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징 대학살
연표
1937
[상하이 함락 및 난징 안전지대 구상]
상하이가 함락된 후, 프랑스 사제의 중립 지대 선포와 W. 플러머 밀스의 제안으로 난징에 '난징 안전지대' 설치가 제안되었습니다. 한편, 중국군 사령관 탕셩즈 장군은 난징 결사항전을 선언하며 수도 방어를 다짐했습니다.
1937년 11월, 상하이가 함락된 후 프랑스인 로마 가톨릭교회 자퀴노 드 베 사제가 상하이에 중립 지대를 선포했습니다. 이어서 W. 플러머 밀스의 제안으로 '난징 안전지대' 설치가 논의되었고, 욘 라베는 히틀러에게 난징 상황을 알리는 전보를 보냈습니다. 같은 시기, 중국 국민당 탕셩즈 장군은 기자회견을 열고 난징 결사항전을 선언했습니다. 일본군은 상하이 점령 후 난징으로 통첩 없이 진격했습니다.
일본군이 지난을 점령했습니다.
일본군이 타이위안을 점령했습니다.
[상하이 및 난징 공격 개시]
일본군이 항저우만에 상륙하여 상하이를 공격하고, 중화민국 수도 난징에 대한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이 상하이 전투는 일본군의 예상과 달리 격렬한 저항으로 장기화되며 일본군 내 중국인에 대한 적개심을 키웠습니다.
1937년 8월, 일본군이 항저우만에 상륙하여 상하이를 공격하고 난징 공습을 시작했습니다. 상하이 전투는 2~3개월이나 장기화되었고, 중국 국민당 엘리트 직계군대의 격렬한 저항으로 일본군이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 중국군과 중국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극에 달했습니다. 일본군 수뇌부는 처음에는 "단 3개월 안에 중국대륙을 점령하겠다"고 큰소리쳤으나 상하이에서의 예상치 못한 저항에 고전했습니다.
[중일 전쟁 발발 및 북부 도시 점령]
루거우차오 사건을 계기로 중일 전쟁이 발발, 일본군이 베이징과 톈진 등 북부 주요 도시를 점령하며 기세등등했습니다.
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마르코 폴로 다리, 노구교 사건)으로 중화민국과 일본 사이에 무력충돌이 터지면서 중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은 베이징, 톈진 등 북부 주요 도시들을 손쉽게 점령하고 진격을 거듭했습니다.
[일본군 100인 참수경쟁 기사 보도]
일본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이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노다 쓰요시 소위가 일본도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하는지 시합을 벌였다는 기사를 보도했습니다.
난징 대학살 시기인 1937년 11월 30일자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과 12월 13일자 도쿄 니치니치 신문에서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노다 쓰요시 소위가 일본도로 누가 먼저 100인을 참살(斬殺)시키는지를 겨뤘다는 사실이 보도되었습니다. 이 기사는 전후 난징전범재판의 증거가 되었습니다.
1937년 12월 5일, 마쓰이 이와네의 병세 악화로 난징 대학살의 총책임자 역할을 맡게 될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가 도쿄를 출발했습니다.
[난징 침공 일본군 지휘권 교체]
일본군 총책임자 마쓰이 이와네의 병세 악화로 난징 침공의 지휘권이 아사카 야스히코에게 넘어갔습니다.
1937년 12월 7일, 마쓰이 이와네의 병세가 악화되면서 난징 침공 지휘권이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에게 넘어갔습니다. 그는 이후 '모든 포로들을 죽이라'는 명령서에 서명하며 대학살을 조장했습니다.
1937년 12월 8일, 중화민국 장제스 총통이 난징에서 철수했습니다. 정부는 충칭을 임시수도로 정했으며, 이로 인해 난징은 더욱 혼란에 빠졌습니다.
[파나이호 철수 및 휴전 거부]
미국의 경비정 파나이호가 난징에서 철수했으며, 난징국제위원회가 3일간의 휴전 교섭을 제안했지만 중국이 응하지 않고 일본군은 오히려 폭격을 강화했습니다.
1937년 12월 9일, 미국의 경비정인 파나이호가 난징에서 철수했습니다. 난징국제위원회가 3일간의 휴전 교섭을 제안했지만 장제스는 이에 응하지 않았고, 일본은 폭격의 강도를 더욱 강화했습니다.
[일본군, 난징에 최후통첩 후 전면 공격]
난징을 포위한 일본군이 중국군에 투항하지 않으면 "피의 양쯔강을 만들겠다"고 최후통첩했으나 거부되자 전면적인 공격에 돌입했습니다.
1937년 12월 10일, 난징을 완전히 포위한 일본군은 중국군 사령관에게 투항하라는 경고를 했습니다. 그러나 난징을 지키고 있던 탕셩즈 사령관 휘하의 15만 명의 중국군은 투항을 끝내 거부했고, 일본군은 전면적인 공격에 들어갔습니다.
1937년 12월 11일, 장제스 총통이 탕셩즈 장군에게 퇴각 명령을 내렸습니다. 탕셩즈는 이 명령에 따라 양쯔강을 가장 먼저 건너 도망했고, 남겨진 난징 시민과 군인들은 일본군의 학살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파나이호 침몰 사건]
난징 인근 장강(양쯔강)에서 일본 해군 전투기에 의해 미국 아시아함대 소속 경비정 파나이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일본 정부는 미국에 공식 사과하고 배상금을 지불했습니다.
1937년 12월 12일, 난징 대학살이 한창 벌어지던 시기에 난징 인근 장강(양쯔강) 유역에서 일본 해군(해군 소속 전투기)에 의해 당시 난징 인근 양쯔강 유역을 순찰 중이던 미국 아시아함대 소속 경비정인 파나이 호가 침몰당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공식적으로 일본 정부에서 미국과 영국 정부에게 정중하게 사과하였고, 미국 정부에 배상금을 지불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난징 함락 및 대학살 시작]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으며, 이와 동시에 66대대에 모든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이 전달되면서 난징 대학살의 비극적인 서막이 올랐습니다.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이 난징을 점령하고 난징성 안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습니다. 난징 함락과 동시에 일본군 66대대에 모든 포로를 처형하라는 명령이 전달되었고, 이후 6주간에 걸쳐 무차별적인 학살과 강간이 자행되었습니다. 중국은 2014년부터 이날을 국가 추모일로 지정해 희생자를 애도하고 있습니다.
1937년 12월 17일, 난징 대학살 당시 총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가 병으로 전선에 없다가 난징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이후 사형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일본군이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으로 1937년 12월 24일, 모든 민간인은 통행증을 받아야 한다는 포고령을 내렸습니다.
1937년 12월 28일, 일본군이 난징에 있는 사람들을 피라미드형 위계질서에 따라 편재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민간인 등록이 시작되었습니다.
1938
1937년 12월 13일부터 1938년 2월까지 약 6주간에 걸쳐 이뤄진 난징 대학살이 비로소 종결되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일본군은 난징 시민과 군인들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학살과 강간, 약탈을 자행했습니다.
[난징 대학살 종결 및 일본군 통제]
6주간의 난징 대학살이 봄에 비로소 종결되었고, 일본군은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습니다.
1937년 12월 13일 난징이 함락된 이후 6주간의 대학살이 계속되었고 1938년 봄에야 비로소 종결되었습니다. 그 후 일본군은 도시 전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기 위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일본 외무부, 난징 대학살 비밀 보고]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가 주미 일본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에서 난징에서 최소 30만 명의 민간인이 극도로 잔혹하게 살해되었고 약탈과 아동 강간 등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음을 언급했습니다.
1938년 1월, 일본 외무대신 히로타 고키가 주미 일본대사관에 보낸 비밀 전문 내용에는 "믿을 만한 목격자들의 직접 추산과 신뢰도 높은 일부 인사들이 보내온 편지에 따르면 일본 군이 저지른 모든 행위와 폭력 수단은 아틸라왕과 흉노족을 연상시킨다. 최소 30만명의 민간인이 살육됐고, 많은 수는 극도로 잔혹하고 피비린내 나는 방식으로 살해됐다. 전투가 끝난 지 수주가 지난 지역에서도 약탈과 아동 강간 등 민간에 대한 잔혹 행위가 계속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 외무부는 난징에서의 학살 사실을 숨기기 위해 서방 외교관들을 매수하려 시도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난징 괴뢰 정부 수립]
일본군이 난징 통제를 위해 친일 성향의 중국인 관리들로 구성된 '난징자치위원회'를 구성하며 꼭두각시 정부를 세웠습니다.
1938년 1월 1일, 일본은 난징에 있는 사람들을 피라미드형 위계질서에 따라 편재하는 방식으로 통제하는 방법을 고안했으며, 그 일환으로 새로운 시 정부인 '난징자치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난징자치위원회는 도시의 행정, 복지, 금융, 상업, 치안, 교통 등을 담당하는 중국인 관리들로 구성되어 일본의 꼭두각시 역할을 했습니다.
1939
[1644부대 신설 및 생체실험 시작]
일본군이 난징에 의학연구기관인 1644부대를 신설하고, 매주 10여 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마루타 같은 생체실험을 자행하며 끔찍한 만행을 이어갔습니다.
1939년 4월, 일본군은 난징에 의학연구기관을 설치하고 마루타(통나무) 같은 형식의 실험 대상을 모아 생체실험 연구를 하곤 했습니다. 이를 'Ei 1644부대'라 불리는데, 매주 10여 명의 사람들이 생체실험에 의해 희생당하고, 그 사체는 'Ei 1644부대'의 소각로에서 처리되었습니다.
1940
[왕징웨이 괴뢰 정권 수립]
일본의 지원을 받아 왕징웨이를 수반으로 하는 친일 성향의 괴뢰 정부인 왕징웨이 정권이 난징을 수도로 수립되었지만, 민중의 지지는 거의 없었습니다.
1940년 3월 30일, 왕징웨이를 정부 수반으로 친일 성향의 괴뢰 정부인 왕징웨이 정권이 난징을 수도로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은 일방적으로 세워진 왕징웨이의 정권에 대한 지지가 거의 없었습니다.
1944
[UN 조사위원회 구성]
난징 대학살 등 2차 세계 대전 관련 전쟁 범죄 조사를 위해 UN 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극동지역 소위원회가 개설되었습니다.
1944년 3월, UN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극동지역 소위원회가 개설되었습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전쟁 범죄를 심판하기 위한 국제적 움직임의 일환이었습니다.
1945
[연합군의 포츠담 선언 발표]
연합군(미, 영, 중)이 일본에 대해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며 전쟁 종결을 촉구했습니다.
1945년 7월 26일, 연합군(미국, 영국, 중국)이 일본에 대해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이 선언은 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요구하며 전후 처리의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했습니다. 일주일 후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투하되며 일본의 항복을 결정적으로 촉진했습니다.
1945년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습니다. 일주일 후 나가사키에도 원자폭탄이 투하되면서 일본은 전쟁 지속이 불가능한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함으로써 제2차 세계 대전이 종결되었습니다. 이로써 1937년 시작된 중일 전쟁도 끝을 맺었습니다.
1945년 9월 9일, 일본이 항복 문서에 공식적으로 서명했습니다. 이로써 일본의 식민 통치와 전쟁 범죄에 대한 책임 추궁이 본격적으로 시작될 발판이 마련되었습니다. 또한 일본이 패망하면서 Ei 1644부대 등 일본군, 일본인들은 중화민국의 군대가 난징에 입성하기 전 모든 데이터를 파괴하고 도주했습니다.
1946
[난징전범재판 개최]
난징에서 B급, C급 전범에 대한 난징전범재판이 열려, 난징 대학살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자들을 심판했습니다. 이 재판에서 100인 참수 경쟁의 가담자와 다니 히사오 중장 등이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1946년 8월부터 1947년 2월까지 난징에서 B급, C급 전범에 대한 재판이 열렸습니다. 이 재판에서는 1천 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460여 건의 살인, 강간, 방화, 약탈에 관해 증언했습니다. 일본 신문에 보도된 '100인 참수 경쟁'의 노다 쓰요시 중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중위는 1947년 12월 18일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 역시 재판에 회부되어 난징에서 30만 명 학살에 동조한 혐의로 1947년 2월 6일 유죄 판결 후 3월 10일 사형이 언도되어 공개 총살되었습니다.
[극동국제군사재판 개정]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 전쟁 범죄인을 심판하는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 재판)이 개정되었습니다.
1946년 5월 3일,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동아시아의 전쟁 범죄인을 심판하는 극동국제군사재판, 일명 도쿄 재판이 개정되었습니다. 이 재판에서는 60여 명 이상의 용의자 중 28명이 기소되었으며, 난징 대학살의 총책임자 마쓰이 이와네와 외무성 장관 히로타 고키가 사형을 선고받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난징대학살 지휘관이었던 아사카노미야 야스히코는 일본 황족이라는 이유로 처벌을 면했습니다.
1947
[다니 히사오 중장 사형 집행]
난징 대학살 당시 끔찍한 만행을 저지른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 다니 히사오가 난징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고 공개 총살되었습니다.
1947년 2월 6일, 난징 대학살 당시 난징에 주둔한 일본군 6사단 육군 중장이었던 다니 히사오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졌습니다. 그는 전쟁법과 전쟁포로에 대한 대우에 관한 헤이그 협정을 위반하고 자신의 군대가 난징에서 30만 명 학살에 동조한 혐의로 3월 10일 사형을 언도받으면서 공개 총살이 집행되었습니다.
[100인 참수 경쟁 가담자 사형 선고]
'100인 참수 경쟁'을 벌인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노다 쓰요시 소위가 난징전범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난징전범재판에서 감춰졌던 증거들이 공개되면서 일본 신문에 보도된 '100인 참수 경쟁'의 노다 쓰요시 중위와 무카이 도시아키 중위가 재판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민간인 학살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결국 1947년 12월 18일 평결이 내려져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1948
[마쓰이 이와네 등 전범 사형 집행]
난징 대학살 총책임자 마쓰이 이와네와 중일 전쟁 당시 일본 외무성 장관 히로타 고키가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난징 대학살 당시 총책임자였던 마쓰이 이와네는 사형판결을 받아 교수형을 당했습니다. 중일 전쟁 당시 일본 외무성 장관이었던 히로타 고키도 사형을 선고받아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나 난징대학살 당시 주요 범죄자들이 단 한 명도 법정에 서지 않았다는 점이 극동국제군사재판의 한계로 지적됩니다.
1965
[일본 교과서, 난징 대학살 삭제]
일본 사토 에이사쿠 총리 하 문부과학성 검정 역사 교과서에서 난징 대학살 관련 내용이 삭제되어 역사 왜곡 논란이 시작되었습니다.
1965년,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 총리 하의 문부과학성 검정 역사 교과서에서 난징 대학살이 삭제된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습니다. 이에 대해 이에나가 사부로 교수가 이의를 제기하며 30년에 걸친 교과서 소송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1971
[‘중국 여행’ 르포로 논쟁 재점화]
일본 아사히 신문의 혼다 카츠이치 기자가 '중국 여행'이라는 르포를 연재하며 난징 대학살과 100인 참수 경쟁, 731 부대 이야기를 다루어 일본 내에서 난징 대학살 논쟁을 다시금 불붙였습니다.
1971년, 일본의 아사히 신문의 혼다 카츠이치 기자가 홍콩을 경유해 중국에 입국해서 당시 일본과 국교가 없던 중화인민공화국의 국내를 여행하며 신문상에 연재한 '중국 여행'이라는 르포가 화제와 인기를 끌면서 다시금 일본에 난징 대학살 논쟁의 불씨를 당겼습니다. 이 과정에서 100인 참수 경쟁 이야기나 731 부대의 이야기도 연재되었습니다.
1973
[난징 대학살 부정론 서적 출판]
일본 극우 언론인 스즈키 아키라 기자가 혼다 카츠이치 기사의 주장을 반박하는 '난징 대학살의 환상'을 출판하며 일본 내 난징 대학살 논쟁을 더욱 격화시켰습니다.
1973년, 혼다 카츠이치 기자의 르포 기사를 반박하는 일본의 극우 언론인 산케이 신문의 스즈키 아키라 기자가 난징 대학살의 환상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일본 내에서도 다시금 논쟁이 격해졌습니다.
1981
[‘중국 여행’ 르포 책 출판]
혼다 카츠이치 기자의 르포 '중국 여행'이 책으로 출판되며 일본 사회에 다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1981년에 '중국 여행'이 책으로 출판되면서 또 다시 화제를 일으켰습니다.
1990
[이시하라 신타로, 난징 대학살 부정 발언]
당시 도쿄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한 잡지 인터뷰를 통해 "난징 대학살은 중국인들이 지어낸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1990년 당시 도쿄도지사였던 이시하라 신타로가 한 잡지의 인터뷰를 통해 "난징 대학살은 중국인들이 지어낸 거짓말로 중국 내 반일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꾸민 얘기"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난징 대학살 부인론의 대표적인 정치인 중 한 명입니다.
1995
[교과서 소송 재판 승소]
난징 대학살 삭제에 이의를 제기했던 이에나가 사부로 교수의 30년에 걸친 교과서 소송 재판이 최고재판소의 판결로 승소하여 교과서에 난징 대학살 내용이 의무적으로 실리게 되었습니다.
1965년에 일본의 사토 에이사쿠 총리 하의 문부과학성 검정 역사 교과서에서 난징 대학살이 삭제된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했었는데, 이에 이의를 제기한 이에나가 사부로 교수의 30년에 걸친 교과서 소송 재판이 1995년에 마침내 최고재판소의 판결로 교과서에 의무적으로 실리게 되었습니다.
1997
[아이리스 장의 '난징의 강간' 출판]
아이리스 장이 난징 대학살의 진실을 다룬 논픽션 책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을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서구에 난징 대학살을 널리 알리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1997년, 아이리스 장이 1937년 12월부터 1938년 사이에 6주간 일어난 난징 대학살에 관해 쓴 논픽션 책 '난징의 강간'(The Rape of Nanking)을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습니다. 이 책은 저자의 심도 깊은 자료조사에 기초하여 서술되었으며, 일본 정부가 전쟁 범죄에 대해 충분히 사과하지 않았다는 관점을 제시했습니다. '난징의 강간'은 난징 대학살을 서구에 처음으로 소개한 중요한 영어 서적으로 평가되며 여러 언어로 번역되었습니다. 아이리스 장은 이 책으로 미국 내 중국인 인권 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 되었으나 일본 우익들의 협박에 시달리다 2004년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을 맞았습니다.
1999
1999년부터 다시 학살 부정론이 우익 진영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부정론은 '새역모'단체에서 발행한 '후소샤판 역사 교과서'에서 난징 대학살을 '난징 사건'으로 축소하고 '지금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고만 간단히 서술하는 등 역사 왜곡을 부추겼습니다.
2000
[오사카 난징 대학살 부정론 집회]
일본 오사카에서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난징 대학살을 철저히 검증하는 집회"가 열리며 부정론자들이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습니다.
2000년 1월 23일 오사카에서는 "20세기 최대의 거짓말! 난징 대학살을 철저히 검증하는 집회" 대회를 열어 부정론자들이 활동을 하기도 했습니다. 만화가 코바야시 요시노리, 아세아 대학교 교수 히가시나카노 슈도 등이 최선봉이 되어 다시금 부정론을 강하게 제기했습니다.
2004
[아이리스 장 사망]
난징 대학살의 참상을 알린 '난징의 강간' 저자 아이리스 장이 일본 우익들의 협박과 학살 목격 후유증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난징 대학살에 대한 폭로적인 저서 '난징의 강간'을 쓴 아이리스 장은 일본 우익들로부터 여러 협박에 시달렸으며, 2004년 11월 자살로 추정되는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녀는 더 많은 희생자들을 살리지 못했다는 자책감 혹은 참상을 목격한 후유증으로 힘들어했습니다.
2005
[100인 참수 경쟁 보도 언론사 소송]
'100인 목베기 시합'을 보도했던 언론사들을 명예훼손 혐의로 유가족들이 고발하여 소송을 제기했으나, 도쿄 지방 재판소는 시합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1937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이 극에 달했을 무렵, 일본 마이니치 신문에 일본군 무카이 도시아키 소위와 노다 쓰요시 소위가 100인 목베기 시합을 했다는 내용이 게재된 바 있습니다. 2005년에 그 유가족들이 100인 목베기 시합에 대해 보도했던 언론사들을 명예훼손을 이유로 고발하여 소송을 걸었습니다. 일본 극우 및 우익 단체들은 이 유가족들을 지원하는 모임도 결성하는 등 소송을 지원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이 사건에 대해 도쿄 지방 재판소는 100인 목베기 시합이 없었던 일이라고 단정 지을 수 없다며 유가족 등 원고측에 패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2007
[‘난징의 강간’ 일본어판 출간]
일본 우익 세력의 저지 시도에도 불구하고 아이리스 장의 '난징의 강간' 일본어판이 마침내 출간되었습니다.
'난징의 강간'을 일본에서 한 출판사가 번역 출판을 시도하자 일본 우익 세력들은 출간을 저지하기 위해 대규모 규탄 집회를 열었습니다. 결국 계약을 파기하고 일본에서는 출판조차 되지 않은 이 책에 대한 비판서들이 등장하는 등 일이 일어났으나, 이러한 논란과 극우파들의 저지 시도 끝에 일본어판은 2007년에 출간됐습니다.
2009
[난징 대학살 피해 규모 논의 합의 실패]
중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피해 규모 논의를 거쳐 2009년 12월 23일에 최종 보고서를 발표할 예정이었으나, 양측의 주장 대립으로 합의점을 찾지 못했습니다. 중국 측은 희생자 수가 30만 명이며 일본이 계획적인 침략을 감행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일본 측은 희생자 수가 수만 명에서 최대 20만 명에 이르는 다양한 범위를 제시하며 이를 '사건'으로 축소하여 표현하고 있습니다.
nan
2010
[난징 대학살 참가 일본군 증언]
1937년 난징 대학살에 참가했던 일본인 군인들이 언론과 인터뷰하고 기록영화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증언하며 학살의 진실을 뒷받침했습니다.
2010년 5월 16일에는 1937년 일본군의 '난징(南京) 대학살'에 군인으로 참가했던 일본인들이 최근 언론과 인터뷰하고 기록영화에 출연해 당시 상황을 증언하였습니다. 이는 난징 대학살 부인론에 대한 중요한 반박 증거가 되었습니다.
2014
[중국, 난징 대학살 국가 추모일 지정]
중국이 난징 대학살 희생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매년 12월 13일을 국가 추모일로 지정했습니다.
중국은 지난 2014년부터 12월 13일을 국가 추모일로 지정해 난징 대학살 희생자를 애도하고 있습니다. 이는 일본의 만행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추진하는 노력의 일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