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인수
연표
1918
[트로트 황제의 탄생]
경상남도 진주에서 최창수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이후 강문수로 개명했으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1918년 10월 18일 경상남도 진주에서 최창수라는 이름으로 출생했습니다. 이후 강문수로 개명하였고, 다소 불우한 유년 및 청소년 시절을 보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1932
1932년 진주 봉래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학적부 기록을 통해 확인된 사실입니다.
1936
['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 첫발]
9세 소년 시인 김상화 작가의 시에 곡을 붙인 〈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하며 가수로서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1936년 당시 9세 소년 시인이었던 김상화 작가의 시에 곡을 붙인〈눈물의 해협〉으로 가요계에 데뷔했습니다.
1938
['애수의 소야곡'으로 스타덤에 오르다]
데뷔곡 〈눈물의 해협〉을 이부풍 작사가가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으며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미성'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1938년 데뷔곡을 이부풍이 개사한 〈애수의 소야곡〉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약 20여 년간 최고의 인기를 누리게 됩니다. 시에라레코드를 통해 데뷔했으나 오케레코드에서 스타가 되었으며, '백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미성의 가수 탄생'으로 크게 선전되었습니다.
1942
대표작 중 하나인 〈낙화유수〉를 발표하여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1943
[강제 동원 가요 취입]
일제강점기 말,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혈서지원〉, 〈그대와 나〉 등 강제 동원 가요를 군국 일제에 의해 취입했습니다. 이는 훗날 친일 논란의 중심이 됩니다.
일제강점기 말기, 백년설, 박향림과 함께 부른 〈혈서지원〉을 비롯하여 〈그대와 나〉, 〈아들의 혈서〉 등 태평양 전쟁을 지원하는 강제 동원 가요를 군국 일제에 의해 취입하였습니다.
1947
광복 후 대중의 마음을 울리는 대표곡 〈가거라 삼팔선〉을 발표했습니다.
1949
대중에게 큰 사랑을 받았던 대표곡 〈달도 하나 해도 하나〉를 발표했습니다.
['여수야화', 대한민국 최초 금지곡으로 지정되다]
여순사건을 다룬 곡인 〈여수야화〉가 대한민국 최초로 금지곡으로 지정되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1949년 9월 1일, 여순사건을 다룬 곡 〈여수야화〉가 대한민국 최초의 금지곡으로 지정되었습니다.
1954
[대표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발표]
한국 전쟁의 아픔을 담은 대표적인 히트곡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발표하여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었습니다.
한국 전쟁 후 발표된 〈이별의 부산정거장〉은 전쟁으로 인한 이별의 아픔을 담아내며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1955
대중에게 깊은 울림을 준 대표곡 〈추억의 소야곡〉을 발표했습니다.
1956
남인수의 애절한 가창력이 돋보이는 대표곡 〈산유화〉를 발표했습니다.
1959
그의 말년의 대표곡 중 하나인 〈무너진 사랑탑〉을 발표하며 여전한 인기를 과시했습니다.
1962
[가요 황제, 폐결핵으로 영면하다]
한국연예인협회 부이사장과 대한가수협회 회장을 역임한 뒤,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장례식은 연예협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1962년 6월 26일, 폐결핵으로 영면했습니다. 사망 전 한국연예인협회 부이사장, 대한가수협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장례식은 연예협회장으로 치러져 그의 위상을 짐작케 했습니다.
2005
[진주 생가 문화재로 지정]
그의 고향인 진주의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후 동상과 노래비도 세워졌습니다. (※ 문화재 지정은 8년 후 해제되었으나, 지정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합니다.)
2005년 4월 18일, 경남 진주에 위치한 그의 생가가 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이후 동상과 노래비도 건립되었으나, 문화재 지정은 8년 후 근거 부족을 이유로 해제되었습니다.
2008
2009
[친일반민족행위 심의 기각]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로 올랐으나, 당시 대중 가수의 사회적 위상이 낮았다는 점이 인정되어 기각되었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남인수를 친일반민족행위 결정 심의 대상자 명단에 올렸습니다. 하지만 대중 가수가 갖고 있던 당시의 사회적 위상이 상대적으로 낮았다는 사실이 인정되어 최종적으로 기각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