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소네 야스히로
연표
1918
군마현 다카사키시에서 목재 도매상을 운영하던 나카소네 마쓰고로의 차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41
도쿄 제국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여 일본 내무성 소속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해군 단기 현역 제도"에 따라 해군경리학교에서 군 교육을 받은 뒤 1941년 4월 18일 해군 주계위로 임관되었고, 같은 해 8월 11일 아오바형 중순양함에 배치되었습니다.
1942
[발릭파판 해전]
나카소네가 승선한 수송선단이 보르네오섬 발릭파판 연안에서 네덜란드군과 영국군의 합동 작전에 포위되어 격렬한 해전을 겪었습니다.
수송선단이 발릭파판 연안에 진입했을 때 네덜란드군과 영국군의 합동 작전에 걸려들어 포위되었습니다. 나카소네가 탄 배 주변 4척이 폭격당하고,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전사한 군인들의 장례는 발릭파판 해안에서 화장으로 치러졌습니다.
1945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해군 주계 소령이었던 나카소네는 군대 해산에 따라 내무성으로 복귀하여 관방조사부에서 근무했습니다.
1947
[중의원 의원 당선 및 정계 입문]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군마현 제3구에 출마하여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그는 이후 20회 연속 당선 기록을 세웠습니다.
내무성 퇴직 후 정계에 입문하여 제23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일본민주당 소속으로 군마현 제3구에 출마, 당선되었습니다. 이후 2003년까지 56년간 의원직을 유지하며 20회 연속 당선되었습니다.
1954
[원자력 연구 개발 예산 확보]
국회의원으로서 원자력 연구 개발을 위한 예산을 상정하고 통과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총액은 2억 5천만 엔이었습니다.
한 명의 국회의원으로서 과학 기술 연구 조성비 중 원자력 평화적 이용 연구 보조금 2억 3500만 엔, 우라늄 자원 조사비 1500만 엔 등 총 2억 5000만 엔의 예산을 상정,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습니다.
1955
1955년 보수합동으로 자유민주당이 창당되자 자신과 함께 정치 활동을 해온 기타무라 도쿠타로와 과거 하토야마 이치로파였던 고노파에 속했습니다. 이후 당내에서 자신을 회장으로 하는 나카소네파를 결성했습니다.
1956
[개헌 활동 및 일소 공동 선언 논란]
'헌법 개정의 노래'를 직접 작사하여 발표하는 등 자민당 내 개헌파로 활동했으며, 일소 공동 선언 비준을 위한 중의원 본회의에서 소련 비판적인 연설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헌법 개정의 노래를 직접 작사하여 발표하며 자민당 내 개헌파로 활발하게 활동했고, 언론에서 '청년 장교'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같은 해 11월 27일, 일소 공동 선언 비준 중의원 본회의에서 소련 비판 연설로 일본사회당과 일본공산당 의원들과 충돌, 약 50분간의 연설 전문이 중의원 회의록에서 삭제되는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1959
1959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에서 과학기술청 장관을 시작으로 각료 경험을 쌓기 시작했습니다.
1967
[운수대신 취임]
제2차 사토 내각에서 운수성 장관으로 취임했습니다. 이 시기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 분쟁에 개입했습니다.
제2차 사토 제1차 개조내각에서 운수대신으로 입각했을 때, 나카소네는 입각 이전에 사토 에이사쿠 내각을 "우익 편중 내각"이라고 비판했음에도 입각하여 "철새"라는 야유를 받았습니다. 나리타 국제공항 건설을 둘러싼 산리즈카 투쟁 등 여러 분쟁에 개입했습니다.
1970
[방위청 장관 취임]
제3차 사토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으로 취임했습니다. 미시마 사건에 비판 성명을 발표하여 논란이 되었습니다.
제3차 사토 내각에서 방위청 장관으로 취임했습니다. 방위청 사무 분야에서 권세를 휘두르던 가이하라 오사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논란을 일으켰고, 미시마 사건 발생 시 비판 성명을 방위청 장관 명의로 내어 보수계 단체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습니다.
1972
[통상산업대신 겸 과학기술청 장관 취임]
제1차 다나카 내각에서 통상산업성 장관 겸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취임하며 '삼각 찹쌀떡' 중 한 명으로 주목받았습니다.
미키 다케오, 다나카 가쿠에이, 오히라 마사요시, 후쿠다 다케오와 함께 '삼각 찹쌀떡'으로 불리며 사토 에이사쿠의 후계자 후보로 간주되었습니다.
1974
미키 내각 기간에는 내각을 떠나 당직인 자민당 간사장을 맡았습니다. 이후 당내에서 미키 다케오 총리의 사임 요구가 나왔을 때 미키파를 제외한 파벌 중 유일하게 사임 반대 입장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1976
[록히드 사건 연루 의혹]
록히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받았으나, 다른 인사들에 비해 타격이 적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간신히 중의원 선거에 당선되었습니다.
록히드 사건이 발생하자 측근인 사토 고코가 체포되는 등 나카소네의 관여 정황이 드러났으나, 당내에서 본인에게까지 사임 요구가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이후 제34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는 낙선을 예상하는 분위기였지만, 지역구에서 4위 득표로 간신히 당선되었습니다.
1980
스즈키 젠코 내각 기간에 행정관리청 장관으로 입각하여 재정 재건의 수단으로서 행정 개혁에 집중하며 도코 도시오의 신임을 얻었습니다.
1982
1982년 11월 열린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다나카파의 지지를 얻어 압도적인 득표로 당선되었습니다.
[내각총리대신 취임]
스즈키 젠코를 이을 제71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했습니다. '행정 개혁'과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슬로건으로 내걸었습니다.
제71대 내각총리대신에 취임하며 "행정 개혁"과 "전후 정치의 총결산"을 정권의 슬로건으로 내걸고 1987년까지 재임했습니다. 그는 총리 산하에 다수의 정책 자문 기관을 두어 자문을 받고 직접 정책을 결정하는 "톱다운 정치"를 표방하며 '대통령형 총리'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983
[대한민국 공식 방문]
현직 총리로서 최초로 대한민국을 공식 방문하여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40억 달러의 경제협력 지원에 합의했습니다.
총리 취임 후 방미 직전 역대 일본 총리 중 최초로 한국을 방문하여 전두환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는 등 갈등에 빠진 한일 관계의 복원을 지향했습니다. 총 40억 달러의 경제협력 지원에 합의했습니다.
[미일 '운명 공동체' 및 '불침 항공모함' 발언]
미국 방문 중 "일본과 미국은 운명 공동체" 발언을 했으며, 일본 열도 불침 항공모함화 언급으로 논란이 발생했습니다.
방미 중 나카소네가 말한 것으로 알려진 "일본과 미국은 운명 공동체"라는 발언을 포함해 일본 열도 불침 항공모함화 및 "3해협(쿠릴·쓰가루·쓰시마) 봉쇄" 발언 등 미국이 요구해온 사항들을 실현하기로 하면서 미국과의 신뢰를 회복했습니다. 이 중 "불침 항공모함" 발언은 통역 문제로 잘못 번역된 것으로 해명되었으나, 일본 외무성 문서 공개로 논란이 재점화되기도 했습니다.
[윌리엄스버그 G7 정상회의 참석]
윌리엄스버그 G7 정상회의에 참석하여 소련의 핵미사일 배치에 대한 서방의 결속을 강조하며, 일본 국내의 정치적 위기를 무릅쓰고 퍼싱 II 미사일 배치에 찬성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미국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에서 열린 G7 정상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소련의 중거리 핵미사일 SS20 배치에 대한 미국의 퍼싱 II 미사일 배치 여부가 핵심 의제였고, 나카소네는 자유 진영의 결속과 소련을 협상장으로 이끌기 위해 일본의 기존 정부 방침과 달리 퍼싱 II 배치에 찬성하는 강경한 입장을 밝혔습니다.
[다나카 가쿠에이 영향력 배제 선언]
다나카 가쿠에이가 록히드 사건 1심에서 실형을 선고받자, "다나카 씨의 정치적 영향을 일절 배제하겠다"고 선언하며 관계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정권 초반 '다나카소네 내각'으로 불릴 만큼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이 강했으나, 다나카가 록히드 사건 1심 재판에서 실형을 선고받은 뒤 "다나카 씨의 정치적 영향을 일절 배제하겠다"는 성명을 내며 정치 윤리 고양과 당 체질 쇄신을 약속했습니다.
[자민당 총선 과반 실패]
제37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지 못하면서 나카소네 정권이 궁지에 몰렸습니다.
제37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자민당이 과반수 의석을 획득하지 못하면서 나카소네 정권은 궁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결국 록히드 사건 직후 자민당을 탈당한 세력이 결성한 신자유클럽과 연립 정권을 구성하여 제2차 나카소네 내각이 출범했습니다.
1984
[야스쿠니 신사 최초 참배]
현직 총리대신으로서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습니다. 이는 중일 관계 악화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현직 총리대신으로는 최초로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했습니다. 이후 1985년 종전 기념일 공식 참배와 함께 야스쿠니 참배 문제가 중일 관계가 악화되는 주요 원인이 되었습니다.
[중일 우호 21세기 위원회 발족]
나카소네의 방중에 맞춰 "중일 우호 21세기 위원회"가 발족하여 양국 간 우호 증진에 기여했습니다.
1983년 11월 후야오방 총서기 방일 시 양국 간 우호를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합의하였고, 1984년 3월 나카소네의 방중에 맞춰 "중일 우호 21세기 위원회"가 발족했습니다. 이 위원회는 중일 양국의 청년 교류를 위한 "중일 청년 교류 센터" 베이징 건설을 제안했습니다.
1985
[주요 공기업 민영화 (일본담배산업, NTT)]
민영화된 일본담배산업주식회사(구 일본전매공사)와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구 일본전신전화공사)가 영업을 개시했습니다.
일본전매공사와 일본전신전화공사가 민영화되어 각각 일본담배산업주식회사와 일본전신전화주식회사로 전환, 영업을 개시했습니다. 이는 나카소네 내각의 핵심 정책 중 하나였습니다.
나카소네가 총리로서 처음 종전 기념일인 8월 15일에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 참배하여 중화인민공화국 등으로부터 강한 항의를 받았습니다.
[플라자 합의 채택]
미국과의 무역 마찰 해소를 위해 플라자 합의가 채택되어 엔화 가치가 상승하고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미국과의 통상·경제 마찰 심화에 대처하기 위해 플라자 합의가 채택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달러화 가치가 하락하고 엔화 가치가 상승하여 일본의 수출 경쟁력이 약화되었습니다.
1986
제38회 중의원 및 제14회 참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이 각각 300석과 143석을 획득하며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자민당 규약 개정을 통해 당 총재 임기가 1년 연장되는 혜택을 얻었고, 나카소네는 1980년대 후반 자민당 압승 현상의 주역으로 이름을 남겼습니다.
[인종 차별 발언 논란]
자민당 전국 연수회 강연에서 "백인을 제외한 미국인의 지적 수준은 매우 낮다"고 발언하여 미국 및 일본 내에서 큰 비판을 받았습니다.
자민당 전국 연수회 강연에서 "백인을 제외한 미국인의 지적 수준은 매우 낮다"라고 발언하여 미국 내 흑인 및 히스패닉계 의원 단체의 강력 반발을 샀습니다. 또한 "일본은 단일 민족 국가"라는 발언으로 아이누족 차별 문제가 다시 주목받기도 했습니다.
참의원 본회의에서 국철의 분할·민영화 관련 법안이 가결되었습니다. 이는 나카소네 내각의 핵심 공기업 민영화 정책의 주요 단계였습니다.
1987
나카소네 내각의 국철 분할 민영화 정책에 따라 일본국유철도가 해체되고 민영화된 JR그룹 7개사가 영업을 개시했습니다.
지방선거 패배와 부가가치세 논란으로 위기에 몰렸던 나카소네 내각은 당내 결속이 강화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았습니다. 나카소네는 이를 이용해 차기 총재 후보들을 분열시키고, '뉴리더' 중 다케시타 노보루를 후계자로 직접 지명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내각총리대신 퇴임]
약 5년간의 총리 재임을 마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역대 총리 중 7위의 장기 집권 기록을 남겼습니다.
후임 총재 지명 후 약 5년간의 재임을 마치고 총리직에서 물러났습니다. 그는 역대 총리 중 7위(전후 5위, 쇼와 시대 3위)의 장기 집권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습니다.
1989
총리 퇴임 후인 1989년, '전후 최대의 비리 사건'으로 불린 리크루트 사건에 개입 정황이 드러나 중의원 예산위원회에 증인으로 소환 심문을 받았습니다.
리크루트 사건에 책임을 지겠다며 자유민주당을 탈당했습니다.
1991
[걸프 전쟁 중동 특사]
걸프 전쟁 당시 중동 특사로 임명되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회담 후 일본인 인질 전원 석방을 성공시켰습니다.
걸프 전쟁 당시 중동 특사로 임명되어 사담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과 회담을 가졌고, 일본인 인질 전원 석방을 이루어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리크루트 사건으로 탈당한 지 몇 년 되지 않아 자유민주당으로 복당했습니다.
1996
[비례대표 종신 1번 보장]
제41회 중의원 총선거에서 선거 제도 개편 후 신설된 기타칸토 비례대표구의 자민당 종신 1번을 보장받았습니다.
제4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소선거구제 및 비례대표제 병립제가 처음 도입되자, 기타칸토 비례대표구에서 자민당의 종신 1번을 보장받았습니다.
1997
[국회의원 50년 재직 및 대훈위 국화대수장 수여]
헌정 사상 4번째로 50년 이상 국회의원으로 재직한 인물이 되었으며, 이에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수여받았습니다.
헌정 사상 4번째로 50년 이상 국회의원으로 재직한 사람이 되었으며, 의원 재직 50주년 기념으로 같은 해 4월 대훈위 국화대수장을 수여받았습니다.
2003
[정계 은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비례대표 73세 정년제 도입을 위한 은퇴 요청을 수락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 56년간의 정치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자민당의 비례대표 73세 정년제 도입으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로부터 은퇴를 요청받았습니다. 그는 이 요청을 "정치적 테러"로 규정하며 강하게 반발했지만, 결국 마지못해 받아들여 차기 중의원 선거 불출마와 의원직 사퇴 의사를 표명하며 56년간의 정치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2018
일본 총리 경험자로서 두 번째로 만 100세가 되었습니다(제1호는 히가시쿠니 나루히코). 이 시기에 팔다리는 쇠약해졌지만 주 2회 사무소를 방문해 서류를 정리하고 손님을 접견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2019
2019년 11월 29일, 노환으로 인해 사망했습니다. 향년 101세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