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로돔 시아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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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정치인, 영화 감독, 국가 원수 + 카테고리

캄보디아 왕족 출신인 노로돔 시아누크는 두 차례 국왕으로 재위하고 국가 원수를 지낸 핵심 인물입니다. 프랑스 식민 통치, 일본 점령, 독립, 내전, 다양한 정권을 거치며 캄보디아의 격동적인 역사를 이끌어 '국부'로 불립니다. 정치뿐만 아니라 영화 감독, 작곡가로도 활동한 다재다능한 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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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1922

[탄생]

캄보디아의 왕자 노로돔 수라마리트와 시소왓 코사막 공주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프랑스령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노로돔 수라마리트 왕자와 시소왓 코사막 공주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훗날 캄보디아의 국왕이자 정치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1941

[캄보디아 국왕 즉위]

외할아버지 시소와스 모니봉 국왕이 서거하자 왕위에 간택되어 프랑스령 캄보디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외할아버지이자 재종조부인 시소와스 모니봉 국왕이 서거한 후, 왕립위원회에 의해 왕으로 간택되어 프랑스령 캄보디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대관식은 같은 해 10월에 열렸다.

1945

[총리 취임 (1차)]

프랑스령 캄보디아의 초대 총리로 취임하여 같은 해 8월 13일까지 재임했다.

프랑스령 캄보디아의 초대 총리직을 맡아 짧은 기간 동안 국가를 이끌었다. 이 시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의 영향력이 강하던 때였다.

1950

[총리 취임 (2차)]

캄보디아 총리로 두 번째 취임하여 다음 달인 5월 30일까지 재임했다.

잠시 총리직에 복귀하여 한 달여 동안 캄보디아를 통치했다. 이는 그의 복잡한 정치 이력 중 하나였다.

1952

[모니끄 이지와 결혼]

여섯 번째 아내인 모니끄 이지(프랑스-이탈리아계 혈통의 캄보디아인)와 결혼했다.

1952년, 캄보디아 혈통이 섞인 프랑스-이탈리아계 여성인 모니끄 이지와 결혼했다. 그는 사치스럽고 자유분방한 생활로도 유명했다.

[총리 취임 (3차)]

캄보디아 총리로 세 번째 취임하여 다음 해 1월 24일까지 재임했다.

세 번째로 캄보디아 총리직을 수행했으며, 이 시기에 그의 정치는 보다 국수주의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하여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강력히 요구했다.

1953

[캄보디아 독립 확정]

프랑스로부터 캄보디아의 완전한 독립을 확정받아 국가의 주권을 되찾았다.

프랑스로부터 캄보디아의 완전한 독립을 쟁취하여 오랜 식민 지배를 끝냈다. 이는 시아누크의 국수주의적 정치 노선이 결실을 맺은 중요한 사건이었다.

1954

[총리 취임 (4차)]

캄보디아 왕국의 총리로 취임하여 같은 해 4월 18일까지 재임했다.

캄보디아 왕국의 총리로서 잠시 국정을 운영했다. 그의 정치 인생에서 총리직은 여러 차례 역임한 중요한 직책이었다.

1955

[국왕직 퇴위 및 정치 활동 시작]

국왕직에서 퇴위하고 아버지 노로돔 수라마리트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직접 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왕위에서 물러나 아버지 노로돔 수라마리트에게 왕위를 계승하고 평민공동사회(Sangkum)를 조직하여 직접 정치인으로 활동하는 새로운 길을 택했다.

[총리 취임 (5차)]

그가 속한 평민공동사회(Sangkum)가 총선에서 승리하면서 캄보디아 총리로 취임했다.

국왕직에서 퇴위한 후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그가 이끄는 평민공동사회(Sangkum)가 1955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두면서 다시 총리직에 올랐다. 그는 일당 체제로 국가를 통치하며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다.

1956

[총리 취임 (6차)]

캄보디아 총리로 여섯 번째 취임하여 같은 해 3월 24일까지 재임했다.

캄보디아 왕국의 총리로서 국정을 운영했다. 이 시기에도 그는 중립국을 표방하면서도 공산권에 가까운 외교 노선을 취했다.

[총리 취임 (7차)]

캄보디아 총리로 일곱 번째 취임하여 다음 달 10월 15일까지 재임했다.

잠시 총리직을 다시 맡아 국정을 이끌었다. 그의 총리직은 재위 기간과 퇴위 후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1957

[총리 취임 (8차)]

캄보디아 총리로 여덟 번째 취임하여 같은 해 7월 7일까지 재임했다.

다시 한번 캄보디아 왕국의 총리로서 국정에 참여했다. 그는 중립 외교를 표방하며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캄보디아의 위치를 모색했다.

1958

[총리 취임 (9차)]

캄보디아 총리로 아홉 번째 취임하여 1960년 4월 19일까지 재임했다.

가장 오랫동안 총리직을 수행한 기간 중 하나로, 이 시기 동안 그는 캄보디아의 내정을 안정시키고 중립 외교 노선을 유지하는 데 집중했다.

1960

[캄보디아 국가 원수 취임]

아버지 노로돔 수라마리트의 서거 이후, 캄보디아의 국가 원수 직책을 맡아 실질적인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

부왕 노로돔 수라마리트의 서거 후, 국왕 대신 '국가 원수' 직책을 맡아 캄보디아의 최고 지도자로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국가를 통치했다.

1961

[총리 취임 (10차)]

캄보디아 총리로 열 번째 취임하여 다음 해 2월 13일까지 재임했다.

국가 원수직을 수행하면서 총리직을 겸임하며 국정을 이끌었다. 이는 그의 정치적 영향력을 보여주는 단면이었다.

1970

[캄보디아 쿠데타로 실각 및 망명]

론 놀 주도의 쿠데타로 국가 원수직에서 실각하고, 중국과 북한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캄보디아에서 론 놀이 주도한 쿠데타가 발생하여 국가 원수직에서 축출되었다. 그는 중화인민공화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망명하며 국제적인 망명 생활을 시작했다.

1975

[크메르 루주 정권 복귀]

크메르 루주가 정권을 장악한 후 캄보디아 국가 원수(국가상임위원회 주석)로 복귀했으나, 사실상 상징적인 존재였다.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를 장악하자, 폴 포트가 이끄는 정권의 상징적인 국가 수반인 국가상임위원회 주석으로 복귀했다. 그는 캄보디아 내전 기간 중 크메르 루주를 지지했었다.

1976

[크메르 루주에 의해 사임 및 가택 연금]

크메르 루주 정권과의 관계 악화로 국가 원수직에서 사임하고 1979년까지 가택 연금되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이 그를 직위에서 박탈하고 정치 은퇴를 강요하여 사임했다. 이후 베트남-캄보디아 전쟁이 발발한 1979년까지 가택에 연금되는 수모를 겪었다.

1978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크메르 루주 정권이 축출되는 혼란 속에서 가택 연금에서 풀려났다.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침공하여 크메르 루주 정권을 축출했다. 이로 인해 시아누크는 가택 연금에서 풀려나 유엔에 베트남을 성토하기 위해 뉴욕에 파견되었다.

1981

[저항 정당 푼신펙 창당]

다시 망명 생활 중 저항 정당인 푼신펙(FUNCINPEC)을 창당하여 정치적 활동을 재개했다.

가택 연금에서 풀려난 후 다시 망명지에서 활동을 시작,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에 저항하기 위해 푼신펙(FUNCINPEC)을 창당하며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1982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CGDK) 대통령 취임]

푼신펙, 손산의 KPNLF, 크메르 루주로 구성된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CGDK)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베트남과 대적하기 위해 푼신펙, KPNLF, 크메르 루주 등 세 개의 세력이 연합한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CGDK)의 수반이 되어 국제 사회에서 캄보디아의 정통 정부 대표로 인정받았다.

1990

[캄보디아 최고국가위원회(SNC) 위원장 취임]

캄보디아의 주권 문제를 감독할 과도 기구인 캄보디아 최고국가위원회(SNC)의 위원장이 되었다.

민주 캄푸치아 연합정부와 캄푸치아 인민공화국 간의 평화 협상이 진전되면서 캄보디아의 주권 이양 과정을 관리할 과도 기구인 최고국가위원회(SNC)의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1991

[캄보디아 귀국]

파리 평화 협정이 타결된 후 13년에 걸친 망명 생활을 마치고 캄보디아로 귀국했다.

CGDK와 PRK 간의 평화 협상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고 파리 평화 협정이 체결되면서, 그는 13년에 달하는 오랜 망명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 캄보디아로 돌아왔다.

1993

[캄보디아 국왕 재즉위]

유엔 캄보디아 과도 통치기구가 주관한 총선 이후 왕실 회의에 의해 캄보디아 국왕으로 재임명되었다.

1993년 캄보디아 총선 이후 훈 센과 아들 노로돔 라나리드의 연립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는 왕실 회의의 결정에 따라 다시 캄보디아의 국왕으로 즉위했다.

2004

[국왕직 퇴위]

건강 문제로 인해 국왕직에서 퇴위하고 왕위를 아들 노로돔 시하모니에게 물려주었다.

건강 악화로 인해 국왕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아들 노로돔 시하모니에게 왕위를 계승시켰다. 이후 그는 '국부'로서 존경받는 삶을 살았다.

2012

[사망]

중국 베이징에서 건강 악화로 인해 향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004년 국왕직에서 퇴위한 이후 건강 문제로 자주 치료를 받기 위해 베이징을 오가다가, 결국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에서 향년 89세의 일기로 서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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