대에 있다는 점에서 '하이랜더스'라는 별명이 생겼습니다.
뉴욕으로 연고지를 옮긴 뒤의 첫 근거지는 맨해튼 섬에서 가장 높은 지대 중 하나인 165번가와 브로드웨이 모퉁이에 세워졌습니다. 구장이 고지대(High Land)에 있다는 것과 회장의 이름이 조셉 고든이라는 것에서, 사람들은 영국 보병 부대의 명칭인 고든 하이랜더스를 떠올렸고, 여기에서 하이랜더스라는 이름이 탄생했습니다. 언론과 사람들에게서 널리 불리던 이 명칭이 공식적으로 채택됐는지에 대한 증거는 없으며, 유니폼에는 검은색의 N과 Y만이 있었습니다. 힐탑 파크도 정식 명칭은 '아메리칸 리그 파크'였으나 근처의 폴로 그라운드보다 높은 데 있는데다 팀 이름도 하이랜더스로 불리자 사람들이 붙인 별명이었습니다.
[뉴욕 하이랜더스로 뉴욕 이전]
아메리칸 리그 팀의 뉴욕 입성이 승인되면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는 뉴욕으로 연고지를 옮기고 '뉴욕 하이랜더스'로 팀 명칭을 변경했습니다.
1903년 1월, 분쟁 해결과 공존을 위한 '평화협상'에서 아메리칸 리그 팀의 뉴욕 입성이 승인되었습니다. 오리올스의 새 구단주인 프랭크 J. 파렐과 윌리엄 S. 데버리는 뉴욕 자이언츠의 방해를 받지 않는 위치에 새 구장을 건립하여 뉴욕으로 이전하고 팀 명칭을 '뉴욕 하이랜더스'로 바꾸었습니다.
1904
[월드시리즈 진출 좌절과 '마이너급' 팀 논란]
하이랜더스는 페넌트레이스 우승에 가까이 다가섰으나, 아메리칸 리그 최종전에서 보스턴 아메리칸즈(현 레드삭스)에 패배하여 월드시리즈 진출이 무산되었습니다.
하이랜더스가 페넌트레이스 우승에 가장 가까이 다가간 때는 1904년 시즌이었습니다. 시즌 내내 하이랜더스가 좋은 성적을 거두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구단주는 "만약 하이랜더스같은 '마이너급'의 팀이 월드 시리즈에 진출한다면 시합을 하지 않겠다"라고 공언하기도 했습니다. 아메리칸 리그의 우승 팀을 결정하기 위한 최종전에서 하이랜더스와 보스턴 아메리칸즈(1908년에 레드삭스로 개명)가 만났고, 하이랜더스의 투수 잭 체스브로의 끝내기 폭투로 아메리칸즈가 우승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이언츠는 시합을 거부해, 그 해의 월드시리즈는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않은 해는 이때와 선수노조가 파업한 1994년의 2회뿐입니다.
1911
[폴로 그라운드 화재, 자이언츠에 홈구장 제공]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 구장인 폴로 그라운드에 화재가 발생하자, 하이랜더스가 힐탑 파크를 임시 홈구장으로 제공하며 두 팀 간의 관계가 개선되었습니다.
1911년에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홈 구장 폴로 그라운드에 화재가 일어나서 구장 사용이 어려울 때, 하이랜더스가 힐탑 파크를 제공함으로써 두 팀 간에 화해 분위기가 생겼습니다.
1913
[폴로 그라운드로 이전 및 뉴욕 양키스로 개명]
새롭게 지어진 폴로 그라운드로 홈구장을 옮겼으며, '하이랜더스'라는 명칭이 맞지 않게 되자 언론에서 사용하던 별명 '양키스'를 공식 팀 명칭으로 채택했습니다.
1913년 폴로 그라운드가 새로 지어지자 하이랜더스는 홈 구장을 옮겨 뉴욕 자이언츠와 공동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저지대로 옮겨온 이후 '하이랜더스'라는 명칭이 맞지 않게 되자 언론들은 대체할 다른 명칭을 찾게 되었습니다. 1904년 초 뉴욕 프레스의 스포츠국장 짐 프라이스가 양키스(Yankees 혹은 Yanks)라는 별명을 만들어 붙였는데 헤드라인에 쓰기 편하다는 이유였습니다. 이 단어는 점차 널리 퍼지면서 1910년대에는 이미 많은 언론들이 쓰고 있었고, 결국 언론들이 붙여준 애칭은 공식적인 팀 명칭이 되었습니다.
1915
[제이콥 루퍼트 구단주 인수]
자금난에 빠진 공동 구단주 파렐과 데버리로부터 제이콥 루퍼트 대령과 틸링해스트 롬므디으 휴스턴 대위가 125만 달러에 구단을 인수했습니다. 루퍼트는 막대한 재력과 의지로 팀의 전성기를 이끌게 됩니다.
1910년대 중반, 공동 구단주인 파렐(Farrell)과 데버리(Devery)는 사이가 나빠진데다, 둘 다 자금부족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구단을 계속 소유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1915년 초에, 구단은 제이콥 루퍼트 대령과 틸링해스트 롬므디으 휴스턴 대위에게 125만 달러의 금액으로 매각되었습니다. 당시 루퍼트는 주방위군에 대령으로 복무하고 있었습니다. 루퍼트는 재력과 의지를 갖춘 구단주였고, 팀은 루퍼트가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전성시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1920
[에드 배로우 단장 부임]
보스턴 레드삭스 감독이던 에드 배로우가 양키스의 단장 겸 구단 대표로 부임하여 25년간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팜 제도 정비와 혁신적인 구단 운영에 기여했습니다.
에드 배로우는 1918년부터 보스턴 레드삭스의 감독을 하고 있다가 1920년 시즌 종료 후에 양키스로 옮겨와 단장 겸 구단 대표로 25년 동안 근무하면서 팀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배로는 보스턴 감독 시절 루스에게 타자 전환을 권유했던 장본인으로서 보스턴 선수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보스턴에서 선수들을 데려올 때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비지니스 매니저'였으나 이후 '제너럴 매니저'로 선수 계약, 트레이드, 티켓 가격 책정 등 구단 운영의 전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사업가 출신이었던 배로는 선수들에게 백넘버를 달게 했고, 처음으로 관중이 파울볼을 가져갈 수 있게 했습니다. 조지 와이스와 함께 양키스의 팜 제도를 정비한 것도 그의 큰 업적 중의 하나입니다.
[베이브 루스 영입]
보스턴 레드삭스로부터 메이저리그 야구의 전설 '베이브 루스'를 12만 5천 달러의 현금과 펜웨이 파크 저당 빚 30만 달러에 영입했습니다. 이 영입은 팀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습니다.
구단 인수 후에 몇 년 동안 새 구단주 루퍼트는 적극적인 투자를 펼쳐 선수단 연봉을 높은 수준으로 유지하고 타팀의 좋은 선수들을 영입했습니다. 영입 선수 중 팀 전력에 도움이 되는 선수는 대부분 보스턴 레드삭스 출신이었습니다. 그중 최고의 선수는 1920년 1월에 영입된, 투수에서 야수로 변한 베이브 루스였습니다. 이미 최고 연봉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금액을 요구하는 바람에 감당할 의사가 없던 레드삭스는 그를 양키스로 트레이드해버렸습니다. 양키스가 영입 비용으로 지출한 금액은 12만 5천 달러의 현금과 레드삭스의 구장 펜웨이 파크를 저당잡은 빚 30만 달러였습니다. 이 트레이드는 보스턴 레드삭스에겐 84년간 '밤비노의 저주'를 안겨주었습니다.
1921
[첫 월드시리즈 진출]
팀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여 뉴욕 자이언츠와 대결했으나 패배했습니다. 이 대결은 양키스가 폴로 그라운드를 떠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베이브 루스가 때려낸 폭발적인 수의 홈런은 대중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급기야 세들어 살고 있던 폴로 그라운드의 주인인 뉴욕 자이언츠 팬마저 흡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 1921년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뉴욕 자이언츠를 상대하게 되자, 뉴욕 자이언츠는 1922년 시즌 후에는 폴로 그라운드에서 나가 달라는 압력을 가했습니다.
1923
[첫 양키 스타디움 개장 및 첫 월드시리즈 우승]
5만 8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최첨단 '양키 스타디움'이 개장했습니다. 개장 첫 경기에서 베이브 루스가 홈런을 치며 '루스가 지은 구장'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같은 해 뉴욕 자이언츠를 꺾고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뉴욕의 야구 강팀으로 등극했습니다.
1923년 지어진 양키 스타디움은 당시로서는 최첨단의 시멘트 공법으로 지어졌는데, 3층 건물로는 사상 처음이었고, 수용인원은 5만 8천명이라는 엄청난 숫자였습니다. 개장 첫 경기에서 베이브 루스는 보기 좋게 홈런을 쳤고, 이 시즌에 루스가 기록한 타율 0.393은 지금도 양키스의 팀 기록이며, 루스의 유일한 MVP 시즌입니다. '루스가 지은 구장'이라는 칭호에 걸맞은 시작이었습니다. 지난 2년 간의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자이언츠에게 두 번 다 졌던 양키스는 1923년에 다시 만난 자이언츠에게 승리를 거둬 첫 월드시리즈 우승을 했습니다. 이전까지 자이언츠는 압도적인 강팀으로 뉴욕을 대표하는 구단으로 군림했으나, 이 시리즈를 계기로 양키스에게 그 역할을 넘겨주었습니다.
밀러 허긴스 감독은, 1919년에 공동 구단주였던 휴스턴이 유럽에 출장간 사이에 루퍼트가 영입했는데, 이때문에 두 오너의 사이에 반목이 생겼고, 결국 1923년에 루퍼트는 휴스턴의 지분을 매입해 단독 구단주가 되었습니다.
1927
[살인 타선 구축 및 최강의 팀 등극]
얼 콤스, 마크 쾨니히,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등으로 구성된 '살인 타선'을 구축하며 아메리칸 리그 기록인 110승을 거두었고, 월드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스윕하며 야구 역사상 최강의 팀 중 하나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60홈런으로 단일 시즌 기록을 세웠습니다.
1927년, 얼 콤스, 마크 쾨니히, 베이브 루스, 루 게릭, 밥 뮤젤, 토니 라제리가 포진한, 이른바 살인 타선을 구축했고, 아메리칸 리그 기록인 110승을 거두며 (44패) 월드시리즈에서 피츠버그 파이리츠를 스윕하는 막강한 위용을 자랑해 야구 역사상 최강의 팀 중 하나로 꼽히고 있습니다. 베이브 루스는 홈런 60개를 때려내며 34년간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단일시즌 홈런 기록을 세웠고, 루 게릭은 0.373의 타율과 47홈런, 175타점으로 베이브 루스가 1927년에 기록한 171타점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1928
[월드시리즈 2연패 달성]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0으로 물리치며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이는 양키스의 강한 면모를 다시 한번 입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8년에도 월드시리즈에 올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4-0으로 물리치면서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머줬습니다. 이로써 월드시리즈에서 12연속 경기 승리를 하게 됐습니다(1927년 1~4차전, 1928년 1~4차전, 1932년 1~4차전).
1929
1929년 밀러 허긴스 감독은 시즌 종료 직전 왼쪽 눈 아래의 혹을 제거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5일 만에 패혈증으로 사망했습니다. 아트 플레처와 밥 쇼키가 그 뒤를 이었으나 1년씩만 맡았습니다.
1931
[조 매카시 감독 부임 및 AL 챔피언 등극]
조 매카시 감독이 부임하면서 양키스는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매카시 감독 체제하에서 팀은 새로운 전성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1931년, 조 매카시 감독이 부임하면서 양키스는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에 올랐습니다. 이듬해 1932년 월드시리즈에서 시카고 컵스를 스윕하며 4년만의 우승을 이뤄냈습니다. 특히 리글리 필드에서 벌어진 3차전은 베이브 루스의 가장 유명한 홈런인 예고 홈런이 터지면서 화제를 더했습니다.
1934
[베이브 루스 이적]
양키스의 첫 전성기를 이끌었던 베이브 루스가 시즌 후 내셔널 리그의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이적했습니다. 이는 한 시대의 막을 내리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양키스의 첫 전성기를 이끈 루스는 1934년 시즌 후 내셔널 리그에 새로 가입한 보스턴 브레이브스로 이적하면서 더 이상 월드시리즈에 진출하지 못했습니다.
1936
[조 디마지오 시대 개막 및 월드시리즈 4연패]
조 디마지오의 등장과 함께 1939년까지 4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우며 또 다른 전설을 써 내려갔습니다.
루스가 이적하면서 마침내 게릭이 양키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으나, 'Joltin' Joe' 조 디마지오라는 새로운 주인공이 등장하면서, 게릭의 독주는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이 무렵 팀은 1936년부터 1939년까지 4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우면서 또 다른 전설을 써내려갔습니다.
1939
24년 동안 구단주로 있으면서 양키스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루퍼트도 1939년 1월 13일 세상을 떠났고, 양키스는 그의 유산으로 남겨졌습니다.
[루 게릭 마지막 경기 및 은퇴]
루 게릭이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루 게릭 병)으로 인해 마지막 경기를 치르고 은퇴했습니다. 그의 은퇴는 야구계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939년 게릭은 나중에 "루 게릭 병"이라고 불리게 되는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을 앓게 되면서 4월 30일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은퇴하게 되었습니다.
[루 게릭 등번호 4번, MLB 최초 영구 결번 지정]
구단이 7월 4일을 '루 게릭의 날'로 선포하고 그의 등번호 4번을 메이저 리그 야구 사상 최초로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이날 게릭은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이라는 유명한 고별사를 남겼습니다.
구단은 1939년 7월 4일을 '루 게릭의 날'로 선포하고 그의 등번호 4번을 메이저 리그 야구 사상 최초로 영구 결번으로 지정했습니다. 이날 행사에서 게릭은 스스로를 '세상에서 가장 운이 좋은 사람'라고 지칭하는 유명한 고별사를 남겼고, 2년 후 사망했습니다.
1941
[조 디마지오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 수립]
조 디마지오가 메이저 리그 야구 역사상 깨지지 않는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을 세웠습니다. 같은 해 양키스는 브루클린 다저스를 꺾고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2차 대전 이전의 황금시대의 마지막 해로 불리는 1941년, 전 미국은 메이저 리그의 두 가지 이벤트로 떠들썩했습니다. 보스턴 레드삭스의 테드 윌리엄스는 4할 타율이라는 목표에 도전하고 있었고, 디마지오는 연속경기 안타 기록에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디마지오의 연속경기 안타 기록은 56경기가 되었고, 이 기록은 현재까지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한편, 디마지오가 기록을 세운 그 해, 양키스는 브루클린 다저스를 만나 시리즈 전적 4-1로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진주만 공습 및 선수들 입대]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메이저 리그의 많은 스타 선수들이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팀 전력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41년 시즌이 끝난 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공습으로 메이저 리그는 디마지오를 포함해 리그에서 활동하던 많은 스타 선수들을 입대시켜야 했습니다. 팀은 그 와중에도 1942년 월드시리즈에 진출해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4-1로 패배했지만, 이듬해 월드시리즈에서는 똑같은 전적으로 되갚아주었습니다.
1943
[월드시리즈 우승 (카디널스 설욕)]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전년도 패배를 설욕하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로써 팀은 다시 한번 강팀의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1942년 월드시리즈에서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 4-1로 패배했지만, 이듬해 월드시리즈에서는 똑같은 전적으로 되갚아주었습니다.
1945
[델 웹 투자 그룹에 구단 매각]
제이콥 루퍼트의 유산으로 남겨진 양키스가 건설업계의 거물 델 웹과 동업자 댄 타핑, 래리 맥파일에게 280만 달러에 매각되었습니다. 이는 구단 경영의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1945년, 루퍼트의 유산이었던 양키스는 건설업계의 거물 델 웹과 동업자 댄 타핑, 래리 맥파일에게 280만 달러의 금액으로 매각됐습니다. 다만, 맥파일은 1947년에 자신의 지분을 매각했습니다.
1946
[조지 와이스, 새 단장으로 부임]
24년간 단장 생활을 했던 에드 배로우가 은퇴하고 조지 와이스가 후임 단장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와이스는 팜 제도를 정비하여 팀의 성공적인 미래를 다졌습니다.
1946년, 배로가 24년 간의 단장 생활을 끝내면서 조지 와이스를 후임으로 결정했는데, 와이스는 배로와 함께 키우던 팜을 양키스의 자금력에다 자신의 스카웃-선수개발 조직으로 더욱더 풍요롭게 만들었습니다. 최초로 팜 시스템을 만든 세인트루이스보다 더 나은 시스템이었습니다. 그 외에 케이시 스텡걸의 감독 발탁, 로저 메리스의 트레이드도 그의 작품이었습니다.
1947
[월드시리즈 우승 (벅 해리스 감독)]
벅 해리스 감독의 지휘 아래 월드시리즈에서 브루클린 다저스와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팀의 재정비를 통해 이룬 성과였습니다.
1943년 월드시리즈 우승 후 몇 년간 팀이 침체에 빠지자, 매카시는 1946년 시즌 도중 해임을 당하고 빌 디키, 조니 눈(Johnny Neun)이 남은 시즌을 임시 감독으로 이끌어나갔습니다. 1947년 벅 해리스가 지휘봉을 잡고 팀을 정비한 뒤 월드시리즈에 진출해 브루클린 다저스와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48
[베이브 루스 등번호 3번 영구 결번]
메이저 리그 야구의 전설인 베이브 루스의 등번호 3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의 업적을 기리는 중요한 행사였습니다.
1948년 6월 13일, 양키스의 전설적인 선수 베이브 루스의 등번호 3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루스는 우익수로 활동하며 메이저리그 야구의 흐름을 홈런 위주로 바꿨으며 양키스의 4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1949
[케이시 스텡걸 감독 부임]
케이시 스텡걸이 새로운 감독으로 부임했습니다. '광대'라는 평판을 들었으나 양키스에서 명장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전 시즌의 월드시리즈 우승, 그리고 1948년 시즌에도 1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3게임 뒤진 성적을 기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리스는 감독자리에서 물러났고, 후임으로 케이시 스텡걸이 왔습니다. 그 전까지 스텡걸은 '광대짓이나 하면서 약팀 감독이나 한다'라는 평판을 들었으나, 양키스 감독이 되면서 명장 반열에 올라서게 됩니다.
[MLB 최초 5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 달성]
1953년까지 전무후무한 5년 연속 월드시리즈 제패 기록을 세웠습니다. 미키 맨틀, 화이티 포드, 요기 베라를 주축으로 한 케이시 스텡걸 사단이 이룬 대기록입니다.
조 매카시 감독의 지휘 하에 좋은 성적을 거뒀던 양키스는, 케이시 스텡걸 감독 밑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뒀습니다. 중견수 미키 맨틀과 투수 화이티 포드, 포수 요기 베라가 팀의 주축을 이룬 가운데 스텡걸이 있던 12 시즌 동안 10번의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과 7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뒀습니다. 그중에는 1949년에서 1953년까지의 전무후무한 5년 연속 월드시리즈 제패 기록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텡걸은 팀과 스스로를 매스컴에 홍보하는 데 달인이어서 1955년에는 타임지의 표지를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극적인 AL 우승과 5년 연속 WS 우승 시작]
정규시즌 마지막 두 경기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극적인 2연승을 거두며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후 월드시리즈에서 브루클린 다저스를 꺾고 우승하며 5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1949년 정규시즌 마지막 두 경기를 남기고, 보스턴 레드삭스는 양키스를 1경기 앞선 1위를 하고 있어 반타작만 해도 지구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10월 1일의 첫 경기에서 양키스는 조니 린델의 홈런으로 5-4 승리를 거뒀고, 10월 2일의 마지막 경기에서 15연속 선발승을 따낸 레드삭스의 엘리스 킨더를 무너뜨리면서 5-3의 승리를 거뒀습니다. 이 극적인 2연승으로 양키스는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달성하고, 월드시리즈에서 브루클린 다저스를 4-1로 물리쳤습니다. 이 시즌 이후 양키스와 레드삭스는 라이벌 관계가 앙숙으로 변하게 되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1951
[조 디마지오 은퇴 및 미키 맨틀 데뷔]
양키스의 전설 조 디마지오가 은퇴하고, '오클라호마의 아이' 미키 맨틀이 데뷔하여 그의 빈자리를 메꾸며 팀의 주축으로 성장했습니다.
이 시즌부터 디마지오의 성적은 하락하기 시작해 1951년 은퇴했고, 디마지오가 은퇴하던 때에 '오클라호마의 아이'로 불렸던 미키 맨틀이 데뷔해 디마지오의 빈자리를 메꾸며 양키스의 주축으로 자리잡았습니다.
1952
[조 디마지오 등번호 5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위대한 중견수 조 디마지오의 등번호 5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 등 수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1952년 4월 18일, 양키스의 전설 조 디마지오의 등번호 5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중견수로 활약하며 56경기 연속 안타라는 메이저 리그 야구 기록을 세웠습니다.
1955
[월드시리즈에서 브루클린 다저스에 패배]
월드시리즈에서 5번 만나 모두 이겼던 브루클린 다저스에게 패배하며 우승컵을 내주었습니다. 이는 다저스의 첫 월드시리즈 우승이었습니다.
1954년 100승을 넘겼지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아메리칸 리그 신기록인 111승을 거두는 바람에 2위로 밀려났고, 1955년에는 월드시리즈에서 5번 만나 모두 이겼던 다저스를 상대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1956
[돈 라슨, 월드시리즈 퍼펙트 게임 달성]
월드시리즈 5차전에서 돈 라슨이 월드시리즈 역사상 유일무이한 퍼펙트 게임을 기록했습니다. 이 경기의 여세로 양키스는 3년 만에 우승컵을 되찾았고, 라슨은 월드시리즈 MVP에 선정되었습니다.
양키스는 여전히 강팀이었고, 1956년 월드시리즈 5차전이 벌어진 10월 8일, 투수 돈 라슨이 월드시리즈 역사상 유일의 퍼펙트 게임을 기록했습니다. 포스트 시즌에서 퍼펙트 게임은커녕 노히트 노런조차 없던 상태였고, 이후에도 2010년 로이 할러데이가 노히트 노런을 할 때까지 54년 동안은 그 기록 하나뿐이었습니다. 그 경기의 여세를 몰아 양키스는 3년 만에 다시 우승컵을 되찾아왔고 라슨은 월드시리즈 MVP에 뽑혔습니다.
1957
[월드시리즈 패배 및 뉴욕 라이벌 팀들의 이전]
월드시리즈에서 밀워키 브레이브스에 패배한 후, 뉴욕 자이언츠와 브루클린 다저스가 서부 캘리포니아주로 연고지를 옮기면서 뉴욕에는 양키스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1957년 월드시리즈에서 밀워키 브레이브스에게 패배했습니다. 이어서 뉴욕 자이언츠와 브루클린 다저스가 서부 캘리포니아주로 떠나면서 뉴욕에는 양키스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1958
[밀워키 브레이브스에 대한 월드시리즈 설욕]
월드시리즈에서 밀워키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1승 3패의 열세를 뒤집는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1년 전 패배에 대한 설욕이었습니다.
1958년 시즌 양키스는 월드시리즈에서 다시 만난 브레이브스를 상대로 복수극을 펼쳤는데 1승 3패의 열세를 뒤집은 극적인 승리였습니다.
1960
[로저 메리스 영입]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로부터 젊은 외야수 로저 메리스를 영입했습니다. 이는 'M&M 타선'의 탄생으로 이어지며 팀의 공격력을 한층 강화했습니다.
캔자스시티 애슬레틱스의 구단주 아놀드 존슨은 양키스의 공동 구단주 델 웹과 댄 타핑의 오래 거래했던 관계 때문인지, 젊은 선수들을 양키스로 보내고 현금이나 나이든 노장을 데려오는 트레이드를 하곤 했습니다. 양키스한테 심하게 유리한 이런 트레이드들 때문에 애슬레틱스는 '양키스의 메이저 리그 팜'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런 상태는 애슬레틱스가 필라델피아에서 캔자스시티로 옮기기 전까지 거의 2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1960년 찰스 핀리(Charles O. Finley)가 애슬레틱스를 인수하면서 비로소 이런 거래는 중지되었지만, 이미 양키스는 20대 초반의 젊은 외야수 로저 메리스를 포함한 유망주를 빼낸 뒤였습니다. 1960년 매리스는 아메리칸 리그 장타율 1위와 타점 1위를 차지하고, 미키 맨틀에 이어 홈런 2위를 기록하면서 골드 글러브와 아메리칸 리그 MVP로 뽑혔습니다.
1961
[로저 메리스 61홈런 기록 경신]
로저 메리스가 시즌 61홈런을 때려내며 베이브 루스의 단일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이 해 팀은 240홈런으로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에 올라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61년은 M&M포의 홈런 경쟁과 월드시리즈 우승으로 양키스 역사상 가장 인상깊은 해 중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여름까지 맨틀과 매리스는 빠른 속도로 홈런을 때려내면서 베이브 루스의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인 60홈런에 도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맨틀이 엉덩이에 심각한 부상으로 레이스에서 이탈하면서 매리스 혼자 독주하게 되었습니다. 162경기의 마지막 경기를 치르게 된 10월 1일 매리스는 61홈런을 때려내면서 루스의 기록을 경신했습니다. 커미셔너인 포드 프릭이 154 경기의 루스의 기록과 162경기의 매리스 기록을 별도로 기록하겠다고 선언해버렸고, 30년 동안 두 기록은 병기되었으나, 후에 매리스의 기록은 1998년 마크 맥과이어가 70홈런으로 경신할 때까지 단독 기록으로 남았습니다. 메이저 리그 기록은 경신되었지만, 여전히 아메리칸 리그 기록이기도 합니다. 홈런 기록과 함께 팀은 240홈런의 무서운 공격력을 보였고, 109승 53승을 기록하면서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으로 진출한 월드시리즈에서 신시네티 레즈를 물리치고 우승했습니다.
1962
[월드시리즈 우승 (2년 연속)]
월드시리즈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승리하며 2년 연속 우승이자 지난 16년간 10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1962년, 양키스 홀로 있던 뉴욕에 내셔널 리그의 뉴욕 메츠가 퀸즈에 새롭게 자리를 잡았습니다. 양키스가 1962년 월드시리즈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7차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승리하면서, 2년 연속이자, 지난 16년간 10번째인 월드시리즈를 우승을 거두었습니다.
1963
[LA 다저스와 월드시리즈 패배]
LA 다저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패배했습니다. 이는 다음 해 요기 베라 감독 부임으로 이어지는 변화의 시작이었습니다.
1963년 LA 다저스와 월드시리즈에서 만났으나 패배했습니다.
1964
[요기 베라 감독 부임 및 월드시리즈 패배]
요기 베라가 선수에서 은퇴하자마자 감독으로 부임했습니다. 노쇠한 팀을 이끌고 월드시리즈에 5년 연속 진출했으나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패배했습니다.
이듬해 요기 베라는 선수에서 은퇴하자 마자 감독이 되었고, 노쇠한 양키스를 이끌고 팀을 월드시리즈에 5년 연속 진출시켰습니다. 하지만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에게 7차전 끝에 패배하고 말았고, 이후 1976년 월드시리즈 전까지는 한 번도 진출하지 못하는 침체기에 들어섰습니다.
[CBS에 구단 지분 매각 및 아마추어 드래프트 도입]
시즌이 끝난 후, CBS 방송사가 공동 구단주 타핑과 웹으로부터 1,120만 달러에 80%의 지분을 인수했습니다. 이와 함께 아마추어 드래프트가 도입되면서 팀은 급격한 하락세를 겪기 시작했습니다.
1964년 시즌이 끝난 후, CBS (미국 방송사)는 공동 구단주 타핑과 웹으로부터 1,120만 달러의 금액으로 80%의 지분을 인수했습니다. 새 구단주가 등장한 그때, 메이저 리그에 아마추어 드래프트가 도입되었고, 양키스는 더 이상 유망주들을 싹쓸이하기 힘들어지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이때문에 팀은 급격한 하락세를 겪기 시작했는데, 1965년의 경우 40년 만에 순위가 하위권으로 떨어져 버렸습니다.
1966
1966년 1912년 이후 처음으로 꼴찌로 추락했고, 1967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아 뒤에서 2등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1974년까지는 포스트 시즌 진출과는 거리가 먼 팀으로 보였습니다. 성적 저하에 대한 다양한 이유가 존재했지만, 가장 큰 원인으로는 왕년의 스타들이 노쇠해지면서 대체할 자원이 있었어야 했는데, 더 이상 지난 50년 동안의 방식으로는 메꿀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타핑과 웹이 구단주였던 20년 동안 15번 월드시리즈에 진출해서 10번을 우승했지만, 그와 대조적으로 CBS가 구단주일 때는 한 번도 월드시리즈에 진출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1969
[미키 맨틀 등번호 7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전설적인 중견수 미키 맨틀의 등번호 7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팀의 황금기를 이끈 주역 중 한 명이었습니다.
1969년 6월 8일, 양키스의 전설적인 중견수 미키 맨틀의 등번호 7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맨틀은 중견수, 1루수, 코치로 활동하며 양키스의 'M&M 타선' 시대를 이끌었습니다.
1970
[케이시 스텡걸 감독 등번호 37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명장 케이시 스텡걸 감독의 등번호 37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12시즌 동안 10번의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과 7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1970년 8월 8일, 양키스의 명장 케이시 스텡걸 감독의 등번호 37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케이시 스텡걸 사단'을 이끌며 팀의 전무후무한 5년 연속 월드시리즈 제패 기록을 포함한 수많은 영광을 안겼습니다.
1972
[빌 디키 & 요기 베라 등번호 8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빌 디키와 요기 베라의 등번호 8번이 동시에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두 선수는 팀의 황금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1972년 7월 22일, 양키스의 전설적인 포수 빌 디키와 요기 베라의 등번호 8번이 동시에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빌 디키는 포수, 감독, 코치로, 요기 베라는 포수, 감독, 코치로 활동하며 팀의 성공에 기여했습니다.
1973
[조지 스타인브레너, 양키스 인수]
클리블랜드 기반의 선박 제조업자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이끄는 투자 그룹이 CBS로부터 870만 달러로 양키스를 인수했습니다. 이는 양키스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습니다.
클리블랜드에 기반을 둔 선박 제조업자 조지 스타인브레너가 이끄는 투자 그룹은 1973년 1월 3일, CBS로부터 870만 달러로 양키스를 인수했습니다. 마이크 버크(Mike Burke)가 이사회 의장으로 4월까지 있었으나 그 해가 가기 전에 스타인브레너가 다른 투자자들로부터 지분을 매입해서 지배 주주가 되었습니다.
1974
[캣피쉬 헌터 영입, FA 시대 개막]
시즌 후 오클랜드의 스타 투수 캣피쉬 헌터를 335만 달러에 영입하며 현대식 자유계약제도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이는 선수 영입 시장의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1974년 시즌 후, 스타인브레너는 오클랜드의 스타 선수 캣피쉬 헌터를 335만 달러에 영입해, 현대식 자유계약제도(Free Agency)가 탄생하는데 일조를 했습니다.
[양키 스타디움 보수 및 셰이 스타디움 임시 사용]
1975년까지 셰이 스타디움을 임시 홈구장으로 사용하며 양키 스타디움의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이는 노후화된 구장을 현대화하려는 노력이었습니다.
스타인브레너의 주요 목표 중 하나는 1923년에 지어져 1960년대 들어 악화된 양키 스타디움을 보수하는 것이었습니다. 뉴욕 시에서 스타디움을 매입해 2년 간 광범위한 재단장을 하기로 하고, 시 소유인 셰이 스타디움을 2년 간 양키스도 함께 사용할 수 있게 한다는 중재안이 승인되었습니다. 재단장을 마친 구장은 현대식 느낌을 주었고, 몇 군데의 좌석은 재배치되었습니다.
[화이티 포드 등번호 16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전설적인 선발 투수 화이티 포드의 등번호 16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스텡걸 사단의 핵심 투수였습니다.
1974년 8월 3일, 양키스의 전설적인 선발 투수 화이티 포드의 등번호 16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선발투수, 코치로 활동하며 팀의 5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을 비롯한 수많은 영광에 기여했습니다.
1975
[빌리 마틴 감독 부임]
시즌 중반, 1950년대 전성기의 주역이었던 빌리 마틴을 감독으로 데려왔습니다. 그의 지휘 아래 팀은 다시 한번 월드시리즈에 도전했습니다.
1975년 시즌 중반, 1950년대 전성기의 주역이었던 전 2루수 빌리 마틴을 감독으로 데려왔습니다.
1976
[레지 잭슨 영입]
시즌 종료 후, 스타인브레너 구단주가 오클랜드의 스타 선수 레지 잭슨을 직접 영입했습니다. 이는 팀 내 갈등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1976년 시즌이 끝난 후 스타인브레너는 또다시 오클랜드의 스타 선수 레지 잭슨을 직접 영입했습니다. 하지만 잭슨은 1972년 플레이오프에서 빌리 마틴이 감독으로 있던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패배시키면서 생긴 악연으로 이미 사이가 좋지 않은 상태였던데다, 1977년 시즌 전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팀의 주장인 포수 서먼 먼슨에 대한 부적절한 발언으로 동료들과 사이가 나빠져버렸습니다. 잭슨과 마틴, 스타인브레너는 잭슨의 5년 계약기간 내내 서로 다퉜고, 스타인브레너는 마틴을 13년 동안 5번 고용했다가 해고했습니다.
[월드시리즈 진출 및 신시내티 레즈에 패배]
12년 만에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으나 '빅 레드 머신'으로 불리던 신시내티 레즈에게 패배했습니다.
마틴의 지휘 하에 양키스는 1976년 월드시리즈에 12년 만에 올라갔으나 '빅 레드 머신'이 이끌던 신시내티 레즈에게 패퇴했습니다.
1977
[레지 잭슨의 '10월의 사나이' 활약 및 월드시리즈 우승]
레지 잭슨이 월드시리즈에서 6차전 3홈런을 포함해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10월의 사나이(Mr. October)'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이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1977년 월드시리즈에 올라가 LA 다저스를 만났고, 잭슨은 자신의 스타성을 유감없이 발휘해 팀을 정상에 올렸습니다. 6차전의 3홈런을 포함해 4연타수 홈런이었고, 4개의 홈런 모두 각기 다른 투수들을 상대로 때려낸 것이었습니다. 이런 활약으로 월드시리즈 MVP 수상과 함께 '10월의 사나이(Mr. October)'라는 멋진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1978
['보스턴 대학살'과 월드시리즈 우승]
1978년 7월 14일 기준 보스턴 레드삭스에 14. 5 게임 차로 뒤처져 있었으나, 9월 초 펜웨이 파크 4연전을 모두 승리하며 '보스턴 대학살'을 기록하였습니다. 이후 순위 결정전에서 버키 덴트의 홈런으로 승리하였고, LA 다저스를 꺾고 22번째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양키스는 4경기에서 15-3, 13-2, 7-0, 7-4의 압도적인 스코어로 모두 승리하며 '보스턴 대학살'로 불리는 역사를 만들었습니다. 결국 시즌 마지막날, 두 팀은 아메리칸 리그 동부에서 공동 1위로 정규시즌을 마쳤고, 지구 우승을 위한 순위 결정전 추가 경기를 펜웨이 파크에서 치러야 했습니다. 경기 초반 2-0으로 레드삭스가 앞서갔으나, 7회 초 양키스의 유격수 버키 덴트가 토레즈를 상대로 펜웨이 파크의 명물 그린 몬스터 너머의 조명등을 맞추는 대형 3점 홈런을 때려내면서 역전에 성공했고, 이어 서먼 먼슨의 1타점 2루타, 레지 잭슨의 홈런으로 승리를 굳혔습니다. 레드삭스는 8회 구스 고시지에게 2점을 뽑아내며 1점 차로 맹추격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양키스는 100승으로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3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에서 만난 캔자스시티 로열스를 물리치고 월드시리즈에 올라가 LA 다저스를 2년 연속으로 만났습니다. 두 경기를 먼저 내주면서 위기에 빠졌으나 홈에서 치러진 3~5차전 3경기를 모두 이기면서 전세를 뒤집고, LA의 홈에서 벌어진 6차전에서 승리하면서 시리즈 전적 4-2로 22번째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됐습니다.
1979
[주장 서먼 먼슨, 비행기 사고로 사망]
팀의 주장 서먼 먼슨이 자신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팀 전체에 큰 슬픔과 충격을 안겼습니다.
1970년대의 마지막 해, 양키스에게 비보가 전해졌습니다. 1979년 8월 2일, 팀의 주장 서먼 먼슨이 자신의 비행기로 착륙 연습을 하다 사고로 죽었던 것입니다. 4일 후, 선수단 전원은 저녁에 볼티모어 오리올스15번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서먼 먼슨 등번호 15번 영구 결번]
서먼 먼슨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다음 날, 그의 등번호 15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의 라커는 추모의 뜻으로 양키 스타디움에 그대로 보존되었습니다.
1979년 8월 3일, 서먼 먼슨이 비행기 사고로 사망한 다음 날, 그의 등번호 15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경기 전에 먼슨의 포수 장비만 남기고 비워진 라커는, 앞면에는 등번호 15번이 붙은 채로 추모의 뜻에 따라 양키 스타디움에 계속 있다가, 새로운 구장이 개장됐을 때 라커의 내용물만 새 박물관으로 옮겨졌습니다.
1980
[돈 매팅리 시대의 월드시리즈 진출 실패]
1980년대 양키스는 올스타급 1루수 돈 매팅리가 이끌었으나, 투타 불균형과 주축 선수들의 부상으로 인해 월드시리즈에 단 한 번도 진출하지 못하는 암흑기를 보냈습니다.
1981년 월드시리즈의 패배 이후 1994년까지 포스트 시즌에 오르지 못해, 팀 역사상 1921년 이후로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합니다. 올스타급 1루수 돈 매팅리가 이끌던 양키스는 1980년대에서 가장 많은 승을 올렸으나 월드시리즈에 한 번도 진출 못한 두 번째 팀이 되었습니다. 이는 비교적 무난한 시즌들을 보냈지만 전력이 집중된 해가 없었다는 걸 뜻합니다. 특히 투타의 불균형이 문제가 되었는데, 매팅리와 데이브 윈필드, 리키 헨더슨, 마이크 파글리아룰로, 스티브 색스, 제스 바필드가 포진한 공격력은 여전히 꾸준한 파워를 자랑했으나 선발투수진들이 받쳐주지 못했습니다.
[딕 하우저 감독 부임 및 AL 동부 우승]
빌리 마틴이 또다시 해고되고 딕 하우저가 후임 감독으로 부임했습니다. 레지 잭슨이 생애 첫 3할 타율과 41홈런을 기록했습니다. 팀은 AL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으나 ALCS에서 로열스에게 스윕당했습니다.
1980년, 팀에 더 많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빌리 마틴은 또다시 해고되었고, 딕 하우저가 후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크리스 챔블리스는 토론토 블루제이스의 포수 릭 세른과 트레이드 되었습니다. 잭슨과 사이가 좋지 않던 마틴과 달리, 하우저는 레지 잭슨을 합리적으로 대했고, 이때문인지 잭슨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3할 타율을 달성하고, 거기에 41홈런을 더해 캔자스시티의 조지 브레트에 이은 MVP 투표 2위를 차지했습니다. 팀은 103승으로 2위 볼티모어 오리올스보다 3승을 더 많이 거둬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차지했지만 ALCS에서 로열스에게 스윕당하면서 시즌을 마쳤습니다.
1981
[최동원 선수 메이저리그 진출 무산]
최동원 선수가 토론토 블루제이스와 계약을 체결했으나, 병역 문제로 인해 메이저리그 진출이 무산되었습니다. 양키스를 포함한 여러 팀이 영입 경쟁을 벌였습니다.
시즌 뒤 최동원 스카우트 물망에 올랐고 해당 팀 외에도 LA 다저스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등이 최동원 영입 경쟁을 벌였으며 우여곡절 끝에 토론토 블루제이스가 1981년 9월 계약을 체결했지만 병역 문제 때문에 무산됐습니다.
[1921년 이후 최장 포스트 시즌 진출 실패]
1994년까지 포스트 시즌에 오르지 못하며, 팀 역사상 1921년 이후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하는 암흑기를 겪었습니다.
1981년 월드시리즈의 패배 이후 1994년까지 포스트 시즌에 오르지 못해, 팀 역사상 1921년 이후로는 가장 오랜 기간 동안 포스트 시즌 진출에 실패합니다.
[데이브 윈필드 장기 계약 및 월드시리즈 패배]
데이브 윈필드와 당시 보기 드문 10년의 초장기 계약을 맺었습니다. 선수노조 파업으로 시즌이 분할되는 혼란 속에서도 AL 동부 선두를 차지했으나, 월드시리즈에서 LA 다저스에 패배했습니다.
시즌이 끝난 후 스타인브레너는 데이브 윈필드와 당시로서는 보기 힘든 10년의 초장기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리고 하우저 감독을 해임하고 진 마이클을 후임으로 앉혔습니다. 6월부터 8월까지의 선수노조 파업으로 시즌이 분할됐던 1981년, 마이클이 지휘하던 전기리그까지는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선두를 차지했으나, 후반기에는 또다시 밥 레몬으로 바뀌면서 성적이 6위로 급전직하했습니다. 전후기 1위팀 간에 벌어진 플레이 오프에서 후기리그 1위인 밀워키 브루어스와 디비전 시리즈를 펼쳐 3-2로 간신히 승리했습니다. ALCS에서는 빌리 마틴이 지휘하는 오클랜드 애슬레틱스를 만나 3게임으로 완파하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습니다. LA 다저스를 상대로 두 게임을 먼저 이기면서 앞서 나갔으나 이후 4게임을 내리 내주면서 다저스가 1965년 이후 처음으로 우승하는 걸 지켜봐야 했습니다.
1984
[로저 메리스 & 엘스턴 하워드 등번호 영구 결번]
로저 메리스와 엘스턴 하워드의 등번호 9번과 32번이 동시에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두 선수는 팀의 황금기에 큰 기여를 했습니다.
1984년 7월 21일, 로저 메리스의 등번호 9번과 엘스턴 하워드의 등번호 32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로저 메리스는 우익수로 'M&M 타선'의 주역이었으며, 엘스턴 하워드는 양키스 최초의 흑인 선수로 포수와 좌익수로 활약했습니다.
1985
[필 리주토 등번호 10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유격수 필 리주토의 등번호 10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뛰어난 수비와 공격으로 팀의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1985년 8월 4일, 양키스의 유격수 필 리주토의 등번호 10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팀의 핵심 선수로 활약하며 여러 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1986
[빌리 마틴 등번호 1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전설적인 2루수이자 감독이었던 빌리 마틴의 등번호 1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선수와 감독 모두 팀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1986년 8월 10일, 빌리 마틴의 등번호 1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2루수와 감독으로 팀에 헌신했으며, 특히 감독으로 팀을 월드시리즈에 진출시키기도 했습니다.
1989
[주축 선수 이탈 및 부상으로 공격력 쇠퇴]
리키 헨더슨과 마이크 파글리아룰로가 시즌 중반 트레이드되었고, 데이브 윈필드와 돈 매팅리가 부상으로 시즌을 거의 날려버리며 팀 공격력이 급격히 쇠퇴했습니다.
1980년대가 끝나가면서 양키스의 보루였던 공격력마저 쇠퇴하면서 팀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어갔습니다. 헨더슨과 파글리아룰로는 1989년 시즌 중반에 다른 팀으로 트레이드됐고, 윈필드와 매팅리 둘 다 등부상을 겪으면서 윈필드는 1989년 시즌을 통째로, 매팅리는 1990년 시즌을 거의 다 날려먹었던 것입니다. 유례를 찾기 힘들던 윈필드의 장기계약은 에인절스로 이적하면서 종료되었습니다.
1990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 직무정지 및 팜 시스템 재건]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가 데이브 윈필드와의 계약 비리 사건으로 커미셔너에게 직무정지를 당했습니다. 그의 간섭이 사라지면서 진 마이클 단장과 벅 쇼월터 감독은 팜 시스템을 통한 선수 육성 프로그램을 시작했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이어진 저조한 성적은 스타인브레너가 커미셔너 페이 빈센트에게 직무정지를 당하면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스타인브레너가 데이브 윈필드와 계약할 당시 윈필드 재단에 기부하기로 했던 30만 달러가 아까운 나머지, 윈필드의 뒤를 캐려던 사실이 폭로된 것이었습니다. 스타인브레너의 간섭이 사라지자 진 마이클 단장과 벅 쇼월터 감독은 비싼 선수 영입보다는 자신들의 팜 시스템에서 재능있는 선수들을 키우겠다는 일관된 목표에 따라 선수영입과 육성 프로그램을 시작할 수 있었고, 그 결과 외야수 버니 윌리엄스, 유격수 데릭 지터, 포수 호르헤 포사다, 투수 앤디 페티트, 마리아노 리베라가 팀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1966년 이후 첫 리그 꼴찌 기록]
1966년 이후 처음으로 아메리칸 리그 최하위를 기록하는 최악의 시즌을 보냈습니다. 이는 팀의 깊은 침체를 상징하는 해였습니다.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자유계약 선수와 신인 드래프트에 거액의 자금을 투입했지만 모두들 기대만큼 성장해주지 못했고 팀은 패 기록만 올리고 있었습니다. 1990년 시즌은 그중 최악으로 1966년 이후 처음으로 꼴찌에 머물렀습니다.
[앤디 호킨스, 노히트 패배 기록]
투수 앤디 호킨스가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노히트 경기를 펼쳤으나, 타격 지원 부족과 야수 실책으로 인해 패배하는 불운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는 20세기 사상 최다 점수 차 노히트 패배였습니다.
전력이 약화된 데다 운까지 꼬인 팀의 모습을 상징하는 듯, 1990년 7월 1일 투수 앤디 호킨스는 시카고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안타 하나 내주지 않고 노히트 경기를 하고 있었으나 타격지원의 부재와 8회말 볼넷과 야수들 실책 3개가 겹치면서 패배의 멍에를 지고 말았습니다. 특히 2사 만루에서 신인 좌익수 짐 레이리츠가 플라이볼을 놓치지 않았다면 그대로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칠 수 있었던 것이 뼈아팠습니다. 노히트 게임을 하고도 패배를 한 투수들이 몇 있지만, 이 경기의 4점 차는 20세기 사상 최다 점수 차이였습니다. 11일 후, 양키스와 호킨스는 또다시 화이트삭스를 만났으나 이번에는 7회 강우 콜드로 노히트 게임을 당하는, 기막힌 상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1993
[레지 잭슨 등번호 44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우익수 레지 잭슨의 등번호 44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10월의 사나이'로 불리며 팀의 월드시리즈 우승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993년 8월 14일, 레지 잭슨의 등번호 44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우익수로 활동하며 1977년 월드시리즈에서 맹활약하여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고, '10월의 사나이'라는 멋진 별명을 얻었습니다.
1994
[선수노조 파업으로 월드시리즈 취소]
선수노조 파업으로 월드시리즈가 열리지 않았습니다. 아메리칸 리그 전체 선두를 달리던 양키스에게 돈 매팅리가 월드시리즈에 나설 가장 좋은 기회를 잃게 된 아쉬운 시즌이었습니다.
이러한 시도는 1994년 시즌부터 가시적인 성과가 나타나 아메리칸 리그 전체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선수노조 파업으로 월드시리즈는 열리지 않았고, 매팅리가 월드시리즈에 나갈 가장 좋은 기회는 아쉽게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10월 내내 뉴스 미디어들은 만약 파업이 없었다면 양키스는 어떤 성적을 냈을까 하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 기사들을 싣곤 했습니다.
1995
[조 토리 감독 부임]
시즌이 끝나자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벅 쇼월터 감독을 해고하고 조 토리를 후임으로 정했습니다. 조 토리는 양키스에서 가장 오래 감독 자리에 머물며 새로운 왕조를 이끌게 됩니다.
1995년 시즌이 끝나자, 스타인브레너는 쇼월터 감독을 해고하고 조 토리를 후임으로 정했습니다. 토리는 내셔널 리그에서 감독으로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못낸 편이었던지라 그의 선임을 조롱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차분한 성품은 팀과 잘 맞는 편이었고, 스타인브레너가 구단주가 된 이후 가장 오래 감독 자리에 있게 됩니다.
[14년 만의 PS 진출 및 돈 매팅리 은퇴]
14년 만에 와일드 카드로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으나, 시애틀 매리너스에 패배했습니다. 등부상이 심했던 돈 매팅리는 이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1년 뒤 파업으로 예년보다 20일 정도 늦게 시작해 144게임의 단축 시즌에서 와일드 카드로 14년 만에 포스트 시즌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시애틀 매리너스1995년 시즌을 끝으로 은퇴했습니다. 그의 불운함은 하필이면 양키스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한 1981년과 1996년 사이에서만 선수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1996
['코어 4' 등장 및 18년 만의 월드시리즈 우승]
데릭 지터, 호르헤 포사다, 앤디 페티트, 마리아노 리베라 등 이른바 '코어 4' 선수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의 활약으로 양키스는 18년 만에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며 새로운 왕조 시대를 열었습니다.
1996년 양키스가 수년 간 팀의 중심이 될 것으로 기대받던 4명의 선수들이(유격수 데릭 지터, 포수 호르헤 포사다, 선발투수 앤디 페티트, 투수 마리아노 리베라)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이 젊은 선수들은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고 15년 만에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1위에 올랐습니다. ALDS에서 텍사스 레인저스를 물리치고 ALCS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4-1로 물리치고는 대망의 월드시리즈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월드시리즈 상대는 그렉 매덕스, 톰 글래빈, 존 스몰츠가 54승을 합작한 막강한 투수력의 전년도 챔피언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였습니다. 홈에서 치른 2경기를 모두 내줬으나, 적지에서의 3게임을 내리 이기면서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다시 홈에서 벌어진 6차전을 승리함으로써 18년 만에 월드시리즈 챔피언이 되었습니다.
1997
[ALDS 패배 및 브라이언 캐쉬맨 단장 부임]
와일드 카드로 디비전 시리즈에 올랐으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아쉽게 패배했습니다. 단장인 밥 왓슨이 물러나고 브라이언 캐쉬맨이 후임 단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1997년에는 와일드 카드로 디비전 시리즈에 올랐으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3-2로 아쉽게 패했습니다. 단장인 밥 왓슨이 물러나고 후임으로 브라이언 캐쉬맨이 단장직을 맡게 되었습니다.
[재키 로빈슨 등번호 42번, 전 구단 공통 영구 결번]
최초의 흑인 메이저 리그 선수 재키 로빈슨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그의 등번호 42번이 전 구단 공통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1997년 4월 15일, 재키 로빈슨의 등번호 42번이 전 구단 공통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이는 인종 차별을 없애는 데 기여한 그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돈 매팅리 등번호 23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스타 1루수 돈 매팅리의 등번호 23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암흑기 동안 팀을 지탱한 상징적인 선수였습니다.
1997년 8월 31일, 양키스의 1루수 돈 매팅리의 등번호 23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1980년대 양키스의 암흑 시대 동안 팀을 지탱한 스타였습니다.
1998
[역대 최고 성적 기록 및 월드시리즈 우승]
정규 시즌에서 아메리칸 리그 기록인 114승을 거두고, 포스트 시즌을 포함한 단일 시즌 125승이라는 메이저 리그 역대 최고 기록을 세웠습니다. 월드시리즈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스윕하며 우승했습니다.
야구 역사상 최고의 팀 중의 하나로 널리 알려진 1998년의 양키스는 정규 시즌에서 114승을 거두며 아메리칸 리그 기록을 세우는 동안 단 48번의 패배만 허용했고, 월드시리즈에서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4-0으로 스윕해버리는 막강한 전력을 자랑했습니다. 정규 시즌과 포스트 시즌에서 합작한 125승은 메이저 리그 역사를 통틀어 단일 시즌 기록이었습니다.
[데이빗 웰스, 퍼펙트 게임 달성]
데이빗 웰스가 양키 스타디움에서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습니다. 이는 팀의 황금기를 더욱 빛나게 했습니다.
1998년 5월 17일 데이빗 웰스는 양키 스타디움에서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달성했습니다.
1999
[2년 연속 월드시리즈 우승 (레드삭스, 브레이브스 격파)]
ALCS에서 라이벌 보스턴 레드삭스를 물리치고, 월드시리즈에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를 물리치며 2년 연속 월드시리즈를 제패했습니다. 이 두 시즌 동안 포스트 시즌 6개 시리즈를 모두 이겼습니다.
1999년 ALCS에서 레드삭스를 물리치고, 월드시리즈에서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를 물리치면서 2년 연속 월드시리즈를 제패했습니다. 이 2시즌 동안 6개의 포스트 시즌 시리즈를 모두 이기면서(ALDS, ALCS, 월드시리즈) 22승을 하는 동안 패배는 단 3번 뿐이었고, 시리즈 스윕도 4번이나 있을 정도로 포스트 시즌에서 마땅히 상대할 팀이 없었습니다.
[데이빗 콘, 퍼펙트 게임 달성]
데이빗 콘이 '요기 베라의 날'을 축하하듯이 양키 스타디움에서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재현했습니다. 이는 팀의 두 번째 퍼펙트 게임이었습니다.
1999년 7월 18일 데이빗 콘이 '요기 베라의 날'을 축하라도 하듯이 양키 스타디움에서 몬트리올 엑스포스를 상대로 퍼펙트 게임을 재현했습니다.
2000
['지하철 월드시리즈' 우승 및 3연패 달성]
뉴욕 메츠와 1956년 이후 첫 번째 '지하철 월드시리즈'를 펼쳐 4-1로 승리하며 월드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습니다. 이는 1930년대, 1950년대 양키스에 이은 세 번째 3연패 기록입니다.
2000년, 양키스는 뉴욕 메츠와 1956년 이후 첫 번째 '지하철 월드시리즈'(Subway Series World Series)를 펼쳤습니다. 시리즈 전적 4-1로 월드시리즈 3연패를 달성했는데, 3차전에서 지면서 월드시리즈 연승은 14연승으로 마감됐으나(1996년 3~6차전, 1998년 1~4차전, 1999년 1~4차전, 2000년 1~2차전), 기존 팀 기록이었던 12연승은 넘어서는 기록이었습니다. 월드시리즈 3연패 기록은 1936년~1939년, 1949년~1953년의 양키스와 1972년~1974년의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외에는 없습니다.
2001
[9.11 테러 속 AL 4연패 및 월드시리즈 준우승]
정규 시즌 우승으로 4연패를 달성했으며, 9.11 테러 여파 속에 ALDS와 ALCS를 거쳐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7차전에서 마리아노 리베라가 끝내기 안타를 맞으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데릭 지터는 '11월의 사나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2001년 정규 시즌에서 우승하면서 1921년~1924년의 뉴욕 자이언츠, 그리고 양키스의 '36~'39, '49~'53, '55~'58, '60~'64 팀만이 해낸 정규 시즌 4연패를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뉴욕에 발생한 9·11 테러의 영향 아래에 있던 포스트 시즌 동안 양키스는 오클랜드를 ALDS에서 물리치고, 116승의 정규시즌 다승 기록을 세운 시애틀 매리너스를 ALCS에서 물리쳤습니다. 하지만 애리조나 다이아몬드백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서 마리아노 리베라가 7차전의 마무리로 나와 그답지 않게 끝내기 안타를 맞으면서 챔피언 자리를 내놓고 말았습니다. 데릭 지터는 시리즈 내내 2할의 타율로 부진에 빠져 있었지만, 4차전에서 김병현에게 끝내기 홈런을 때려낸 덕분에 레지 잭슨이 갖고 있던 '10월의 사나이'와 비교되는 '11월의 사나이'라는 애칭을 얻었습니다. 911 테러 여파로 월드시리즈가 늦게 열리는 바람에 4차전은 10월 31일에 시작했는데, 티노 마르티네스의 동점 홈런으로 연장전까지 가면서 경기 시간이 자정을 넘겨 11월 1일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2002
[AL 최고 승률 기록 및 ALDS 패배]
대대적인 팀 정비 후 아메리칸 리그 최고 성적인 103승을 거뒀습니다. 알폰소 소리아노가 2루수 최초로 30홈런-30도루 클럽에 가입했으나, ALDS에서 애너하임 에인절스에 패배했습니다.
2002년 시즌을 앞두고 팀이 대대적인 정비 경과 아메리칸 리그에서 가장 좋은 103승 58패의 성적을 거뒀고, 알폰소 소리아노는 39홈런 41도루로 홈런 1개 차이로 40-40 클럽 가입에는 아깝게 실패했으나, 그래도 30-30 클럽 가입은 2루수 사상 최초였습니다. ALDS에서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에너하임 에인절스를 만나 패배했고, 애너하임은 월드시리즈 우승까지 거머쥐었습니다.
2002년에는 팀을 뒷받침하면서 미디어 범위를 확장하기 위해 양키스 전용의 텔레비전 채널 YES 네트워크를 출범시켰습니다.
2003
[ALCS 레드삭스 격파 및 월드시리즈 패배]
101승으로 AL 최고 승률을 기록했으며, 로저 클레멘스의 300승-4000탈삼진 기록이 빛난 해였습니다. ALCS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꺾었으나, 월드시리즈에서 플로리다 말린스에 패배했습니다.
2003년 양키스는 101승 61패로 다시금 아메리칸 리그 최고 승률을 기록했고, 로저 클레멘스의 300승과 4,000 탈삼진으로 더욱 빛났던 한 해였습니다. ALCS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만나 7차전까지 열전을 펼쳤는데, 라이벌 팀 간의 신경전이 3차전에서 벤치 클리어링으로 폭발하면서 분위기가 과열되더니, 7차전은 양키스가 8회말 극적으로 3점을 따라 붙으면서 연장까지 가는 혈전이 펼쳐졌습니다. 결국 11회 말에 에런 분의 끝내기 홈런으로 대미를 장식했고, 보스턴 레드삭스는 또다시 '밤비노의 저주'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월드시리즈에 진출해서 플로리다 말린스와 만났으나 2-4로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론 기드리 등번호 49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전설적인 선발 투수 론 기드리의 등번호 49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루이지애나의 번개'로 불리며 1978년의 뛰어난 활약으로 유명합니다.
2003년 8월 23일, 론 기드리의 등번호 49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선발투수, 코치로 활동하며 1978년 시즌에서 리그 최다인 9개의 완봉승을 포함해 25승 3패, 평균자책점 1.74로 다승과 평균자책에서 1위를 기록했습니다.
2004
[알렉스 로드리게스 영입 및 역사적인 '리버스 스윕' 패배]
역대 최고액으로 FA 계약을 맺었던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영입했으나, 데릭 지터의 유격수 자리 때문에 3루수로 전환했습니다. ALCS에서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3승 후 4연패를 당하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리버스 스윕' 치욕을 겪었습니다.
2004년 양키스는 역대 최고액으로 텍사스 레인저스와 FA 계약을 맺었던 유격수 알렉스 로드리게스를 계약 기간 도중임에도 불구하고 영입했습니다. 하지만 팀의 유격수 자리에는 캡틴 데릭 지터가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로드리게스는 3루수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ALCS에서 또다시 보스턴 레드삭스를 만났으나, 이번에는 3경기를 먼저 땄음에도 불구하고 4경기를 내리 내주는, 이른바 리버스 스윕의 치욕을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북미 프로 스포츠로는 3번째) 당했습니다.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주루 중에 상대팀 수비수의 글러브를 치는 비신사적인 플레이로 비난을 당하면서 이래 저래 수모를 당한 시리즈였습니다. 보스턴은 그 기세로 86년 만에 월드시리즈에서 우승하면서 길고 길었던 '밤비노의 저주'와 인연을 끊었습니다.
2005
[알렉스 로드리게스 AL MVP 선정 및 400만 관중 돌파]
알렉스 로드리게스가 팀 역사상 돈 매팅리 이후 처음으로 아메리칸 리그 MVP에 선정되었습니다. 팀은 400만 홈 관중을 돌파하며 높은 인기를 입증했으나, ALDS에서 에인절스에 패배했습니다.
2005년, 알렉스 로드리게스는 팀 역사상 1985년 돈 매팅리의 수상 이후 처음이자, 자신의 생애 두 번째 아메리칸 리그 MVP에 선정되었습니다. 팀은 보스턴 레드삭스와 같은 승률을 기록했으나 두 팀 모두 와일드 카드가 가능한 승률이어서 별도의 순위 결정전을 더 치르지는 않고, 상대 전적이 앞선 양키스가 지구 1위로 결정되고 보스턴은 와일드 카드 팀이 되어 나란히 ALDS에 진출했습니다. 하지만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 오브 애너하임에게 3-2로 지면서 ALCS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2005년에는 4,090,696으로 스포츠 역사상 홈관중 400만을 넘은 3번째 팀이 되었습니다.
2006
[코리 라이들 투수 사망]
ALDS 종료 후 투수 코리 라이들이 경비행기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이는 서먼 먼슨의 비극을 다시 떠올리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ALDS가 끝난 후 투수 코리 라이들(Cory Lidle)이 자신의 경비행기를 타고 가다 맨해탄의 아파트와 부딪치는 사고로 사망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자신의 경비행기 사고로 죽은 서먼 먼슨의 비극을 다시금 떠올리게 했습니다.
['두 번째 보스턴 대학살' 및 ALDS 패배]
레드삭스의 홈인 펜웨이 파크에서 벌어진 5연전을 모두 승리하는 '두 번째 보스턴 대학살'을 기록했습니다. 9년 연속 AL 동부 우승을 했으나, ALDS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 패배했습니다.
2006년에는 정규시즌에서 레드삭스의 홈인 펜웨이 파크에서 벌어진 5연전에서 총 득점 49-26으로 5게임 모두를 싹쓸이 하는 전과를 올렸는데 혹자는 1978년에 이은 '두 번째 보스턴 대학살'이라고도 표현합니다. 9년 연속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우승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에게 ALDS에서 지게 됩니다.
2007
[조 토리 감독 이탈 및 ALDS 3년 연속 탈락]
9년 연속 AL 동부 지구 우승 기록이 멈췄지만 와일드 카드로 ALDS에 진출했습니다. 그러나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 패하며 3년 연속 1라운드 탈락을 경험했습니다. 시즌 후 조 토리 감독이 재계약 제의를 거절하고 팀을 떠났습니다.
2007년 그들의 아메리칸 리그 동부 지구 연속 기록은 9에서 멈췄으나 와일드 카드로 ALDS에 진출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게 패하면서 3년 연속 1라운드에서 떨어지는 실패를 맛봤습니다. 시리즈가 끝난 후 조 토리는 그의 능력에 의구심을 표하는 프런트가 제시한 짧은 기간의 재계약 제의를 거절하고는 내셔널 리그 서부 지구의 LA 다저스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양키스의 조 토리 시절이 다한 것입니다.
[중국 선수 계약 및 중국 시장 개척]
사상 최초로 두 명의 중국 선수와 계약하고 중국 기업과 광고 계약을 맺으며 중국 시장 개척에 나섰습니다.
2007년 6월 18일, 양키스는 사상 최초로 두 명의 중국 선수와 계약하고, 중국 기업과 광고 계약을 맺음으로써 중국 시장 개척의 신기원을 열었습니다.
2008
[플레이오프 진출 실패 및 FA 선수 영입]
선수들의 부상으로 라인업 변동이 많았고, 14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시즌 후 마크 테세이라, CC 사바시아, A.J. 버넷 등 거물급 자유계약선수들을 영입하며 전력을 보강했습니다.
성적면에서는 선수들의 부상으로 시즌 중간에 여러 번 라인업이 변동했고, 이때문에 14년 만에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습니다. 시즌이 끝난 뒤, 마크 테세이라, CC 사바시아, A.J. 버넷과 같은 거물급 자유계약선수를 영입해 팀 전력을 보강하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조바 챔벌레인이나 필 휴즈 같은 젊은 투수 유망주도 쌓아두는 전략을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조 지라디, 새 감독으로 부임]
조 토리가 떠난 후, 양키스에서 포수로 뛴 적이 있는 조 지라디를 새 감독으로 임명하고 3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시대의 지휘봉을 잡게 되었습니다.
조 토리가 떠난 후 양키스는 90년대 후반 팀에서 뛴 적이 있는 전 포수 조 지라디를 감독으로 임명하고 3년 계약을 맺었습니다.
[구 양키 스타디움에서 올스타전 개최]
역사가 오래된 구 양키 스타디움에서 메이저 리그 야구 올스타전이 개최되었습니다. 이는 구장의 마지막 시즌을 기념하는 의미 있는 행사였습니다.
2008년은 역사가 오래된 구 양키 스타디움에서 치르는 마지막 시즌이었습니다. 마지막 시즌을 기념하기 위해 2008년 메이저 리그 야구 올스타전이 7월 15일에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렸습니다.
[구 양키 스타디움 마지막 경기 승리]
구 양키 스타디움에서 볼티모어 오리올스와의 마지막 경기를 치렀고, 7-3으로 승리했습니다. 호세 몰리나의 홈런이 구장의 마지막 홈런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마지막 경기는 9월 21일 볼티모어 오리올스볼티모어와 치렀으며 7-3으로 승리했는데 4회말 호세 몰리나가 날린 2점 홈런은 구 양키 스타디움의 마지막 홈런이 되었습니다.
2009
[새 양키 스타디움 개장 및 27번째 월드시리즈 우승]
새로운 양키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시작했습니다. 이 구장은 홈런이 잘 나오는 구장으로 유명해졌습니다. 양키스는 AL 동부 지구 1위를 탈환하고, 월드시리즈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꺾고 27번째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2009년 시즌부터 새 양키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치렀고, 금세 홈런이 잘 나오는 구장으로 유명해졌습니다. 5월 14일부터 6월 1일까지는 18경기 연속 무실책 경기로 메이저 리그 기록을 세웠습니다. 올스타전 휴식 무렵, 양키스는 52승 22패를 기록하고 있었고, 결국 AL 동부 지구 1위를 3년 만에 탈환했습니다. ALDS에서 트윈스를 3-0으로 물리치고, ALCS에서 에인절스를 4-2로 물리치며 지난 7년 동안 두 번이나 발목을 잡혔던 원한을 풀었습니다. 월드시리즈서 전년도 챔피언이자 박찬호가 불펜투수로 뛰던 필라델피아 필리스를 상대로 4-2로 무찌르며 그들의 27번째 월드시리즈 타이틀을 쟁취했습니다.
2010
[ALDS 승리 및 ALCS 패배]
지구 1위 탬파베이 레이스에 이어 와일드 카드를 획득하여 ALDS에서 미네소타 트윈스를 꺾었으나, ALCS에서 클리프 리를 앞세운 텍사스 레인저스에 패배하며 시즌을 마쳤습니다.
2010년 지구 1위 탬파베이 레이스에 이어 와일드 카드를 획득해 ALDS에서 전년도에 이어 또다시 미네소타 트윈스를 상대로 3-0으로 이겼습니다. 하지만 ALCS에서 클리프 리를 앞세운 텍사스 레인저스에게 4-2로 패하면서 2010년 시즌은 끝이 났습니다.
[밥 세퍼드 아나운서 및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 사망]
오랜 기간 양키스의 상징이었던 아나운서 밥 세퍼드가 사망했습니다. 이틀 뒤에는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마저 세상을 떠나 팀에 큰 상실감을 안겨주었습니다.
2010년 올스타전 동안 오랜 기간 양키스의 상징이었던 두 사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나운서이던 밥 세퍼드가 7월 11일에 죽은 지 이틀 후 구단주 조지 스타인브레너마저 세상을 떴습니다. 8일 후 또 다른 상징이었던 랠프 후크 전 감독마저 사망했습니다.
2013
[뉴욕 시티 FC 공동 창단]
맨체스터 시티 FC와 공동으로 투자하여 미국 프로축구 메이저 리그 사커(MLS)의 20번째 신생 구단인 뉴욕 시티 FC를 창단했습니다. 이는 구단의 사업 영역 확장을 의미합니다.
2013년 5월 맨체스터 시티 FC와 공동으로 투자해서 창단한 미국 프로축구 메이저 리그 사커 (MLS)의 20번째 신생 구단인 뉴욕 시티 FC의 구단주입니다.
[마리아노 리베라 등번호 42번 영구 결번]
역사상 가장 위대한 마무리 투수 중 한 명인 마리아노 리베라의 등번호 42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전 구단 공통 영구 결번인 재키 로빈슨과 함께 42번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2013년 9월 22일, 마리아노 리베라의 등번호 42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구원 투수로 활동하며 1990년대 후반부터 각종 포스트 시즌 기록을 세워갔습니다. 최초의 흑인 메이저 리그 선수 재키 로빈슨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전 구단 공통 영구 결번으로 정하기 전부터 써왔기 때문에, 계속 사용하였으나 2013년 리베라 역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면서 42번은 두 선수의 영구 결번이 되었습니다.
2014
[조 토리 감독 등번호 6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명장 조 토리 감독의 등번호 6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팀을 새로운 왕조로 이끌며 많은 우승을 안겼습니다.
2014년 8월 23일, 조 토리 감독의 등번호 6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감독으로 활동하며 1996년부터 2007년까지 양키스를 이끌며 4번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포함한 수많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데릭 지터의 작별 인사]
영원한 캡틴 데릭 지터가 홈 마지막 경기에서 끝내기 안타를 치며 영화 같은 은퇴 경기를 가졌습니다. 20년간 팀의 얼굴로 활약한 그의 퇴장에 전 야구계가 존경의 박수를 보냈습니다. 지터의 은퇴와 함께 양키스의 한 시대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마지막 타석에서 특유의 인사이드 아웃 스윙으로 안타를 만들어내며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그는 양키스에서만 뛰며 3,465안타를 기록한 살아있는 전설이 되었습니다. 지터의 은퇴 이후 양키스는 새로운 리더를 찾기 위한 과도기를 겪게 됩니다.
2015
[버니 윌리엄스 등번호 51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중견수 버니 윌리엄스의 등번호 51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코어 4'의 일원으로 팀의 1990년대 후반 왕조에 기여했습니다.
2015년 5월 24일, 버니 윌리엄스의 등번호 51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중견수로 활동하며 1990년대 후반 양키스 왕조의 핵심 선수 중 한 명이었습니다.
[호르헤 포사다 등번호 20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포수 호르헤 포사다의 등번호 20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코어 4'의 일원으로 팀의 황금기를 함께했습니다.
2015년 8월 22일, 호르헤 포사다의 등번호 20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포수로 활동하며 '코어 4'의 일원으로서 팀의 여러 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앤디 페티트 등번호 46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선발 투수 앤디 페티트의 등번호 46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코어 4'의 일원으로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2015년 8월 23일, 앤디 페티트의 등번호 46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선발투수로 활동하며 '코어 4'의 일원으로서 팀의 여러 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2016
[애런 저지의 강렬한 데뷔]
거구의 신인 애런 저지가 데뷔전 첫 타석에서 홈런을 터뜨리며 양키스의 새로운 에이스 탄생을 알렸습니다. 타일러 오스틴과 함께 백투백 홈런을 기록하며 메이저리그 역사상 최초의 기록을 세웠습니다. 지터 이후 공백이었던 팀의 상징적인 타자로서의 등장이었습니다.
그는 신체 조건만으로도 상대 투수들을 압도하는 카리스마를 보여주었습니다. 데뷔 초기 삼진 문제로 고전하기도 했으나 곧 리그를 대표하는 거포로 성장했습니다. 이날의 홈런은 브롱스의 새로운 주인인 '판사' 저지의 시대를 여는 축포였습니다.
2017
[데릭 지터 등번호 2번 영구 결번]
양키스의 유격수 데릭 지터의 등번호 2번이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는 '캡틴'으로 불리며 팀의 리더이자 '코어 4'의 핵심 선수였습니다.
2017년 5월 13일, 양키스의 유격수 데릭 지터의 등번호 2번이 영구 결번 처리되었습니다. 그는 유격수로 활동하며 '코어 4'의 일원이자 팀의 주장으로서 여러 차례 월드시리즈 우승에 기여했고, 팀 최다 안타 기록을 세웠습니다.
[지안카를로 스탠튼 영입]
내셔널 리그 MVP였던 지안카를로 스탠튼을 트레이드로 영입하며 '저지-스탠튼'이라는 역대급 거포 듀오를 구축했습니다. 두 명의 50홈런 타자가 한 팀에서 뛰게 되면서 상대 팀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양키스는 다시 한 번 강력한 힘의 야구로 회귀했습니다.
스탠튼은 영입 당시 잔여 계약 기간이 10년에 달하는 초대형 계약자였습니다. 저지와 스탠튼이 동시에 타석에 서는 모습은 전설적인 루스-게릭 듀오를 연상시켰습니다. 비록 부상으로 시너지가 완벽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으나 그 화력만큼은 압도적이었습니다.
2019
[게릿 콜과의 기록적 계약]
리그 최고의 우완 투수인 게릿 콜을 9년 3억 2,400만 달러라는 투수 역대 최고액으로 영입했습니다. 고질적인 선발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단이 꺼내든 승부수였습니다. 콜은 어린 시절부터 양키스 팬이었음을 증명하는 포스터를 들고 입단식에 나타나 화제를 모았습니다.
그는 입단 후 팀의 에이스로서 매 경기 퀄리티 스타트를 기록하며 활약했습니다. 강력한 구위와 철저한 자기 관리로 팀의 마운드를 든든하게 지켰습니다. 콜의 영입은 양키스가 우승을 위해 자본력을 아끼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다시 한번 각인시켰습니다.
2020
[할 스타인브레너의 체제 안착]
아버지 조지의 뒤를 이은 할 스타인브레너 구단주가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구단 운영 시스템을 정착시켰습니다. 과거의 즉흥적인 영입보다는 데이터와 분석을 바탕으로 한 장기적 관점의 투자를 선호했습니다. 양키스는 비즈니스적으로도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스포츠 구단으로 성장했습니다.
사치세 관리와 유망주 육성에도 심혈을 기울이며 과거와는 다른 운영 방식을 보였습니다. 포브스 선정 야구 구단 가치 1위를 꾸준히 유지하며 브랜드 파워를 과시했습니다. 그의 리더십 아래 양키스는 현대적인 데이터 야구의 선두 주자로 발돋움했습니다.
2022
[애런 저지의 62호 홈런]
애런 저지가 시즌 62호 홈런을 터뜨리며 로저 매리스가 보유했던 아메리칸 리그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61년 만에 경신했습니다. 약물 논란이 없는 청정 홈런왕으로서 야구의 정통성을 수호했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 홈런은 전 세계 야구팬들에게 전율을 선사한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텍사스 원정 경기에서 선두 타자로 나서 담장을 넘기며 신기록을 달성했습니다. 시즌 내내 홈런을 칠 때마다 전 미국이 생중계를 지켜볼 정도로 관심이 뜨거웠습니다. 이 기록으로 저지는 2022년 아메리칸 리그 MVP를 차지하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제16대 캡틴 임명]
FA 자격을 얻었던 애런 저지가 9년 3억 6,000만 달러의 초대형 계약과 함께 팀에 잔류하며 제16대 주장에 임명되었습니다. 데릭 지터 이후 8년간 공석이었던 양키스 캡틴의 자리를 공식적으로 이어받았습니다. 구단은 저지를 팀의 영원한 얼굴로 확정 지으며 우승의 의지를 다졌습니다.
스타인브레너 구단주는 저지의 가치를 인정하며 파격적인 대우를 약속했습니다. 주장 임명은 저지가 단순한 선수를 넘어 팀의 정신적 지주임을 인정한 것입니다. 저지는 "양키스에서 은퇴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히며 팬들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습니다.
2023
[게릿 콜의 사이영상 수상]
에이스 게릿 콜이 압도적인 성적으로 생애 첫 아메리칸 리그 사이영상을 수상하며 양키스 투수의 자존심을 세웠습니다. 팀 성적이 다소 부진했던 상황에서도 묵묵히 마운드를 지키며 최고의 활약을 펼쳤습니다. 양키스 투수로서는 로저 클레멘스 이후 22년 만의 수상입니다.
리그 최다 이닝과 최저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받았습니다. 콜은 수상 소감에서 동료들과 가족, 그리고 양키스 구단에 감사를 표했습니다. 이 수상으로 그는 메이저리그 역사에 남을 위대한 투수 중 한 명으로 공인받았습니다.
[후안 소토의 블록버스터 영입]
샌디에이고 파드리스로부터 천재 타자 후안 소토를 트레이드로 영입하며 타선의 파괴력을 극대화했습니다. 저지와 소토라는 리그 최고의 타자 두 명을 한 라인업에 배치하며 '공포의 외야진'을 완성했습니다. 우승을 갈망하는 양키스의 공격적인 투자가 다시 한번 빛을 발했습니다.
소토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완성된 타격 기술과 선구안을 가진 선수입니다. 저지와 소토의 조합은 상대 투수들에게는 피할 곳 없는 가혹한 선택을 강요했습니다. 이 영입은 2024년 시즌을 앞두고 양키스를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로 올려놓았습니다.
2024
[2024년 아메리칸 리그 우승]
뉴욕 양키스가 2024년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2009년 이후 15년 만의 리그 우승입니다.
뉴욕 양키스가 2024년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구단 통산 41번째 리그 우승이며, 2009년 이후 15년 만에 리그 정상에 오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