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연표
595
[김유신 탄생]
신라 진평왕 건복 12년, 김유신이 아버지 김서현의 부임지인 만노군(현재 진천군)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는 그를 스무 달 품어 낳았다고 전해집니다.
진평왕 건복 12년, 아버지 김서현의 부임지인 만노군(현 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상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만명은 그를 낳기 전 형혹성과 진성 두 별이 자신에게 내려오는 꿈을 꾸고, 황금 갑옷을 입은 어린아이가 구름 타고 집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으며, 스무 달 만에 그를 낳았다고 합니다. 그의 탄생지 및 태실로 전해지는 곳은 '진천 김유신 탄생지와 태실'이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의 사적지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609
[화랑 용화낭도의 우두머리가 됨]
15세의 김유신은 화랑이 되어 용화낭도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군사적 리더십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었습니다.
건복 26년,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낭도(龍華香徒)를 이끌게 되었습니다. 화랑으로서 그의 청년기는 신라의 미래를 이끌 인재로 성장하는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611
[중악에서 수도하며 비법 전수받음]
17세의 김유신은 중악의 동굴에 들어가 재계하며 하늘에 기도하던 중, 난승이라는 노인으로부터 신비로운 비법을 전수받았습니다.
진평왕 건복 28년, 김유신은 17세에 중악의 동굴에 들어가 재계하고 하늘에 기도했습니다. 나흘째 되는 날, 난승이라는 노인이 나타나 그에게 신비한 비법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노인은 비법을 의롭지 못한 일에 쓰면 재앙을 받을 것이라 경고하고 홀연히 사라졌으며, 김유신은 그가 비범한 인물임을 깨달았습니다.
[첩자 백석의 낭도 침투]
고구려(혹은 말갈 계통)의 첩자인 백석(白石)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김유신의 낭도 무리에 합류한다. 백석은 수년간 김유신의 곁을 지키며 그를 보좌하여 깊은 신뢰를 쌓는 데 주력한다. 김유신은 밤낮으로 삼국통일을 염원하며 수련하느라 그를 전혀 의심하지 못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석은 김유신이 고구려를 치고자 하는 뜻이 강함을 알고, 그를 유인하여 제거하기 위해 고구려 조정의 지령을 받고 잠입한 인물입니다.
612
[별의 정기가 깃든 보검을 얻다]
중악에서 비법을 전수받은 김유신은 18세에 열박산에서 기도하여 허성과 각성 두 별의 빛이 깃든 보검을 얻어 국선이 되었습니다.
건복 29년, 김유신은 보검을 가지고 열박산 깊은 골짜기에 들어가 하늘에 기도했습니다. 사흘째 되는 밤, 허성과 각성 두 별의 빛이 내려와 칼에 깃들어 그의 검은 별의 정기를 품은 영검으로 거듭났다고 전해집니다. 이로써 그는 국선(國仙)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적진 정탐과 유인]
백석은 김유신에게 "우리가 함께 은밀히 고구려로 가서 지형을 살피고 온다면 훗날 정벌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꾐을 시도한다. 나라를 위한 마음에 감복한 김유신은 기뻐하며 단둘이서 고구려로 떠날 채비를 한다. 두 사람은 밤길을 재촉하여 신라 국경을 향해 나아간다.
당시 김유신은 중악(中嶽)과 인박산 등에서 기도를 올리며 영적인 체험을 하던 시기(17~18세)였습니다. 백석은 김유신의 이러한 공명심과 애국심을 역이용하여 그를 납치하려 했습니다.
[골화천의 세 신녀]
골화천(현재 경북 영천 인근)에 이르러 유신 일행이 잠시 쉴 때, 세 명의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나 곁에 앉는다. 김유신이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여인들은 귤과 과자를 건네며 백석이 첩자임을 은밀히 암시한다. 여인들은 김유신을 따로 불러 "백석은 당신을 죽이려는 자"라고 경고한 뒤 홀연히 사라진다.
세 여인은 사실 내림(奈林), 혈례(穴禮), 골화(骨火) 세 곳을 지키는 호국신(산신)들이 여인의 모습으로 현신한 것이었습니다. 이는 김유신이 신라의 수호신들로부터 보호받고 있음을 상징합니다.
[김유신의 탈출과 회군]
신녀들의 경고를 들은 김유신은 태연하게 백석에게 돌아와 "중요한 문서를 잊고 왔다"라고 거짓말을 한다. 백석을 객관에 기다리게 한 뒤, 김유신은 말을 타고 전력으로 달려 신라 수도 서라벌로 돌아온다. 이후 즉시 관군을 보내 골화천에 있던 백석을 체포하여 압송한다.
김유신이 두고 왔다고 핑계를 댄 물건은 '긴요한 문서' 혹은 '보패' 등으로 묘사됩니다. 이는 의심을 사지 않고 백석을 떼어놓기 위한 기책이었습니다.
[추남의 원혼과 처형]
혹독한 심문을 받은 백석은 자신이 고구려 왕의 명령을 받고 김유신을 죽이러 왔음을 자백한다. 그는 과거 고구려에서 억울하게 죽은 점쟁이 '추남'이 김유신으로 환생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언 때문에 파견되었다고 진술한다. 모든 전말이 밝혀진 후 백석은 참수되고, 김유신은 자신을 구해준 세 신녀에게 제사를 지낸다.
백석의 진술에 따르면, 고구려 보장왕(혹은 이전 왕)이 궤짝 안에 든 쥐의 성별을 맞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점쟁이 추남을 죽였습니다. 죽기 전 추남은 "장군으로 환생해 고구려를 멸망시키겠다"고 저주했고, 그 환생체가 김유신이라 믿어 자객을 보냈다는 내용입니다.
615
[기생 천관녀와 애마 참수 사건]
신라의 화랑 김유신이 기생 '천관녀'에게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어머니의 엄한 꾸중을 듣고 발길을 끊기로 맹세했다. 어느 날 술에 취해 잠들었는데, 말이 습관대로 천관녀의 집 앞으로 그를 태우고 갔다. 김유신은 자신의 다짐을 깨뜨렸다며 그 자리에서 칼을 뽑아 아끼던 말의 목을 베어버리고 냉정하게 돌아섰다.
배경: 김유신은 가야 왕족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삼국 통일의 주역이 되기 위해 엄격한 자기 관리가 필요했다. 어머니 만명부인은 "장차 큰 일을 할 아이가 술과 여자에 빠져 있느냐"며 그를 강하게 훈육했다.
팩트: 『삼국유사』와 『파한집』에 기록된 내용이다. 김유신이 말의 목을 베고 가버리자, 천관녀는 그를 원망하며 '원사(怨詞)'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전해진다. 김유신은 훗날 그녀를 위해 '천관사'라는 절을 지어주기도 했다. 이 사건은 김유신의 냉혹한 결단력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화다.
625
[김춘추 옷 찢기와 여동생 결혼 공작]
김유신은 진골 귀족인 김춘추(훗날 무열왕)와 축국(축구)을 하다가 일부러 그의 옷고름을 밟아 찢은 뒤, 수선을 핑계로 집으로 데려가 여동생 문희와 만나게 했다. 이후 문희가 임신했으나 김춘추가 결혼을 망설이자, 김유신은 "아비 없는 자식을 뱄으니 태워 죽이겠다"며 마당에 불을 지르는 시위를 벌였다. 이를 본 선덕여왕(당시 공주)의 중재로 결국 결혼이 성사되었다.
설계: 『삼국유사』 기이편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김유신은 가야계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인 김춘추와의 결합이 절실했다.
불쇼의 디테일: 김유신은 선덕여왕이 남산으로 행차하는 날짜와 시간을 미리 파악하고, 그 타이밍에 맞춰 장작에 불을 질러 연기를 피웠다. 연기를 본 여왕이 자초지종을 묻게 유도하고, 옆에 있던 김춘추를 압박해 결혼을 승낙받게 한 철저한 기획 자작극이었다.
결과: 이 결혼으로 김유신은 '왕의 처남'이자 '왕의 외삼촌(문무왕)'이 되어 신라 권력의 핵심으로 진입했다.
629
[고구려 낭비성 전투 승리]
34세의 김유신은 아버지를 따라 고구려 낭비성 공격에 종군했습니다. 신라군이 패배하자 직접 나서 적장을 참수하고 사기를 높여 성을 함락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진평왕 51년 가을 8월, 왕명을 받고 고구려 낭비성(狼鼻城)을 치는 아버지 김서현을 따라 부장군 또는 중당당주로 종군했습니다. 1차 접전에서 패배하여 사기가 꺾인 신라군 앞에서 김유신이 직접 적진을 오가며 적을 교란하고 적군 장수의 목을 베어 돌아오자, 신라군은 용기를 얻어 진격했고 고구려군은 항복했습니다.
642
[대야성 함락과 김품석 부부 사망]
백제 의자왕이 대야성을 함락시키면서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과 딸 고타소랑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은 김춘추와 김유신이 백제에 대한 복수를 맹세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선덕여왕 인평 9년 8월, 백제는 대야성을 포함한 신라 서쪽 40여 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김춘추의 사위였던 대야성주 김품석 부부가 죽임을 당하자, 김춘추는 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구려에 원병을 요청하러 떠났습니다. 김유신은 김춘추와 피로 맹세를 나누며 백제와 고구려를 멸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김춘추 구출을 위한 출정 준비]
김유신은 압량주도독으로 부임한 뒤, 고구려에 억류된 김춘추를 구하기 위해 결사대 1만 명을 조직하고 왕에게 출병을 요청하여 결국 김춘추가 풀려나게 했습니다.
인평 9년 겨울,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 군주(軍主)로 옮겨간 뒤, 고구려에 사신으로 갔다가 억류되었다는 김춘추의 소식에 군사 1만(열전에는 3천)을 모아 결사대를 조직하고 왕에게 고구려로 보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이 소식을 접한 고구려는 전쟁 방지를 위해 김춘추를 석방시켰습니다.
644
[백제 7성 점령 및 소판 승진]
진골 귀족 최고 관등인 소판으로 승진한 김유신은 상장군이 되어 백제의 가혜성 등 7개 성을 점령하며 군사적 역량을 과시했습니다.
인평 11년 9월, 김유신은 진골 귀족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관등인 소판(蘇判)으로 승진하고 상장군이 되어 왕명으로 백제의 가혜성, 성열성, 동화성 등을 포함한 7개 성을 점령했습니다. 이 승리는 신라의 서부 전선을 강화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습니다.
645
[백제 매리포성 침공 격퇴]
전년도 백제 7성 점령 후 서라벌로 돌아오던 김유신은 매리포성 침공 소식에 곧바로 출전하여 백제군 2천여 명을 베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인평 12년 정월, 서라벌로 돌아와 개선 보고도 하기 전에 백제군이 매리포성에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날아들었습니다. 여왕은 김유신을 상주장군으로 삼아 막게 했고, 그는 집에 들르지도 않고 곧바로 달려나가 백제군 2천여 명의 목을 베는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인평 12년 음력 3월, 김유신은 다시 왕명을 받고 백제를 쳐서 침략을 격퇴하는 공을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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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평 14년 정월 8일, 비담의 난이 진행 중이던 상황에서 선덕여왕이 서거했습니다. 여왕의 뒤를 이어 사촌인 승만공주가 왕위를 계승하여 진덕여왕이 되었습니다.
[비담의 난 진압]
상대등 비담과 염종이 일으킨 반란에서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반군을 제압했습니다. 특히 허수아비 연 작전으로 반군의 사기를 꺾고 비담을 죽여 9족을 멸했습니다.
인평 14년 정월, 상대등 비담과 염종 등이 여왕의 부덕을 빌미로 난을 일으켰습니다. 김유신은 김춘추와 함께 월성에 진영을 설치하고 명활성에 주둔한 반란군과 열흘간 대치했습니다. 비담이 별이 떨어진 것을 보고 승리 징조로 삼자, 김유신은 허수아비를 연에 매달아 밤하늘에 띄워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반군의 사기를 꺾었습니다. 이틈을 타 명활성을 함락하고 1월 17일에 비담을 쳐서 그 9족을 모두 죽여 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인평 16년 10월, 비담의 난을 진압한 후 압량주군주로 부임한 김유신은 무산성(茂山城), 감물성(甘勿城), 동잠성(桐岑城)에 들어온 백제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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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12성 함락 및 이찬 승진]
김유신은 백제의 악성 등 12개 성을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공로로 이찬으로 승진하고 상주행군대총관에 임명되었습니다.
태화 원년, 김유신은 승세를 몰아 거듭 백제를 쳐서 악성 등 12개 성을 함락시켰으며, 2만여 명을 죽이고 9천여 명을 사로잡았습니다. 그 공으로 김유신은 이찬으로 승진한 뒤 상주행군대총관에 임명되었습니다.
[백제 진례성 등 9성 공격]
김유신은 백제의 진례성 등 9개 성을 공격하여 9천여 명을 죽이고 6백여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태화 원년, 김유신은 백제의 진례성 등 9개 성을 쳐서 9천여 명을 죽이고 6백여 명을 사로잡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 해에 김춘추는 당에서 원병 파병 약속을 받아내고 귀국했습니다.
[대야성 수복 및 김품석 부부 유골 송환]
김유신은 백제에게 빼앗겼던 대량주를 수복하고 대야성을 공격하여 백제군을 옥문곡으로 유인해 크게 격파했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를 통해 김품석 부부의 유골을 송환받는 데 성공했습니다.
진덕여왕 태화 원년 4월, 김유신은 압량주군주로서 백제에 빼앗겼던 대량주를 다시 공격하여 수복하고, 대야성 밖에 이르러 백제군을 유인해 계곡에 매복시킨 군사들과 협공하여 1천여 명을 죽였습니다. 이후 교섭을 통해 사로잡은 백제 장군 8명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대야성에서 죽은 김품석 내외의 유골을 송환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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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은상 침공 격퇴]
백제 장군 은상이 석토성 등 7개 성을 기습하자, 김유신은 간첩을 역이용하는 전법으로 은상과 백제 장수 10명을 포함해 8,980명의 백제군을 죽이고 100명의 장수를 사로잡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태화 2년 8월, 백제의 좌평 은상이 대군을 이끌고 석토(石吐) 등 7개 성을 기습하여 대량의 전사자가 발생하고 성들을 빼앗겼습니다. 김유신은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은상과 자견을 비롯한 백제 장수 10명과 8,980명의 백제군을 죽이고, 달솔 정중 등 장수 100명을 사로잡았습니다. 또한 말 1만 필과 갑주 1,800필을 노획하는 대승을 거두었으며, 서라벌로 돌아와 진덕여왕으로부터 극진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654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
진덕여왕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김유신은 화백회의에서 이찬 김춘추를 설득하여 왕으로 추대함으로써 태종 무열왕의 즉위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진덕여왕 8년 봄 3월, 진덕여왕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서거하자 화백은 상대등 알천을 추대했으나, 알천은 이를 거부하고 이찬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김유신의 정치적 영향력은 화백의 결정을 취소시키고 자신의 연척인 김춘추를 왕으로 추대할 만큼 성장해 있었습니다. 이가 태종 무열왕입니다.
655
[지소부인과 혼인]
김유신은 태종 무열왕의 셋째 딸이자 자신의 외조카인 지소와 혼인하며 신라 왕실과의 이중, 삼중 혼맥을 통해 최고 권력자로 부상했습니다.
무열왕 2년, 태종 무열왕의 셋째 딸이자 외조카였던 지소부인과 혼인했습니다. 이러한 신라 왕실과의 중첩적인 혼맥을 통해 그는 신라의 최고 권력자로 부상하며 정치적 기반을 더욱 공고히 했습니다.
660
[상대등에 오르다]
무열왕 7년 정월, 김유신은 상대등 금강의 뒤를 이어 신라의 최고 관직인 상대등에 임명되며 명실상부한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무열왕 7년 초, 김유신은 상대등으로 승진했습니다. 이는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서 그의 위상이 확고해졌음을 의미합니다.
[황산벌 전투 승리]
김유신은 5만 병력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계백이 지휘하는 5천 백제 결사대와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했습니다. 이는 백제 멸망의 결정적인 발판이 되었습니다.
무열왕 7년 6월, 당 고종이 보낸 소정방이 지휘하는 13만 수군과 합류하기 위해 김유신은 태자 법민과 함께 5만 병사를 이끌고 출정했습니다. 사비성으로 향하던 중 7월 9일, 백제의 계백이 이끄는 5천 병력과 황산벌에서 만나 치열한 전투 끝에 승리했습니다. 이 전투 승리 후, 약속 기일에 하루 늦은 것을 트집 잡아 신라측 독군 김문영을 처형하려던 소정방에게 강경하게 맞서 뜻을 굽히게 했습니다.
김유신은 자신의 동생(김흠순)의 아들인 '반굴'을 먼저 적진으로 돌격시켜 전사하게 했고, 이후 품일 장군의 아들 '관창'을 보냈습니다. 계백이 관창의 어린 나이를 보고 가상히 여겨 살려 보냈으나, 관창은 돌아오자마자 "적장의 목을 베지 못하고 왔다"며 우물 물을 마시고 다시 적진으로 돌진했습니다. 결국 계백이 그를 참수하여 머리를 말 안장에 묶어 돌려보냈습니다.
[백제 멸망]
황산벌 전투 승리 후, 나·당 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웅진성으로 달아났던 의자왕이 결국 항복하며 백제는 멸망했습니다.
무열왕 7년 7월 13일, 나·당 연합군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태자 부여융과 좌평 사택천복 등을 포로로 잡았습니다. 이어서 7월 18일, 웅진성으로 달아났던 백제 의자왕이 성에서 나와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멸망했습니다. 김유신은 이 공적에도 불구하고 당의 회유를 거절하며 신라의 입장을 굳건히 했습니다.
661
[고구려 평양성 군량 수송 자원]
평양을 포위한 당군에게 군량 수송 요청이 오자, 67세의 김유신은 어려운 임무에 스스로 자원하여 김인문 등과 함께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갔습니다.
태종 무열왕 8년, 문무왕 원년 11월, 평양을 포위하고 있던 소정방으로부터 군량 수송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위험한 임무에 누구도 자원하려 하지 않자, 김유신이 스스로 자원하여 임무를 수행하겠다고 나섰습니다. 문무왕은 기뻐하며 그에게 국경을 넘어 상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면책특권을 주었습니다. 12월 10일, 김유신은 부장군 김인문, 김진복, 김양도 등과 함께 쌀 4천 섬과 조 22,250섬을 싣고 수송부대를 이끌고 고구려 국경으로 들어갔습니다.
662
[고구려 군량 수송 및 역습 성공]
김유신은 혹한 속에서 고구려에 군량을 성공적으로 수송하고, 퇴각하는 길에 추격해온 고구려군을 유인하여 1만 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공로로 본피궁 토지와 보물을 하사받았습니다.
문무왕 2년 정월 23일, 김유신은 칠중하를 건너 험한 길을 택해 나아갔습니다. 2월 1일, 평양 가까이 이르러 보기감 열기, 구근 등을 소정방에게 보내 신라군의 도착을 알렸습니다. 2월 6일, 양오에 진을 치고 김인문과 김양도를 통해 소정방에게 군량을 전달했습니다. 소정방이 군량을 받자마자 퇴각하자, 김유신은 고구려군의 기습에 대비한 교란 작전을 펼치며 표하(임진강)에 이르렀습니다. 강을 건너는 도중 추격해온 고구려군을 집단 사격으로 역습, 장군 한 명을 사로잡고 1만여 명의 목을 베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이 공으로 본피궁의 토지, 노비, 보물을 은상으로 하사받았습니다.
663
[백제 부흥군 진압 공로 포상]
김유신은 문무왕과 함께 당군과 연합하여 백제 흥복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함락시키고 부흥운동을 진압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이 공로로 토지 500결을 하사받았습니다.
문무왕 3년 8월 13일, 백제 흥복군 내부의 분열과 혼란이 거듭되는 가운데, 당으로부터 증원된 손인사 등이 이끄는 수군과 문무왕, 김유신 등이 이끄는 육군이 육지와 바다에서 백제와 왜의 연합군을 격파했습니다. 마침내 백제 흥복군의 본거지 주류성을 함락시키며 부흥운동을 진압했습니다. 그 공로로 김유신은 겨울 11월 20일에 토지 500결을 상으로 하사받았습니다.
668
[고구려 멸망 (삼국통일의 주요 단계)]
김유신은 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직접 참전하지 못하고 서라벌에 남았지만, 그의 조카 김인문과 아우 김흠순 등이 주장이 되어 나·당 연합군이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을 함락시키며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문무왕 8년 6월 21일, 김유신은 고구려 원정군의 최고 총사령관인 대당대총관에 임명되었으나, 늙고 쇠약해진 데다 병까지 들어 직접 원정에 참가하지 못하고 서라벌에 남았습니다. 대신 김유신의 조카 김인문과 아우 김흠순 등이 대신 주장(主將)으로 나섰습니다. 마침내 9월 26일, 나·당 연합군이 평양성을 함락시키고 고구려를 멸망시켰습니다. 이로써 삼한일통의 대업이 완성되는 중요한 단계가 이루어졌습니다.
[태대각간 임명 및 최고 예우 하사]
고구려 멸망 후, 문무왕은 김유신의 공적을 치하하며 전무후무한 최고 관등인 태대각간과 식읍 5백 호를 하사하고, 대궐에서 몸을 굽히지 않는 최고 예우를 허락했습니다.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회군하는 길에 남천주에 들른 문무왕은 신료들 앞에서 김유신의 조부와 아버지, 그리고 김유신 자신이 이룬 공적을 술회하며 그에게 태대서발한(太大大舒發翰, 태대각간)의 관등과 식읍 5백 호를 내렸습니다. 또한 수레와 지팡이를 하사하고 대궐에 오를 때 몸을 굽히지 않는 것이 허락되는 등 전무후무한 최고 예우를 받았습니다. 당 고종 또한 그에게 봉상정경·평양군개국공 식읍 2천 호라는 관직을 주었습니다.
672
[석문 벌판 패배와 김원술 처형 요청]
나당전쟁 중 신라군이 석문 벌판에서 당군에게 대패하자, 김유신은 방어전으로의 전술 변경을 조언했습니다. 또한, 살아 돌아온 아들 김원술의 '가풍을 더럽힌 죄'를 물어 처형을 요청했으나 문무왕은 거절했습니다.
문무왕 12년 8월, 나당전쟁 중 고구려 부흥군을 지원하던 신라군이 말갈과 연합해 석문(石文) 벌판에서 당군에게 크게 패배하며 여러 장수들이 전사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살아 돌아온 김유신의 아들 김원술에게 '왕명을 무시하고 가풍을 더럽힌 죄'를 물어 처형할 것을 문무왕에게 청했으나 거절당했습니다. 이후 김유신은 직접적인 전투보다는 성 위주의 방어전으로 전술을 변경할 것을 조언했습니다.
673
[김유신 서거]
문무왕 13년 7월 1일, 김유신은 79세의 나이로 자택에서 병사했습니다. 문무왕은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극진한 예우로 장례를 치렀습니다.
문무왕 13년 정월, 황룡사와 재성 사이에 큰 별이 떨어지고 지진이 일어나는 흉조가 있었으나, 김유신은 자신에게 일어날 일이라며 왕을 위로했습니다. 이후 병들어 누운 자신을 문병 온 문무왕에게 '처음은 있어도 끝까지 잘 맺는 이는 드물다'는 시경의 구절을 인용하며 당부의 말을 전한 뒤, 7월 1일 자택에서 7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문무왕은 크게 슬퍼하며 비단 1천 필과 조 2천 석을 부조로 보내고, 군악 고취수 100명을 장례식에 보내는 등 극진한 예우를 표했습니다. 그의 유해는 금산원(현 경주 김유신묘)에 묻혔으며, 왕명으로 공적비와 수묘인이 배치되었습니다.
835
[흥무왕으로 추존]
신라 흥덕왕 10년(835년), 김유신은 사후 '순충장렬흥무대왕' 즉 흥무왕으로 추존되어 신하로서 유일하게 왕의 지위로 격상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흥덕왕 10년, 김유신은 '흥무왕(興武王)'으로 추존되어 사후 신하로서 유일하게 왕으로 지위가 격상되는 전무후무한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는 태종 무열왕의 즉위와 삼한일통 전쟁에 세운 공적을 인정받은 결과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