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닉스
연표
1946
[닉스의 탄생]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소유주인 네드 아이리시가 농구단 창단을 결정하며 뉴욕 닉스가 출범했습니다. 팀 명칭은 뉴욕의 초기 정착민들을 지칭하던 '니커보커스(Knickerbockers)'에서 유래했습니다. BAA(NBA의 전신)의 창립 멤버로서 역사적인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네드 아이리시는 당시 대학 농구의 성지였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 프로 농구단을 유치하고자 했습니다. 팀의 공식 명칭은 '뉴욕 니커보커스'이지만 대중적으로는 짧게 '닉스'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창단 멤버로서 리그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리그 첫 경기 승리]
토론토 허스키스와의 역사적인 리그 개막 경기에서 68-66으로 승리했습니다. 이는 BAA 리그 전체의 첫 경기이자 닉스 구단 역사상 첫 승리로 기록되었습니다. 레오 고틀리브가 팀의 최다 득점자인 14점을 기록하며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당시 경기는 토론토의 메이플 리프 가든에서 열렸으며 7,000명 이상의 관중이 운집했습니다. 첫 골은 닉스의 오시 슈엑트먼이 기록하며 NBA 역사상 첫 득점자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이 승리는 닉스가 리그 내 강력한 경쟁자로 자리 잡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1947
[랩칙 감독의 부임]
전설적인 감독 조 랩칙이 지휘봉을 잡으며 팀의 체계를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강력한 리더십으로 닉스를 리그 상위권 팀으로 변모시켰습니다. 랩칙 체제 아래 닉스는 매 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리는 강팀이 되었습니다.
조 랩칙 감독은 대학 농구에서 명성을 쌓은 후 닉스에 합류하여 프로 무대에 적응했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닉스는 안정적인 경기력을 보여주며 팬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전술적인 안목이 뛰어났던 그는 1950년대 초반의 황금기를 준비하는 기틀을 닦았습니다.
1951
[첫 파이널 진출]
로체스터 로열스를 상대로 사상 첫 NBA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습니다. 시리즈 전적 0승 3패의 열세를 딛고 7차전까지 가는 끈질긴 추격전을 보여주었습니다. 비록 우승컵은 놓쳤으나 뉴욕 농구의 저력을 전 세계에 알린 사건이었습니다.
닉스는 3연패 후 3연승을 거두는 기적 같은 저력을 보여주며 7차전까지 승부를 끌고 갔습니다. 7차전에서 4점 차로 아쉽게 패배했으나 이 투혼은 구단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후 닉스는 3년 연속 파이널 진출이라는 위업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1952
[두 번째 준우승]
미니애폴리스 레이커스와의 파이널 대결에서 다시 한번 7차전 접전을 벌였습니다. 당시 최강이었던 조지 마이칸의 벽을 넘지 못하고 아쉬운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닉스는 명실상부한 동부 컨퍼런스의 강자로 공인받았습니다.
시리즈 내내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벌이며 관중들을 열광시켰습니다. 빅맨 전력이 다소 약했던 점이 결정적인 순간에 발목을 잡았습니다. 2년 연속 파이널 준우승은 팬들에게 깊은 아쉬움과 동시에 우승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었습니다.
1953
[3년 연속 파이널]
또다시 파이널에 진출하며 3년 연속 우승에 도전했으나 이번에도 레이커스에 가로막혔습니다. 닉스는 당시 NBA 역사상 최초로 3년 연속 준우승이라는 진기록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강력한 전력을 갖추었음에도 마지막 한 고비를 넘지 못한 시기였습니다.
해리 갤러틴과 맥스 자슬로프스키 등 스타 플레이어들이 분전했습니다. 레이커스의 왕조 구축에 희생양이 된 측면이 있으나 팀의 위상은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이후 닉스는 긴 세대교체의 시기를 맞이하며 잠시 주춤하게 됩니다.
1964
[윌리스 리드 드래프트]
드래프트 2라운드에서 센터 윌리스 리드를 지명하며 구단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열었습니다. 그는 입단 첫해 신인왕을 차지하며 팀의 핵심 전력으로 급부상했습니다. 리드는 훗날 닉스의 영혼이자 리더로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게 됩니다.
윌리스 리드는 강력한 피지컬과 부드러운 중거리 슛을 겸비한 센터였습니다. 당시 2라운드 지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리그를 지배하는 선수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존재는 닉스가 1960년대 중후반 강팀으로 재건되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1967
[클라이드 프레이저 지명]
드래프트 1라운드 5순위로 월트 '클라이드' 프레이저를 지명하며 최강의 백코트를 구축했습니다. 그는 화려한 패션 감각과 더불어 리그 최고의 수비력과 경기 운영 능력을 선보였습니다. 프레이저는 윌리스 리드와 함께 닉스의 황금기를 이끄는 쌍두마차가 되었습니다.
프레이저는 가로채기와 어시스트 능력에서 독보적인 재능을 발휘했습니다. 그의 세련된 스타일은 뉴욕이라는 도시의 이미지와 완벽하게 부합했습니다. 이후 그는 닉스 역사상 최고의 포인트 가드 중 한 명으로 기억됩니다.
[레드 홀즈먼의 부임]
팀의 스카우트이자 코치였던 레드 홀즈먼이 감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수비 우선'과 '팀워크'를 강조하는 철학으로 닉스의 농구 색깔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홀즈먼 감독 체제 아래 닉스는 마침내 우승할 수 있는 완벽한 팀으로 변모했습니다.
홀즈먼 감독은 선수들에게 이타적인 플레이와 헌신적인 수비를 요구했습니다. 그의 전술 아래 개성 강한 스타들이 하나의 유기적인 팀으로 묶였습니다. 그는 닉스 구단 역사상 유일하게 두 번의 우승을 안긴 전설적인 감독으로 남았습니다.
1968
[네 번째 가든의 개장]
현재 위치인 펜실베이니아 역 위에 지어진 네 번째 매디슨 스퀘어 가든으로 홈 경기장을 이전했습니다. 최첨단 시설을 갖춘 새로운 안방에서 닉스는 새로운 시대를 선언했습니다. 이곳은 곧 농구의 메카이자 뉴욕 스포츠의 심장이 되었습니다.
이전 경기장보다 압도적인 수용 인원과 화려한 조명 시설을 갖추었습니다. 개장과 동시에 닉스는 홈 관중들의 열광적인 응원을 등에 업고 승승장구했습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은 이후 닉스 정체성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었습니다.
1969
[18연승의 대기록]
단일 시즌 18연승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을 세우며 리그 전체를 경악하게 만들었습니다. 강력한 수비를 바탕으로 모든 상대 팀을 압도하며 무패 행진을 이어갔습니다. 이 기록은 당시 NBA 역사상 최다 연승 기록으로, 닉스의 압도적인 전력을 증명했습니다.
윌리스 리드와 월트 프레이저 등 주축 선수들의 고른 활약이 돋보였습니다. 뉴욕 시민들은 매일 저녁 가든을 가득 메우며 팀의 연승 행진에 열광했습니다. 이 연승 기록은 시즌 종료 후 우승을 향한 강력한 전조가 되었습니다.
1970
[부상 투혼과 첫 우승]
LA 레이커스와의 파이널 7차전에서 부상당한 윌리스 리드가 절뚝거리며 코트로 돌아오는 영화 같은 장면을 연출했습니다. 리드의 등장은 동료들과 팬들에게 폭발적인 에너지를 불어넣었고, 닉스는 마침내 창단 첫 NBA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이 순간은 NBA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장면 중 하나로 꼽힙니다.
리드는 경기 시작 전까지 출전이 불확실했으나 코트에 서는 것만으로 분위기를 바꿨습니다. 월트 프레이저는 36득점 19어시스트라는 경이로운 기록으로 실질적인 승리를 견인했습니다. 뉴욕시는 거리마다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고 닉스는 마침내 무관의 한을 풀었습니다.
1971
[얼 먼로의 영입]
라이벌 팀이었던 볼티모어 불렛츠에서 리그 최고의 가드 얼 먼로를 영입했습니다. 그와 월트 프레이저가 결성한 '롤스로이스 백코트'는 리그 역사상 가장 화려한 콤비로 불렸습니다. 두 천재 가드의 결합으로 닉스는 다시 한번 우승권 전력을 갖추었습니다.
처음에는 두 스타의 공존 여부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도 있었으나 곧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주었습니다. 먼로의 화려한 드리블과 득점력은 닉스의 공격에 창의성을 더했습니다. 이 영입은 2년 뒤 다시 한번 우승을 차지하는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1973
[두 번째 우승컵]
다시 한번 파이널에서 레이커스를 제압하며 구단 역사상 두 번째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시리즈 전적 4승 1패라는 압도적인 성적으로 최고의 팀임을 입증했습니다. 이는 닉스 역사상 가장 안정적이고 완벽한 시즌으로 평가받습니다.
윌리스 리드, 프레이저, 먼로, 드부셔 등 주전 전원이 명예의 전당 급 활약을 펼쳤습니다. 수비에서는 여전히 리그 최강의 조직력을 자랑하며 레이커스의 득점원을 차단했습니다. 이후 50년 넘게 이어질 긴 무관의 시작 전 마지막으로 맛본 최고의 영광이었습니다.
1974
[윌리스 리드의 은퇴]
팀의 심장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윌리스 리드가 부상 악화로 인해 은퇴를 선언했습니다. 그의 은퇴와 함께 닉스의 첫 황금기는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팬들은 가든을 가로질러 걷던 그의 마지막 뒷모습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리드는 닉스에서만 뛰며 두 번의 우승과 두 번의 파이널 MVP를 차지했습니다. 그의 번호 19번은 구단 역사상 최초로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그의 은퇴는 팀의 전력 손실 이상의 상징적인 손실을 의미했습니다.
1977
[프레이저의 이적]
팀의 상징이었던 월트 프레이저가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로 이적하며 황금기 멤버들과 완전히 결별했습니다. 닉스는 새로운 시대의 주역을 찾기 위해 리빌딩의 고통을 겪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프레이저가 남긴 화려한 기록과 기억은 뉴욕 농구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프레이저는 이적 전까지 닉스의 거의 모든 통계 항목에서 1위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이적 이후 닉스는 한동안 플레이오프 경쟁에서 멀어지며 암흑기에 진입했습니다. 그는 훗날 해설가로 복귀하여 현재까지도 닉스 팬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1982
[버나드 킹의 폭격]
리그 최고의 득점 기계인 버나드 킹이 팀에 합류하며 가든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는 매 경기 30점 이상을 쏟아부으며 뉴욕의 득점을 책임졌습니다. 킹의 화려한 공격 농구는 침체되었던 닉스 팬들에게 다시 즐거움을 선사했습니다.
1984년 크리스마스 경기에서 60득점을 기록하는 등 경이로운 퍼포먼스를 선보였습니다. 그는 불의의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닉스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득점원 중 한 명으로 군림했습니다. 킹의 활약으로 닉스는 다시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을 수 있었습니다.
1985
[로터리의 기적]
NBA 역사상 처음으로 도입된 드래프트 로터리 제도에서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하는 행운을 잡았습니다. 당시 대학 최고의 센터로 꼽히던 패트릭 유잉을 지명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닉스가 1990년대 전성기를 맞이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뉴욕 닉스가 1순위를 획득하자 조작 의혹이 제기될 정도로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 로터리 당첨은 암흑기에 빠져있던 닉스 구단에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패트릭 유잉은 지명 직후 뉴욕의 구세주로 추앙받기 시작했습니다.
[패트릭 유잉의 데뷔]
조지타운 대학교 출신의 패트릭 유잉이 마침내 가든에서 데뷔전을 치렀습니다. 그는 입단 첫 시즌 신인상을 수상하며 기대에 완벽히 보답했습니다. 유잉은 이후 15년 동안 닉스의 골밑을 지키며 구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 중 한 명이 됩니다.
데뷔 시즌부터 강력한 블록슛과 득점력을 뽐내며 리그를 긴장시켰습니다. 유잉의 등장은 닉스가 수비 중심의 팀 컬러를 확립하는 시작점이 되었습니다. 팬들은 그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챔피언십에 도전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습니다.
1988
[찰스 오클리의 영입]
시카고 불스에서 패트릭 유잉의 보디가드 역할을 수행할 찰스 오클리를 트레이드로 영입했습니다. 그의 합류로 닉스는 리그에서 가장 거칠고 터프한 수비 팀으로 변모했습니다. 오클리의 헌신적인 리바운드와 수비는 유잉이 공격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습니다.
오클리는 닉스에서 뛰는 동안 팀의 '블루칼라' 정체성을 상징하는 선수가 되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을 보호하고 골밑에서 육탄전을 마다하지 않는 투혼을 보여주었습니다. 유잉과 오클리의 골밑 조합은 90년대 닉스의 강력한 수비 벽을 구축했습니다.
1991
[팻 라일리 감독 부임]
레이커스에서 화려한 '쇼타임'을 이끌었던 팻 라일리 감독이 닉스의 사령탑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뉴욕의 팀 컬러에 맞춰 기존의 화려함을 버리고 처절할 정도로 강력한 수비 농구를 이식했습니다. 라일리 체제 하에 닉스는 리그에서 가장 상대하기 두려운 팀이 되었습니다.
상대를 몸싸움으로 압도하는 이른바 '진흙탕 농구'로 승수를 쌓아갔습니다. 패트릭 유잉을 중심으로 한 완벽한 수비 시스템을 구축하여 우승 후보로 거듭났습니다. 라일리 감독은 닉스에 승리에 대한 집념과 프로 정신을 다시 불어넣었습니다.
1992
[존 스탁스의 부상]
무명 선수였던 존 스탁스가 주전 가드로 도약하며 닉스의 활력소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그는 열정적인 플레이와 폭발적인 외곽슛으로 뉴욕 팬들의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스탁스와 패트릭 유잉의 조합은 90년대 초반 닉스 공격의 핵심이 되었습니다.
특히 조던의 불스를 상대로 보여준 '더 덩크(The Dunk)' 장면은 전설로 남았습니다. 기복은 있었으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터지는 그의 슛은 가든을 열광케 했습니다. 그는 닉스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성공 스토리를 가진 선수 중 하나입니다.
1994
[21년 만의 파이널]
시카고 불스와 인디애나 페이서스를 꺾고 마침내 21년 만에 파이널 무대에 진출했습니다. 휴스턴 로켓츠와 7차전까지 가는 혈투를 벌였으나 아쉽게 패배하며 준우승에 머물렀습니다. 패트릭 유잉 시대의 가장 빛났던 순간이자 가장 아쉬웠던 순간이었습니다.
7차전 막판 존 스탁스의 슛 부진이 뼈아픈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하킴 올라주원과 패트릭 유잉의 정통 센터 대결은 전 세계적인 관심을 모았습니다. 비록 준우승이었으나 닉스의 투혼 넘치는 수비 농구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1996
[앨런 휴스턴의 영입]
자유계약 시장에서 리그 최고의 슈터 중 한 명인 앨런 휴스턴을 영입하여 공격력을 보강했습니다. 그의 정교한 슛 터치는 닉스의 부족했던 화력을 메워주었습니다. 휴스턴은 이후 유잉의 뒤를 이어 팀의 차세대 에이스로 활약하게 됩니다.
아름다운 슛 폼으로 'H2'라는 별명을 얻으며 가든의 새로운 주역이 되었습니다. 수비 지향적인 팀에서 해결사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그의 영입은 90년대 후반 닉스가 경쟁력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1999
[8번 시드의 반란]
동부 컨퍼런스 8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강팀들을 차례로 꺾고 파이널에 오르는 기적을 선보였습니다. 이는 NBA 역사상 최초의 8번 시드 팀의 파이널 진출 사례였습니다. 래리 존슨의 4점 플레이와 앨런 휴스턴의 위닝샷이 빛난 시즌이었습니다.
마이애미 히트와의 라이벌 전에서 앨런 휴스턴의 버저비터로 승리하며 파란을 예고했습니다. 패트릭 유잉의 부상 공백 속에서도 팀워크로 승승장구했습니다. 샌안토니오와의 파이널에서 패했으나 뉴욕의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준 최고의 서사였습니다.
2000
[유잉 시대의 종언]
팀의 상징이었던 패트릭 유잉이 시애틀 슈퍼소닉스로 트레이드되며 한 시대가 마무리되었습니다. 15년간 뉴욕을 지탱했던 위대한 센터와의 이별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은 닉스가 긴 암흑기로 빠져드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구단과 선수 간의 불협화음 끝에 이루어진 다소 씁쓸한 이적이었습니다. 유잉은 닉스에서만 2만 득점 이상을 기록하며 구단의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습니다. 그의 등번호 33번은 훗날 가든 천장에 영구 결번으로 걸리게 됩니다.
2003
[아이제아 토마스의 부임]
전설적인 선수 출신인 아이제아 토마스가 구단 운영 부문 사장으로 부임했습니다. 그는 화려한 스타 플레이어들을 대거 영입하며 전력 보강에 힘썼으나 결과적으로는 실패로 끝났습니다. 막대한 연봉 지출에도 불구하고 성적은 바닥을 치며 구단 최악의 암흑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스테판 마버리 등 개성 강한 선수들을 영입했으나 팀워크 형성에 실패했습니다. 사생활 문제와 성희롱 소송 등 구단 밖에서도 끊임없이 구설에 올랐습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닉스는 리그의 웃음거리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2008
[마이크 댄토니의 공격 농구]
공격 농구의 대가인 마이크 댄토니 감독이 부임하여 닉스의 팀 컬러를 180도 바꾸려 시도했습니다. 빠른 속공과 3점 슛 위주의 전술로 팬들에게 잠시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수비 불안을 해결하지 못하며 성적 반등에는 한계를 보였습니다.
아이제아 토마스 시절의 잔재를 정리하고 새로운 문화를 정착시키려 노력했습니다. 그의 체제 하에서 다닐로 갈리날리 등 유망주들이 성장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우승과는 거리가 있었으나 현대적인 농구 트렌드를 도입한 시기였습니다.
2010
[아마레 스타더마이어 영입]
자유계약 시장에서 리그 최고급 빅맨인 아마레 스타더마이어를 영입하며 리빌딩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폭발적인 득점력으로 닉스의 공격을 주도하며 팬들을 다시 가든으로 불러 모았습니다. 스타더마이어는 닉스가 다시 경쟁력을 갖춘 팀임을 증명한 첫 번째 조각이었습니다.
부상 우려 속에서도 계약 첫해 9경기 연속 30득점 이상을 기록하며 활약했습니다. 뉴욕의 팬들은 그의 투지 넘치는 플레이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습니다. 그의 영입은 훗날 카멜로 앤서니가 합류하는 중요한 유인책이 되었습니다.
2011
[멜로 타임의 시작]
리그 최고의 득점원인 카멜로 앤서니를 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영입했습니다. 고향 팀으로 돌아온 그는 즉시 닉스의 절대적인 에이스로 군림하며 팀을 이끌었습니다. 앤서니의 합류로 닉스는 명실상부한 동부의 강호로 복귀했습니다.
수많은 유망주를 내주고 데려온 만큼 팬들의 기대와 우려가 공존했습니다. 앤서니는 특유의 아이솔레이션 득점 능력으로 가든을 매료시켰습니다. 그는 닉스에서만 7년 가까이 뛰며 팀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았습니다.
2012
[린새니티(Linsanity)의 열풍]
무명 선수였던 제레미 린이 갑작스럽게 선발 기회를 잡아 연속적인 승리를 이끄는 기적을 보여주었습니다. 전 세계적인 사회적 현상이 될 정도로 엄청난 열풍을 일으켰으며, 닉스는 잠시 동안 린을 중심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농구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한 달로 기록되었습니다.
코비 브라이언트의 레이커스를 상대로 38점을 폭격하는 등 믿기 힘든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아시아계 선수로서 인종적 편견을 깨뜨리며 수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었습니다. 비록 기간은 짧았으나 닉스 팬들에게 가장 강렬한 추억 중 하나를 선물했습니다.
2013
[지구 우승과 부활]
19년 만에 아틀란틱 디비전 우승을 차지하며 정규 시즌 동부 2위에 올랐습니다. 카멜로 앤서니가 득점왕을 차지하며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냈고, 타이슨 챈들러가 골밑을 든든히 지켰습니다. 90년대 이후 닉스가 거둔 가장 뛰어난 정규 시즌 성적이었습니다.
베테랑 선수들이 대거 합류하여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전력을 구축했습니다. 플레이오프 2라운드까지 진출하며 우승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팀의 노쇠화와 부상이 겹치며 성적이 급격히 하락했습니다.
2014
[필 잭슨 사장의 부임]
닉스 우승 멤버이자 전설적인 감독인 필 잭슨이 사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닉스를 다시 우승팀으로 만들겠다는 원대한 계획으로 큰 기대를 모았으나 독단적인 운영으로 실패했습니다. 자신의 철학인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강요하며 팀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스타 플레이어인 카멜로 앤서니와 끊임없이 불화를 겪으며 팀 분위기를 저해했습니다. 부적절한 트레이드와 드래프트 실패로 팬들의 원성을 샀습니다. 결국 3년 만에 초라하게 물러나며 구단 역사에 오점을 남겼습니다.
2015
[포르징기스의 탄생]
드래프트 4순위로 라트비아 출신의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를 지명했습니다. 지명 당시 팬들의 야유를 받았으나 놀라운 실력으로 야유를 환호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유니콘'이라 불리며 닉스의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습니다.
큰 키에 외곽슛과 블록슛 능력을 겸비한 현대 농구의 정점과 같은 선수였습니다. 신인왕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며 전 세계적인 유망주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후 구단과의 갈등 끝에 트레이드되며 아쉬운 이별을 맞이했습니다.
2017
[멜로 시대의 끝]
팀의 중심이었던 카멜로 앤서니가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로 트레이드되었습니다. 오랜 기간 닉스를 지켰던 에이스의 퇴장은 팀의 대대적인 리빌딩을 의미했습니다. 팬들은 우승을 안겨주진 못했지만 끝까지 뉴욕을 사랑했던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 트레이드를 기점으로 닉스는 본격적인 신인 위주의 팀 재건에 들어갔습니다. 앤서니는 닉스 역사상 최다 득점 상위권에 이름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가든의 주인이 사라진 자리는 한동안 공석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2019
[RJ 바렛의 지명]
드래프트 3순위로 캐나다 출신의 유망주 RJ 바렛을 지명했습니다. 그는 입단 전부터 '뉴욕을 사랑한다'는 발언으로 팬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습니다. 바렛은 리빌딩의 핵심으로서 묵묵히 성장하며 팀의 주축이 되었습니다.
성실한 태도와 다재다능한 능력으로 팀의 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가든의 압박감을 이겨내며 성숙한 플레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훗날 대형 트레이드의 카드로 사용될 때까지 닉스의 미래로 불렸습니다.
2020
[톰 티보도 감독 부임]
수비의 대가인 톰 티보도 감독이 부임하며 팀의 체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했습니다. 그는 90년대 닉스의 투혼 넘치는 수비 정신을 현대적으로 부활시켰습니다. 티보도 감독 부임 이후 닉스는 다시 플레이오프를 노리는 강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부임 첫해에 만년 하위권이던 닉스를 동부 4위로 이끌며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줄리어스 랜들을 리그 최고 수준의 올스타로 성장시키는 지도력을 보여주었습니다. 뉴욕 팬들은 다시 한번 가든에서 외치는 'Defense' 함성에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2022
[제일런 브런슨의 입성]
자유계약 시장에서 댈러스의 가드 제일런 브런슨을 영입하며 에이스 문제를 단번에 해결했습니다. 그는 영입 당시의 의구심을 비웃듯 가든의 새로운 주인으로 우뚝 섰습니다. 브런슨의 합류로 닉스는 우승권을 넘보는 진정한 강팀이 되었습니다.
폭발적인 득점력과 리더십으로 팀 전체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습니다. 중요한 승부처마다 해결사로 나서며 닉스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는 90년대 패트릭 유잉 이후 닉스가 가진 가장 확실한 1옵션으로 평가받습니다.
2023
[조쉬 하트의 합류]
트레이드를 통해 포틀랜드에서 조쉬 하트를 영입하며 팀의 에너지를 더했습니다. 브런슨과 빌라노바 대학교 동창인 그는 환상적인 호흡을 보여주며 팀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하트의 합류 이후 닉스는 더욱 끈질기고 거친 팀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가드임에도 불구하고 리바운드와 수비에서 엄청난 투혼을 보여주었습니다. 중요한 순간마다 허슬 플레이로 경기 분위기를 바꾸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팬들은 그의 헌신적인 모습에 매료되어 '뉴욕의 심장' 중 하나로 불렀습니다.
[OG 아누노비 트레이드]
유망주 RJ 바렛과 이매뉴얼 퀴클리를 내주고 리그 최고의 수비수 OG 아누노비를 영입하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그의 합류로 닉스의 수비력은 리그 최고 수준으로 도약했습니다. 아누노비는 티보도 감독 전술의 마지막 퍼즐과 같은 활약을 보여주었습니다.
합류 직후 팀의 연승 행진을 이끌며 즉각적인 효과를 입증했습니다. 모든 포지션을 수비할 수 있는 다재다능함으로 팀의 밸런스를 맞췄습니다. 이 트레이드는 닉스가 단순한 플레이오프 팀을 넘어 우승 후보로 거듭나는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2024
[동부 컨퍼런스 세미파이널 혈투]
주전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 악재 속에서도 인디애나 페이서스와 7차전까지 가는 처절한 승부를 펼쳤습니다. 부상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닉스의 농구는 전 미국을 감동시켰습니다. 비록 탈락했으나 뉴욕 농구의 부활을 알린 장렬한 퇴장이었습니다.
제일런 브런슨은 손 골절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 초인적인 활약을 이어갔습니다. 팬들은 경기 후 선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며 다음 시즌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이 시즌을 통해 닉스는 리그에서 가장 무서운 팀 중 하나로 공인받았습니다.
[미칼 브릿지스의 합류]
브루클린 네츠에서 미칼 브릿지스를 영입하며 이른바 '빌라노바 닉스'를 완성했습니다. 대학 시절 우승 멤버들이 뉴욕에서 다시 모인 이 사건은 팬들에게 엄청난 기대를 안겼습니다. 철강왕이라 불리는 그의 합류로 닉스의 뎁스는 더욱 두터워졌습니다.
막대한 드래프트 픽을 내준 만큼 우승을 향한 구단의 강력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공수 양면에서 흠잡을 데 없는 실력을 갖춘 브릿지스는 팀에 완벽히 녹아들었습니다. 동료들과의 끈끈한 유대감은 닉스의 새로운 무기가 되었습니다.
[칼-앤서니 타운스의 영입]
시즌 개막 직전 리그 최고급 빅맨인 칼-앤서니 타운스를 영입하는 파격적인 트레이드를 단행했습니다. 줄리어스 랜들을 내주는 아픔이 있었으나 강력한 외곽슛을 갖춘 센터를 확보하며 전력을 극대화했습니다. 이로써 닉스는 마침내 우승 가시권의 완벽한 주전 라인업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제일런 브런슨과 타운스의 원투 펀치는 리그 최강의 화력을 예고했습니다. 공간 창출 능력이 뛰어난 타운스의 합류로 티보도 감독의 전술은 더욱 다채로워졌습니다. 뉴욕 시민들은 1973년 이후 가장 강력한 우승 기회를 맞이했다며 흥분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