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시마 시게오
나가시마 시게오는 일본 야구계의 전설적인 인물로, '미스터 프로 야구'라 불리며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위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상징적인 4번 타자이자 오 사다하루와 함께 'ON포'를 형성하여 V9 시대의 핵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은퇴 후에는 감독으로서 팀을 이끌며 두 차례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일궈냈고, 뇌졸중 발병이라는 역경 속에서도 국민영예상과 문화훈장을 수상하며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의 열정적인 플레이 스타일과 독특한 리더십은 일본 야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습니다.
연표
1936
[나가시마 시게오 탄생]
일본 지바현에서 태어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설적인 4번 타자이자 감독으로 일본 프로 야구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한 나가시마 시게오가 태어났습니다.
지바현 인바군 우스이정(현 사쿠라시)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 도큐 플라이어스의 오시타 히로시, 한신 타이거스의 후지무라 후미오의 활약상을 보며 야구 선수의 꿈을 키웠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했으며, 어머니가 손수 만든 장비로 훈련했습니다.
1951
고시엔 출장 경험이 있는 지바 현립 지바 고등학교 대신 지바현 명문고인 지바 현립 사쿠라 제1 고등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 게이세이 전철을 이용해 통학했습니다. 2학년 때부터 4번 타자를 맡았습니다.
1953
[고교 시절 첫 3루수 및 유일한 홈런 기록]
고교 시절 마지막 대회에서 부상당한 3루수 대신 출전해 첫 3루수 경험과 유일한 홈런을 기록하며 야구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고교 시절 마지막 대회인 미나미칸토 대회 1차전 구마가야 고등학교와의 경기에서 부상당한 3루수 스즈키 히데미를 대신해 3루수로 출전했습니다. 유격수로서 거듭된 실책으로 수비 위치가 변경되었고, 이후 3루수로 정착했습니다. 이 경기에서 패했지만 6회초 상대 투수 후쿠시마 이쿠오로부터 고교 대회 유일한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이 홈런은 야구 관계자들의 주목을 끄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54
[릿쿄 대학 진학 및 아버지 사망]
릿쿄 대학 경제학부 경영학과에 진학했으나, 같은 해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며 집안의 가장을 잃는 충격을 겪었습니다.
1954년, 릿쿄 대학 경제학부 경영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에는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집안의 가장을 잃은 충격으로 인해 궁핍한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어머니가 채소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어려움을 겪었고, 나가시마는 대학 중퇴 후 프로 입단을 고민했으나 어머니의 반대로 포기했습니다.
1955
[주니치 드래건스 입단 시도 실패]
군대식 야구부 분위기에 불만을 품고 동기 스기우라 다다시와 함께 주니치 드래건스 입단을 시도했으나 구단으로부터 거절당했습니다.
스나오시 감독의 스파르타 훈련과 야구부 내의 폭력적인 환경에 싫증을 느껴 동기 스기우라 다다시와 함께 야구부 합숙소를 빠져나와 주니치 드래건스 구단 사무소를 방문했습니다. 계약금 없이 프로에서 뛰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구단 대표로부터 '일단 졸업하고 오라'는 조언과 함께 거절당했습니다.
1957
도쿄 6대학 야구 리그에서 1956년 춘계 리그전과 1957년 추계 리그전에서 수위 타자 타이틀을 획득했습니다. 1957년에는 리그 통산 신기록인 8호 홈런을 때려냈습니다. 통산 96경기에 출전해 타율 0.286, 8홈런, 39타점, 22도루를 기록했습니다.
여러 구단에서 입단 제의가 있었으나 난카이 호크스로의 이적이 유력했습니다. 그러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설득과 어머니의 바람으로 요미우리에 입단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계약금 1,800만 엔, 연봉 200만 엔으로 당시 최고 대우를 받았습니다. 등번호는 지바 시게루가 사용했던 3번으로 결정했습니다.
1958
최종 타격 성적은 홈런 29개, 92타점을 기록해 홈런왕과 타점왕을 연달아 석권했습니다. 타율은 3할 5리(타격 2위)에 끝났지만, 시즌 최다 안타 153개, 도루 리그 2위 37개 등을 기록하며 센트럴 리그 신인왕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신인으로서의 타격 2관왕은 NPB에서 가장 유일한 기록입니다.
[프로 데뷔전 4타석 연속 삼진]
프로 데뷔전에서 당시 에이스였던 가네다 마사이치로부터 4타석 연속 삼진을 당하며 강렬한 신고식을 치렀습니다.
1958년 4월 5일, 개막전인 고쿠테쓰 스왈로스전에서 3번 타자로 선발 출전했습니다. 상대 에이스 가네다 마사이치에게 4타석 연속 풀스윙 삼진을 당하며 데뷔전을 마쳤습니다. 다음날 경기에서도 가네다에게 삼진을 당했습니다.
데뷔 이틀 후인 4월 7일 고쿠테쓰전에서 미쓰바야시 세이지를 상대로 첫 안타를 때려냈습니다.
[프로 첫 홈런]
다이요 웨일스전에서 곤도 마사토시를 상대로 프로 첫 홈런을 기록하며 본래의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했습니다.
4월 10일 요코하마 DeNA 베이스타스전에서 곤도 마사토시로부터 첫 홈런을 기록하여 본래의 힘을 발휘했습니다.
[요미우리 4번 타자 데뷔]
히로시마전부터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대신하는 요미우리의 4번 타자가 되면서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8월 6일 히로시마전부터는 요미우리의 중심 타자였던 가와카미 데쓰하루를 대신하는 4번 타자가 되면서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습니다.
[신인 28호 홈런 취소]
히로시마전에서 신인으로서 28호 홈런을 때렸으나, 1루 베이스를 밟지 않아 취소되는 해프닝을 겪었습니다.
1958년 9월 19일 히로시마전에서 우가리 미치오로부터 신인으로서의 신기록(당시)인 28호 홈런을 때렸지만 1루 베이스를 실수로 밟지 않아 결국 홈런이 취소되는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만약 인정됐다면 신인 트리플 쓰리(타율 3할, 30홈런, 30도루) 달성 기회였습니다.
다음날 9월 20일 오사카 타이거스전에서 28호 홈런을 기록하여 신인 신기록을 달성했습니다.
1959
2년째가 된 1959년 시즌에는 시즌 도중까지 퍼시픽 리그의 가쓰라기 다카오와 함께 3관왕을 목전에 두고 있었지만 막판에 홈런과 타점은 늘어나지 않았습니다. 타율 3할 3푼 4리로 본인에게 있어서는 처음으로 수위 타자 타이틀을 차지했습니다.
[천황 참관 경기 끝내기 홈런]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천황 참관 경기에서 한신 타이거스의 무라야마 미노루를 상대로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터뜨리며 '미스터 프로 야구'의 존재감을 각인시켰습니다.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한신 타이거스전은 일본 프로 야구 사상 최초의 천황 참관 경기였습니다. 9회말 타석에 들어선 선두타자 나가시마는 무라야마 미노루가 던진 5구째 공을 좌측 관중석으로 날려 극적인 끝내기 홈런을 기록하며 요미우리의 승리를 이끌었습니다. 이 경기는 나가시마의 강한 승부 감각을 널리 알리고 프로 야구의 인기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날 오 사다하루도 홈런을 기록하며 'ON 동반 홈런' 제1호가 탄생했습니다.
1960
1960년 7월 17일의 다이요 웨일스전에서는 고의 사구성 공을 치고 나서 러닝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같은 해 7월 16일에는 투수가 고의 사구로 던진 공을 가까스로 쳐서 2루타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1960년 고쿠테쓰와의 개막전에서는 고의 사구로 보내려던 공을 홈런으로 날리는 등 그의 승부욕과 타격 감각을 보여주었습니다.
1961
[3년 연속 수위 타자 및 첫 MVP]
타율 3할 5푼 3리를 기록하며 3년 연속 수위 타자를 석권했고, 생애 첫 센트럴 리그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1961년에는 타율 3할 5푼 3리로 2위 곤도 가즈히코(3할 1푼 6리)와의 큰 격차를 내면서 3년 연속이 되는 수위 타자를 석권했고 생애 첫 센트럴 리그 MVP에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시즌 28홈런을 기록하면서 홈런왕까지 차지했지만 타점은 리그 2위에 해당되는 86타점을 기록하여 3관왕을 놓쳤습니다.
1962
1962년, 팀내 절친한 사이이자 동고동락을 하며 지내온 사다하루가 홈런왕과 타점왕 등 연거푸 타이틀을 차지하며 사다하루와 함께 팀 타선의 주축이 된 일명 'ON포'(사다하루와 나가시마의 영문 이니셜)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미키 맨틀과 로저 메리스를 MM포에 비유했습니다.
1963
[수위 타자·타점왕 동시 석권 및 MVP]
타율 3할 4푼 1리, 37홈런, 112타점을 기록하며 수위 타자와 타점왕을 동시에 석권했고, 통산 2번째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습니다.
1963년은 타율 3할 4푼 1리, 37홈런, 112타점으로 수위 타자와 타점왕을 동시에 석권했고 홈런은 사다하루의 40홈런에 뒤를 이은 리그 2위를 차지하면서 사다하루의 타점도 나가시마에 뒤를 잇는 리그 2위였습니다. 2년 만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막대한 공헌을 하는 등 통산 2번째의 센트럴 리그 MVP를 수상했습니다.
1965
[요미우리 자이언츠 V9 달성]
요미우리 자이언츠가 일본 시리즈 9연패(V9)를 달성하는 데 오 사다하루와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습니다.
요미우리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일본 시리즈를 9연패를 달성하여(V9) 이들 두 사람(나가시마와 오 사다하루)은 당시의 팀을 대표하는 선수였습니다. 이 기간 동안 나가시마는 타율, 홈런, 타점 등 모든 면에서 꾸준히 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팀 공격을 주도했습니다. 이는 일본 프로 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기록으로, 나가시마의 존재감이 팀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보여줍니다.
1966
[메이저 리그 이적 제의 거절]
미일 야구 대회 참석차 일본을 방문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 회장으로부터 메이저 리그 이적 제의를 받았으나, 일본 야구 발전을 위해 거절했습니다.
1966년, 나가시마의 시즌 타율은 3할 4푼 4리를 남겨 통산 5번째의 수위 타자를 획득했고 26홈런과 105타점은 각각 사다하루에 뒤를 이은 리그 2위였습니다. 가을에는 미일 야구 대회 참석차 일본을 방문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의 회장이 '나가시마가 우리 팀에 들어오면 좋겠다. 양보해달라'고 쇼리키 마쓰타로 구단주에게 타진했지만 '나가시마가 없어지면 일본 야구는 10년 늦는다'고 거절했기 때문에 메이저 리그 이적은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1968
[난투극 직후 홈런 폭발]
한신과의 더블헤더 경기에서 난투극 발생 직후 곤도 마사토시로부터 3점 홈런과 2점 홈런을 연이어 때려내며 팀 승리에 기여했습니다.
1968년 9월 18일 한신과의 더블헤더 2차전에서 사다하루에게 위협구를 던진 한신 투수 진 바크에게 요미우리 코칭스태프가 달려들며 양 팀간 난투극이 발생했습니다. 난투극에 가담하지 않았던 나가시마는 그 직후, 곤도 마사토시가 던진 커브를 노려 3점 홈런(시즌 35호)을 때려냈을 뿐만 아니라 8회에도 2점 홈런을 때려내는 등 혼자서 팀 승리에 기여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1971
[통산 5번째 MVP 수상]
통산 5번째 센트럴 리그 MVP에 선정되며 역대 2위 타이 기록을 세웠고, 우타자로는 최다 타이 기록을 달성했습니다.
1971년 시즌에는 2위 기누가사 사치오와의 격차가 크게 벌어진 3할 2푼의 타율을 남기는 등 통산 6번째의 수위 타자가 되었습니다. 시즌 종료 후인 12월 27일에는 다음 시즌부터 코치를 겸임하는 것으로 공식 발표했고 통산 5번째인 센트럴 리그 MVP에 선정되었습니다.
[통산 2000안타 달성]
야쿠르트전에서 아사노 게이시를 상대로 역대 5번째, 우타자 최고 속도로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습니다.
1971년 5월 25일 야쿠르트전에서 상대 투수 아사노 게이시로부터 역대 5번째가 되는 통산 2000안타를 달성했습니다. 1708경기에서의 2000안타 달성은 가와카미 데쓰하루에 이어 가장 빠른 기록(역대 2위)이며 우타자로서는 역대 최고 속도 기록입니다. 또한 대졸자로서 프로에 들어간 프로 야구 선수로서는 첫 달성자가 되었습니다.
1974
[현역 은퇴 선언]
주니치의 리그 우승 확정으로 팀의 10연패 달성이 무산된 날, 현역 은퇴를 표명하며 야구 인생의 한 페이지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10월 12일, 주니치의 리그 우승이 확정되면서 요미우리의 리그 10연패 달성이 무산된 날에 나가시마는 현역 은퇴를 표명했습니다. 은퇴 기자회견에서 '나는 엉망진창이 될 때까지 (야구를) 할 수 있어서 행복했습니다. 마지막까지 경기에 나가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팬들에게 감사를 전했습니다.
[은퇴 경기 마지막 홈런]
주니치와의 은퇴 경기 1차전에서 마지막 홈런(통산 444호)을 때려냈고, 사다하루와 마지막 'ON 동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은퇴 경기를 앞두고 미팅에서 팀 동료들에게 '모두들 언젠가는 은퇴하는 날이 오겠지만 그것까지 최선을 다해 후회가 없는 플레이를 해주었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1차전에서 3번·3루수로 선발 출전했고 두 번째 타석에서는 무라카미 요시노리로부터 현역 생활 마지막 홈런(통산 444호)을 때려냈습니다. 사다하루도 홈런을 때려내며 마지막(106개째) 'ON 동반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은퇴식 명언]
은퇴 경기 종료 후 고라쿠엔 구장에서 거행된 은퇴식에서 '우리 교진군은 영구히 불멸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팬들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2차전 종료 후 은퇴식이 거행됐는데 나가시마는 고별 인사에서 '우리 교진군은 영구히 불멸입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 발언은 일본 프로 야구 역사에 길이 남을 명언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은퇴 경위에 대해 타구가 야수의 정면을 찌르는 듯한 힘에 쇠약해짐을 느꼈고, 지난해 오프 때 은퇴를 결심했다고 말했습니다.
[선수 생활 최종전]
메이저 리그 뉴욕 메츠와의 미일 친선 야구 대회에서 4타수 2안타 1타점을 기록하며 현역 선수로서의 마지막 경기를 치렀습니다.
정규 시즌 종료 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뉴욕 메츠 구단을 불러 전국 주요 도시에서 미일 친선 야구 대회(18경기)가 치러졌기 때문에 나가시마는 그 중 17경기에 출전했습니다. 현역으로서의 최종전은 1974년 11월 20일 시즈오카현 시즈오카시의 구사나기 구장에서 열린 경기에서 4타수 2안타 1타점을 기록했습니다.
[요미우리 감독 부임 및 등번호 3번 영구 결번]
가와카미 데쓰하루 감독의 후임으로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제13대 감독으로 부임했으며, 선수 시절 등번호 3번은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습니다.
1974년 11월 21일, 요미우리는 고라쿠엔 구장에서 기자 회견을 열어 가와카미의 후임으로 나가시마가 차기 감독으로 부임했다고 공식 발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나가시마는 '클린 베이스볼'을 표방했습니다. 선수 시절에 착용했던 등번호 3번은 영구 결번으로 제정되었습니다.
1975
[감독 첫 해 최하위]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 주력 선수들의 부진과 팀 성적 악화로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최하위(6위)로 추락하는 불명예를 안았습니다.
감독으로 부임한 첫 해(1975년)에 주력 선수들의 성적 부진과 신통치 않은 팀 성적으로 악재가 겹치면서 결국 팀 창단 이후 처음으로 센트럴 리그 최하위(6위, 47승 7무 76패)로 추락하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습니다. 10월 15일에는 홈구장인 고라쿠엔 구장에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패하여 구단 창설한 지 26년째의 상대에게 리그 첫 우승을 헌납했습니다.
1976
['그린 베이스볼'로 리그 우승]
전년도 최악의 부진을 딛고 '그린 베이스볼'과 '챌린지 베이스볼'을 표방하며 팀을 재정비, 리그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1975년 시즌 종료 후 '그린 베이스볼', '챌린지 베이스볼'을 표방하여 이기는 야구에의 변화를 도모했습니다. 닛폰햄 파이터스로부터 장훈을 영입하고, 다이헤이요 클럽 라이온스로부터 가토 하지메를 영입하는 등 전력 강화에 착수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1976년에는 리그 우승을 달성했으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한큐 브레이브스에게 3승 4패로 패했습니다.
1980
[요미우리 감독 사임]
가와카미파와의 갈등 속에서 요미우리 감독직에서 사실상 해임됐고, 이후 '떠돌이 시대'를 시작하며 야구 해설가 등으로 활동했습니다.
1980년 시즌, 젊은 선수들을 적극 기용했으나 세대교체 단경기 상황에서 연승을 이어가지 못했습니다. 나가시마에 대한 비판이 커지는 가운데, 가와카미 데쓰하루 전 감독의 대망론이 급부상했고, 가와카미파의 공작으로 인해 구단주 쇼리키 도루가 아닌 요미우리 신문사 사장에 의해 시즌 종료를 앞두고 해임이 결정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음모'로 간주한 나가시마는 가와카미에 대한 악감정을 갖게 되었고, 이후 개인 사무소 '오피스엔'을 설립해 '떠돌이 시대'를 시작했습니다.
1982
[한국 야구 발전에 기여]
한국야구위원회 초청으로 대한민국을 방문, 세미나 강연자로 나서 한국 야구 발전에 대한 조언을 전했습니다.
요미우리 감독에서 물러난 이후 야구 뿐만 아니라 스포츠 전반의 지도자적 역할, '스포츠 외교관'적 역할을 보여주었습니다. 특히 1982년 1월에는 한국야구위원회 초청으로 대한민국을 방문, 세미나의 강연자로 나선 적도 있습니다.
1985
1980년대부터 일본에서의 주목도가 높아졌던 트라이애슬론에 대해서도 1985년에 경기 단체 중 하나인 일본트라이애슬론연맹의 초대 회장을 맡았습니다. 나가시마는 1992년에 요미우리 감독으로 취임한 이후에도 회장직에 계속 머무르며 1994년 4월에 각 경기 단체를 통합해서 발족한 일본트라이애슬론연합의 명예회장으로 추대되었습니다.
1988
일본 야구 전당 헌액자(1988년)
1992
[제2기 요미우리 감독 복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제13대 감독으로 복귀하며 등번호 33번을 배정받고 팀 재건에 나섰습니다.
나가시마 퇴임 후 후지타 모토시 감독, 오 사다하루 감독 체제를 거쳐 후지타가 다시 복귀했으나 건강 문제로 후임 감독 문제가 거론되었습니다. 1990년 가와카미 데쓰하루와의 화해, 1991년 무타이 미쓰오의 사망, 와타나베 쓰네오의 요미우리 신문 사장 취임 등 감독 복귀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1992년 10월 12일 제13대 감독으로서 기자회견을 가졌고, 등번호는 '33'번으로 결정했습니다.
1994
['10.8 결전' 승리 및 일본 시리즈 우승]
주니치 드래건스와의 리그 동률 상황에서 '국민적 행사'로 불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하며 리그 우승을 이끌고, 일본 시리즈에서도 세이부 라이온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1994년에는 주니치와 리그 동률을 이루면서 시즌 마지막 경기(10월 8일)에서는 주니치와 상대하여 팀의 리그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경기 직전에 나가시마는 이 경기를 '국민적 행사'라고 발언하여 후에 '10.8'이라는 이름이 붙여질 정도의 명승부가 되었습니다.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는 현역 시절 동료인 모리 마사아키가 이끄는 세이부 라이온스와의 맞대결을 펼쳤고, 4승 2패의 성적으로 감독 부임 이후 처음으로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시즌 종료 후 일본 야구계 최고상인 쇼리키 마쓰타로상도 수상했습니다.
1996
['메이크도라마'로 리그 우승]
최대 11.5경기 차로 벌어졌던 히로시마를 제치고 선두를 탈환하며 '메이크도라마'를 완성, 리그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1996년에는 최대 11.5경기차로 벌어졌던 히로시마를 제치고 선두 자리를 탈환하면서 리그 우승을 달성했습니다. 이는 작년에 달성할 수 없었던 2년 넘는 '메이크도라마'를 완성시킨 것으로 평가받았습니다. 그러나 일본 시리즈에서는 오릭스 블루웨이브에게 1승 4패로 패해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습니다. 시즌 종료 후 아들 가즈시게에게 스스로 방출 통보를 전하며 현역을 은퇴시켰습니다.
2000
['ON 대결' 승리 및 일본 시리즈 우승]
등번호를 현역 시절 3번으로 변경하고, 오 사다하루 감독이 이끄는 다이에 호크스와의 'ON 대결'로 주목받은 일본 시리즈에서 승리하며 통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2000년에는 FA로 입단한 에토 아키라에게 등번호 33번을 양보하고 나가시마는 현역 시절 등번호였던 3번으로 변경했습니다. 당시에 화제성이 결여돼 있던 팀의 화제몰이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 해엔 4년 만에 리그 우승을 이끌었습니다. 일본 시리즈 상대팀이자 오 사다하루 감독이 이끄는 전년도 일본 시리즈 우승팀 다이에였는데, 일명 'ON 대결'로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습니다. 일본 시리즈에서는 1·2차전 연속으로 패하는 등 고전했지만 그 후 4연승을 기록하여 자신으로서는 통산 두 번째의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오르는데 성공했습니다.
2001
[요미우리 감독 퇴임 및 종신 명예 감독]
9년간의 감독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요미우리 감독에서 물러나며 종신 명예 감독으로 취임했습니다. 기자회견에서 '야구는 인생 그 자체입니다'라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2001년 이 해를 끝으로 감독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히면서 9년 간의 감독 생활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9월 28일에 감독 퇴임과 동시에 종신 명예 감독으로 취임한다는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기자 회견장에서 '나가시마에게 있어서 야구라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에 '야구라는 스포츠는 인생 그 자체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2002
[아테네 올림픽 대표팀 감독 부임]
아테네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하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정식 부임하며, 프로 야구 선수 출신으로는 최초로 대표팀 사령탑에 올랐습니다.
2002년 4월 22일에 아테네 올림픽 출전을 목표로 하는 일본 대표팀의 전력 강화위원장으로 부임했습니다. 7월에는 릿쿄 학원 영예상(제1호)을 수상했고 같은 해 12월 2일에 아테네 올림픽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정식 부임했습니다. 프로 야구 선수 경험이 있는 인물로는 최초로 대표팀 사령탑에 올랐습니다.
2004
[뇌졸중 발병]
아테네 올림픽을 약 반년 앞두고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으며, 우반신 마비와 언어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후유증을 겪었습니다.
올림픽을 약 반년 앞둔 이듬해 2004년 3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고, 한때는 의식불명 상태에 빠졌지만 우반신에 마비가 남아있어 언어 능력에도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로 인해 아테네 올림픽에서 대표팀 지휘를 맡을 수 없게 되었고, 수석 코치인 나카하타 기요시가 대신 지휘를 맡았습니다.
2005
2005년 11월 3일에는 2005년도의 문화공로자(스포츠 진흥)로 선정되었고 이듬해 2006년에는 소년 야구 교실에 참여하는 것 외에도 재활훈련의 성과도 있어 조금씩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2013
2013년 4월 1일 오후, 스가 요시히데 내각관방장관은 기자회견에서 국민영예상 수여와 관련해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국민영예상 수여를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같은 달 16일에 일본 정부는 나가시마와 마쓰이를 국민영예상 공동 수상자로 결정했습니다.
2021
[도쿄 올림픽 성화 봉송]
도쿄 올림픽 개막식에서 오 사다하루,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성화 봉송 주자로 참여하였습니다. 당초 2020년 성화 봉송이 유력했으나 건강 문제로 참가가 불확실했던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올림픽이 코로나19 사태로 2021년으로 연기되면서 재활을 재개했습니다. 2021년 6월 하순 경 대회 조직위원회로부터 정식 제안을 받아, 7월 23일 올림픽 개막식 성화 봉송에 오 사다하루, 마쓰이 히데키와 함께 참가했습니다. 요시다 사오리, 노무라 다다히로로부터 성화봉을 전달받아 오 사다하루에게 건네준 뒤 마쓰이의 부축을 받고 경기장을 걸었습니다.
[문화훈장 수여 발표]
일본 정부가 나가시마 시게오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키로 발표하며, 일본 프로 야구계에서는 최초의 문화훈장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2021년 10월 26일, 일본 정부는 나가시마에게 문화훈장을 수여키로 발표했습니다. 이는 프로 야구계에서는 최초의 문화훈장 수상입니다. 그의 스포츠 진흥에 대한 공로가 높이 평가받았습니다.
2025
2022년 9월 자택에서 넘어져 뇌출혈 증세로 입원 치료를 받던 중, 2025년 5월 이후 혈압 저하 등 건강 악화로 중환자실에서 집중 치료를 받았습니다. 결국 6월 3일 오전 6시 39분 도쿄 도내 병원에서 폐렴으로 사망했습니다(향년 89세). 이날은 둘째 딸 미나의 생일이었고, 미나가 임종을 지켰습니다. 일본 야구계는 물론 해외에서도 애도 물결이 이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