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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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회담, 남북 관계, 정치 외교 + 카테고리

남북정상회담은 분단 70여 년간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향한 양측 최고 지도자들의 역사적인 만남이었습니다. 때로는 극적인 합의로 희망을 때로는 급작스러운 중단으로 아쉬움을 남겼지만 남북 관계의 큰 흐름을 결정지어 온 핵심적인 외교 무대였습니다. 분단 최초의 만남부터 핵 위기 속 대화까지 세계가 주목하는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며 한반도의 미래를 그려나갔습니다.

주요사건만
최신순

연표

1961

[북한 첫 공식 특사 파견]

북한은 한국의 정치회담 제안을 받아들여 황태성을 특사로 남파했습니다.그는 남북협상회의와 외세 간섭 없는 통일 논의를 제안했지만, 안타깝게도 간첩 누명을 쓰고 체포되면서 첫 공식 특사 활동은 비극으로 끝났습니다.

황태성 특사는 남북 비밀무역대표부 설치도 제안했으나 결국 체포되어 남북 대화의 문이 열리기도 전에 닫히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1971

[김일성, 접촉 용의 표명]

김일성 주석은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면서도 남측의 다양한 단체 및 인사들과 접촉할 용의가 있다고 밝히며 남북 관계에 다시 한번 대화의 물꼬를 트는 유화적인 제스처를 보였습니다.

이후 남북적십자회담이 진행되는 등 관계 개선의 움직임이 보였습니다.

1972

[이후락 특사 비밀 방북]

한국의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으로 최초로 비밀 방북하여 김일성 주석을 만났습니다.이 만남은 역사적인 7.4 남북 공동 성명 발표의 중요한 초석이 되었으며, 분단 이후 최고위급의 첫 비밀 접촉으로 기록됩니다.

이후 북한은 박성철 부수상을 서울로 보내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상회담을 제의하는 등 상호 간의 교류가 이어졌으나, 결국 정상회담은 성사되지 못했습니다.

1981

[전두환, 김일성 초청 제안]

전두환 대통령은 국정연설에서 김일성 주석의 서울 초청과 남북 최고지도자의 상호 방문을 공개적으로 제안했습니다.과거를 묻지 않고 평화통일을 주도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전두환 정부의 첫 정상회담 제의였습니다.

당시 주미 공사는 전두환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의 독립운동을 존경한다고 언급하며 직접 만나 해결 방안을 찾길 원했다고 밝혔습니다.

1983

[아웅 산 테러로 관계 경색]

남북 간 화해 분위기가 무르익던 시기, 미얀마에서 아웅 산 묘역 테러 사건이 발생하며 남북 관계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이 사건으로 한반도에 극심한 위기가 고조되었습니다.

당시 대북 밀사로 활동하던 임창영 전 UN 대사는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두 정상이 만나야 한다는 긴박감을 느끼며 분위기 반전을 시도했으나, 전두환 대통령은 정상회담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1985

[박철언, 비밀회담 주도]

1985년부터 1991년까지 박철언은 무려 42차례에 걸쳐 북한과 비밀회담을 진행하며 남북 관계 개선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이 장기간의 물밑 협상은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이라는 중요한 성과를 이끌어냈습니다.

박철언의 이러한 활동은 냉전 시대 남북 간의 의사소통을 유지하고 중요한 합의를 도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허담 방남, 물밑접촉 지속]

아웅 산 테러 이후에도 남북 간 물밑 접촉은 꾸준히 이어졌습니다.북한의 허담 등이 방남하여 전두환 대통령을 예방하는 등 대화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노력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어 장세동 등이 방북하여 정상회담을 논의하려 했으나, 언론 보도와 북한의 기존 요구 반복으로 진전을 보지 못했습니다.

[간첩선 침투, 관계 악화]

남북 관계가 잠시 기대감을 주던 찰나, 북한의 무장간첩선이 부산으로 침투하다 격침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이로 인해 전두환 대통령은 김일성에게 배신감을 느끼며 전두환 정부의 정상회담 추진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습니다.

훗날 박철언은 회고록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서울올림픽 시 북한의 적대 행위 방지에 목적이 있었을 뿐, 정상회담 자체에는 목표가 없었으며, 한국 내 보수 세력과 미국의 견제로 무산되었다고 주장했습니다. 이후 '평화의 댐' 사건은 북한 인식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었습니다.

1988

[노태우, 정상회담 제의]

노태우 대통령은 취임 후 '7.7 선언'을 발표하며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섰고, 8.15 경축사에서 '민족 간 분단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며 남북정상회담을 공식적으로 제의했습니다.

이후 김일성 주석은 인민정권 창건일 하루 전 통일 문제 논의를 위한 위원회 설립을 전제로 평양 정상회담 개최 용의를 밝혔으나, 주한 미군 철수와 상호 불가침 조약 체결 등 기존 요구를 반복했습니다.

1990

[북한, 정상회담 거부]

노태우 대통령이 다시 연두 기자회견에서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촉구했으나, 김일성 주석은 당국·정당수뇌협상회의 소집을 주장하며 정상회담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 해 10월, 김일성 주석은 태도를 바꿔 방북한 강영훈 총리에게 노태우 대통령과의 최고위급회담이 빨리 개최되도록 노력해달라는 입장을 전하며 다시 한번 정상회담 가능성에 불씨를 지폈습니다.

1991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 가입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이는 남북한이 국제사회에서 각각의 국가로 인정받는 중요한 진전을 의미하며,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은 순간이었습니다.

이후 1992년 2월에는 '남북 기본합의서'를 체결하며 관계 개선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1992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

남북한은 '남북 기본합의서'를 체결하며 관계 진전의 상징적인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이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남북 간 화해와 불가침, 교류협력에 대한 큰 틀의 합의를 이룬 것으로, 평화 공존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당시 김우중 회장은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20번 이상 만나며 정상회담을 전제로 합의서 체결을 추진했다고 증언했으나, 노태우 대통령은 군부와 보수의 저항을 우려하여 결국 정상회담을 성사시키지 못했습니다.

1993

[한국, 핵 문제 우선 강조]

김영삼 정부는 남북 관계에서 '핵 문제'를 최우선으로 다루어야 한다는 내부적인 의견을 모았습니다.이는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한 우려가 커지던 당시 상황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주석도 오스트리아 대사를 통해 핵 문제를 포함한 정치·경제·군사 문제를 논의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혀, 핵 문제 해결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듯 보였습니다.

[입장 차이로 논의 경색]

남북한이 핵 문제와 특사 교환을 놓고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면서 남북 관계는 다시 경색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서로 비난 성명을 주고받으며 정상회담 논의는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강성산 북한 총리는 김영삼 대통령이 전쟁열을 고취한다고 비난했고, 오인환 한국 공보처 장관은 북한 측의 성의 있는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등 공방이 이어졌습니다.

1994

[김영삼, 회담 용의 천명]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다시 한번 핵 문제를 비롯한 통일 문제, 경제 협력 등 모든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 용의가 있음을 천명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 주석은 '핵 문제를 거론하며 북남관계를 해결하려는 것 자체가 성급하고 잘못된 사고 방식'이라며 회담을 거부했습니다. 이후 제1차 북핵위기가 발생하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제1차 북핵위기 발생]

북한의 핵 개발을 둘러싼 북미 간의 입장 차이가 심화되면서 '제1차 북핵위기'가 발생했습니다.이는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을 최고조로 끌어올린 심각한 사건이었습니다.

연료봉 교체 시 샘플 채취와 방사화학실험실 추가 사찰 허용 문제로 북미 사이가 멀어졌습니다.

[카터, 정상회담 물꼬 터]

제1차 북핵위기 속에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중재자로 나섰습니다.그는 김영삼 대통령과 회동 후 김일성 주석을 만나 정상회담을 수락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하며 새로운 국면을 열었습니다.

이후 6월 28일 실무협상을 통해 7월 25일~27일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했습니다. 당초 한국은 김일성의 8월 서울 방문도 추진했으나 북한의 미온적인 태도로 무산되었습니다.

[김일성 사망, 회담 무산]

평양에서 개최 예정이었던 첫 남북정상회담을 약 2주 앞두고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여 무산되었습니다. 이후 김영삼 정부의 대북 정책은 강경 노선으로 변경되었습니다. 당시 김영삼 대통령의 대북 정책이 강경 노선으로 바뀐 것은 김정일의 권력 승계 불확실성 때문이었습니다.

1998

[WEF, 회담 추진 실패]

김대중 정부 출범 후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던 중, 세계 경제 포럼(WEF)에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만남이 추진되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습니다.당시 정부는 이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클라우스 슈바프 WEF 회장이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김정일 위원장의 불참으로 무산되었습니다.

1999

[북한, 정상회담 가능성 언급]

제1연평해전으로 남북 관계가 최악이던 상황에서 북한 백남순 외무상은 '7.4 성명 3대 원칙 존중'과 '협상 제의 응답'을 전제로 정상회담 가능성을 언급하며 대화의 여지를 남겼습니다.

이어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방북하여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남북 경협 사업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 등 민간 교류가 활성화되었습니다.

2000

[첫 정상회담 공식 발표]

김대중 정부와 북한은 6월 12일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한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이는 북한이 개방과 경제 발전을 통해 체제 유지가 용이하다고 판단하면서 태도 변화를 보인 결과였습니다.

분단 50여 년 만에 양측 최고 지도자가 만나는 초유의 사건이 예고되며 한반도와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습니다.

[분단 첫 남북정상회담 개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만났습니다. 이는 한반도 평화의 새로운 장을 여는 계기였습니다. 공항 마중 및 의장대 사열이 거행되었습니다.

[6.15 남북 공동선언 발표]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로 '6.15 남북 공동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이 선언은 남북이 전쟁을 포기하고 통일 문제를 대화로 해결한다는 원칙을 세우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청신호를 보냈습니다.이는 국제사회에서도 크게 환영받았습니다.

G8, 아시아 유럽 정상회의, 유엔 총회 등 국제기구에서 한반도 평화 지지 결의안이 잇따라 채택되며 전 세계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2001

[미국 대북 강경책 전환]

조지 W.부시가 새 미국 대통령으로 취임하면서 대북 강경책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이는 남북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고, 정상회담 이후에도 큰 진전을 보이지 못하던 남북 관계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정상회담과 이어진 장관급 회담에서 발표된 수많은 합의 사항들이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으며, 특히 정상회담 직후 개최된 당국 간 회담이 결렬되면서 대화조차 쉽지 않아졌습니다.

2002

[제2연평해전 발발]

서해에서 제2연평해전이 발발하며 남북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습니다.이 사건은 김대중 정부 말부터 사그라들던 통일 문제에 다시 한번 찬물을 끼얹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북한은 '한국의 선제 공격'이라고 주장하며 남북 관계 냉각의 책임을 한국에 돌렸고, 2000년 정상회담과 관련된 대북송금 특검 등 남남갈등까지 겹치면서 노무현 정부 출범 당시 남북 관계는 냉각기에 접어들었습니다.

2003

[개성공업지구 착공]

지지부진하던 남북 관계는 개성공업지구 착공을 계기로 반전의 기회를 맞이했습니다.북핵 문제로 한미정상회담에서 '대결 방향'이 언급된 직후였기에 더욱 의미 있는 조치로 평가받았습니다.

개성공단은 남북 경제 협력의 상징이자 평화 정착의 중요한 발판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005

[정동영 장관 방북]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방북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회담했습니다.김정일은 기존의 '핵 문제는 북미 간 문제'라는 입장을 거두고 한국의 중재자 역할을 인정하며 2차 정상회담에 대한 기대감을 높였습니다.

이 회담에서 2차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6자 회담의 9.19 공동성명 이행에 제동이 걸리면서 결국 정상회담까지 표류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제재로 회담 무산]

2006

[북한, 첫 핵실험 강행]

북한은 7월 미사일 발사에 이어 10월에는 최초로 핵실험을 강행하며 한반도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이로 인해 청와대가 비밀리에 추진하던 정상회담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남북 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습니다.

청와대는 북한의 6자 회담 복귀와 남북 관계를 통한 위기 돌파를 모색했으나 북한의 호응이 없어 무산되었습니다.

2007

[2차 정상회담 개최 합의]

정부는 8월 28일부터 평양에서 남북정상회담을 개최하기로 합의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비핵화, 평화체제 구축, 군비 통제, 경제협력 등 실질적인 진전을 목표로 했으나, 17대 대선에 영향을 주려는 북한의 의도를 경계하는 목소리도 나왔습니다.

그러나 8월 7일부터 북한에 집중호우로 인한 수해가 발생하여 정상회담은 35일이나 연기되었습니다.

[10.4 남북정상선언 발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에서 '10.4 남북정상선언'을 발표했습니다.이 선언은 평화체제 구축, 종전 선언, 평화협정 논의, 군비 통제, 경제협력 등을 포함하며 한반도 평화의 로드맵을 제시했습니다.

특히 장관급회담을 총리급회담으로 격상하고 남북 정상이 수시로 만나 현안 문제를 협의하기로 약속하며 대화의 지속성을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북방한계선(NLL), 납북자, 국군포로 문제는 의제에 포함되지 않아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2008

[금강산 관광객 피격]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이 발생하면서 남북 관계는 급격히 얼어붙었고 장기 대치 국면으로 접어들었습니다.이 사건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 기조와 맞물려 남북 교류의 큰 벽이 되었습니다.

이후 북한은 2009년 1월 남북 간 체결된 모든 정치·군사적 합의사항의 무효화를 일방적으로 선언하며 관계 파탄을 공식화했습니다.

[이명박, 실용주의 천명]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언제든지 남북 정상이 만나자'고 제안하며 남북 관계를 이념의 잣대가 아닌 '실용의 잣대'로 풀어나가겠다고 천명했습니다.이는 이전 정부와는 다른 새로운 대북관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국내 정치를 위한 형식적인 정상회담은 갖지 않겠다'고 밝히며 실용주의 원칙을 강조했습니다. 3월 통일부 업무보고에서도 10.4 선언의 핵심 내용이 거의 포함되지 않아 북한을 대화 상대로 고려하지 않았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2009

[싱가포르 비밀 접촉]

대남 관계 경색 속에서 임태희 노동부 장관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싱가포르에서 비밀리에 만나 정상회담에 대한 기본 합의를 이뤘습니다.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 사망에 대한 북한 특사 조문단 방한 이후 관계 개선의 기대를 높인 일이었습니다.

중국 베이징과 상하이에서도 비밀 접촉이 이루어지며 북핵 문제, 식량 지원, 인도적 문제 등이 조율되었으나, 이후 개성 회담에서 국군포로·납북자 송환과 대규모 쌀 지원 문제로 이견이 해소되지 못해 결국 정상회담은 불발되었습니다.

2011

[북한, 비밀 접촉 폭로]

이명박 정부의 김천식 통일부 정책실장 등이 비밀 접촉에 나섰으나, 북한이 이를 폭로하고 심지어 돈 봉투까지 건네려 했다고 주장하며 녹음 내용을 공개해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이는 '정치적 고려 없이, 대가 없이, 투명하게' 정상회담을 추진하겠다던 정부의 신뢰성을 크게 훼손했습니다.

이번 폭로 사태는 한국 대북 정책의 아마추어리즘과 전문성 부족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으며, 특히 대북 강경파 인사가 협상에 나선 점이 북한의 진정성 의심을 샀다는 지적도 있었습니다.

2013

[2007년 회담 대화록 논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둘러싸고 NLL 포기 발언 논란이 불거지며 국내에서 극심한 남남갈등이 발생했습니다.여야는 '진실이다, 왜곡이다' 설전을 벌였고, 이는 남북 관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북한 역시 조평통 명의의 성명을 통해 '최고 존엄에 대한 우롱'이라며 강하게 반발했습니다. 이 사건은 박근혜 정부 출범 초 남북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했습니다.

2014

[북한 최고위급 3인 깜짝 방문]

2014년 아시안 게임 폐막식에 북한의 황병서 총정치국장, 최룡해 로동당 비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등 최고위급 실세 3인이 깜짝 방문했습니다.이들은 정홍원 국무총리 등 한국 고위 인사들과 짧은 면담을 가졌습니다.

황병서는 '좁은 오솔길을 냈는데 앞으로 대통로로 열어가자'며 관계 개선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하지만 한국 측의 청와대 예방 제안은 '시간 관계상 어렵다'며 거절되었고, 류길재 통일부 장관도 모르게 진행된 일이라는 보도가 나오며 비선 논란을 낳기도 했습니다.

2016

[북한 4차 핵실험 강행]

북한이 4차 핵실험을 강행하며 한반도에 또다시 큰 긴장을 불어넣었습니다.이 사건으로 남북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었고, 한국은 대북 확성기 방송을 재개하는 등 '강 대 강' 대치 상태로 접어들었습니다.

북한은 핵실험 성공을 자축하는 행사를 개최하며 도발을 이어갔고, 결국 2월에는 남북 경협의 상징이었던 개성공업지구 폐쇄 결정이 내려지면서 남북 관계는 더욱 불투명해졌습니다.

2017

[문재인, 평양 방문 의지 표명]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여건이 조성되면 평양에도 가겠다'고 말하며 정상회담 추진 의지를 강력하게 피력했습니다.이는 경색된 남북 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모았습니다.

이날 국정원장으로 임명된 서훈 역시 정상회담의 필요성을 강조했고, 통일부 차관에는 남북회담 경험이 풍부한 천해성을 임명하는 등 대북 정책에 대한 의지를 확고히 했습니다.

[베를린 구상 발표]

문재인 대통령은 독일에서 '베를린 구상'을 발표하며 '한반도의 긴장과 대치 국면을 전환시킬 계기가 된다면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혔습니다.이는 북한의 화성 14호 발사 직후 나온 발언으로, 속도 조절 예상을 깬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7월 27일 화성 14호를 다시 발사하고 9월에는 6차 핵실험까지 강행하는 등 강경한 태도로 대응하며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습니다.

2018

[김정은, 평창 계기 대화 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신년사를 통해 다가오는 2018년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간 대화 의지를 전격적으로 피력했습니다.한반도 평화를 위해 '누구에게도 대화와 접촉, 내왕의 길을 열어놓을 것'이라고 밝혀 분위기 반전의 단초를 제공했습니다.

청와대는 북한의 진의를 확인하면서도 '환영한다'는 공식 입장을 내놓으며 남북 관계 개선에 대한 기대를 높였습니다.

[김여정 특사, 한국 방문]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등이 북한 특사로 방한하여 문재인 대통령과 회담했습니다.이는 북한 최고 지도자의 직계 가족이 대한민국을 방문한 최초의 사례였습니다.

김여정은 문재인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의 친서를 전달하고, 평양 방문을 공식적으로 초청했습니다. 이 만남은 경색되었던 남북 관계의 급진적인 해빙 무드를 조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한국 특사, 김정은 면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등을 포함한 한국 특사단이 방북하여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면담 및 만찬을 가졌습니다.이 자리에서 남북 정상회담 개최에 대한 구체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습니다.

이후 남북은 4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상회담을 진행하기로 합의하며 역사적인 만남을 예고했습니다.

[1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역사적인 1차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했습니다.양 정상은 분단 이후 최초로 판문점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감동적인 장면을 연출했고, '판문점 선언'을 채택하여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 정착을 위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두 정상은 오전부터 저녁까지 7시간 30분 동안 친분을 다지는 10개의 일정을 함께 소화하며 신뢰를 쌓았고, 특히 군사분계선에서의 첫 악수, 도보다리 회담 등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명장면을 만들었습니다.

[2차 남북정상회담 전격 개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북미정상회담 파기를 선언하자, 이틀 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통일각에서 전격적으로 2차 남북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이는 현안의 긴급성과 당사국의 해결 의지가 고스란히 반영된 새로운 형태의 정상회담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양 정상은 교착 상태를 타개하기 위해 직접 이견을 조율하며 소통의 중요성을 입증했습니다. 이 회담의 결과로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북미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데 기여했습니다.

[3차 평양정상회담 개최]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하여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3차 남북정상회담을 진행했습니다.2박 3일 동안 두 정상은 대부분의 일정을 함께하며 친밀감과 신뢰를 과시했고, 문재인 대통령은 릉라도5월1일경기장에서 북한 주민을 상대로 최초로 대중 연설을 했습니다.

회담 후 '9월 평양 공동선언'이 발표되었는데, 김정은 위원장이 직접 비핵화를 천명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집니다. 종전 선언 가능성, 경제·산림·보건 분야 협력 강화, 이산가족 상봉, 국제경기 공동 진출 등을 합의했습니다. 부속 합의서에서는 남북공동군사위원회를 만들어 우발적 충돌 방지 노력을 강구하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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