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쓰메 소세키
연표
1867
[나쓰메 소세키 출생]
나쓰메 소세키가 에도의 우시고메 바바시모요코초(오늘날 신주쿠구 기쿠이 정)에서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긴노스케였으며, 자식 많은 집안의 늦둥이로 태어나 어머니가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게이오 3년(1867년) 1월 11일(음력 1월 5일)에 에도의 우시고메 바바시모요코초(오늘날 신주쿠구 기쿠이 정)에서 나쓰메 고효에 나오카쓰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나쓰메 긴노스케이며, 태어난 날이 경신일(庚申日)이었으므로 액을 막는 의미에서 '긴(金)'이라는 글자가 이름에 들어갔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복잡한 양부모 관계를 겪으며 여러 차례 집을 옮겨 다녔습니다.
1874
[양부모 가정불화로 친가 복귀]
양부 시오바라 쇼노스케의 여성 문제로 가정불화가 불거지자, 7세 때 양모와 함께 잠시 친가로 돌아왔습니다. 어수선한 가정환경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1세 때 부친의 친구였던 시오바라 쇼노스케의 양자로 갔지만, 양부였던 쇼노스케의 여성 문제가 들통나는 등 가정불화가 불거지면서 7세 때 양모가 잠깐 생가로 데리고 왔습니다. 이후 양부모 이혼과 함께 9세 때 생가로 되돌아옵니다.
1879
[도쿄부 제1중학 입학 및 중퇴]
12세 때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오늘날 도쿄도립 히비야 고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대학 예비문 수험에 필수인 영어 수업이 없어 2년 뒤 중퇴했습니다.
12세 때인 메이지 12년(1879년)에 도쿄부 제1중학 정칙과에 입학했습니다. 그러나 대학 예비문 수험에 필수였던 영어 수업이 없던 것과 함께 한학과 문학에 뜻을 두었으므로 2년 뒤 중퇴하고, 1883년 영어를 가르치던 영학숙 세이리쓰 학사에 입학하여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1889
[마사오카 시키와의 운명적인 만남과 '소세키' 호 사용]
동창생이자 문학적, 인간적으로 깊은 영향을 준 마사오카 시키를 만났습니다. 시키의 문집 비평을 한문으로 쓰며 우정을 시작했고,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호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1889년에 동창생으로 소세키에게 문학적·인간적으로 많은 영향을 준 마사오카 시키와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시키가 손수 쓴 한시나 하이쿠 등을 묶은 문집 《나나쿠사슈》가 돌고 있을 때 소세키가 그 비평을 권말에 한문으로 쓴 게 우정의 시작이었으며, 이때 처음으로 ‘소세키’라는 호를 사용했습니다. 소세키라는 이름은 《진서》의 고사 ‘수석침류’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 시키의 수많은 필명 가운데 하나였으나 이후에 소세키는 시키로부터 이를 물려받았습니다.
1890
[제국대학 영문과 입학 및 염세주의, 신경쇠약 발현]
제국대학(이후 도쿄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이즈음 염세주의와 신경쇠약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형들의 죽음과 셋째 형수 도세의 사망 등 가족사의 비극을 겪었습니다.
1890년에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제국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지만, 이 시기부터 염세주의와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1887년 큰형 다이스케를 잃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 형 에이노스케를, 1891년에는 셋째 형 와사부로의 아내 도세마저 스물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는 등 연이은 가족의 죽음으로 고통받았습니다.
1892
[도쿄 전문학교 강사 시작]
병역을 피하기 위해 분가하고 홋카이도로 적을 옮긴 뒤, 같은 해 5월 도쿄 전문학교(지금의 와세다 대학)의 강사를 시작하며 교육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1892년에 병역을 피하기 위해 분가하였으며, 홋카이도로 적을 옮겼습니다. 같은 해 5월에는 도쿄 전문학교(지금의 와세다 대학)의 강사를 시작합니다. 이후 시키가 대학을 중퇴하지만, 소세키는 마쓰야마의 시키의 집에서 뒤에 소세키를 직업작가의 길로 이끄는 다카하마 교시와 만나게 되었습니다.
1893
[도쿄 제국대학 졸업 및 교사 생활의 고뇌]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지만, 일본인이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에 대한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잇단 가족 죽음과 함께 폐결핵, 극도의 신경쇠약이 심해지는 시기였습니다.
1893년에 도쿄 제국대학을 졸업하고, 도쿄 고등사범학교 영어교사가 되었으나 일본인이 영문학을 가르치는 것에 위화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잇단 가족 죽음과 함께 폐결핵, 극도의 신경쇠약 등이 나타난 게 이때입니다.
1896
[구마모토 부임 및 나카네 교코와의 결혼]
구마모토현 제5고등학교(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의 영어교사로 부임했으며, 친족의 권유로 귀족원 서기관장 나카네 시게카즈의 장녀 교코와 결혼했지만, 부부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1896년에는 구마모토현 제5고등학교(구마모토 대학의 전신)의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친족들의 권유로 귀족원 서기관장이던 나카네 시게카즈의 장녀 교코와 결혼하지만, 좋은 관계는 맺지 못하는 등 원만한 부부는 아니었습니다.
1900
[영국 유학길에 오르다]
문부성의 지시로 영문학 연구를 위해 영국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조지 메리디스, 찰스 디킨스 등의 작품을 읽으며 연구했지만, 영문학 연구와의 위화감과 인종차별로 신경쇠약이 더욱 심해졌습니다.
1900년 5월에 일본 문부성에 의해 영문학 연구를 위해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됩니다. 조지 메리디스나 찰스 디킨스 등을 주로 읽었으며, 셰익스피어 연구가 윌리엄 크레이그의 지도를 받거나 《문학론》 연구 등을 하지만 영문학 연구와의 위화감은 지속되어 신경쇠약은 심해졌습니다. 또한 동양인이라는 이유에서 인종차별을 받는 등의 초조함도 쌓여 몇 번이나 거처를 옮겼습니다.
1901
[이케다 기쿠나에와의 만남과 과학적 자극]
독일 베를린에서 유학 중이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찾아와 잠시 동거하며 깊은 과학적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 연구에 몰두하는 모습에 주변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1901년에 물리화학 연구를 위해 2년간 독일로 유학해 있던 화학자 이케다 기쿠나에가 베를린에서 소세키를 찾아와 잠시 동거한 것으로 인해 깊은 자극을 받고, “기쿠나에에게 받은 자극을 계기로 소세키가 과학이라는 학문을 강하게 의식하기 시작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 혼자서 연구에 몰두하는 등으로 인해 주변의 일본인들에게서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습니다.
1903
[귀국 명령에 따른 일본 귀환]
영국 유학 중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자 문부성에서 귀국 명령을 내렸고, 결국 일본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런던에 소세키 기념관이 설립되어 그의 체류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케다 기쿠나에와의 만남 이후 '나쓰메가 미쳤다'는 소문이 돌자, 문부성에서 귀국 명령을 내립니다. 1903년에 결국 일본으로 귀국하게 되었으며, 소세키가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의 맞은편에 1984년 쓰네마쓰 이쿠오에 의해 런던 소세키 기념관이 설립되었습니다.
1905
[데뷔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발표]
신경쇠약을 완화하기 위해 집필한 데뷔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시키 문하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받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작가의 길을 열망하기 시작했습니다.
귀국 이후 도쿄 제국대학과 메이지 대학의 강사 등을 전전하던 소세키는, 신경쇠약을 완화하기 위해 데뷔작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를 집필하고 시키 문하의 모임에서 발표하여 호평을 얻었습니다. 1905년 1월에 《호토토기스》에 1회만 게재할 계획이었지만, 호평으로 속편을 집필합니다. 이때부터 작가의 길을 열망하기 시작했고, 이후 〈런던탑〉이나 《도련님》 등을 연달아 발표하면서 인기를 얻어갑니다.
1907
[아사히 신문사 입사 및 직업 작가 전향]
도쿄 아사히 신문의 주필 이케베 산잔의 초청으로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하며 본격적인 직업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해 첫 직업 작가 작품인 《우미인초》 연재를 시작했습니다.
1907년에 도쿄 아사히 신문의 주필이던 이케베 산잔의 초청으로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해 본격적인 직업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습니다. 같은 해에 직업작가로서의 첫 작품 《우미인초》의 연재를 시작하고, 집필 도중에 신경쇠약이나 위병 등으로 고생했습니다.
1909
[만주와 조선 여행 기록 연재]
친우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청으로 만주와 조선을 여행하며, 이 여행의 기록은 《아사히 신문》에 〈만한 이곳저곳〉이라는 이름으로 연재되었습니다.
1909년 친우였던 남만주 철도 총재 나카무라 요시코토의 초청으로 만주와 조선을 여행합니다. 이 여행의 기록은 《아사히 신문》에 〈만한 이곳저곳〉(満韓ところどころ)이란 이름으로 연재되었습니다.
1910
[위궤양으로 입원 및 '슈젠지의 큰 병' 발병]
전반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 《문》을 집필하던 중 위궤양으로 입원했습니다. 이후 이즈 슈젠지로 요양을 떠났으나 병이 악화되어 각혈하는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1910년 6월, 《산시로》와 《그 후》에 이은 전반기 3부작의 세 번째 작품 《문》을 집필하던 중에 위궤양으로 입원하게 됩니다. 같은 해 8월에는 이즈의 슈젠지로 요양을 떠났으나 거기에서 병이 악화되어 각혈을 일으키고, 위독한 상태가 됩니다. 이것이 바로 ‘슈젠지의 큰 병’으로 불리는 사건으로, 이때 사경을 헤매던 경험은 이후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1912
[지병 악화로 《행인》 집필 중단]
위궤양 등 건강 문제로 고통받던 중, 병으로 인해 후반기 3부작 중 하나인 《행인》의 집필을 중단했습니다. 그의 작품들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탐구하는 방향으로 심화되었습니다.
1910년 '슈젠지의 큰 병' 이후 용태가 안정되었으나 이후에도 위궤양 등으로 수차례 고통을 겪었습니다. 1912년 12월에는 병으로 《행인》의 집필도 중단했습니다. 이후의 작품은 인간의 이기적인 마음을 따라가면서, 후반기 3부작이라고 불리는 《피안이 지날 때까지》, 《행인》, 《마음》으로 연결되었습니다.
1915
[다섯 번째 위궤양 발병 및 《한눈팔기》 연재]
교토에서 다섯 번째 위궤양으로 쓰러졌습니다. 6월부터는 자전적 소설 《한눈팔기》의 연재를 시작했지만, 1916년에는 당뇨병까지 앓게 되는 등 병세가 깊어졌습니다.
1915년 3월에 교토에서 놀던 중 다섯 번째의 위궤양으로 쓰러졌습니다. 6월부터는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집필 당시의 환경을 돌아보는 내용인 《한눈팔기》의 연재를 시작하지만 1916년에는 당뇨병도 앓게 됩니다.
1916
[《명암》 집필 중 요절]
《명암》 집필 중 큰 내출혈을 일으키며 향년 48세로 요절했습니다. 그의 뇌와 위는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에 기증되어 보관 중이며, 묘는 도쿄도 도시마구 조시가야 묘원에 있습니다.
1916년 1월 9일에 큰 내출혈을 일으키면서 《명암》 집필 중 향년 48세로 요절하였습니다. 소세키가 요절한 다음 날, 사체는 도쿄 제국대학 의학부 해부실에서 나가요 마타로에 의해 해부되었습니다. 이때 적출된 뇌하고 위는 기증되어, 뇌는 현재도 에탄올에 담긴 상태로 도쿄 대학 의학부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묘는 도쿄도 도시마구 미나미이케부쿠로의 조시가야 묘원입니다.
1984
[1000엔 지폐 인물로 선정]
외교 마찰을 빚던 이토 히로부미 대신, 나쓰메 소세키의 초상이 일본 1000엔 지폐 인물로 변경되어 발행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문학적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일본 정부는 1984년(쇼와 59년)에 이토 히로부미 초상이 새겨진 1000엔 지폐가 주변국들과 외교 마찰을 빚자, 그 자리에 나쓰메 소세키로 바꾸는 것으로 일단락했습니다. 이는 나쓰메 소세키의 국민적 위상을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2004
[1000엔 지폐 인물 노구치 히데요로 교체]
헤이세이 16년(2004년) 이후, 1000엔 지폐 인물이 나쓰메 소세키에서 노구치 히데요로 교체되었습니다.
헤이세이 16년(2004년) 이후로는 노구치 히데요로 초상이 바뀌면서, 나쓰메 소세키는 1000엔 지폐에서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