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 전쟁
연표
648
[신라-당 동맹과 야욕]
신라와 당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을 경계로 삼자는 약속과 함께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당나라는 이후 신라와의 약속을 어기고 한반도 전체를 탐내는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648년(진덕여왕 2년), 신라는 당나라와 군사동맹을 맺으며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대동강을 양국의 경계로 삼기로 합의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는 고구려 멸망 후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 전 지역을 자국에 편입시키려는 속셈을 드러냈습니다.
660
[백제 멸망과 당의 야욕]
백제가 멸망하자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비롯한 5개 도독부를 설치하며 옛 백제 지역을 자신들의 영토로 만들려 했습니다.
이는 한반도 전체에 대한 당의 지배 야욕을 보여주는 첫걸음이었습니다.
660년 백제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그 지역에 웅진도독부를 포함한 5개 도독부를 설치하며 백제의 옛 땅을 당나라 영토로 기정사실화하려 했습니다.
663
[신라, 당의 지방으로]
당나라는 신라를 자국의 지방 행정구역인 '계림대도독부'로 삼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는 노골적인 도발을 감행했습니다.
고구려가 건재했기에 신라는 당장 맞서지 못했지만, 이는 신라의 자주성을 정면으로 부인한 행위였습니다.
당나라는 663년(문무왕 3년) 신라를 계림대도독부로,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하여 신라의 자주성을 부인하고 자국의 일개 지방행정구역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668
[고구려 멸망, 전쟁 서막]
고구려가 멸망하자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며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어진 신라는 당나라와의 전쟁을 결심하게 됩니다.
668년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이를 통해 신라를 관리하도록 하며 한반도 전체에 대한 지배 의도를 드러냈습니다. 이에 신라는 당나라와 전쟁에 돌입하게 됩니다.
670
[압록강 넘어! 전쟁 시작]
신라는 귀순한 고구려 왕족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삼고, 신라군 1만과 고구려 부흥군 1만이 압록강을 건너 당군을 선제 공격하며 나당 전쟁의 포문을 열었습니다.
동시에 옛 백제 지역의 82개 성을 탈환하며 기세를 올렸습니다.
670년 3월, 신라군 1만과 고구려 유민군 1만이 압록강을 건너 당군을 선제 공격함으로써 나당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신라는 귀순한 고구려 왕족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삼아 고구려 부흥군을 결집시켰으며, 연합군은 옛 백제 지역의 당나라 주둔군과 부여융이 이끄는 백제군이 주둔하는 82개 성을 빼앗았습니다.
671
[사비성 회복과 당의 반격]
신라군은 671년, 백제의 옛 수도인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백제 땅을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설인귀의 수군과 육군을 대규모로 동원해 신라에 대한 반격에 나섰습니다.
671년, 신라군은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그곳에 소부리주를 설치하여 백제의 옛 땅을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이에 당나라는 설인귀에게 수군을 이끌고 백제로 향하게 하고, 육지로는 당군과 말갈족으로 편성된 군대를 동원해 압록강으로 남침하며 반격을 시작했습니다.
672
[당군의 평양 점령]
당나라 육군은 672년 7월 평양을 점령하고, 8월에는 한시성과 마읍성까지 점령하며 신라의 북쪽을 강력하게 위협했습니다.
하지만 설인귀가 이끈 당의 수군은 신라군에 격파당했습니다.
672년 7월, 당나라 육군은 평양을 점령했고, 8월에는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점령하며 신라를 위협했습니다. 그러나 설인귀의 수군은 신라군에 격파당하고 당으로 되돌아갔습니다.
[백빙산 전투 대패]
신라군과 안승의 고구려 부흥군은 672년 12월 백빙산 전투에서, 그리고 이듬해 호로하 전투에서 당나라군에게 연이어 크게 패하며 전열을 가다듬는 시간을 가져야 했습니다.
신라군과 안승의 고구려 부흥군은 672년 12월 백빙산 전투와 673년 호로하 전투에서 당나라군에게 대패하며 잠시 전세가 불리해졌습니다.
674
[문무왕 폐위, 이간책 무산]
당 고종은 신라가 고구려 부흥군을 돕고 백제 땅을 강탈했다는 명분으로 문무왕의 관작을 삭제하고 그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왕에 책봉했습니다.
이는 신라 내부 분열을 노린 책략이었으나, 문무왕의 단호한 대처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674년, 당 고종은 신라가 고구려 유민군을 돕고 백제의 옛 땅을 무력으로 강탈했다는 이유로 문무왕의 관작을 삭제하고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을 신라왕에 책봉했습니다. 이는 신라의 내부 분열을 일으키고자 하는 책략이었으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675
[설인귀 격파! 천성 승리]
설인귀가 신라 유학생 풍훈을 길라잡이로 삼아 다시 쳐들어왔지만, 신라군은 천성 전투에서 당군을 크게 물리치며 설인귀를 철수시키고 승리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675년 9월, 설인귀가 신라의 숙위학생(유학생)이었던 풍훈을 길라잡이로 삼아 다시 쳐들어왔으나 신라군은 천성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철수시켰습니다.
[매소성 대첩! 전세 역전]
이근행이 이끄는 4만 대군이 매소성에 주둔하며 신라를 압박하자, 신라군은 매소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군마 3만여 필과 3만 명 분의 무기를 노획했습니다.
이 전투는 나당 전쟁의 주도권을 신라로 가져오는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675년 9월말부터 이근행이 이끄는 4만 군대가 매소성(현 경기도 연천군 청산면)에 주둔하며 신라에 대한 공세를 취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라군은 매소성 전투에서 군마 30,380마리와 30,000여 명 분의 무기를 노획하는 대승리를 거두었으며, 이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676
[당군의 한반도 완전 철수]
기벌포 해전의 패배로 당나라는 더 이상 한반도 지배 야욕을 이어갈 수 없었습니다.
당나라는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웅진도독부를 건안성으로 옮기며 대동강 북쪽으로 완전히 철수했습니다.
이로써 신라는 대동강부터 원산만까지를 영토로 확정하고 삼국통일을 완수했습니다.
676년, 당나라는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성으로, 웅진도독부를 건안성(건안성: 개평)으로 옮기면서 대동강 북쪽으로 완전히 철수하였습니다. 신라는 나당전쟁의 승리로 대동강부터 원산만(元山灣)까지를 경계로 그 이남의 지역을 영토로 확정하였습니다.
[기벌포 해전! 통일의 마침표]
금강 하구 기벌포 앞바다에서 신라 수군과 설인귀가 이끈 당 수군 사이에 나당 전쟁의 마지막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신라 수군은 이 전투에서도 세계최강 당나라 수군을 물리치며 나당 전쟁의 최종 승리를 거두었고, 당나라는 더 이상 전쟁을 이어갈 의지를 잃었습니다!.
676년 11월, 금강 하구인 기벌포(현 충청남도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에서 신라 수군과 설인귀가 이끈 당의 수군 사이에 마지막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도 신라군이 승리를 거두었고, 당나라는 더 이상 전쟁 수행의 의지를 상실했습니다.
698
[발해 건국과 남북국 시대]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영토에는 698년 발해가 건국되었습니다.
이로써 한반도 남쪽에는 신라, 북쪽에는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 시대'가 열리며 한민족 역사의 중요한 한 장을 장식하게 됩니다.
신라가 차지하지 못한 만주의 고구려 옛 영토에는 698년 발해가 건국되었습니다. 신라와 발해가 공존한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부릅니다.
732
[신생 발해 견제를 위한 협력]
나당 전쟁 이후 50여년간 소원했던 신라와 당나라의 관계는 신생국 발해가 강성해지자 다시 가까워졌습니다.
732년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했을 때, 신라는 당나라를 돕기 위해 발해 남쪽 국경에 군대를 파견하기도 했습니다.
전후 신라와 당의 관계는 50여년간 소원했으나, 신생국인 발해가 강성해지자 다시 가까워져 무역 및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습니다. 732년에 발해가 당나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당나라를 돕기 위해 발해의 남쪽 국경에 군대를 파견하였으나, 폭설 등 험한 날씨로 인해 중도 철수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