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연표
1922
[출생]
대한민국 대구광역시에서 독실한 가톨릭 집안의 5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보냈습니다.
김수환은 1922년 7월 2일 경상북도 대구부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경상북도 군위군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5남 3녀 중 막내로, 8살 때 아버지 김영석 요셉을 여의고 홀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 슬하에서 자랐다. 조부 김보현 요한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가톨릭 신자였다.
1929
김수환은 8살 때 아버지 김영석 요셉을 여의고 홀어머니 서중하 마르티나 슬하에서 자랐다. 어머니 서중하는 가난한 옹기장수인 김영석과 결혼하고 고단한 삶을 살았으나 자식들 앞에서는 한 번도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1933
[신학교 입학]
어머니의 권유로 형 김동한 가롤로 신부와 함께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하며 사제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의 강요로 자신의 형 김동한(金東漢) 가롤로 신부와 함께 1933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에 입학한다. 이후 1935년에 졸업하고 서울대교구의 신학교였던 동성상업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지속하였다.
1941
[일본 유학 시작]
대구교구의 장학생으로 일본 조치대학교에 입학했으나, 일제 강점기 상황 속에서 독립투쟁에 관심을 두며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1941년 4월에 20세의 김수환은 천주교 대구대교구의 장학생으로 조치대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했으나 점차 독립투쟁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일본 유학시절 친일 성향의 일부 학생들과 조선인을 무시하는 일부 교수들과 관리들의 부당한 처우로 방황했지만 독일인 가톨릭 사제의 격려로 학업을 지속하였다.
1944
[학도병 강제 징집]
조치대학교 졸업을 앞두고 학도병에 강제로 징집되어 도쿄 남쪽 후시마 섬에서 사관후보생 훈련을 받았습니다. 일본 상관에게 조선인 차별을 항의하다가 병사로 신분이 격하되기도 했습니다.
1944년(당시 23세) 김수환은 졸업을 얼마 남겨 놓지 않았던 무렵에 강제로 학도병에 징집되어 도쿄 남쪽의 후시마 섬에서 사관후보생 훈련을 받게 되었다. 정상적으로 훈련을 마쳤으면 소위로 임관할 터였지만 일본군 상관에게 훈련에 대한 고충과 조선인에 대한 차별을 말해서 후보생 자격이 박탈되어 병(兵)으로 신분이 격하되었다.
1945
[일본 유학 중단 및 귀국]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조치대학교에 복학했으나 곧 자퇴하고 귀국하여 이듬해 성신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이듬해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다시 조치 대학교에 복학했으나 1945년 9월에 자퇴한 후 귀국하고 이듬해 성신대학에 입학하여 1950년에 졸업하였다.
1951
[사제 서품 및 첫 사목 활동]
대구 계산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안동성당에서 첫 사목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대구교구장 비서, 재경부장, 김천 성당 주임 등 다양한 직책을 수행했습니다.
1951년 9월 15일에 대구에 있는 계산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김수환이 사제로서 첫 사목 생활을 시작한 곳은 목성동성당 안동성당이었다. 이어 1953년 4월에 천주교 대구대교구장 최덕홍 주교의 비서, 천주교 대구대교구 재경부장을 거쳐 1955년 6월에는 김천시 김천 성당의 주임 겸 교구 평의원으로도 활동하였다.
1955
그해 성의여자고등학교의 교장으로 부임하여 1년 동안 재직하였다.
1956
[독일 유학 및 귀국]
35세에 뮌스터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독일 거주 한국인 노동자들을 돌보며 학업을 지속하기 어려워 박사 학위를 얻지 못하고 1964년에 귀국했습니다.
김수환은 1956년 7월 35세에 뮌스터 대학교 뮌스터대 대학원에 진학하였는데 그 시절 독일에 일하러 온 한국 노동자들을 돌보는 일을 맡아 학업을 지속하는데 어려움을 겪다가 결국 졸업하지 못했다. 1960년에 대한민국 제2공화국 출범 소식을 접했고 이듬해 1961년 다시 박정희 등에 의한 5.16 군사 정변 소식을 접하고 그는 군인들의 정변에 반대한다. 그 뒤 박사 학위를 얻지 못한 채 1964년에 귀국하고 그 해 6월에 '가톨릭시보사'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1964
[가톨릭시보사 사장 취임]
가톨릭시보사의 사장에 취임하여 1년 8개월 동안 안정적인 신문 제작과 발행에 힘썼으며, 강연 활동도 활발히 펼쳤습니다.
박사 학위를 얻지 못한 채 1964년에 귀국하고 그 해 6월에 '가톨릭시보사'의 사장에 취임하였다. 서울에서 김수환은 1년 8개월 동안 안정된 신문 제작과 발행에 역점을 두고 노력했고 그 밖에 그는 강연 활동을 하기도 했다.
1966
[마산교구장 주교 임명]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천주교 마산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어 초대 교구장으로서 마산교구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1966년 2월 15일(당시 43세) 김수환은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천주교 마산교구장 주교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31일에 성지여자중 성지여자고등학교의 강당에서 주교 서품식과 교구장 착좌식을 가졌다. 김수환 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교구를 이끌었으며, 초대 교구장으로서 아무것도 없던 천주교 마산교구에 발판을 마련했다.
1968
[서울대교구장 대주교 서임]
천주교 서울대교구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서임되어, 어려운 교구 행정을 안정화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967년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인 노기남 대주교가 고령의 나이를 이유로 은퇴하자 1968년 4월에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서임되었고 5월 2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주교좌에 착좌하였다. 당시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교구장이 1년 가까이 공석이었기 때문에 행정상태가 매우 어려운 형편이 었는데 김수환은 대주교로서 이를 잘 타개하여 안정된 행정을 수행하였다.
1969
[세계 최연소 추기경 서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47세의 나이로 추기경에 임명되어 당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 되는 기록을 세웠습니다. 한국인 최초의 추기경으로서 30년간 서울대교구장 대주교직을 역임했습니다.
1969년 3월 28일, 김수환은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추기경으로 임명되었다. 동아시아에서는 세 번째이자 한국인 최초로 추기경직에 서임 되었으며, 그때 그의 나이는 마흔일곱 살로 당시 세계 최연소 추기경이었다. 김수환은 이후 30년 동안 천주교 서울대교구의 교구장 대주교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다.
1970
[아시아 주교회의 위원장 선출 및 국민훈장 수훈]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같은 해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 받았습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1970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여 받았다. 박정희는 그에게 국가원로로서 자문을 요청하였으나 그는 조용히 박정희의 요청을 사양하였다.
1971
[박정희 정권 비판 강론]
크리스마스 자정 미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비상대권 입법을 비판하는 강론을 진행했습니다. 이 강론은 TV 생중계가 도중에 중단될 정도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1971년 크리스마스 자정 미사에서 사전 검열된 강론 원고에는 없던 박정희의 비상대권 입법을 작심하고 비판하는 내용을 포함한 강론을 진행한다. 마침 이를 TV로 지켜보던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관계 당국은 생중계를 중단시키는 조치를 곧바로 하였으나 여러 문제가 걸려서 강론이 다 송출되고 나서야 방송이 뒤늦게 중단된다. 이 카톨릭 추기경의 문제를 다루는 관계 기관 대책회의가 크리스마스 날 아침에 열렸는데, 잠시 후 165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대연각호텔 화재 사건이 발생하여 추기경의 발언 문제는 흐지부지 된다.
1972
그리고 그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박정희의 철권 통치를 강도높게 비판하였다.
1974
[지학순 주교 석방 탄원]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금된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탄원하기 위해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면담하고 정권의 독재를 강도 높게 비판하여 지 주교의 석방을 얻어냈습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지학순 주교가 연루돼 구금됐을 때는 석방을 탄원하러 박정희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면담하기도 했고, 그 앞에서 정권의 독재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또한, 정교분리와 자유와 인권 등의 문제를 놓고 박정희와 갑론을박하다가 논쟁 끝에 박정희를 설득시켜 지 주교의 석방을 얻어냈다.
[서강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후 여러 국내외 대학에서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습니다.
그는 고위 성직자로서 한국의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사회·문화 등 여러 방면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1974년 2월 서강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은 이래 미국 노트르담 대학, 일본 조치 대학, 고려대학교, 미국 '시튼 힐 대학', 연세대학교, 타이완 '후젠 가톨릭대학', 필리핀 '아테네오 대학' 등에서 명예 법학·철학·인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4년 7월 인혁당 사건 관련자에 대한 탄원서에 서명하였다.
1975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하였다.
1979
[박정희 대통령 암살 추모사 낭독]
박정희 대통령 암살 후 추모사를 낭독하며 “인간 박정희가 이제 주님 앞에 섰습니다.”라는 표현으로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1979년 10월 26일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직접 추모사를 낭독하기도 하였다. 이때 추모사 중에서 “인간 박정희가 이제 주님 앞에 섰습니다.”라는 표현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편, 박정희에 대해 그는 장기 집권 야욕을 버리고 나머지 과제를 후임자에게 넘겼더라면 지금쯤 국민의 존경을 받는 국부(國父)가 됐을 것이라며 아쉬워하기도 하였다.
1980
[전두환 신군부 비판]
12.12 사태 이후 인사를 온 당시 전두환 소장에게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비판했습니다.
1980년대의 군사정권 출범 뒤에도 재야 활동을 하였다. 12.12 사태 이후 인사를 온 당시 전두환 소장에게 "서부 활극을 보는 것 같습니다. 서부영화를 보면 총을 먼저 빼든 사람이 이기잖아요."라고 비판했다. 또 가장 마음에 아팠던 일로 광주 민주화 운동이었다고 말하면서, 그는 "개인적으로 가장 고통을 겪었을 때가 그때였어요. 사태가 그대로 알려지지도 않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대처할지도 모르는 상태이고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해봤지만 먹혀들어가지도 않고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받은 것 같으니까…"라는 말을 남겼다.
1983
[넷째 형 김동한 사제 선종]
넷째 형 김동한 사제가 사망하자, 형이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곳을 찾아 한동안 머물며 애도했습니다.
1983년 넷째 형 김동한 김동한 사제가 사망하자 그는 형이 마지막으로 거주하던 곳을 찾아 그곳에서 한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1987
[민주화 운동 참여 및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비판]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당시 정권을 향해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고 꾸짖고, 6월 항쟁 때는 명동성당으로 피신한 시위대를 연행하려는 경찰에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라며 막아섰습니다.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당시에는 "이 정권에 '하느님이 두렵지도 않으냐'라고 묻고 싶습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라는 게 있습니까. 총칼의 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 젊은이, 너희 국민의 한 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모르는 일입니다' 하면서 잡아떼고 있습니다.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라며 강도높게 비판했다. 1987년 4.13 호헌 조치 당시에서도 미사에서 이를 철회하라는 요구를, 6월 항쟁 때는 명동성당에 들어온 시위대를 연행하기 위해 경찰이 투입되려 하자 "경찰이 들어오면 맨 앞에 내가 있을 것이고, 그 뒤에 신부들, 그 뒤에 수녀들이 있을 것이오. 그리고 그 뒤에 학생들이 있을 것이오"라고 버틴 것도 그였다.
1988
1988년 2월 - 가톨릭대학교 서울가톨릭대학교 종신종교학연구교수
1990
[장기 기증 서약]
장기 기증에 서약하며 생명 존중의 뜻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이 서약은 선종 후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0년 1월 5일에 장기 기증에 서약하였고, 선종 후에는 자신의 각막을 두 사람에게 기증하였다.
[서경원 의원 재판 증인 출석]
서경원 의원 밀입북 사건 항소심에 증인으로 출석하여 국가보안법 개정 또는 철폐의 필요성을 소신 있게 밝혔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서경원 의원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할 것인지 사회적으로 관심이 있은 가운데 『종교인으로서 양심상 증언요청이 있을 때 피할 수 없었으며 재판부에서도 일단 나오면 증인으로 받아주겠다고 해 출석했다 그러나 출석여부에 관한 결정은 다른 신부들과 상의하지 않고 나혼자 결정했다』고 말해 교회 및 사법사상 처음으로 김수환 추기경이 1990년 4월 21일 오전 10시 서울고등법원 형사2부(재판장 윤재식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서경원의원 밀입북사건 항소심 5차공판에서 1988년 9월 22일 서경원 의원을 만나 나눈 대화내용, 국가보안법 및 남북통일문제에 대한 견해 등을 증언했다. 피고인석에 있는 서경원이 "북한으로부터 김수환의 방북을 추진하라"는 지령을 받고 자신을 만났다는 공소사실을 부인하면서 『서경원 의원이 나를 만나 방북사실을 털어놓은 것은 서경원 의원 나름대로 남북관계개선이나 종교자유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왔다는 사실을 교회의 책임자인 나에게 자랑하고 칭찬받고자 하는 것 같았다』고 하면서 『국가보안법상의 불고지죄가 정부로서는 필요할지 몰라도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 같다』며 『국가보안법자체도 사회여론이나 민주화의 시점에서 볼때 개정되거나 철폐돼야 할 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보안사 민간인 사찰 대상 확인]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노태우 정부 집권 당시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사람이 되어 감시당하다가, 한국외국어대학교 재학 중 민학투련 출신의 사유로 보안사에 연행되었다. 1990년 10월 4일 그것이 군정부의 프락치로 활동해 왔던 윤석양 이병의 탈영과 폭로로 밝혀졌다.
1991
1991년 7월에는 강원도 강원도 고성군 고성의 통일전망대를 방문해서 장애인들과 남북통일을 기원하며 평화의 종을 울렸다.
1998
[서울대교구장 및 평양교구장 서리직 사임]
고령을 이유로 여러 차례 표명했던 서울대교구장 및 평양교구장 서리직 사임 의사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최종 허락되었습니다.
1997년 김수환은 고령의 나이(당시 만 75세)를 이유로 로마 교황청에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사임 의사를 밝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그는 다시 여러 차례 사임 의사를 밝혔고 1998년 4월 19일에는 아시아 특별 주교 시노드 참석차 교황청을 방문한 자리에서 다시 한 번 사의를 표명하였고, 결국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1998년 5월 29일 천주교 서울대교구 서울대교구장과 천주교 평양교구 평양교구장 서리직의 사임을 허락하였다.
[길상사 개원법회 참석]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의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하여 축하하며 종교간 화합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례로 법정 스님이 명동성당에서 특별 강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1998년 12월 14일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동의 길상사 개원법회에 참석하여 축하함으로써, 종교간의 화합을 보여주었다. 이에 대한 답례로 1998년 2월 24일에 법정 법정 스님이 명동성당을 방문하여 특별 강연을 가지기도 하였다.
1999
[장면 총리 재평가 의지 표명]
추기경 서임 30주년 축하 자리에서 장면 총리의 역사적 재평가 작업을 여생 동안 이루고 싶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했습니다.
1999년 4월 28일 김수환은 강원도 강원도에서 추기경 서임 30주년 축하식을 열어준 군종사제들과의 면담에서 "장면 총리의 역사적인 재평가 작업을 여생동안 이뤄보고 싶다"는 의지를 적극 표명하였다.
2000
[평화 체험 전시회 주관]
강원룡 목사, 이돈명 변호사와 함께 전쟁의 참상·평화의 가치 체험현장 전시회 추진공동위원장을 맡아 전시회를 주관했습니다.
2000년 12월 26일부터 2001년 1월 28일까지 강원룡 목사, 이돈명 변호사와 함께 전쟁의 참상·평화의 가치 체험현장 전시회 추진공동위원장으로 전시회를 주관하였다.
2001
[사형수 미사 집전 및 생명 존중 메시지]
경기도 의왕시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직전의 사형수들을 찾아 미사를 집전하며 사형제도와 낙태 문제에 대한 반대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2001년 1월 26일 오전 10시 반부터 1시간 20분 동안 경기도 의왕시의 서울구치소에서 사형 직전의 사형수들을 찾아 미사를 집전하기도 하였다. 사형제도와 낙태 문제에 대해 반대 의견을 피력하였다. 2004년, 동아일보와의 기자회견에서 그는 "사형제 폐지, 낙태 반대 등은 모든 것이 다 생명을 위해서이다. 우리가 사는 목적이 무슨 돈을 벌기 위해서, 권력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고, 인간이 참으로 인간다운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줄여서 말하면 참생명이다. 참생명은 현실에서만이 아니고 영원으로 이어지는 생명이며 생명은 세상 모든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2002
2002년 로마 가톨릭교회 천주교 규정에 따라 만 80세가 되어 교황 선출권을 상실하였으나, 2004년 4월 9일 사제급추기경 수석에 승계되었다.
2004
[탄핵 정국 촛불시위 자제 촉구]
사순절 기념 강연에서 노무현 탄핵사태로 국론이 분열될 것을 우려하며 촛불시위 자제를 촉구했으나, 함세웅 신부로부터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2004년 봄, 사순절 기념 강연에는 노무현 탄핵사태 등으로 국론이 분열될 것을 우려하며 여당에 참을 것을 주문하였다가 함세웅 신부로부터 불의한 독재시대에 권력자들이 늘 했던 표현이며 시대의 징표를 읽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영화 시사회 참석 등 예술 활동]
서울 중앙시네마에서 열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 특별 시사회에 참석하여 관람했습니다. 2005년에는 '마더 데레사' 영화도 관람했습니다.
문화예술 활동에 두드러지게 활동한 바는 없으나 2004년 3월 24일 오후 서울 중앙시네마에서 열린 특별 시사회에 특별히 참석하여 관람하기도 했다. 또한 테레사 수녀의 생애를 다룬 '마더 데레사'도 관람하기도 했다.
2005
[교황 베네딕토 16세 즉위 미사 공동 주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선종 후 새 교황 선출 선거에는 연령 제한으로 참석하지 못했지만, 교황 베네딕토 16세 즉위 미사를 공동으로 주관하며 한국 가톨릭의 영광을 드높였습니다.
2005년 4월,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선종 후 새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 선거에는 연령 제한 규정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러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선출된 후 교황 즉위 미사를 2명의 추기경과 공동으로 주관하였다.
[강정구 교수 및 친일파 선정 비판]
특별 기자회견을 열어 강정구 교수의 '미군 개입 비판' 발언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파 선정'에 대해 강력히 비판하며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2005년 10월 동국대학교의 강정구 교수가 한국 전쟁 당시 미군의 개입을 비판하자, 10월 21일 특별 기자회견에서 강정구를 비판하였다. 이어 강정구의 발언 중 한국 전쟁이 ‘남침’으로 발발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한국 전쟁이 남침이었다는 말은 그쪽 진영의 사람들 입에서는 오랜만에 듣는 말인 것 같습니다. 그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은 한국 전쟁에 대해 늘 북침이었다고 말해 왔지요. 소련도 북한을 따라서 북침이라고 했고요. 그런데 한국 전쟁이 남침이었다는 말이 강정구라는 사람을 통해서 처음으로 실토했어요.”라고 말했다. 한편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장면과 노기남, 김성수를 친일파로 선정하자 김수환은 유감을 표명하였다.
[황우석 사태에 대한 눈물]
황우석 사태가 불거지자 성탄절 대담 자리에서 배아줄기세포 진위 논란에 대해 소감을 말하며 두 번이나 눈물을 흘렸습니다.
황우석 사건 황우석 사태가 일어나고 2005년 12월 김수환 추기경의 크리스마스 성탄절 대담 자리에서 배아줄기세포 진위 논란 사태에 대한 소감을 말하며 두번이나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
2006
[정진석 추기경 서임 환영]
새로운 정진석 추기경이 서임되자 “마음 편히 잘 수 있게 됐다”고 말하며 한국 천주교회에 새로운 추기경이 필요함을 강조했습니다.
2002년 로마 가톨릭교회 천주교 규정에 따라 만 80세가 되어 교황 선출권을 상실하였으나, 2004년 4월 9일 사제급추기경 수석에 승계되었다. 이에 김수환은 공식 업무에서 은퇴한 추기경 대신 실무를 맡을 추기경이 한국 천주교회에 절실히 필요하다고 로마 교황청에 통보하였고 이듬해 소설가 최인훈과의 인터뷰에서 이를 증언하였다. 2006년 6월 22일, 대한민국에 새로운 정진석 정진석 추기경이 나옴에 따라 김수환은 다행이라고 표현했다.
2007
[개인 드로잉 및 붓글씨 전시회]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열린 '현대미술 오늘과 내일' 전에 드로잉 14점과 붓글씨 판화 7점을 출품했습니다. 작품 판매 수익은 장학기금으로 사용되었습니다.
2007년 10월 18일부터 23일까지 세종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열린 ‘현대미술 오늘과 내일’ 전에 김수환이 그린 드로잉들이 전시되었다. 동성고등학교가 개교 100주년을 맞아 동문의 작품을 소개하는 전시에서 동성고등학교의 전신인 동성상업학교를 1941년에 졸업한 김수환은, 드로잉 14점과 그가 평소 아끼던 붓으로 직접 쓴 판화 7점을 출품하였다. 김수환이 그린 드로잉은 검은색 유성파스텔을 이용해 동그란 얼굴 안에 눈, 코, 입 등을 그리고 그림 아래에 ‘바보야’라는 문구를 적은 자화상과 옛집, 원, 산, 기차 등이었고, 붓글씨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등이었다. 김 추기경이 만든 전시작품의 판매 수익은 장학기금으로 사용되었다.
2008
2008년 7월부터 노환으로 기력이 쇠약해져 서울성모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왔다. 2008년 10월 4일 오전 한 때, 호흡 곤란으로 산소 호흡기에 의존하는 등 생명이 위중할 지경에 이르렀으나 기력을 회복했다.
2009
[선종 (逝終)]
오후 6시 12분, 강남성모병원에서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향년 86세로 선종했습니다. 그의 장례는 5일장으로 치러졌으며 수많은 조문객이 방문했습니다.
2009년 2월 16일 오후 급격히 호흡 곤란과 혈압이 떨어지면서 의식을 잃어 의료진이 응급 조치에 나섰지만, 결국 오후 6시 12분 경 강남성모병원에서 86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 장례식은 명동 성당에서 5일장으로 치러졌으며,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많은 조문객이 오갔다. 2009년 2월 20일 용인공원묘원에 유해가 묻혔다.
[각막 기증 및 사회적 파급 효과]
선종 후, 그가 생전에 서약했던 각막을 두 사람에게 기증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장기기증 운동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한편, 김수환 추기경은 1990년 1월 5일에 장기 기증에 서약하였고, 선종 후에는 자신의 각막을 두 사람에게 기증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이 각막을 기증했다는 사실이 보도되고 나서 사랑의 장기기증 운동본부에는 평소보다 10배나 많은 사람이 장기기증 의사를 밝혔고, 여타 공공기관 등에서의 장기기증 약속, 그리고 연예인들의 장기 기증 의사 또한 이어졌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스티커 배포]
천주교 서울대교구는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적힌 원형 스티커를 배포하며 추기경의 나눔과 사랑 정신을 기리는 사회 운동을 펼쳤습니다.
서울대교구는 그가 선종한 후 2009년 3월 9일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라고 적힌 지름 9cm 크기의 원형 스티커를 50만 장 찍어 일반에 배포되었다. 이 스티커는 빨간색을 바탕으로 그가 그린 자화상 《바보야》를 중앙에 새겨, 많은 사람이 차량 유리창이나 사무실 출입문 등에 이 스티커를 붙여 김 추기경의 넋을 기렸다.
2010
[공익법인 《바보의 나눔》 창립]
그의 자화상 이름을 본뜬 모금 및 배분 전문 공익법인 《바보의 나눔》이 창립되어, 추기경의 나눔 정신을 이어받은 자선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2010년 2월에는 그가 그린 자화상의 이름을 본뜬 모금 및 배분 전문 공익법인 《바보의 나눔》이 창립되었다.
2019
[선종 10주년 기념행사]
선종 10주년을 맞아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최로 추모 사진전, 유품 전시회, 기념 음악회 등 다양한 기념행사가 개최되어 그의 삶과 정신을 되새겼습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에서는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10주년을 맞는 2019년 2월에 추모사진전과 유품전시회, 기념음악회등 다양한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2024
['하느님의 종' 칭호 선포]
교황청으로부터 시복 추진에 '장애 없음(Nihil Obstat)' 승인을 받았으며, '하느님의 종' 칭호를 수여 받았습니다. 이는 그의 영적 유산을 인정하는 중요한 단계입니다.
2024년 6월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하느님의 종으로 선포 되었다. 교황청으로부터 시복 추진에 '장애 없음(Nihil Obstat)" 승인을 하였고 '하느님의 종'칭호를 받게되었다.