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
연표
1851
[급진 개화파의 선구자, 김옥균 탄생]
조선 충청도 공주군에서 태어났다. 살결이 '백옥같이 곱고 희다' 하여 이름이 '옥균'이라 지어졌다고 한다.
1851년 2월 23일 조선 충청도 공주군에서 김병태와 은진 송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났을 때 살결이 '백옥같이 곱고 희다'고 하여 이름을 '옥균'이라 지었다고 전해진다.
1857
6살 때 김옥균은 5촌 당숙이자 당대 정계 거물인 김병기의 양자가 됐다. 당시 유력 집안에 적자가 없는 경우 일가 친척 중 양자를 들여 정치적 지위와 제사를 잇게 하는 경우는 흔했어도 맏이를 양자로 보내지는 않는데, 그럼에도 그는 친아버지인 김병태의 결정으로 세도가 집안에 입양가게 됐다. 이후 유명한 선생들을 찾아다니며 과거 준비에 전념했다.
1872
[문과 장원급제, 관료 생활 시작]
1870년 박규수의 문하가 된 후, 1872년 문과 알성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보임되며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1870년 홍문관 제학 박규수의 문하가 되어 서구 지리와 정세, 문물을 소개한 서적들을 탐독했다. 이후 1872년 문과 알성시에 장원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에 보임되며 관직에 올랐다. 양아버지의 배경과 우의정에 오른 스승 박규수의 인도로 권지에서 바로 임관됐다.
1876
['강화도 조약' 후 개화파 비밀결사 '충의계' 결성]
불평등 강화도 조약 체결 후, 나라의 자주 독립과 실력 양성, 개혁을 위해 신분을 초월한 비밀결사 '충의계'를 조직하고 동지들을 규합했다.
1876년 2월 불평등조약인 강화도 조약 체결 후, 김옥균 등 개화파(開化派) 청년들은 나라의 자주 독립과 실력 양성, 개혁을 추진할 정치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신분을 초월한 비밀결사를 결의했다. 그는 자주독립과 근대 개혁을 위해서는 이를 초월해야 한다고 설득해 뜻을 모았다. 김옥균, 홍영식, 민영익,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이 주축이 돼 유대치, 오경석, 이동인, 윤웅렬 등이 자문하는 식이었다.
1881
[신사유람단, 일본의 발전상 목격]
2만 엔의 거금을 마련해 신사유람단을 조직, 일본에 파견되어 나가사키, 고베, 오사카, 교토, 도쿄 등지에서 조선소, 제련소, 탄광, 군수기지 공장 등을 시찰하며 일본의 발전상에 감명받았다.
1881년 12월 신사유람단을 조직한 김옥균은 생가와 양가 재산 및 주변의 후원금 등을 모두 환전, 총 2만 엔의 거금을 마련해 방일했다. 일행은 나가사키를 거쳐 각자 흩어졌으며, 김옥균은 나가사키현 조선소, 제련소, 탄광, 금광 등을 시찰하고 채굴기계의 존재와 금속 가공원리를 파악하려 애썼다. 이후 고베, 오사카, 교토를 거쳐 1882년 3월 도쿄에 도착했다. 게이오 대학교를 설립한 개화 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의 집에 4개월 정도 머물며 일본의 발전상에 대해 담론을 나누고 일본 정재계 인사들을 만났다.
1883
[동남제도개척사로 울릉도·독도 영유권 확립에 기여]
일본 망명에서 귀국 직후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로 임명되어 울릉도에 어부들을 정착시켜 무인도화를 막고, '독섬'이라 불리던 독도의 지명을 확립하는 등 한국 영토 개척에 크게 기여했다.
1883년 3월 귀국과 동시에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東南諸島開拓使 兼 管捕鯨使)로 임명됐다. 이는 김옥균이 원하는 것이기도 했으나 사실 좌천이었다. 우선 울릉도에 남해안과 호남 출신 어부들을 정착시켜 무인도화를 막았다. 정착민들이 고기잡이를 나가면서 조선 때 지리 명칭인 우산도를 '돌섬'이라는 뜻의 호남 방언 '독섬'으로 불렀는데, 이것이 독도의 어원이 된다.
1884
[조선 최초의 근대적 개혁 시도, '갑신정변' 주도]
청나라의 내정 간섭과 민씨 척족의 부패에 맞서 1884년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고종의 승인 아래 개화파 신정부를 수립하고 14조 개혁 강령을 발표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했다.
1884년 8월 청불전쟁으로 청나라 주조선 병력이 감소하자, 김옥균은 혁명을 결심했다. 10월 12일 고종의 승인을 얻고, 10월 17일 우정국 낙성식에서 일본군 동원 준비를 확인 후 거사를 시작했다. 창덕궁에 입궐하여 고종을 경우궁으로 피난시키고 민씨 척신 세력을 척살했다. 10월 18일 새벽 신정부를 발족하고 이재원을 영의정, 홍영식을 좌의정에 임명하며 14조 개혁 강령을 발표했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고, 10월 20일 제물포항에서 지토세마루 호에 승선하여 일본으로 망명길에 올랐다.
1886
[일본 정부의 냉대, 외딴 섬으로 강제 연금]
조선 정부의 계속된 암살 시도와 일본 사회 내 '조선 토벌 음모' 루머로 인해, 일본 정부의 부담이 커지자 오가사와라섬에 2년간 강제 연금되었다.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은 조선 정부의 자객 파견과 일본 사회 내 '조선 토벌 음모' 루머로 인해 일본 정부에게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었다. 일본 정부는 그를 조선과 일본의 우호에 방해가 된다며 1886년 7월 그를 오가사와라섬에 강제로 연금했다. 그는 2년 동안 습한 기후와 악조건 속에서 실의의 나날을 보냈으며, 이후 1888년 8월 홋카이도로 이송되어 1890년 4월까지 연금 생활을 이어갔다.
1894
['호랑이 굴'에 들어가다, 상하이에서 비극적인 최후]
청나라의 실권자 리훙장과 담판을 짓기 위해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조선 정부의 사주를 받은 자객 홍종우에게 리볼버 권총으로 저격당해 암살되었다.
연금에서 해방된 후 청나라 리훙장과의 담판을 기획한 김옥균은 1894년 2월 상하이로 건너갔다. 오사카에서 조선 자객 이일직과 홍종우를 만났지만 이들을 역이용하려 했다. 3월 27일 윤치호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홍종우를 신뢰했던 그는 3월 28일 상하이 동화양행 호텔에서 와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홍종우의 리볼버 권총에 암살당했다. 그의 나이 향년 44세였다.
[역적 낙인, 시신마저 잔혹한 부관참시]
암살된 그의 시신은 청나라를 거쳐 조선으로 송환되어 서울 양화진에서 공개적으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머리는 효수되었다. 이 잔혹한 처벌은 국제적으로 보도되며 조선 정부의 야만성을 규탄받는 계기가 되었다.
상하이에서 암살당한 김옥균의 시신은 청나라를 거쳐 조선으로 인계되었다. 1894년 4월 28일 서울 양화진에서 공개적으로 능지처참을 당하고, 목에는 '모반 대역부도 죄인 옥균'이라 쓰인 천이 나부끼며 효시되었다. 그의 가족 역시 연좌제로 처벌되어 생부 김병태는 처형당하고 모친은 음독 자결하는 등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 사건은 외국인 기자들에 의해 보도되며 일본 지식인층의 격렬한 규탄을 받았다.
1910
[사후 명예 회복, 규장각 대제학 추증]
아관파천 후 취소되었던 복권이 1910년 순종에 의해 다시 이루어졌고,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며 충달공의 시호를 받았다.
1895년 갑오개혁으로 일시 사면·복권되었으나 아관파천 후 취소되었다. 이후 1910년 순종 때 다시 복권되어 규장각 대제학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충달(忠達)이다.
1989
[생가 터 정비 및 추모비 건립, 재조명 시작]
공주군청 주도로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 생가 터가 정비되고 복원된 생가 앞에 추모비가 건립되며 그에 대한 재조명이 이루어졌다.
1989년 2월 22일 공주군청의 주도로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광정리(현 공주시 정안면) 소재 생가 터를 정비하고, 복원된 생가 앞에 추모비가 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